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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 결혼 계약서(46)

ㅇㅇ(222.110) 2021.02.27 21:45:42
조회 412 추천 36 댓글 8


“오랜만이네요. 이렇게 둘이 얘기하는 거..”


애써 웃으며 입을 연 안나의 목소리는 어딘가 떨리고 있었다. 엘사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불안한 듯한 목소리를 모를 리 없었다. 오랜만에 본 안나는 어딘가 수척해 보였고 살은 더 빠진 것 같았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엘사는 안나가 자신에게 할 말이 아주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스..에겐 내가 부탁했어요.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


“..네.”


안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노력하고 있었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몸과 손, 그리고 아까부터 쿵쾅대는 심장소리가 엘사에게 들릴까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엘사의 모습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을 떠나 이렇게 살고 있다는 생각에 화도 나는 것 같았다. 나는 당신 때문에 하루하루 고통스러운데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아서.


“얼마 안 있으면 판결 난다면서요. 구속은..피하기 힘들 거라고 하던데..”


“..죗값은 치뤄야죠.”


“...그래요. 당신은 그럴 사람이니까.”


“…….”


안나는 자신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엘사를 바라봤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슬퍼 보이는 눈동자가 제발 아무 말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았다. 엘사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사람. 안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언제나 혼자 생각하고, 혼자 감당하려 하고, 나를 지킨다는 이유로 나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 모르면서 왜 당신이 그런 표정을 짓는지 이해가 안 돼.

내가 당신 떄문에 얼마나 울고, 힘들었는지도 모르면서. 그런 표정을 지으면 내가 잘못한 것 같잖아.


안나는 굳게 닫혀있는 엘사의 입술을 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수없이 이 순간을 상상했으면서도 막상 엘사를 보니 그 동안 해온 다짐들이 너무나 쉽게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단호하게 할 말만 하고 돌아 설거라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지만 그저 엘사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녹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그렇기에 이젠 선택해야 했다.


“엘사, 사실 나 오늘 당신한테 할 말 있어서 왔어요.”


“…….”


안나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엘사에 대한 이 감정이 당분간 사라지지 않겠지만 계속 엘사를 붙잡을 수는 없었다. 엘사의 행동들이 자신을 위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안나가 엘사를 필요로 했을 땐 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이젠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이 사람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 아니, 애초에 사랑하긴 했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런 생각들은 안나를 고통스럽게 했고 지치게 만들었다. 차라리 엘사와 확실하게 끝낸다면 나아질 것 같았다.


“..그거 알아요? 당신은 늘 모든 걸 혼자 감당하려고 해요. 그리고 그게 날 너무 아프게 했어요.”


그 말에 거짓말처럼 엘사의 눈이 안나를 쫓았다.

공원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담담하게 고백하는 안나의 모습은 체념한 것 같기도 했고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이제 더 속이지 않겠다, 떠나지 않겠다 해놓고 뒤로 돌아서면..당신이 없더라구요.”


“...안나.”


“내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아파했는지 모르죠? 당신은 날 지킨다는 명분이었지만 내가 원했던 건..”


안나는 목이 메인 듯 잠시 말을 멈췄다. 엘사는 불안한 눈으로 안나를 쫓고 있었다.

자신의 눈동자가 흔들리는지 안나의 몸이 떨리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저 안나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이 너무 아프지 않길 바랐다.

자신이 아닌 안나에게.


“..내가 원했던 건 당신이었어요, 엘사. 그저...내 옆에서 손을 잡고 날 안아주길 바랐어요. 그게 내가...간절히 원했던 단 하나였어요.”


“…….”


“그런데 이젠 상관없어요. 더 이상 그걸 원하지 않을거니까.”


“안나, 나는..”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어디 아픈 건 아닐까 걱정하다 보니까...내가 죽을 것 같았거든요. 바보같죠?...당신은 이렇게 잘 지내는데.”


“…….”


“사실 이 말만 하고 바로 헤어지려고 했는데..당신 얼굴 보는 순간 수없이 해왔던 다짐들이 다 사라진거 있죠? 나 당신 진짜 좋아했나봐. 이런 사람이 뭐가 좋다고...”


“..안나.”


“당신을 기다리는 매 순간이 너무 고통스러워서..이제 그만 할래요.”


“…….”


“이제 당신 안 기다릴래. 그만...놔줄게요.”


마침내 고개를 돌린 안나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동시에 울고 있었다. 그 모습에 엘사는 숨이 턱턱 막혀오는 것 같았다. 그 동안 자신이 해왔던 일들이 안나에게 고통을 줬다는 생각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따뜻한 눈물이 엘사의 볼을 타고 흘렀지만 감히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천천히 다가와 따뜻하게 자신을 안아준 안나의 품에서 이렇게 일을 망쳐놓은 자신을 저주했다. 왜 안나의 고통을 알아채지 못했을까. 가족을 지킨다는 명분이었는데 정작 그 가족이 흘린 눈물은 보지 못했을까.

나는..


“안녕, 엘사.”


안나의 첫 마디와 끝 마디는 같았다. 장황한 인사가 아닌 많은 것을 담고 있는 담백한 인사였다.

엘사는 조금씩 자신에게서 멀어져 가는 안나를 멍하니 바라봤다. 미세하게 떨리는 몸이 안나를 더 위태롭게 보이게 했다.

엘사의 머리는 생각을 멈춘 것 같았고 쿵쿵대며 뛰는 심장소리가 귓가에 울리고 있었다. 더 이상 이성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저 본능처럼, 당연히 그래야 했던 것처럼 움직였다.

엘사는 이미 안나를 향해 뛰고 있었다.


“안나!!”


미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엘사는 안나의 팔을 잡고 돌려세웠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보니 안나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


“...미안해요, 내가 잘못..”


“아니, 엘사.”


“안나, 한 번만 더 생..”


“너무 늦었어요.”


그 순간 안나의 팔을 잡고 있던 엘사의 손이 떨어졌다. 온 몸에 힘이 풀린 것처럼 몸이 축 늘어지는 것 같았다.

엘사는 자신이 들은 말이 맞는지 스스로를 의심해야 했다. 안나의 마음이 그럴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너무나 단호한 대답에 차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안나는 손을 뻗어 부드럽게 엘사의 눈물을 닦아주며 속삭였다.


내가 당신을 놔줄 수 있게 해줘요.


귓가에 들린 말은 거짓말처럼 천천히 엘사의 몸 곳곳으로 퍼졌다. 늪에 빠진 것처럼 발을 움직일 수도, 숨을 쉴 시도 없었다. 그저 흔들리는 푸른 눈동자가 안나의 손과 얼굴을 쫓고 있었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천천히 사라져가는 햇살을 잡을 수 없었다. 손에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았고 후회해도 너무 늦은 때였다.

해는 지고 어둠이 올 시간이었다.


안나가 떠난 그 자리에서 엘사는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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