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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G발 주가조작 연루' 가수 임창정 불기소 처분.jpg
- 관련게시물 : 피해자라던 임창정 근황.newshttps://m.news.nate.com/view/20240531n15291 'SG발 주가조작 연루' 가수 임창정 불기소 처분 : 네이트 연예한눈에 보는 오늘 : 연예가 화제 - 뉴스 : 가수 임창정. 〈사진=연합뉴스〉 --------- SG(소시에테제네랄)증권발 주가 폭락 사태에 연루됐다는 의혹을 받아온 가수 임창정 씨가 검찰에서 불기소 처분을 받았습니다. 서울남부지검 금융·증권범죄 합동수사부는 임씨를 전날 무혐의 불기소 처분했다고 m.news.nate.com흠... 소시에테제네랄(SG) 증권발(發) 주가폭락 사태 핵심 인물인 라덕연(43) 호안 대표가 보석으로 풀려난 가운데, 검찰이 주가폭락 사태 연루 의혹을 받던 김익래(74) 전 다우키움그룹 회장과 가수 임창정(51)씨를 기소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다만 라씨의 초기 동업자이자 시세조종 사실을 언론에 제보한 김모씨는 불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겼다.31일 서울남부지검 금융·증권범죄 합동수사부(합수부)는 전날 김 전 회장과 임창정씨에 대해 불기소 처분했다고 밝혔다.김 전 회장은 주가 폭락 2거래일 전인 지난해 4월20일 시간외매매(블록딜)를 통해 다우테이타 지분 140만주(605억원), 지분 3.65%를 합계 605억4300만원 상당에 매도한 바 있다.이에 김 전 회장이 계열사인 키움증권 통해 미공개 투자정보를 전달받아 주가폭락 직전 시세조종 사실을 미리 알고 주식을 대량 매도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그러나 검찰의 압수수색과 관련자 소환조사 결과, 키움증권이 시세조종 대상 종목 관련 정보를 김 전 회장에게 보고한 내역이 확인되지 않았다.김 전 회장이 보유중인 다우데이타사 주식 매각을 검토한 시점은 주가 폭락 사태 발발 3개월 전인 지난해 1월 경이었으며, 임직원 및 주요 주주에게 적용되는 주식 단기매매차익 반환의무가 소멸된 지난해 3월말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블록딜을 시도한 사실이 확인됐다.앞서 라씨 측은 키움증권이 차액결제거래(CFD) 증거금률을 40%에서 100%로 변경하며 SG증권에서 CFD 반대매매가 발생한 것이 폭락의 원인이 됐다고 주장했으나, 검찰은 CFD 증거금률 변경은 주가폭락일 장 종료 시점 이후인 점도 확인했다.합수부는 SG발 주가폭락사태와 관련, 시세조종 범행 조직에 가담했단 의혹이 제기된 가수 임창정씨에 대해서도 불기소 처분을 결정했다.지난 3월 임씨가 라씨에게 30억원을 투자하고, 시세조종 조직원들 모임인 일명 '조조파티' 및 투자자 모임에 참석해 "라씨는 주식투자에 매우 뛰어난 사람" "내 돈을 가져간 라덕연은 대단하다" 등의 발언을 하며 저작인접권 대금으로 가장한 투자 수익금 정산을 제안했단 의혹이 불거졌다. 이후 임씨는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기도 했다.그러나 합수부는 휴대전화 등 압수물 포렌식, 계좌내역 분석 결과 임씨가 라씨 일당의 시세조종 범행을 알고 가담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합수부는 '조조파티' 모임에서의 발언은 임씨가 시세조종 조직에 투자하기 전 라씨와의 친분을 과시하기 위해 즉흥적으로 발언한 것으로 봤다.또한 임씨가 라씨측으로부터 투자 수익금을 지급받거나 투자유치 대가 등을 받은 사실이 없고, 그 밖에 임씨가 라씨 등의 시세조종 범행을 알면서도 이에 가담하였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다만 임씨는 라씨와 엔터테인먼트 사업 공동추진은 계획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그러나 이는 주가폭락 사태로 실행되지 않았다.한편, 라씨의 초기 동업자이자 시세조종 사실을 언론에 제보한 김모씨는 불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겨졌다.합수부는 전날 김씨를 자본시장법 위반, 범죄수익은닉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고 밝혔다.김씨는 지난 2020년 3월 라씨와 함께 호안투자컨설팅업체를 설립해 2년2개월 가량 동업하며 상장기업 주식 시세조종 범행에 가담한 혐의를 받는다.이날까지 주가조작에 가담한 일당 총 57명(구속)이 재판에 넘겨졌으며, 현재 서울남부지법에서 1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라씨 등은 지난 2019년 2월부터 지난해 4월까지 서로 공모해 미신고 유사투자자문업체를 운영하고 통정매매 등의 수법으로 8개 종목의 시세를 조종해 7305억원의 부당이익을 챙긴 혐의를 받는다. 이는 주가조작 범행으로는 사상 최대 규모다.
작성자 : ㅇㅇ고정닉
영국군으로 복무한 홍콩인들
홍콩 군사복무단 Hong Kong Military Service Corps (HKMSC, 香港軍事服務團) 중국인들이 영국군에 복무한 역사는 꽤 오래됐다. 1857년 2차 아편전쟁 당시, 세포이 항쟁으로 인해 인도인 병사들에 대한 불신도가 높아진 영국 원정군이 광둥성에 살던 객가인들을 쿨리로 고용하여 병참부대를 운영했던 것이 시초다. 2차세계대전 때는 수백명의 홍콩인들이 영국군에 협조하여 일본군과 싸웠고 일부는 말레이 반도와 버마까지 가서 싸웠다.1945년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고 냉전이 시작됐을 때, 영국은 더 이상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아니었다. 전후복구 때문에 군축은 확정됐고 그동안 키워온 군사력은 줄어들었다. 그 많던 식민지들은 하나둘 씩 독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극동의 진주인 홍콩은 1997년까지 영국령으로 남아있어야 했다. 중국대륙이 공산화될 것이 확실시되자, 영국 정부는 홍콩방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중 현지 중국인들을 모병하여 전투부대를 만들자는 의견이 나왔고, 이것이 HKMSC의 시작이었다.홍콩 영주권이 있는 홍콩인들은 누구나 입대신청이 가능했다. 18주의 훈련기간을 거쳐 '대영제국의 군인'이 되는 순간부터 4년 의무복무를 해야했다. 장기신청으로 최대 22년까지 복무할 수 있었다. 이들은 구르카처럼 단일부대로 운영된 것이 아니라 카투사처럼 홍콩 주둔 영국군 각부대에 소대 단위로 배치됐다. 광둥어와 영어가 능통했던 HKMSC 대원들은 영국군이 현지인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과정에 반드시 필요했다. 특히 소요사태가 많았던 50~60년대에는 HKMSC는 홍콩주둔 영국군의 귀중한 인재풀이었다.1960년대 HKMSC의 총 병력은 약 6,000명에 달했다. (주: 참고로 당시 홍콩에 주둔하던 영국군은 최대 4~6만명에 달했다.) 이후 중공과의 화해무드가 진전되자 홍콩주둔 영국군의 규모가 점차 줄어들었고 HKMSC의 인원수도 조금씩 축소됐다. 이후 70년대를 거쳐 HKMSC 부대규모는 1,500~1,600명 가량으로 고정됐다.HKMSC는 당대 홍콩경제 수준에 비해 매우 좋은 조건의 직장이었다. 일단 병사들의 월급은 홍콩인들의 평균월급보다 30~40% 더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 70년대에 입대한 한 기수는 18주의 훈련을 견디다 못해 일부 훈련병들이 첫휴가 때 나가서 복귀하지 말자고 모의를 했었다. 하지만 수료식과 함께 받게 된 첫 월급봉투에 담김 480 홍콩달러(주: 당시 홍콩 사회초년생의 평균월급이 350 홍콩달러.)를 보고선 'God save the Queen!'을 연창하며 유니언잭에 대한 충성심이 폭발했다고 한다.게다가 홍콩인들에게 영국군의 이미지는 엘리트집단이라는 의식이 강했다.(주: 반대로 홍콩경찰은 부패문제로 인해 인식이 좋지 않았다.) 군병원의 복지수준도 민간병원보다 훨씬 좋았다. HKMSC 전역자들은 금융권 보안업계에서 0순위 스카웃 대상이었다.하지만 이와 다르게 인지도와 입대 경쟁률은 생각보다 낮았다고 한다. 일단 홍콩인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국계 인구의 문화적 차이 때문이었다. 많은 중국인들은 자녀들이 군인이 되기 보다는 평범한 회사원이 되길 원했다. 과거 그들이 보아온 군인들, 청나라나 내전기 군벌들의 모습이 투영된 결과였다. 그들의 눈에 군인이란 사람이 할 짓이 못됐다.그리고 높은 수준의 영어실력도 필요했다. 영국군은 구르카병들에게는 명령을 이해하는 최소한의 문해력만 요구했으나, 현지 통역이 주임무였던 HKMSC 대원들에게는 중급 이상의 언어구사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HKMSC 입대 자원자들은 대부분 학교에서 영어성적이 높은 이들로 이뤄져 있었다. 보통 이정도 영어실력을 가진 홍콩인들은 금융권 같은 화이트칼라 직업군으로 갔다. 당시 학교 선생들은 공부는 잘하는데 집안 사정으로 인해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취업을 하려는 학생들에게 차선책으로 HKMSC에 입대하는 것을 권하곤 했다.HKMSC에 문제가 있다면 훈련시절이 부족했다는 점이었다. 이는 홍콩이 워낙 좁아서 군인프라 시설을 많이 확충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래서 HKMSC대원들은 상당수의 주특기 훈련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브루나이까지 날아가서 교육 받고 왔다. 일부 성적 우수생들은 사관후보생이 되어 샌드허스트 단기입교 기회도 받았다. 헌병대의 경우 런던 경시청에서, 의무 주특기들의 경우 런던 의과대에서 부검을 실습했다. HKMSC는 홍콩방위 뿐만 아니라 1990년 걸프전에도 영국군 소속으로 소수가 참전했고 키프로스에 PKO 활동을 하러 가기도 했다. HKMSC에 입대한 대부분의 홍콩인들은 매우 열성적으로 복무했다. 영국군 내부에서도 HKMSC에 대한 평판은 꽤 좋은 수준이었다.HKMSC는 1993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새로운 기수를 받지 않았다. 1997년 홍콩반환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96년 12월이 되자 HKMSC는 공식적으로 해체됐다. 일부 대원들은 다른 영국군 부대에 개별로 복무하였으나 이들 역시 1997년 6월 30일, 홍콩주둔 영국군이 완전히 철수하면서 전부 전역처리 됐다.당시 HKMSC 전우회는 영국법원에 자신들도 구르카병들처럼 영국 시민권을 취득하게 해달라는 청원을 했다. 마지막 홍콩 총독이었던 크리스토퍼 패튼도 영국의회에서 '이들도 대영제국에 충성을 바친 이들이니 부디 외면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영국국적 선발제도(BNSS)에 따라 HKMSC 전역자들 대부분은 이 국적취득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 1997년 당해 영국국적을 취득한 HKMSC 전역자들은 15년 이상 복무했던 노병 159명 뿐이었다. 이후로 약 10여년에 걸쳐 HKMSC 전우회는 지속적으로 HKMSC 전역자들의 영국국적 취득 캠페인을 펼쳤다. 하지만 2019년까지 고작 350여명만이 영국 여권을 발급받았을 뿐이었다. 이후 홍콩 민주화 운동을 기점으로 영국정부가 이민법을 파격적으로 개정하여 홍콩인들이 영국국적을 취득하는 절차를 간소화해주면서 HKMSC 재향군인들도 이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 날이 오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많은 재향군인들이 세상을 떠났고 상당수는 호주나 캐나다, 뉴질랜드 같은 다른 영연방 국가로 이민을 떠났다. 세월이 흐르면서 중국으로 반환된 홍콩에서 HKMSC 흔적은 점차 사라져갔다. 이들이 쓰던 부대병영은 헐리거나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다. 이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곳은 HKMSC 전우회 말고는 아무 곳에도 없다. 이들의 경력은 현재 중국에서 제대로 된 군복무로 취급되지 않는다.
작성자 : ㅇㅇ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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