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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들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왔습니다

김호장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1.07.20 19:29:14
조회 436 추천 1 댓글 8


  참을 수 없는 것은 없다. 이것은 모든 걸 이겨낼 수 있다는 의미는 물론 아니다. 지나가지 않는 것은 없다. 이것 또한 모든 걸 잊을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결코, 라는 말이 있다. 그래, 그런 말이 있다. -2011. 7. 15

  내가 고등학생일 때 그 근방에서 가장 유명한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는 버스정류장 옆에 있는 자그마한 두 평 남짓한 컨테이너에서 담배가게를 운영했는데 학생들에게도 담배를 아무렇지 않게 팔아서 우리사이에선 인기였다. 하지만 국산밖에 취급하지 않았고 그마저도 공급이 시원찮았는데, 한 갑에 200원 이문으로 하루에 많이 팔아야 열댓 갑을 팔았으니 별 수 없는 문제였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식이 끝난 며칠 뒤, 할머니가 출근하기 직전에 컨테이너 창틀에다가 몽쉘을 한 박스 끼워뒀다. 4년 전 일이다. 나는 까마득히 그 할머니를 잊고 살았다. 4년 전에도 몸이 성치 않아서 오늘 내일 억지로 버티는 할매였기 때문에 아마 지금은 지겨운 장사도 접고 지병으로 인생도 접었을 거란 사실을 안다.

  동네에 옥터마트라는 수퍼가 있다. 그 수퍼 때문에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살아났다. 수퍼 사장은 대낮부터 가게 한 켠에서 술판을 벌리곤 한다. 이 수퍼 역시 경영이 시원찮은지 담배 공급이 잘 되지 않는다. 하기사 기껏의 매상이라고 해야 주류와 담배밖에 없는 곳이다. 사는 건 이렇게 별 수 없는 때가 더 많다.

 

  내 계절들이 부서지는 것을 시시각각 감지한다. 그것은 소리로 들을 수 있고 매일 밤 출근할 때 내딪는 첫걸음으로부터도 느낄 수 있다. 아마 다시 한 번 많은 것은 모래가 된다. 한 번 모래가 되면 그것들은 되품을 수도 없거니와 억지로 다시 한 번 품어도 이미 가치를 잃은 다음의 것들이란 사실을 안다.

  마음 밖에 자리한 것들에 대해 말할 때 나는 그것들과 나 사이의 까마득한 거리를 절감한다. 그래서 여긴 모래성이고, 나는 모래성의 주인이다. 슬퍼서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니고, 노여워서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닌 것처럼, 그러니까 진위가 중요치 않은 시시껄렁한 소문을 듣듯, 내게 그것들이 어떤 존재였던 간에. 그냥 무리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됐다. 너무 깊이 생각할 일이 아니다. 깊게 생각할 것들은 생각보다 별로 없는지도 모른다.

 

  여긴 지루할 정도로 길지만 마음이 놓일 정도로 폭이 넓지는 않은 평행봉 위다. 나는 허수아비처럼 양 팔을 벌리고 보이지도 않는 저편을 향해 걷고 있다. 갈 길도 멀지만, 앞으로 가야할 길보다 걸어온 길이 더 길어서 걷기를 멈출 수도 돌아갈 수도 없다.

 

  이렇게 혼자 구시렁거리면 무얼 할 테인가. 게다가 무슨 소용인가. 하지만 긍정한다. 낙관의 근거 같은 건 있지도 않고 애당초 중요하지도 않다. 어쩌면 긴 꿈인지도 모른다.

 

  시지프스는 행복했을 것이다.
-2011. 7. 20

  마코토는 날 보고 쓰레기라고 했다. 평생 글 같은 건 엄두도 내지 못할 거라고 장담했다. 소설은 때려치우고 뭐라도 다른 일을 알아보든가 하라고, 넌 안 될 새끼라고 마코토는 말했다. 나는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며 네가 장담할 수 있는 일도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설령 내가 쓰레기라도. 쓰레기도 무슨 재주든 있기 마련이지 않나. 굼뱅이는 구르는 재주가 있고 나는 비록 쓰레기일지언정 쓰는 재주가 있다. 중요한 건, 그가 맞았다. 그래서 쓰레기가 아니라고는 말 못했다.

  어제는 어쩌다보니 뺨을 맞았다. 아프지는 않았다. 마코토에게 한 번 맞았던 뺨이고, 와이에게도 한 번 맞았었다. 사람이 참 비참한 게 매질을 한 번 당하고 나니까 마음이 그렇게 약해질 수가 없는 거다. 와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와이는 자기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남자 목소리가 옆에서 들리고 있었다. 아, 그래, 얜 이런 애였지. 나는 다시는 연락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H가 있었다. H는 와이보다 나이가 두 살 많은 애다. 내가 H를 만날 때 H가 꼭 와이 나이였다. H를 통해서 나는 어린 여자들이 갖고 있는 위악에 대해 알았고, 그예 아주 아주 진절머리가 난지 오래였다.

  나는 그날 오전 집에 돌아와서 케이에게 메신저로 인사를 건넸다. 케이는 신기하다고 했다. 자기가 내 꿈을 꿀 때마다 내가 연락을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잠자코 그러냐고 대답해주었다. 겪은 일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가급적이면 케이에게는 나의 기쁜 일만 알려야 할 거 같아서였다. 대신 남몰래 소주 한 병을 비우고 잤다. 슬퍼서 마신 것도 아니었고 노여워서 마신 것도 아니었다.

  (중략)

  아마 내년부터는 사회에서 좀 떨어져 있어야할 테므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부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 전에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보고 싶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오랫동안 만나고 싶다. 한 이성과의 관계를 오래 지속한다는 것은 사랑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도는 것처럼 물이 순환하는 것처럼 생명에는 궤적이 있다. 그 궤적을 따라 오랫동안 걷고 싶어졌다.

 

  배가 고프다. 삼겹살을 구워먹어야겠다. 그리고 샤워를 하고, 책을 좀 읽다가 자야겠다. 어쨌든 이제 나에게는 해결할 일이 얼마 없다. 그나마도 미뤄둘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급한 일들도 아니니 한가하다고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희생 이후의 고요다. 열매는 가지에서 떨어진다. 그러면 가지는 그 계절에는 그 이상 할 일이 없다. 이런 걸 희생 이후의 고요라고 한다. 나는 움직이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고 있다. 그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 김경주가 그랬었지. 이것은 빈 가지처럼 허공의 희미함을 흔들고 있는 것이라고.

 

   자신에 대해서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을 보니 나도 많이 변했다. 하기사 말하면 무얼할 테인가.

-2011. 7. 16

  너무 멀리 온 것은 아닌지 걱정하지 말길 바란다. 당신은 여행을 한 것이 아니라 배회했을 뿐이므로. 당신 스스로 여기기에 그곳이 시작과 멀다하여도 나는 멀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돌아가려고 하면 금방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새들도 그랬고 한낯 물고기들도 그랬다. 머지않아서 각자의 서성거림이 끝나는 날 우리가 등지고 서있다고 해도, 그래서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어도 그것 역시 완성이라고 조심스레 주장한다. 원래 \'짝\'은 등끼리 맞닿아 창조되었다. 내가 자주 당신의 등을 보았던 것처럼- 그 등에 내 가슴을 바짝 붙여서 당신을 껴안았던 것처럼- 그리고 당신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서로의 등을 그리워하고 있다.

 

  혹 내가 너무 멀리간 것 같고 자꾸만 무례해지는 것 같아도 걱정 마시라.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건, 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건, 결국 그 무엇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건, 그것은 우리가 다른 종류의 인간이 결코 될 수 없다는 뜻인지 모른다.

 

  나는 그날을 생각하면 여전히 설렌다. 그리움과 기대가 섞이면 아마 그런 감정이 되는 모양이다. 더 복잡한 심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이 다른 인간을 그리워하는 일은 꼭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다고.

  그래서 우리는 말로 표현 가능한까지 사랑했다. 말 이상의 감정은 서로를 향한 채여도 온전히 자신만 느낄 수 있었고 오직 자신의 것이었으므로. 바로 그런 특성 때문에 한편으로 우리는 각자 자유로웠다.

  오직 자신의 것- 자기의 마음, 그 속. 거기서 나는 자유를 찾아냈었는데 당신은 뭘 찾아냈나? 아니, 찾아볼 생각은 했었는지... 내 자유는 책임감이라는 화분에 심어진 화초 같은 것이었으므로 나는 비교적 다소곳할 수 있었다.

 

  나의 마음은 그리 넓지 않으나, 그러나 나의 마음에는 가구가 없었다. 바로 그래서 이곳에는 당신과 나와, 속삭이는 말들과 말이 될 수 없었던 감정만이 있었다. 그 정도면 이 삶은 완벽했고 고요했다. 심지어 즐거웠고 행복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부유하고 있다.

 

  그런 동시에, 그것들마저 없다면, 내 마음은 텅 비고 만다.

 

  오늘은 빈 집에 우두커니 앉아서 빗소리를 한참 들었다. 간밤에 마신 술이 덜 깨서 약간 멍한 채로 담배를 피웠다. 모기장에 부딪힌 빗방울이 쪼개져 살갗에 톡톡 닿아올 때 나는 당신 등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었다. 부드럽고 곡선이 아름다운 등이다. 옆구리가 특히 부드러운 등이다. 그리고 어깨가 보였다. 어깨끝에서 팔뚝으로 떨어져내리는 선이 우아한 어깨다. 목이다. 당신 먹고 마시고 숨쉬는 그 모든 것이 오가고 언제나 그리운 그 목소리가 탄생하는 곳. 눈이다. 당신 눈은 나로선 형언할 수 없는 것이다.

 

  감동스럽고 경이로운 것이 있다. 두 가지인데, 둘 다 당신이 만들어낼 수 있다. 하나는 아름다움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다.

-2011.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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