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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 결혼 계약서(39)

ㅇㅇ(222.110) 2020.12.06 02:02:23
조회 435 추천 40 댓글 6


루나드의 사무실엔 서류가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었다. 엘사가 갖고 있던 블랙우드의 지분, 자회사와 재산에 관한 서류들이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엘사의 것은 없었다. 대부분은 안나 해밀턴에게 넘어간 상태였고 서둘러 회수한 것들은 그저 껍데기에 불과했다. 

루나드는 짜증난다는 듯 거칠게 의자에 앉아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그때 마침 비서가 사무실로 들어와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이미 이런 일은 익숙한듯 다른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합법적으로 넘긴 것이기 때문에 다시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합법? 부부가 쌍으로 사기극을 벌였는데 합법?”


“이혼했기 때문에 공범이라고 보기 어렵답니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재산을 넘긴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손 쓸..”


“망할!!”


루나드는 책상을 내리치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가 분노해봤자 이미 끝난 일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었다. 

자신의 손녀가 일을 벌일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 끝이 이혼일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엘사는 안나를 버릴 수 없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는 주먹을 쥐며 화를 삭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결심한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론에 해밀턴에 관한 비리 정보 흘리도록 해. 검찰에도 흘리고.”


“...네? 해밀턴에 비리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있나?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뿌려!!! 여론을 만들란 말이야!!”


“알겠습니다.”


루나드의 고함에 비서는 입을 닫고 곧장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가진 황금을 엘사가 해밀턴에게 고스란히 갖다 바쳤으니 이젠 손에 피를 묻혀서라도 다시 되찾아와야 했다. 

그게 설령 엘사에게 해가 되는 일이라 하더라도.















“안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나가는 게 좋겠어요.”


“또 그 소리!”


“보는 눈이 너무 많아요. 지금은...너무 위험해요.”


집에 들어온 지 며칠째, 결국 참지 못한 엘사가 다시 운을 뗐다. 

안나는 출근하려고 하니 나중에 얘기하자고 했지만 엘사는 자신의 뜻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안나, 어제도 나중에 얘기하자고 했잖아요.”


“…….”


엘사의 말에 안나는 아니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엘사의 말이 옳았다. 

이 주제에 대해선 최대한 피하고 싶었지만 계속 피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엘사를 집안에 가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안나는 결국 등을 돌렸다. 


“...또 헤어지긴 싫어요..”


풀 죽은 목소리에 엘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듯 뒤에서 안나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안나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며 속삭였다.


“이번엔..도망 안 쳐요. 당신이 원하면 언제든지 볼 수 있어요.”


“…….”


“안나, 나 이제 어디 안 갈게요. 약속해요.”


“..알아요..”


엘사의 팔을 쓸던 안나는 마침내 고개를 돌려 엘사를 마주했다. 엘사 역시 안나를 피하지 않았다. 

서로를 원하고 있었지만 불행히도 지금은 옳은 때가 아니었다. 

이혼한 부부가 다시 만날 수도 있었지만 두 사람은 평범한 부부 이상이었다. 사업을 위한 결혼이었고 한번 엎은 것은 되돌릴 수 없었다.


“...대신 매일 연락해요. 그러면 보내줄게요.”


“그럴게요.”


“그리고 머물 곳은 내가 구하게 해줘요.”


“..그건 내가..”


“아무 것도 없는 빈털터리라면서요?”


“…….”


안나의 말에 엘사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현재 엘사가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가 전부였으니 틀린 말도 아니었고. 

안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엘사의 볼에 입을 맞추며 작게 속삭였다.


“다른 사람 들일 생각은 꿈도 꾸지 마요. 나도 갈 거니까.”


협박아닌 협박에 엘사는 웃으며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제야 안나도 표정을 풀고 엘사의 볼을 쓰다듬었다. 

자신의 고집 때문에 엘사를 데려오긴 했지만 위험성은 안나도 잘 알고 있었다. 

같이 살면 분명 어디선가 말이 나올거고 그러면 애써 이혼한 의미가 없어진다.


“더 요구하실 것은 없나요? 여왕님?”


“음...아직은 없는데 그 전까진 내게 잘 해야 할거에요.”


“물론이죠.”


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나를 품에 안았다. 안나 역시 별 말없이 엘사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붙어있는 것이 현재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사랑해요, 안나.”


달콤한 엘사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안나는 진한 키스로 대답을 대신했다.













안나가 출근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엘사도 겉옷을 들고 서둘러 집을 나왔다. 

핸드폰엔 약속 장소와 시간을 알리는 문자가 와 있었고 엘사는 택시를 타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위즐튼의 연락은 엘사에겐 예상 밖이었다. 이미 블랙우드에서 쫓겨난 자신이 그에게 아무런 이득도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조금 놀란 면도 없지않아 있었다. 위즐튼은 은밀하게 만나길 요구했고 엘사 역시 이 만남이 알려지질 않길 원했다. 특히 루나드에게는.

안나에게 말을 할까 고민도 했지만 우선 위즐튼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했다. 불확실한 상황속에서 괜한 걱정거리를 만들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엘사의 제안을 수락한다는 말로는 그의 요구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었기에. 위즐튼은 절벽에 끝에 몰렸고 엘사는 모든 것을 잃었다.


두 사람이 만난 곳은 공원 근처 한적한 카페였다. 넓은 공간에 비해 손님은 없었고 점심시간도 많이 지난터라 조용히 대화를 나누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위즐튼은 이미 다 준비했다는 듯 연신 미소를 짓고 있었고 엘사는 무표정으로 응대하고 있었다.


“오랜만이군요, 잘 지냈습니까?”


“다 아실텐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부회장님. 그 편이 서로에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는 알겠다는 듯 품속에서 서류를 한 장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놨다. 그의 표정과 태도는 여유가 넘치고 있었다. 

자신이 만든 판이니 엘사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지켜보겠단 심산이었다.

엘사 역시 그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위즐튼이 안나와 아그나르와 반복하고 있는 이상 그 어떠한 빌미도 주고 싶지 않았다. 그가 내민 서류를 보기 전까지는.


“말씀대로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죠. 제가 이걸 드렸을 때...일전의 제안이 아직 유효한지 궁금하군요.”


“…….”


엘사는 고개를 들어 위즐튼을 노려봤다. 그가 내민 것은 아렌델 프로젝트에 대한 계약서였다. 

공식적인 계약서가 아닌 뒷거래 계약서. 그는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자신이 살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위즐튼은 엘사를 방패 삼아서라도 이 진흙탕에서 빠져나갈 위인이었다.


“이걸 받으려면 당신도 이에 상응하는 뭔가를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이걸 어떻게 믿겠습니까?...게다가..온전한 계약서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결정적으로..서명이 없군요.”


엘사는 살펴보던 서류를 다시 탁자에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루나드와 위즐튼이 겨우 서류 한장으로 모든 거래를 마무리 했을리는 없었고 무엇보다 친필 서명이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의 뒷거래를 증명하라면 서명이 반드시 필요했다. 가장 확실한 증거.

엘사의 말에 위즐튼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허허허, 제가 설마 원본을 들고 나왔겠습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계약서의 일부입니다. 만약 우리의 이야기가 잘 풀리면 원본을 넘겨드리죠.”


“...조건을 말씀해보시죠.”


“내가 해밀턴을 가질 수 있게 도와달라는 것이 내 조건입니다.”


“만약 거절하면요?”


“그러면 비싼 값에 살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찾아가야겠지요. 이를테면...본인에게 직접..”


“...루나드 회장님께 간다는 말씀이신가요?”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엘사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계약서로 시선을 옮겼다. 위즐튼은 분명 엘사에게 이 계약서를 넘기는 것이 가장 이득일거라 생각해서 왔겠지만 다른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그가 정말 이 계약서를 루나드에게 가져가면 오히려 루나드가 모든 패를 쥐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루나드는 위협이라고 생각했던 위즐튼을 쉽게 제거할 수도, 자기편으로 만들 수도 있고 그러면 아렌델 프로젝트를 막을 방법이 없어진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계약서가 루나드의 손으로 가는 것은 막아야 했다.


문제는 자신이 이 계약서를 얻을 경우 안나에게 뭐라고 말할 지와 앞으로 위즐튼의 행동을 어떻게 저지할 수 있는냐였다. 

거기에 한 가지 더 추가하자면 위즐튼은 확신이 들 때까지 움직일 위인이 아니었다. 엘사가 안나를 돕다는 것을 안 순간 언제든 칼을 빼들 사람이었다. 

긴 침묵 끝에 엘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위즐튼 부회장님, 지금 절 협박하시는 겁니까?”


“협박이 아니라 제안입니다. 그리고 이건 그리 당신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닐텐데요.”


“…….”


“블랙우드를 차지할 수 있는 기회이고, 이제 해밀턴은 상관없지 않습니까? 이혼한 마당에 신경쓸 것이 있나요?”


“…….”


“잘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걸 잃은 상황에서 전부 되찾아 올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테니.”


비아냥거리는 위즐튼의 날선 말투에 엘사는 어금니를 깨물며 그를 노려봤다. 그의 말대로 이건 다시 찾아오지 않을, 반드시 잡아야 하는 기회였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위즐튼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다. 불행히도 그가 말한 것처럼 엘사와 안나는 이혼한 상태였으니 표면적으로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가 해밀턴을 가질 수 있도록 안나에게 칼을 겨눠야 했다. 아니,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위즐튼은 절대 계약서를 넘겨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에.

엘사는 자신에게 선택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위즐튼에게 내줄 수 있는 것은 내어줘야 했다. 한 팔이 부족하면 나머지 팔, 다리를 주는 한이 있더라도 그가 갖고 있는 패를 가져와야 했다. 그것이 자신에게 치명적인 일이 된다 하더라도 엘사에겐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부회장님,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


“부회장님이 해밀턴을 갖게 도와드릴 수는 없습니다. 전 지금 아무 힘이 없으니까요. 블랙우드에서도 쫓겨났고 말씀대로 안나와 이혼까지 했습니다. 남은 게 없죠. 하지만..”


“…….”


“제가 블랙우드를 갖게 된다면 부회장님의 공은 잊지 않겠습니다. 그건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엘사가 위즐튼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불투명한 약속들 뿐이었다. 

어디까지나 엘사가 블랙우드를 차지할 때의 이야기였고 이건 가정이고, 그저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어정쩡한 말로는 위즐튼을 설득시킬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말로만?”


“..원하시면 계약서를 써드리겠습니다.”


“하하하, 회장님과는 다르게 화끈하시군요.”


“…….”


위즐튼은 엘사의 제안이 흥미로운듯 콧수염을 쓰다듬었다. 안경너머로 보이는 그의 눈은 독사같았으며 눈 앞에 놓여있는 먹이를 어떤 방법으로 먹을지 고민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역시 엘사에게 한 제안은 어디까지나 예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면 그다지 나쁜 거래는 아니었다. 최악만 피하면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설령 엘사가 실패한다 해도 위즐튼은 모른 척 하면 그만이었다. 엘사가 루나드에게 대놓고 서류를 들고 가진 않을 테니.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죠. 만약 블랙우드를 갖게 되면 일정 지분을 제게 넘기십시오. 거기에..”


“..?..”


“내 안전까지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좋습니다.”


“허허허, 그럼 성사된 것 같군요. 내일 비서가 우리의 새 계약서를 들고 찾아 갈 겁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과 함께.”


“...알겠습니다.”


“좋은 파트너가 되길 바랍니다.”


위즐튼은 마음에 든 거래였는지 웃음을 감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엘사는 생각보다 구체적으로 요구한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칼자루를 쥔 것은 엘사가 아니었다. 위즐튼과 자신의 새 계약서는 분명 또다른 비리의 증거가 될 것이고 엘사는 점점 더 깊은 늪지대 가운데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이제 엘사는 필사적으로 루나드를 막고 안나를 지킬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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