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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손흥민 저격 트위터 올라왔는데 난리남.....pg
3시간만에 조회수 190만 찍음손흥민 펩이랑 웃는 직캠 보고 경악중개집팬들만 욕하는줄 알았는데 다른팀팬들도 어지간하면 다 욕하네딴건 그렇다쳐도 챔스 탈락이 확정되었는데 주장이 쳐웃는건 뭐지 싶더라불과 몇분전에 벤탕쿠르가 교체 당했다고 성질냈는데손흥민은 자기가 무슨짓을 한지 모를거야- 오늘자 엠창민.gif팀이 쳐발렸는데 친목질이나 하고있으니 ㅉ- [팩트] 손뽕 좆됐노ㅋㅋ 해외에서 진짜 난리났노 ㅋㅋESPN에도 좀전에 트윗 올라왔노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영상) 손흥민 짜증내는 장면
작성자 : ㅇㅇ고정닉
부처님 죽이고 싶은 만화
넣으려고 했다가 못 넣은 TMI들( 걍 아쉬워서 적은거라 안 읽어도 됨 )-------------------------------------------------------부처님오신날은 아시아 각국에서 기념일로 지내는데 날짜와 법정공휴일 여부가 각기 다르다.우리나라에서는 1975년부터 공휴일로 지내기 시작해 곧 50년째를 앞두고 있다.데바닷타의 어린 동생 아난다는 훗날 석가모니의 10대제자로 손꼽히는 거물로 성장한다.어린 나이부터 석가모니를 따라다니며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들어 '다문제일'이라는 이명을 갖는다.여러 불경에서 데바닷타는 그냥 나쁜 놈, 이단자와 거의 동의어로 쓰이며 부처의 전생 이야기마다 데바닷타의 전생이 등장한다.교리적 시각에서도 데바닷타 또한 일반인을 아득히 뛰어넘는 수행자라는 점이나,부처와 매번 같은 시대에 태어나 겨룬다는 점에서 선업과 공덕이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으며다만 승가를 이간질하고 부처를 죽이려 한 악업을 모두 갚으면 데바닷타 역시 부처로 거듭나게 되리라고 해석한다.데바닷타의 암살시도는 여러 판본이 있다보니 사건 순서나 세부 내용에 여러 차이가 있다돌을 직접 밀었다던가 500명의 힘을 모아 투석기로 던졌다던가도 차이가 있고술 취한 코끼리가 한 마리가 아니라 500마리였다고 적은 것도 있고손톱에 독을 발라서 발끝을 그으려고 했다가 실패하고 지옥에 떨어졌다거나자기가 손톱에 독을 바른 게 잘못돼서 고통받다 죽었다거나아자타샤트루(아사세왕)의 왕자 시절부터 함께했든 왕이 된 다음부터 함께했든지,아자타샤트루가 부처 암살에 주도적이었든 아니면 회의적이었든지 등등 지멋대로다.애시당초 불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이야기 만들기의 일환이다보니 이 부분은 실재하는 이야기라기보단 서술자의 창의력이 돋보이는 파트라고 할 수 있겠다다만 공통적으로 발끝을 다쳤다고 하는 걸로 봐서는추측건대 뭐가 됐든 부처에게 직접적 상해를 입힌 일이 있었던 게 아닐까?현장법사가 확인했을 때까지는 데바닷타의 교단이 남아있었으나, 지금은 데바닷타를 스승으로 모시는 교단이 없다. 과거에 언제 망했을지를 특정하기는 어렵더라도, 먹고 자고 입는 것을 기존보다 더욱 제약하는 근본주의적이고 엄격한 계율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세상을 따라가지 못해 설득력을 잃었을 것이며특히 소금 섭취를 제한하는 규정이 사실이라면 영양실조로 죽기 딱 좋다. 그래서인지 5법 중 소금 제한 얘기가 빠진 경전도 많으며 위 내용의 5법은 십송률,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파승사 내용을 종합했다.불경의 내용이나 데바닷타의 전생담 이야기가 더 궁금한 사람은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 -통합대장경을 검색해 들어간 다음제바달다(提婆達多:제파달다) 혹은 조달(調達)로 검색해서 나오는 내용을 찾아보면 된다.어지간한건 다 번역되었고 전산화되어 있다.----------------------------------------------------------남은 공휴일 알차게 보내고남는 시간 심심하면 다른 만화들도 봐주면 좋겠다.미성년자라서 감형받는 만화 - 카툰-연재 갤러리 (dcinside.com)젊은애가 집안 망해서 싫어하던 대머리 아저씨와 손잡는 만화 - 카툰-연재 갤러리 (dcinside.com)스압) 대학떨어지고 술집에서 한탄하다 시비걸려 죽을뻔한 만화 + ∝ - 카툰-연재 갤러리 (dcinside.com)
작성자 : 커피뱃고정닉
벨기에인의 왕 레오폴 2세
레오폴 2세 국왕만큼 논란이 많은 벨기에 군주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는 1835년 4월 9일 브뤼셀에서 레오폴 1세 국왕과 루이즈 마리 왕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그가 얻은 이름은 루이 필리프 마리 빅토르였다.그의 어린 시절은 별로 행복하지 않았다.그의 어머니는 그의 돌출된 코가 그를 기형적으로 보이게 한다고 생각했고 그의 아버지는 그를 "작은 폭군"이라고 불렀다.그의 형 필리프는 명랑하고 인기가 많았고, 그의 여동생은 매력적이고 학구적인 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자식이었던 반면, 레오폴은 수줍음이 많고 서툴렀으며 절뚝거리며 걸었다.그는 항상 그의 형제자매들과 널리 존경받는 아버지와 비교되는 것 같았고 상황이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것 같았다.그가 미래의 통치 기간의 대부분이 그의 아버지가 결코 할 수 없었던 임무, 즉 벨기에를 제국의 위치로 만드는 일을 성공시키는 데 바쳐질 것이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1853년 레오폴 왕자는 국정에 대한 경험을 쌓기 위해 상원에 들어갔고 8월 22일 10대 오스트리아의 마리 헨리에테 여대공과 결혼했다.그 부부는 계속해서 4명의 자녀를 낳았다.이들은 각각 루이즈 마리 공주, 레오폴 공작, 스테파니 공주, 클레망틴 공주였다.그러나 그들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어떤 사람들은 레오폴 왕자가 매력적인 인물일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가정 환경에서 그는 불성실한 남편이었고 1902년 오랜 고통을 겪은 아내의 죽음 전후에 다소 추악한 사생활을 보냈다.1865년 12월 17일, 아버지가 사망한 후 레오폴 2세가 새로운 벨기에인의 왕으로 선서를 했지만 시작부터 우여곡절이 많았다.그가 여동생인 카를로타 황후에게 즉위를 알리기 위해 멕시코에 보낸 대표단이 공화주의 강도들의 공격을 받아 학살당했다.벨기에에서는 소란이 일었고 레오폴 2세는 벨기에 군단의 모집 사무소를 폐쇄했으며, 그의 여동생은 당연히 이를 거의 배신행위로 여겼다.그녀의 오빠는 그녀를 멀고 점점 더 그녀에게 적대적으로 변하는 나라에 남겨두고 떠났다.멕시코에서의 모험이 재앙으로 끝나고 카를로타가 남편과 입양된 그녀의 제2의 조국인 멕시코 제국을 잃은 슬픔에 정신이 팔려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레오폴 2세는 그녀에 대해 상대적으로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레오폴 2세는 벨기에의 국제적 위대함을 달성하는 데 집착했으며 1876년에 중앙아프리카 탐험에 관한 국제회의를 소집했다.이로 인해 다음 해에는 용감한 헨리 모턴 스탠리를 파견하여 지역 족장들과 조약을 체결하고 식민지 확장의 토대를 마련했다.스탠리는 그의 일을 잘 수행했고 1885년 베를린 회의는 레오폴 2세를 벨기에 왕실과 개인적 연합을 이룰 콩고 독립국의 왕-주권자로 인정했다.이로 인해 레오폴 2세는 자신의 국가 전체보다 약 80배 더 큰 광대한 중앙아프리카 제국의 개인 소유자가 되었다.1890년 레오폴 2세 국왕은 당시 여전히 호황을 누리고 있던 중앙아프리카의 아랍 노예 무역을 근절하기 위해 콩고독립국에서 군사 캠페인을 조직했다.이 탐험은 성공적이었지만 레오폴 2세는 콩고의 경제 발전을 위한 틀을 세웠고, 이러한 일은 결국 그곳의 고무나무로부터 엄청난 이익을 얻게 되는(자전거와 자동차가 발명된 이후 크게 발전함) 동시에 콩고 주민들에게 엄청난 잔인함이 가해지게 되었다.요즘 레오폴 2세가 가장 많이 기억되는 것은 바로 이 공포 때문이나 몇 가지 주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우선, 사망한 사람의 수에 대해 주장되는 많은 숫자는 종종 콩고 전체 추정 인구의 50%에 이르기는 매우 터무니없는 주장들이다.분명히, 이러한 극단적인 통계가 절대적으로 사실이라면 어느 누구도 전혀 이익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레오폴 2세가 의도적으로 이러한 잔학 행위를 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그것은 종종 국왕이 히틀러와 비교되는 이미지로 묘사된다.의심할 바 없이 국왕은 무정한 사람이었고 종종 불미스러운 성격을 띠기도 했으나 콩고의 공포가 국왕에 의해 의도적으로 자행되었다는 것은 절대적인 거짓말이다.그가 비난받을 수 있는 부분은 지역 공무원들이 생산한 고무의 양에 따라 급여를 받는 시스템을 구축했다는 것이며, 경제적으로 봤을 때는 타당한 것처럼 보였지만 부도덕한 관리들이 자신의 부를 위해 원주민을 잔인하게 만드는 동기를 제공했다.또한,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과는 반대로, 레오폴 2세는 콩고에서 벌어지고 있는 야만적인 행위에 대해 퍼지기 시작한 보고서에 괴로워했지만, 이에 대해 비난받을 수 있었고, 그는 이것이 악의적인 거짓말이라고 확신하는 조언자들을 너무나 기꺼이 믿었다.그러나 결국 보고서와 국제적 비판은 너무 커져서 무시할 수 없게 되었으며, 1904년(비록 이에 대한 공로가 거의 인정되지 않지만) 이러한 보고서를 조사하기 위해 콩고에 위원회를 보낸 사람은 레오폴 2세 국왕이었다.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심문관들을 레오폴 2세의 엄선된 "예스맨"으로서 결코 부정적인 보고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다시 말하지만, 위원회가 원주민과 지도자, 식민지 관리들을 만났고 매우 균형 잡힌 보고서를 가지고 돌아왔기 때문에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그들은 국왕의 투자로 이루어진 발전을 인용했다.건설된 도로, 학교, 병원 및 지역 기반 시설, 종종 영웅적인 선교사들이 수행한 인도주의적 활동, 그러나 또한 수많은 학대가 자행되고 있으며 많은 사람이 사망하고 많은 사람이 절단되고 더 많은 사람이 착취당하고 있다고 보고되었다.이 일이 완료되자 레오폴 2세 국왕은 이러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새로운 규정을 발표했고, 1908년에 콩고 독립국은 국왕의 개인 재산이 아닌 정부의 통제를 받는 식민지인 벨기에령 콩고가 되었다.이 모든 것은 사실에 물타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공정하게 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언급되었다.'나쁜 놈'이 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전체 인구를 쓸어버릴 필요는 없었다.가족에 대한 냉정하고 독재적인 성격 때문이었든 추악한 사생활 때문이었든, 레오폴 2세 국왕은 아프리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든 관계없이 불미스러운 인물로 여겨졌을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통은 엄청났지만 그의 죄는 고의적인 대량 학살 캠페인이 아니라 부주의하게 착취를 조장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데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아 있다.하지만 왜곡된 방향으로의 그러한 비난은 확실히 사실이 아니다.그는 완전히 무자비한 사람이 아니었고, 유죄가 입증된 범죄자라도 처형하는 것을 꺼려 했다.그는 벨기에가 제국의 세력이 되어 조국을 아름답게 꾸미기를 원했고 그는 확실히 그렇게 했다.오랫동안 "건축 왕"으로 알려진 생껑뜨네흐 공원과 같은 벨기에의 가장 웅장한 건물과 국립 기념물 중 다수는 레오폴 2세가 자신의 비용으로 건설했다.그러나 국제 무대에서 레오폴 2세는 동료들 사이에서 거의 인기가 없었다.이것의 일부는 그의 성공에 대한 질투와 많은 더 큰 규모의 국가들이 벨기에가 자신의 규모에 비례하지 않은 영토를 얻었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말해야 한다.그러나 그것의 대부분은 국왕 자신에게 기인한 것이었고, 개인적인 스캔들과 그와 관련된 콩고의 고통 때문이었다.개인적인 인간관계에서 국왕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고, 이는 부분적으로는 국왕 자신의 성격 때문이었으며 또 부분적으로는 반군주주의와 반식민주의 언론에서 묘사한 국왕의 이미지 때문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이 진정한 감정이라기보다는 방어기제였을지라도 인기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주장했다.레오폴 2세가 항상 강조한 또 하나의 점은 단순히 국제적 합의를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적 준비에 기초한 국방과 무력 중립의 군사 정책에 대한 그의 믿음이었다.그가 임종을 앞두고 오랫동안 바라던 징병법이 마침내 통과됐다.이 지역에서도 다가오는 제1차 세계 대전은 인기 없는 군주가 옳았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었다.또한, 사망하기 5일 전, 레오폴 2세는 두 명의 사생아를 두었던 악명 높은 여성과 종교 의식을 통해 결혼했다(법률혼은 없었다.).그는 1909년 12월 17일에 세상을 떠났다.그는 소규모의 비공개 장례식을 원했으며 태어날 때부터 인기가 없었던 이 남자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널리 퍼지지는 않았지만 완전한 왕실 대우를 받았다.그의 가족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벨기에 군주제의 명성이 얼마나 훼손되었는지 알고 있었다.1865년 벨기에 왕위에 올랐을 때 레오폴 2세 국왕은 "내가 원하는 것은 벨기에를 더 크고, 더 강하고,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라고 선언했다.그것이 그의 성공의 유일한 기준이라면 레오폴 2세는 그 모든 일을 했던 것처럼 성공적인 군주였다.그러나 그의 이름은 그의 통치에 관한 많은 스캔들에 의해 영원히 더럽혀질 것이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콩고 독립국에 존재했던 공포였다.다행히도 그의 후계자는 훌륭한 왕이 되어야 할 모든 것을 갖춘 흠잡을 데 없는 성품을 지닌 사람이 될 것이었다.출처:https://madmonarchist.blogspot.com/2010/05/monarch-profile-king-leopold-ii-of.html
작성자 : Italia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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