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어떻게 이렇게 딱 어르신같은데를 골랐냐?"
"낮엔 낮대로 느낌있고,  밤은 밤대로 좋고."
도우가 마련한 곳에서 어머니의 작품이 숨쉰다.

메리이모가 놓고 간 애니의 휴대전화.
도우는 분노와 절망을 가슴에 새기고 비틀거리며 걷는다. 바람이 분다. 바다로 향해 곧게 뻗은 길 끝까지 걸어간 도우는 더이상 걸어갈 수 없는 막다른 곳에 멈취선다.
"네 아빠 죽었어. 죽기 직전에 너 나한테 보낸거야. 니 아빠가 하라는대로 너한테 거짓말한거고"
애니가 진실을 알았다.
그리고 죽었다.

"그사람 죽었다고 애니한테 말할수 없었던건,  말하려고 했어. 말하려고."
혜원의 눈에 어린 눈물은 그순간을 벗어나기 위한 수단이다.
삶에서 추구하는 가치가 같다고 믿었던 혜원.
사랑스러운 딸 애니.
도우는 혜원과 애니가 지키려고 했던 비밀을 알게 됐다.

바람이 불어 무수히 많은 잔물결을 일으켜  도우에게 보낸다.
밀려오는 물결은 도우 가슴을 가득 채우고 흘러넘친다.

불에서 태어난 검은 돌들은 뜨거운 불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자기 몸에 무수히 많은 바람길을 만들었다.
바람이 불어오면 길을 열어 바람을 보내준다.
비가 내리면 빗길을 열어 가두지 않는다.
뜨거운 바람이 사이사이 미로처럼 만들어진 바람길을 헤메이다 서서히 찬기운을 받아들여 걸음을 멈추듯이 도우는 걷고 또 걷는다.
하루가 저문다.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에 나무가 휘청인다.

검은 물빛은 불빛을 받아 반짝이고,  도우는 불빛에 이끌리는 나방처럼 전화를 건다.
"수아씨. 어디예요? 최수아씨? 어디있는거예요? 나 너무 힘들어요. 어딨어요? 당신이 필요해요."
먹먹한 목소리의 도우가 수아를 찾는다.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사람.
닿을 수 없는 간절함을 깊어가는 어둔바다에 묻는다.
바람에 실어보낸다.
흐르는 물결에 떠나보낸다.  
혜원과 애니가 지키려던 비밀을 그렇게 흘려보낸다.

"불안에 죄책감까지 그러고 어떻게 살아."
햇살이 부드럽게 창으로 배어 들어와 어머니의 작품과 하나로 어우러진다.
도우의 애정어린 손길,  시선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푸른 색 쇼파에 앉은 도우 등 뒤로 어머니의 골무가 보인다.
혹시라도 바늘에 찔려 상처날까 두려워 엄지 손가락에 끼우는 골무처럼,  도우는 혜원이 자유롭게 꿈을 펼치며 살아가도록 덮어두려한다.
애니일이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혜원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도우는 마음을 쓴다.
사랑은 떠났다.
연민이 그 자리를 채웠다.
사랑과 연민이 떠나간 후에 빈 공간이 생기고,  다시 시작된다.
돌고 도는 쳇바퀴처럼.
바람길과 물길은 비워내고 받아들인다.
삶은 그렇게 되풀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