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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 결혼 계약서(44)

ㅇㅇ(222.110) 2021.01.23 19:09:05
조회 467 추천 37 댓글 7


“...이게 다 어디서 난 겁니까?”


“출처는 밝힐 수 없습니다. 다만, 현재 상황을 수습하는데 도움은 될 거라 생각합니다.”


“스톤씨, 이건..”


아그나르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앞에 앉은 이를 바라봤다. 

이른 아침부터 자신을 찾아 온변호사는 해밀턴에게 도움이 될 중요한 정보가 있다며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아그나르는 무슨 소린지 물었지만 그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검찰 측에도 넘겼으니 앞으로는 회장님과 달렸군요.”


파비는 이제 자신의 역할은 끝났다는 듯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사가 원한대로 아렌델 프로젝트와 관련된 비리 증거들과 계약서는 이미 검찰에 넘겼고 아그나르에겐 그 복사본을 넘겨주었다. 그것이 엘사가 원한 일이었다.


“스톤씨,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쭤봅니다만...이것들 전부 엘사...”


“죄송하지만 고객과의 일은 기밀사항이라서요.”


“...당신이 블랙우드 변호사였고 지금은 엘사의 개인 변호도 한다는 건 누구나 압니다. 그러니 말씀해주세요. 전부 어디서 난 겁니까?”


“어디서 났냐가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건지 걱정하셔야죠. 참, 한가지 더요.”


“..?..”


파비는 외투를 입으며 아그나르의 말을 잘랐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짐작은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엘사는 자신이 알려지는 건 원치 않았다. 

아그나르가 무슨 추측을 하든, 파비는 엘사를 보호해야 했다. 그는 엘사의 변호사였으니까. 그리고 엘사의 마지막 부탁도 있고.


“아마 따님께 가보는 게 좋을거라고 했습니다.”


“네?”


“따님과 함께 서류를 살펴보면서 잘 챙겨주라고 전해달라더군요. 힘들어 할거라면서.”


“..엘사가 그러던가요?”


“죄송합니다만, 말씀드렸듯이 출처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그럼, 이만.”


파비의 단호한 태도에 아그나르는 입을 닫았다. 추궁해도 말하지 않았을 사람이지만 그도 괴로운 일이라는 듯 더 이상 원치 않는 것 같았다. 

아그나르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파비를 보내줬다. 그의 말 대로 서류들을 살펴봐야 했고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곧장 수화기를 들고 비서실에 전화를 걸었다.


“안나 해밀턴 팀장 올라오라고 해요.”


“팀장님은 오늘 출근을 안 하셨습니다.”


“출근을 안 했다고?”


“네.”


“휴가인가?”


“아뇨, 연락이 없으셨다고 합니다.”


“..알겠어요.”


아그나르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잠시 머리를 식혔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만약 이 정보를 준 것이 엘사라면, 스스로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꼴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가족을 배신하면서까지 해밀턴을 도울 이유가 없었다. 딱 하나만 빼고.

안나.

엘사가 해밀턴을 돕는다면 그 이유밖에 없었다. 아무리 두 사람이 이혼했다 해도 어디까지나 안나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고 아그나르는 그런 엘사의 뜻을 존중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외투와 서류를 집어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이 일은 어떤 식으로든 안나도 알게 될 것이었고 만일 엘사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가장 힘들어할 것은 안나가 분명했다.














주머니 속에서 쉼 없이 울리는 핸드폰의 진동에 익숙해질 무렵 엘사는 커다란 문 앞에서 마지막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일을 마치기 전, 잠시 쉬어가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핸드폰에는 부재중 전화가 수없이 찍혀 있겠지만 자신이 연락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엘사는 진동이 잠시 끊긴 틈을 타 재빨리 핸드폰을 껐다. 이제 더 이상 안나를 끌어들일 수 없었다. 별 다른 말없이, 흔한 편지 하나 없이 안나를 떠났다는 사실은 마음을 온통 흔들어 놨지만 이제 마침표를 찍을 때라고 생각했다.


“회장님께서 들어오시랍니다.”


책상에 앉아있던 비서의 말에 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사가 이곳에 오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자신이 몸 담았던 회사이기도 했지만 회장의 손녀였기에 아무리 내쫓겼다 해도 엘사를 막을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루나드가 정말 엘사를 저버렸으면 애초에 엘사가 이 곳에 있지도 못할 터였다. 블랙우드의 건물에 발을 디뎠을 때부터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말과 시선은 느껴졌지만 그 누구도 엘사를 막진 않았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인테리어와 익숙한 냄새, 그리고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엘사의 하나뿐인 가족. 


“뜻밖의 손님이구나.”


“…….”


“널 들여보냈다고 해서 용서한다는 뜻은 아니다. 용건이 뭐지?”


루나드는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엘사에게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는 엘사가 잘못을 빌러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있는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엘사가 여길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엘사가 입을 열기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다.


“회장님..아니, 할아버지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뭐?”


“..이제 그만 하세요. 다 끝났습니다.”


루나드는 인상을 쓰며 엘사의 말을 이해하려 애썼다. 갑자기 자신을 찾아와서 헛소리만 늘어놓고 있는 꼴을 보니 잘못을 빌러 온 것 같진 않았다. 

어딘가 체념한 듯한 엘사의 표정에 루나드는 순간적으로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무슨 말인지 되물었다.


“뭐가 끝났다는 거냐?”


“...아렌델 프로젝트, 해밀턴, 비리 조작과 계약서까지..전부 끝났어요.”


“네가 정신이 나갔구나?”


“제가 여기 온 이유는 할아버지께 마지막 기회를 드리기 위해서에요. 이미 검찰에 모든 걸 다 넘겼습니다. 곧 압수수색이 시작 될 거고 검찰에도 가셔야겠죠.”


“뭐?”


“...저랑 같이 자수하세요. 더 일이 커지기 전에. 아직 안 늦었습니다.”


“드디어 미쳤나보구나! 뭐? 마지막 기회? 자수? 너야 말로 마지막 기회란 생각은 안 들더냐? 지금 누구 앞에서..!”


“제발 그만 좀 하세요!!!”


그 순간 사무실의 공기가 내려간 것 같았다. 루나드는 낯선 엘사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한 것 같았고 엘사의 붉게 충혈된 눈은 마지 맹수가 포효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엘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루나드에게 그 동안 꾹꾹 눌러왔던 감정들을 쏟아내는 것 같았다.


“이제 그만 좀 하시라구요!!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할아버지의 욕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고통받는지?!! 이미 많이 갖고 계시잖아요, 얼마나 더 원하시는데요?!!”


“..너..지금..”


“할아버지 때문에 제가 받는 고통은 생각해보셨어요? 제가 얼마나 더 괴로워야 만족하시겠어요? 회사, 결혼, 심지어 이혼까지!!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 저는 그래도 다 받아들였습니다. 그 고통도 다 감당할 수 있었어요! 제게 하나 뿐인 가족이시니까!! 내 가족의 등에 칼을 꽂고 싶진 않았으니까!!!”


“…….”


“그렇게 해밀턴이 탐나셨어요? 그럼 애초에 차라리 그렇게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그럼 최소한 결혼 전에 뭐 라도 거들어 드렸을텐데!! 그러면 제가 여기서 이렇게 괴로워하지 않아도 됐을텐데요!!”


엘사는 울부짖고 있었다. 애원에 가까운 말처럼 들리기도 했고 화를 내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말을 한다 해도 그 동안 엘사가 겪은 고통을 설명할 순 없었다. 루나드와 안나 사이에서 반드시 한쪽 편을 들어야 했고 선택의 순간은 매번 고통스러웠다.

자신을 키워준 할아버지를 놓을 수도, 그렇다고 자신이 사랑하는 아내를 버릴 수도 없었다. 

루나드가 해밀턴에 대한 욕심을 접지 않는 한 이런 일은 계속 반복될 것이고 그때마다 엘사는 누군가를 선택해야 했다. 


“그러니까..이제 그만하세요...한 번만...제 말을 들어주세요..제발...”


고개를 숙인 엘사의 눈에선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엘사의 애원에도, 눈물에도 불구하고 루나드는 입을 굳게 닫은 채 그저 엘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보였다.


“..나가.”


“..할아버지, 제발..!..”


한참만에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엘사를 더욱 절망적이게 만들었다. 

함을 치진 않았지만 그는 화를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울고 있는 엘사를 뒤로 한 채 사무실을 떠났다. 마지막 말을 남기고서.


“그 따위 소리나 할 거면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라.”














아그나르가 안나의 집에 도착했을 땐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옷들과 물건들. 

그 혼란 속에서 우두커니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안나. 그 와중에 손에 쥔 핸드폰은 안나가 뭘 하고 있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아그나르는 조심스럽게 안나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안나.”


“…….”


“날 보렴.”


“…….”


“괜찮니?”


아그나르의 말에도 안나는 입을 꾹 다문 채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이미 많이 부은 눈은 안나가 얼마나 울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이혼한 사이였지만 안나는 여전히 엘사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런 딸을 위로해 줄 유일한 사람이었다. 동시에 안나를 이 늪에서 꺼낼 방법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고.


“...안나, 엘사가..우리에게 뭘 남겼더구나.”


그 순간 어떤 말에도 반응하지 않던 안나가 처음으로 아그나르에게 시선을 맞춰왔다. 안나는 마치 엘사는 어디 있는지, 괜찮은지 묻고 있는 듯 보였다. 그는 엘사가 정확히 뭘 하려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전부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안나를 진정시킬 유일한 방법일테니까. 아그나르는 다 이해한다는 듯 딸을 토닥이며 품에 안았다. 안나는 아그나르에게 그게 무엇인지 묻고 싶었지만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짜는 것도 힘들었다. 대신 그의 품속에서 흐느끼는 것이 고작이었다.


“아..빠...엘사..엘사가...”


“...그래, 괜찮단다. 네가 진정되면 다 설명해주마. 다 괜찮을거다, 안나.”


그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충분히 안나가 진정되길 기다렸다. 아그나르는 마지막에 파비가 왜그런 소리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엘사는 자신이 떠나면 안나가 크게 힘들어할 거란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로서 딸의 고통을 기꺼이 대신 짊어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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