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https://www.fanfiction.net/s/12256518/3/Rule-Number-Five
3. Heart Insurance
엘사는 부엌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며 주말까지 제출해야 할 레포트를 쓰고 있었다. 물론 엘사는 여지껏 그랬듯이 레포트를 늦지 않게 낼 자신이 있었지만, 반대편 의자에 앉은 안나는 그걸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나 보다.
"이번엔 또 뭔데?" 참다 못 한 엘사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네 표정이 너무 진지해보여서 말야. 중요한 거야?" 안나는 테이블 반대편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레포트를 보려고 했고, 엘사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윽... 글자가 너무 많네."
"레포트가 원래 그렇지." 엘사가 레포트 종이를 넘기면서 대답했다.
"그림이라도 좀 그려넣으면 어떨까? 천 마디의 말 보다 하나의 그림이 더 많은걸 전달하는 법이잖아."
"모두가 너처럼 예술이가인건 아니잖아, 안나. 내가 너랑 같은 방법을 쓸 필요는 없어." 엘사는 종이에 뭔가를 휘갈겨쓰면서 대답했다.
"대체 몇 시간째 하고 있는 거야?" 안나는 엘사의 말을 못 들은 척 하며 물었다.
"모르겠네. 이번 주말까지 제출해야 하거든."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안나와 함께 자라온 엘사에겐 이런 멀티태스킹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 빨강머리는 엘사가 뭘 하는 중이건 아니건 항상 말을 걸어왔으니까 이미 익숙해진 상태였다.
"넌 다른 할 일이 없니?"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안나는 엘사를 멀뚱이 바라 볼 뿐이었다.
"벌써 했는 걸." 안나가 어깨를 으쓱하자 엘사는 입이 적 벌어졌다. "그냥 1분짜리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거였어. 내가 그림을 잘 그리는 건 너도 알잖아? 어제 벌써 끝냈지."
"하긴, 너라면 그렇겠네." 엘사는 납득이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어어어...." 안나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왜?"
"내가 한 제안에 대해선 좀 생각해봤어?"
"어떤 제안?"
"나랑 사귀는 거." 안나는 대놓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엘사는 손이 하얘질 정도로 주먹을 쥐었고, 지금 당장 도망가지 않기 위해 다리를 멈춰세워야 했다. 안나는 요 며칠동안 한 번도 이 질문을 하지 않았고, 그 덕분에 엘사는 벌써 안나가 이 놀이에 질린 줄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안나의 눈엔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랫입술을 깨무는 엘사가 보였다. 지금까지 계속 친구로 지내오면서, 이 버릇이 엘사가 뭔갈 정말로 깊이 생각할 때나 말을 멈추려고 할 때 나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둘 중의 어느쪽인지 파악하기 힘들었고, 어쩌면 양쪽 다 일지도 몰랐다. 대체 왜 이렇게 내 제안을 거절하는 거지? 우린 거의 진짜 친자매처럼 지내왔잖아. 고작 이런 것 때문에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고!
"자, 우리가 사귀면서 지켜야 할 규칙을 적어 왔어. 뭘 해야 하고, 뭘 하면 안 되는지. 뭐... 너만 동의한다면 말야." 안나는 종이를 꺼내서 테이블에 얹고 엘사에게 보여주었다.
이건 좀 신선한데. 안나는 평소에 이런 계획을 짜면서 행동하는 아이가 아니었는데. 종이에 규칙까지 적어서 보여준다는 건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봤다는 거겠네. 물론 내가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궁금해지긴 하네. 객관적으로 봐서 안나는 '흐름에 맞춰서 움직이는' 타입의 여자애였다. 규칙을 정해놓고 움직이는게 아니라, 자신에 맞춰서 규칙이 따라오게 만드는.
"애칭...으로 부르기?" 엘사는 첫 번째 규칙을 읽자마자 눈썹이 찡그러졌다.
"네가 누군가와 사귄다면, 제일 먼저 해야 할 건 호칭을 바꾸는 거야." 안나는 검지손가락을 들고 강조하면서 말했다.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 사람은 내 거예요' 라는 걸 보여주면서 접근하지 마라는 걸 알려주지. 물론 애칭으로 부르면 네 파트너한테도 행복한 소속감을 느끼게 해주고 말야."
"그래도 이건 너무 불편하지 않아? 익숙하지 않은 별명으로 불리는 건 거북스럽다던가?"
"그건 맞지, 하지만 금새 익숙해질 거야. 게다가 넌 네 여자친구를 남들 앞에서 과시하고 싶지 않은 거야? 네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애칭을 부끄러워 해서는 안 된다구!"
엘사는 지금 당장 입밖으로 뛰쳐나오려는 말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했다. 내가 널 부끄러워한다고? 말이나 된다고 생각해? 만약 모두에게 널 내거라고 말할 수만 있다면 진작에 했을 거야! 하지만 그렇게 불러야 한다면 진짜 사귀고 난 다음에서지, 이렇게 사귀는 척만 할때는 아니었어.
"다른 사람에게... 작업 걸지 않기." 이번 규칙에는 엘사도 별 군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누군가와 사귄다면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하니까. "근데 말야... 넌 내가 다른 사람한테 작업을 걸 거라고 생각해? 굳이 이 규칙을 넣어야 했어?"
"바로 그거야! 그것 때문에 내가 있는 거라고! 일단 나로 연습을 하는 거야, 엘사. 내가 널 모르겠어? 넌 낯선 사람이랑은 거의 얘기도 안 하잖아? 상대방이 작업을 걸면 반응이라도 좀 해주라고!"
"그래서 내가 너한테 작업을 걸어야 한다?" 엘사는 어이 없다는 듯이 말했다.
"맞아! 만약 네가 나한테도 작업을 못 건다면, 대체 다른 사람한테는 어떻게 다가가겠어?"
만약 네가 그냥 친구였다면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겠네. 문제는 너한테 작업을 거는건 내 가장 큰 꿈이었다는 거지. 게다가 이런 식으로 작업 걸게 되는 건 상상도 못 했다고! 내가 오래도록 사랑한 사람한테 갑자기 작업을 걸라니, 이것보다 힘든 일이 어딨냔 말야!
"그, 그래도, 안나! 내가 너한테 수작을 부리는 건... 너무 이상하지 않아?"
"뭐라고요?!" 안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양뺨을 감싸쥐며 상처받은 척을 했다. "아 그래요? 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자에 못 미쳐서 미안하네요!"
"내 말은, 그, 그게 아니잖아! 우, 우린 지금까지 함께 자라왔는데, 갑자기 그러면 이상할 거라는 말이야, 안나!"
"어째서? 많은 소꿉친구들은 가깝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서로에게 작업을 걸고 그러잖아. 내가 아는 애들 중에도 커플이 된 소꿉친구들이 몇 명이나 있는데?" 안나는 가슴을 펴고 말을 이었다. "전혀 안 이상해."
엘사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아냐, 얘는 그냥 이성애자 커플들을 말하는 거야. 우리가 아니라고. 엘사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리고 이 까다로운 화제를 벗어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종이에 시선을 옮겼다. "네 애인은 항상 옳으니까 말대답 하지 않기."
이번엔 엘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여자는 말대답 듣는걸 싫어하는 법이지. 서로 말다툼을 하다가 열이 올랐을 땐, 네 여자친구는 그냥 자기 말을 들어주길 바랄 거야. 말대답을 듣는게 아니라 말야."
"혹시 내 여자친구가 틀렸다면?"
"엘사, 그거 알아? 여자는 항상 옳아."
"혹시 잊었나해서 말하는 건데 사실 나도 여자거든? 그리고 혹시라도 내 여자친구가 잘못된 걸 계속 말하려고 한다면 난 언제라도 고쳐줄 거야."
"대부분의 여자들이라면 그러지 않길 바랄걸. 최소한 머리에 열이 올랐을 땐 말야. " 안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야기 하려고 할 수는 있겠지. 그래도 만약 네 여자친구가 화난 상태라면, 문제를 설명하려고 해서는 안 돼. 네 여자친구는. 네 말을. 안 들을 거니까."
내가 그걸 모르겠어? 엘사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넌 화가 났을 땐 한 번도 내 말을 듣질 않았잖아. 뭐, 네가 나한테 화를 낸 적은 거의 없긴 해도 그럴 때 마다 참 곤란했어. 여자로서의 감정을 이유로 말다툼을 하는게 얼마나 힘들었는데.
"자주... 키스... 하기..." 엘사의 머리속에 키스를 해오는 안나의 모습이 떠올라 뺨에 열이 올랐다.
"이건 설명할 필요도 없겠네. 서로 사귀는 사이라면 당연히 키스를 해야 하잖아. 그렇지?"
"안나! 너 지금 무슨 말 하는지 알아? 우리가 키스를 한다고? 우리가?! 키스를?!"
"알고 있어, 엘사. 그걸 적은게 나잖아."
"그건... 너 지금 농담 하는 거지?! 어떻게 이런 걸 적을 수가 있어?" 엘사는 헬쓱해진 얼굴로 종이를 가리켰다.
"넌 다른 사람한테 작업을 못 걸잖아? 그러면 키스도 못 한다는 거겠지? 내가 너한테 이 제안을 한 이유는 널 돕기 위해서야. 우리가 더 리얼하게 연기를 할 수록, 넌 연인으로서의 행동에 더 익숙해지고 자신감을 가지게 될 거니까." 안나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괸 후 자랑스럽게 방긋 웃었다.
엘사는 여전히 입을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 했지만, 그건 안나의 말 때문이 아니라 아직도 머리속에서 안나와 키스를 하는 상상이 가득 차올라서였다. 하지만 그 상상속에서 조차 엘사는 자신이 키스하는 모습을 정확하게 그려내지 못 하는게 사실이었다. 키스를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혹은 누구와 키스를 해야 하는지 조차. 머리속에서 키스를 하는 장면을 그리려고 할 때 마다 안나만이 떠올랐고, 상상은 항상 흐리멍텅하게 흩어져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생각해 봐. 넌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라면 키스를 할 수 조차 없잖아?" 그 말을 하는 안나의 얼굴은 짓궃은 웃음에서 상냥한 미소로 표정이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넌 내 곁에서 편안함을 느끼는거 맞지?"
"그, 그렇지만-" 이건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완벽한 진실도 아니었다. 엘사는 안나에게서 편안함을 느끼지만, 적어도 이런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예외였으니까.
"혹시 이래도 네가 걱정이 멈추지 않는다면, 이 규칙들을 바꾸거나 새로운 규칙을 추가해도 돼."
솔직히 말해 엘사와 키스를 한다는 건 나한테도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일은 아니지. 그래도 이걸 역겹다고 할 생각은 없어. 왜냐면 엘사니까. 엘사는 역겹지 않아. 그리고 난 엘사의 옆에 있으면 편안함을 느껴. 키스를 하는 건 아무런 문제도 안 돼. 전혀.
"그리고, 네가 여기에 뭔가를 적어넣는다면..." 안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자, 엘사의 눈동자가 자신의 친구에게 향했다. "그 말은, 너도 내 제안에 동의한다는 거야. 우리가, 사귀는 거."
엘사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신경이 곤두서서 엉크러질 것만 같은데도 몸이 떨리지 않았다는 건 기적이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엘사가 여지껏 누구와도 사귄적이 없다곤 하지만 이 규칙들은 어느 정도 그럴싸하다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누군가와 사귀는걸 두려워 한다는 안나의 착각 때문에 가짜 여자친구가 된다는 것 역시 바보같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나한테 무슨 방법이 있겠어? 무슨 변명을 떠올려봤자 넌 무시할거고,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넌 신이 나서 누군지 물으면서 나랑 걜 이어주려고 할 텐데 말야.
내가 사랑하는 건 사실 너인데.
엘사는 갈증이 나는 목으로 침을 삼키곤 펜을 들고 종이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 작은 행동은 안나의 입꼬리를 올릴만큼 충분한 대답이 되었고, 이제 남은 건 엘사가 펜을 내려놓길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엘사의 예쁜 뺨에 희미한 핑크빛이 스쳐지나갔고, 안나의 눈엔 이게 태어나서 본 가장 아름다운 색으로 보였다.
몇 분 동안 진지하게 종이를 쳐다보던 엘사는 마침내 머뭇거리면서 뭔가를 적고선 안나에게 종이를 건냈다. 조심스레 종이를 받아 들어 시선을 옮기니 수정을 한 부분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추가된 규칙은 하나 있었다.
Rule #5: 서로에게 사랑에 빠지지 않기.
이걸 본 안나는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다. 눈앞에서 겁먹은 표정으로 얼굴을 붉히고 있는 엘사를 보니 장난하는 건 아닌 듯 보였다. 진짜 이것 때문에 이렇게 겁을 먹은 거야? 그리고 엘사의 뺨이 새빨갛게 물드는 걸 보자 속에서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맙소사, 이렇게 귀여운 건 반칙이잖아!
"이걸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을 거야." 안나가 약속했다.
내가 너한테 반해버린다고? 말도 안 돼. 그야 엘사는 예쁘고, 내가 지금껏 만난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멋진 사람이기야 하지. 그래도 내가 엘사에게 반해 버린다고? 그렇게 되려고 노력해도 힘들 것 같은데. 내 베스트 프렌드에, 같은 지붕 아래에서 사는 사람한테 반해 버릴리가 없잖아! 뭐, 엘사도 나한테 반해버린다면 모르지만 말야. 그럼 진짜 매일매일이 지옥같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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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번째 규칙, 서로에게 사랑에 빠지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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