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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 결혼 계약서(47)

ㅇㅇ(222.110) 2021.04.18 01:10:02
조회 464 추천 36 댓글 8



엘사를 두고 떠나는 것은 안나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헤어진 그 순간부터 안나는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집안 곳곳에 남아있는 그의 흔적이 안나를 더 괴롭게 했다. 헤어지자고 한 것은 자신이었지만 안나는 후회했다. 매일 밤을 후회와 눈물로 지샜다. 지금이라도 엘사를 붙잡을까 고민하길 수천, 수만 번. 

하지만 안나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만일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언젠가 엘사는 또 떠나가고 그 고통은 오롯이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또다시 고통의 연결고리를 만드느니 차라리 한번에 끊어내는게 나았다.


그렇게 안나는 한동안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독한 감기를 앓는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눈만 뜨면 눈물이 났고 생각만 하면 그리워졌다. 진한 슬픔에 익숙해질 무렵, 안나는 집 안에 남아있던 엘사의 흔적을 조금씩 지우기 시작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부엌과 거실에 남아있던 엘사의 물건들을 정리하고 미처 빨지 못한 채 널브러져 있던 옷들도 정리했다. 하지만 단 하나.

차마 엘사가 쓰던 방엔 들어갈 수 없었다. 문조차 건드리기 무서웠다. 거기마저 치우면 정말 엘사가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아서. 

독한 마음을 먹었음에도 독해지지 못한 자신이 우스웠다.


사람들은 안나를 걱정하며 집으로 찾아오곤 했지만 안나는 사람들이 달갑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놔뒀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다. 그러던 어느 날 안나는 집 밖으로 나와 다시 세상에 마주 섰다. 많은 사람들이 안나의 복귀를 환영했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밝은 얼굴로 웃는 것을 보니 안심하는 눈치였다. 안나는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게 놔두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겼다. 설령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안나가 다시 돌아온 이유는 하나였다.

엘사가 곧 교도소로 갈 예정이었다.











안나와 헤어진 이후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정신을 차리니 파비가 마련해준 숙소의 방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엘사가 가진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어쩌면 안나가 그가 가진 전부였다. 엘사는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몸을 웅크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악몽을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았다. 

안나를 위해서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전부 자신의 오만이었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웠다. 언제부터 안나의 고통은 당연시 되고 있었을까. 자신이 받아야 할 고통, 자신이 해야 할 일 때문에 미처 그 사람의 상처는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엘사의 머릿속을 잠식해갔다. 


전부 나 때문이야. 모든 게 내 탓이야.


엘사는 천천히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눈물이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지만 안나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 두려움에 차마 숨도 쉴 수 없었다.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이 감정에 온 몸의 열이 전부 머리로 향하는 것 같았다. 엘사는 소리없이 오열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2주 뒤, 엘사의 형이 확정되었다.













엘사에 대한 재판은 생각만큼 시끄럽진 않았다. 어쨌든 엘사는 정보를 제공한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니 집행유예가 아니냐는 말이 많았지만 언론을 인식한 탓이었는지 징역 2개월이라는 형이 확정되었다. 파비는 항소를 해야 한다고 했지만 엘사는 원치 않았다. 받아야 할 죗값을 받는 것뿐이라면서 항소를 포기했다.


하지만 루나드는 아니었다. 언론의 관심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내놓으라 하는 변호사들로 변호인단을 꾸렸다. 그가 가진 힘은 구속이 되어도 여전히 유효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꼭 놓치지 않겠다는 검찰의 의지와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는 여론 때문에 재판은 좀처럼 쉽게 끝나지 못했다. 결국 1심 재판에서 루나드는 징역 10년을 선고 받았다. 루나드는 교도소에 가지만 항소를 할 것이라며 다음을 기약했다. 


위즐튼 역시 루나드처럼 죄질이 무거웠지만 반성하는 모습과 고령이라는 이유로 징역 7년이 선고되었다.




“혹시 문제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건강 잘 챙겨야 한다, 엘사.”


“네.”


파비는 엘사의 손을 잡으며 안타까운듯 고개를 저었다. 엘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살도 빠지고 안색도 더 창백해져 있었다. 사람들은 병이 있는게 아닌가 했지만 엘사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오실 때까지 준비 잘 해놓겠습니다.”


“그래요. 부탁할게요, 한스.”


교도소로 떠나기 직전, 파비와 한스는 짧은 시간 동안 엘사를 볼 수 있었다. 명분은 엘사의 건강이 염려되어 확인하고 싶다는 것이었지만 그저 인사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긴 말은 필요 없었다. 그저 건강하게 지내라는 것과 걱정 말라는 말이 전부였다. 마지막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이런 헤어짐은 달갑지 않았다.

그때 시간이 다 되었다며 사람들이 들어왔다. 엘사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게 전부였다. 










사람들을 태운 버스가 경찰서를 떠나자 건너편 자동차의 창문이 올라갔다. 

이제 더 이상 볼 일이 없는 듯 했지만 차는 출발하지 않았다. 운전기사는 그저 묵묵히 기다렸다. 

출발하자는 말이 들릴 때까지.


“..그만 가요.”


그 말과 동시에 운전기사는 차를 출발시키며 노래를 틀었다. 잔잔하게 들리는 노래 사이로 작은 흐느낌이 들리는 것 같았지만 그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그렇게 울지 않을 거라 다짐했지만 전부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무 말 않고 노래를 틀어준 운전기사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안나는 우는 얼굴을 최대한 가리기 위해 선글라스를 썼다. 하지만 이미 터진 눈물을 감추기엔 역부족이었다. 흐르는 눈물을 닦아봐도 소용없었다.

스쳐가는 풍경들을 보면서 멀리서 본 엘사의 모습을 잊으려 애썼다. 더 수척해진 얼굴과 더 마른 것 같은 몸이 안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보자는 마음으로 온 것인데 너무 가벼운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그저 입술을 깨물며 조금이라도 울음을 삼키는게 안나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루나드와 엘사가 수감되자 블랙우드는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물론 엘사가 곧 돌아올 예정이긴 했지만 대표가 공석인 상황에서 밥그릇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대기업인만큼 한순간에 무너지진 않았지만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했다. 

해밀턴과 다른 회사들에게 많은 것을 내주고 주력으로 미는 계열사들만 겨우 건질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아직 블랙우드에겐 많은 것들이 있었고 조금씩 안정을 찾아간다는 것이었다.  한스 역시 회장 대행의 비서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 엘사를 위해 서류를 정리해 매주 교도소로 향했다. 

엘사 역시 한스가 준 서류들을 보며 나가면 준비해야 할 것들과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살폈다. 다른 회사들의 동향은 어떤지, 무엇이 문제인지 질문이 한 가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엘사가 묻지 않은게 단 하나 있었다.


“일단 이건 여기서 마무리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요, 고생했어요.”


“다음주면 출소라니 아쉽네요. 매주 오면서 정 들었는데..”


“그러면 다음 번엔 당신이 여기 오지 그래요? 한스.”


“하하, 사양할게요.”


“..나 때문에 미안해요.”


“아니에요. 뭐, 이제는 다시 제 상사시니까 이 정도는 해드려야죠. 참, 집은 일단 근처 오피스텔로 구했어요.”


“고마워요.”


“아, 그리고..”


“..?..”


“해밀턴의 새 이사로 임명된 분이 안나..”


“한스, 괜찮아요. 그 얘긴 나중에 들어도 될 것 같네요.”


단호하게 말을 자르는 엘사의 모습에 한스는 입을 닫았다. 엘사가 단 한번도 물었던 적이 없는 것. 안나에 대한 소식. 

물론 해밀턴에 대한 소식을 아예 안 들을 수는 없었지만 안나에 관한 일이라면 엘사가 먼저 피했다. 


“제가 실수했네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조심해서 가요.”


엘사는 웃고 있었지만 마음은 복잡했다. 안나의 대한 소식은 가장 듣고 싶지 않은 것들 중에 하나였다. 알고 싶었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알았다가 괜한 미련만 생길까봐, 마음만 약해질 것 같아서 눈과 귀를 닫았다. 이미 높은 곳으로 간 사람이라 생각해야했다. 더 이상 자신과 엮이면 안되는 그런 사람이어야 했다. 

그저 자신과 했던 결혼이 흠이 되지 않길 기도하는게 엘사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엘사는 더 이상 안나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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