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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 결혼 계약서(41)

ㅇㅇ(222.110) 2021.01.02 18:43:24
조회 418 추천 38 댓글 7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얼굴은 반갑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안쓰럽기도 했다.

조금은 푸석한 백금발이 오늘따라 유독 더 창백하게 보이게 만드는 것 같았다.

한스는 앞에 놓여있던 술 잔을 마저 비우고 엘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엘사!”


“바에서 보자고 할 줄은 몰랐네요.”


“여기도 제 단골집이거든요. 퇴근 후에 가끔 와요. 뭐 마실래요?”


“당신이랑 같은 걸로 할게요.”


한스는 알겠다는 듯 바텐더에게 주문을 한 뒤 엘사를 향해 몸을 틀었다. 저녁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바는 상당히 한적한 편이었다.

가게도 비교적 아담한 편이라 이야기를 나누기엔 적당한 장소였다. 거기다 바에 앉은 사람은 한스와 엘사 뿐이었다.


“잘 지냈어요? 얼굴이 많이 상한 것 같은데..”


“걱정은 고마워요. 덕분에 잘 지내요.”


“어디서 지내요? 오피스텔에서 나온 걸로 아는데..”


“...안나랑요.”


“안나?..안나 해밀턴?!”


“네.”


“두 사람 이혼..”


“사연이 좀 기네요.”


얼빠진 한스의 얼굴을 뒤로 하고 엘사는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들었다. 조금은 독한 알코올이 목을 타고 흐르는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평소 술을 즐겨 하지 않는 엘사에겐 정말 오랜만의 술이었다.


“..안나는 잘 지내요? 안 그래도 뉴스 봤어요. 작정하고 해밀턴 때리던데..”


“그럭저럭요.”


“아무래도..이번 일은...”


“회장님이겠죠.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분 밖에 없으니까.”


“...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엘사..”


자신을 부르는 한스의 목소리에 엘사는 대답 대신 연이어 술만 들이켰다. 타는 듯한 목넘김어었지만 상관없었다.

알코올은 혈관을 타고 엘사의 몸 곳곳에 퍼지는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이냐고? 모든 걸 내줘서라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중이었다. 그게 설령 가족을 배신하는 일이 되더라도.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는 젊은 날의 치기라도 해도 좋고, 멍청한 짓이라고 무시하고 욕을 해도 좋다. 이렇게 생각 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아니, 이렇게 생각 해야만 했다. 그래야 가족을 배신하는 것에 대한 아주 작은 변명이라도 될 수 있으니.


“모르는게 나을 것 같아요.”


“나한테 그런 부탁까지 했으면서 나보고 모른 척 하라고요?”


이미 굳게 닫힌 엘사의 입을 한스는 억지로 열 수 없었다. 그저 이 일이 루나드에게 좋은 일은 아닐거란 추측 뿐이었다.

그리고 루나드는 단순히 회사 회장이 아닌 엘사의 가족이었다. 그렇기에 설령 입을 연다 해도 한스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 일지도 몰랐다.

그 모습을 보던 한스는 결국 졌다는 듯 자신의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앞에 내밀었다.


“부탁한 서류에요. 당신이 나간 뒤로 나도 위치가 애매해져서 구할 수 있는 게 한계가 있었어요.”


“...이거면 충분할 것 같아요. 고마워요, 한스.”


“엘사, 당신이 뭘 생각하든...자신도 좀 챙겨요.”


“…….”


“당신을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는 소리에요. 혼자 짊어지지 말아요. 그게 당신 단점이라니까요.”


“고마워요.”


“..이거 안나도 알아요?”


대답대신 엘사는 남은 술잔을 비우고 건네 받은 서류를 가방에 넣고 짐을 챙겼다. 한스는 이미 예상했다는 고개를 저었다. 예전부터 엘사는 혼자 끌어안기를 좋아했으니까. 하지만 과연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까. 한스는 엘사의 어깨라도 토닥여주고 싶었지만 그건 자신의 몫이 아닌 것 같아 자신의 잔으로 시선을 옮겼다.


“엘사.”


“..네.”


“만약 안나와 다시 잘 되고 있는거라면..말 해요. 그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아요. 오해가 쌓이면 얼마나 힘든지 이미 봤잖아요.”


“조언 고마워요, 한스.”


“...그래봤자 말 안 할 거죠?”


한스의 말에 엘사는 미소만 지었다. 걱정 말라는 듯한 태도에 그는 결국 포기했다는 듯 엘사에게그만 가라고 손짓했다. 

엘사의 고집은 쉽게 꺾을 수 없을 테니. 엘사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는 듯 하더니 잠시 발을 멈추고 한스를 돌아봤다.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엘사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나도 오랜 친구에게 조언 하나 할게요. 블랙우드 말고 다른 곳 알아봐요. 필요하면 추천서 써줄게요.”


“네?”


“떠날 수 있을 때 떠나요. 일이 시작되면 나도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겠어요.”


엘사는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그것 뿐이었다. 한스는 알겠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종의 조언이자 경고였다.

일이 벌어지면 한스까지 책임져 줄 수 없다는 말이기도 했고. 엘사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가게를 떠났다.

이제 선택은 한스의 몫이었다. 그는 엘사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다 마지막 남은 술을 입에 털어넣었다.


“..행운을 빌어요, 엘사.”


깊은 한숨과 함께 빈 잔만 만지작거리던 그도 겉옷과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














날이 지날수록 안나가 들어오는 시간은 점점 늦어졌다. 밤 아홉시, 열시를 넘겨 새벽에 들어오는 일도 일쑤였다.

그 동안 안나는 점점 지쳐가는 듯 보였고 집에 와도 씻고 곧장 잠들기 일쑤였다.


엘사는 안나에게 힘이 되고 싶었지만 지금 당장은 할 수 있는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한스와의 만남 이후 낮에는 안나 몰래 서류를 정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 밤이 되면 안나가 오기전 모든 것을 숨기고 평소대로 행동했다.


“피곤하죠? 이리 와요.”


“계속 비상이에요. 검찰에 언론까지..하아..”


막 샤워를 마친 안나가 가운을 두른 채 침대에 앉아있는 엘사의 옆으로 다가갔다. 엘사는 안나를 침대 끝에 앉혀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마사지였다. 안나는 눈을 감고 엘사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이 시간은 안나가 유일하게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오늘 하루에 대해 얘기하며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것.

엘사는 묵묵히 안나의 얘기를 들으며 마사지에 집중했다. 젖은 머리와 가운 사이로 조금씩 보이는 주근깨와 어깨의 곡선이 고스란히 푸른 눈에 담겼다.


“..그런데..”


“..?..”


“안마하는 방법은 언제 배웠어요? 설마 전 애인들한테 해 준거 아니죠?”


“설마요. 누구한테 해주는 거 처음이에요.”


“그런 것 치고는 너무 능숙한데요, 엘사 블랙우드씨?”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손님.”


그 말에 킥킥대며 웃던 안나는 이제 그만해도 된다며 엘사를 침대로 끌어들였다. 중심을 잃은 엘사가 침대로 쓰러지자 안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품으로 파고들었다. 엘사는 잠이라도 편히 자라면서 자리를 비켜주려 했지만 안나는 절대 그럴 수 없다면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아무리 피곤해도 안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서 잠들고 싶었다. 그것이 현재 안나의 유일한 즐거움이자 버팀목이었다.


“엘사, 아무 얘기해줘요. 오늘따라 당신 목소리 들으면서 자고 싶어.”


“피곤할텐데 자는 게..”


“빨리 해줘요, 응?”


그제야 엘사는 고개를 내려 안나와 시선을 맞췄다. 유난히 반짝이는 녹색 눈동자가 엘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부모님 몰래 장난을 치는 아이처럼 안나의 얼굴에 기대감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엘사는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뻗어 부드럽게 안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음...혹시 그때 기억나요? 당신이 내 사무실 처음 찾아왔을 때.”


“사무실? 결혼 전에요?..잘 기억이 안 나는데..”


“결혼 계약서 들고 왔을 때요.”


엘사의 말에 안나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엘사와 만난 것은 좋은 기억이었지만 그때가 꼭 좋은 기억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계약서도 있었고 옛 애인인 크리스토프의 일도 있었으니까. 엘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작게 웃자 안나는 볼멘소리로 그런 얘기 말고 다른 얘기가 듣고 싶다고 투덜댔다.


“아하하, 잠깐만 더 들어봐요. 그때 내가 무슨 생각 한 줄 알아요?”


“..안 들어도 뻔하죠. 이상한 여자가 찾아와서 미친 소리를 하는구나 했겠죠.”


“설마요! 내가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럼요?”


“이 사람은 예상치 못하게 엉뚱하고 그걸 숨기지 않는구나, 했죠.”


“..별로 좋은 인상은 아니네요.”


“그래서 더 궁금했어요. 당신이 누군지. 당신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어요. 그리고..”


엘사가 일부러 뜸을 들이며 마지막 말을 흐리자 안나는 못 참겠다는 듯 재촉했다. 그런 안나의 모습을 보니 작게 웃음이 나왔다.

안나의 투정을 얼마만에 보는 것인지 이 투정 마저도 사랑스러웠다. 두 사람에게는 웃을 일보다 울 일이 더 많았으니까.


“그리고 생각했죠. 아, 저런 사람과 결혼해야 하는구나. 난 이제 끝났다..혹시라도 이혼하게 되면 뭐라고 하지?..”


“엘사!”


“아하하하, 미안해요, 안나. 간지러워요..윽..,그만!..”


안나는 더 이상 듣지 못하겠다는 듯 엘사의 몸 곳곳을 간지럽히고 때렸다. 엘사가 아무리 체력이 좋다고 해도 작정하고 달려드는 안나를 이길 재간은 없었다. 결국 엘사의 입에서 항복한다는 소리가 나오자 그제야 안나의 공격도 멈췄다.


“하아,하아..안나, 진짜 항복. 농담이었다구요!”


“헉헉..농담 아닌거 알아요!”


그 말에 오랜만에 웃음소리에 방안에 가득 퍼졌다. 웃으면서 거친 숨을 몰아쉬던 두 사람은 다시 마주보고 침대에 누웠다. 푸른 눈동자와 녹색 눈동자가 서로의 시선을 맞추며 깊이 다가가고 있었다. 안나는 손을 뻗어 엘사의 볼을 쓰다듬었다.

안나는 느낄 수 있었다. 이건 엘사가 안나를 위해 일부러 던진 농담이었다. 평소 농담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기에 이건 순전히 안나를 위한 배려였다.

그렇기에 일부러 분위기를 풀어준 엘사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다.


“고마워요. 오랜만에 웃게 해줘서..”


“..고마워요, 웃어줘서.”


안나는 엘사의 입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곧장 품으로 파고 들었다. 일이 얼마나 고되든 사랑하는 이의 품에서 잠들 수 있다면 안나는 그것으로 족했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일이었지만 가끔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안나는 이 순간이 소중했다.

엘사는 자신의 품을 파고 든 안나의 등을 쓰다듬으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최근 안나가 얼마나 힘든지 엘사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욕심이 났다. 여기서 조금만 더 욕심부려도 될까. 아니면 이걸로 만족해야 할까.

몇번의 망설임 끝에 엘사는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안나.”


“응?”


“..우리..여행 갈래요?”


“여행?”


“당신 요새 많이 고생했으니까 잠시 머리도 식힐 겸. 이번 주말에 다녀 올까요?”


“..이번..주말에요?..”


조금은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에 엘사는 눈을 감았다. 이미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해밀턴이 위기에 처한 이때에 여행을 간다는 건 어렵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사는 밀어붙이고 싶었다. 아니, 간절했다. 안나와 함께 있을 유일한 기회가 될 지도 몰랐다. 주말이 안 되면 하루, 하루가 안 되면 반나절이라도 가자고 졸라볼까 하는 마음이 일었지만 엘사는 입을 닫았다.


상대가 안나였기에, 사랑하는 사람이었기에 그럴 수 없었다. 절대 이기적으로 굴 수 없었다. 그건 안나에게 너무 가혹했다.

눈을 뜨니 난처한 표정의 안나가 보였다. 그리고 미세하게 떨리는 입술의 움직임도 보였다. 안나는 분명 거절을 할 것이고 그걸 어떤 식으로 자신에게 전달할지 고민하는 듯한 눈치였다. 이것마저 안나가 감당하게 둘 수는 없었다. 그 순간 엘사는 안나의 입이 열리기 전 먼저 선수를 쳤다.


“미안해요, 안 그래도 바쁜데...대신 저녁 같이 먹어요. 여행은 다음에 가고.”


“..엘사..”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여행은 나중에 가도 되니까.”


“미안해요...이해해줘서 고마워요.”


한숨 돌렸다는 안나의 목소리에 엘사는 웃으며 품에 안으며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가렸다.

하루라도 안나와 더 같이 있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그럴 시간이 없었다. 여기까지가 엘사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미안해요, 안나.



고른 숨을 쉬며 어느새 잠에 빠져 있는 안나를 보는 엘사의 눈에선 눈물이 떨어졌다.

그렇게 또 다른 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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