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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꼭두각시의 칼 31~32

개구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05.02 22: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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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95.



"공주님, 공주님?!"

안나는 문을 거칠게 두드렸고, 문고리를 돌리려고도 해 보았지만, 문은 고장이 난 듯 문고리는 헛돌아갔다.

'어떡하지?'

안나는 왼손에 감춰진 표식을 보고 생각했다. 점멸? 빙의? 점멸은 말 그대로 순간 이동을 할 뿐이지, 벽을 통과하는 이상적인 능력이 아니었다. 빙의를 하자니, 빙의를 할 동물이 성내엔 없었다. 하물며 방관자의 능력을 썼다가는, 그것도 왕족 앞에서 보였다가는 순식간에 만인의 수도원에 끌려갈 판이었다.

"안나, 나, 나는 괜찮아."

"누가 침입한 건 아니죠?"

"아, 아냐! 악몽을 꿔서 그래."

"그럼 다행이지만, 확인 차 문 좀 열어주시면 안 될까요?"

안나가 문고리에서 손을 떼던 그때, 안나와 엘사의 소리를 듣고 복도 끝 나선형의 계단에서 층계를 오르는 소리가 바삐 들렸다. 공주, 정확히는 한스의 경호대였다.

"무슨 일인가?"

"아니, 경호 도중에 공주님이 비명을 지르셔서 문을 열려는데..."

안나는 자신이 책을 보며 농땡이를 피웠다는 사실을 담요 밑에 숨긴 채, 경호대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아, 처음이라 놀라셨을 겁니다. 공주님은 자주 악몽을 꾸시곤 했죠. 늘 있는 일입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근무하시면 되겠습니다."

예상 밖의 태도에, 안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럼에도 공주일 터인데, 안위를 걱정하지 않는 걸까? 아니면 정말로 악몽을 자주 꿔서 그런 것일까? 경비대들이 툴툴대며 다시 계단을 내려갔고, 복도엔 다시 안나만이 남아있었다.

"...공주님?"

"잠시만, 잠시만."

"괜찮으세요? 핫초코라도 가져다 드릴..."

"그래, 너 하나. 나 하나  두 잔으로."

안나는 부리나케 사브레를 들고 계단을 뛰어내려가 지하실, 부엌으로 가 시녀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마시멜로를 끼얹은 핫초코 두 잔을 만들어 올라왔다. 그러는 사이, 침실 안의 엘사는 얼음들을 일일히 손으로 떼내어 창문 밖으로 던졌다. 쨍강, 쨍강, 마치 새벽의 침입자와 싸우는 칼소리일까, 아니면 공주와 왕자의 싸움일까 하는 유리의 역정에 일부 시민들은 창문을 열고 높은 성의 창문을 엿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얼음으로 보이는 것을 던지는 사람이 누군지 모를 것이다. 경비대도, 시종들도 그것이 일상처럼 느끼며 별 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공주가 행패를 부리는 것이 한 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공주가 마법을 숨기기 위한 발악임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게르다와 허버트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엘사에게 무관심했다.

"공주님, 말하신 대로 핫초코를 타왔습니다만..."


"조금만, 더, 기다려!"


헐떡이는 엘사의 목소리가 열쇳구멍을 통해 새어나왔다. 안나는 두 잔의 컵이 든 접시를 스툴에 놓은 다음, 다시 암흑 시야를 발동시켰다. 암흑 시야 속 엘사는 마치 춤과 난동의 사이의 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무언가 쨍강거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귀끝을 긁었다. 안나는 엘사가 낮에 말했던 성격의 문제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했다. 왜 사람들이 엘사를 욕하는지 어느 정도는 알 것 같았다. 하지만 큰 불평을 하기엔, 신입 수호경에겐 무리였다.


"이제 들어와."


들어오라는 그녀의 부름에, 안나는 허둥지둥 접시를 들고 문을 열었다. 문고리에 새겨진 냉기가 접시에 닿을 만큼 차가웠지만, 때마침 새벽의 바람은 얼음장만큼 차가웠다. 문을 열자, 온통 난장판이 된 침실이 눈에 들어왔다. 침대 위 가지런할 이불들은 온통 휘접어 있었고, 화장대 위의 화장품들은 엎어지거나 깨져 냄새가 자욱했다. 정신이 아찔해질만큼 짙은 향기에 두 눈마저 따끔거릴 정도였다. 때마침 부는 바람이 아니었다면, 안나는 눈물을 쏟아내며 접시를 떨어뜨렸을 것이다. 안나는 그녀의 침대 뒤에 있는 서재에 시선을 주목했다.

그 시끄러운 소란 속에서도, 장서들이 빼곡한 책장만큼은 거의 멀쩡하다시피 했다. 안나는 엘사의 침대 위에 접시를 올려 놓으며, 책들의 제목을 하나씩 훑어보았다. '트롤들의 마법 해독서', '미운 오리새끼', '인어 공주'... 무언가 하나같이 괴짜스러운 책들이었다. 안나는 엘사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조용히 머그잔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문득, 안나는 시종이 해야 할 일을 왜 자신이 하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고마워."

잔을 쥐고 있는 엘사의 손이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그녀의 잔에서 유독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느낌이 들었고, 방 안은 바람이 분 탓인지 쌀쌀했다.

"창문을 닫을게요."

안나는 창문을 닫으려 걸터앉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보다 빠르게, 엘사가 몸을 일으켜 창문을 닫았다. 마치 무언가를 숨기려는 것처럼, 엘사는 애써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것이 어색하다는 것을 아는지,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득했다. 구해줘, 안나는 엘사가 눈빛으로 그렇게 얘기하는 것 같았다. 안나와 엘사는 한참동안, 그들의 코가 향수에 익숙해질 때까지 시선을 마주했다. 이내 엘사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고, 안나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볼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투명하고, 차가운 눈물이었다. 아니, 그녀의 볼을 타고 식은 뜨거운 눈물이었으리라.

'우셨어요?'

이 말 한 마디가 목끝에 머무른다. 안나는 아무말 없이 잠시 동안 엘사의 울음이 멈추길 기다렸다. 3분 뒤, 엘사의 눈시운을 진하게 붉어진 채로 안나와 눈을 마주했다.

"미안해. 악몽을 꾸어서 놀라서 그랬어."

"경호대가 늦게 오고, 시종들은 오지도 않던데요."

"게르다는 잠시 외출 중이고,너도 알잖니, 이 성과 영지는 내게 아니란 것을, 나에겐 모든게 제한되어 있어. 그나마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도 한정되어 있지."

안나는 그것이 잠과, 그녀의 옆 책상위에 놓여진 두꺼운 책으로 독서임을 알아챘다.

"악몽은 주로 어떤 걸 꾸시나요?"

안나의 질문에, 엘사는 자신이 꾸는 꿈의 내용을 안나에게 상세히 털어놓았다. 안나는 자신이 엘사의 창에 궤뚫려 죽었다는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내색을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예지몽일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었다. 방관자의 꿈을 꾸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었다.

"항상 똑같은 꿈이었지만, 이번엔 달랐어. 날 마치...죽이려고 했던 것 같아."

엘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안나가 입었던 것보다 더 두꺼운 털잠옷을, 한여름에 입고 있는 상태였는데도. 안나는 엘사가 보통 겁이 많은 정도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핫초코를 내밀었다.

"일단, 이거 드시고 진정하세요."

안나는 다시금 핫초코를 권했다. 엘사는 안나와 시선을 주고받으며 핫초코 위에 떠 있는 반쯤 녹은 마시멜로를 조금씩 입에 넣었다.

"그래도 난 씻을 수 없는 중죄를 저지른 거나 마찬가지야."

"꿈이라면서요."

"아냐, 그 6개의 지구...특히 러드쇼어 상업 지구는 내가 판단만 잘 했더라면..."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러드...어떠구 지구에서."

안나는 어렴풋이, 그곳이 수해 지구로 변하면서 인외마경이 되었다는 소식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 무언가라도 있는 걸까? 어쩌면 엘사가 실책을 범해서 수해가 덮친 게 아닐까? 엘사는 한 곳에 시선을 두지 못하며 벌벌 떨었다. 그런 엘사의 손을 안나가 꼭 잡았다. 비록 장갑을 끼고 있더라도, 여전히 추위가 그녀를 감싸고 있었다. 안나는 하는 수 없이 복도로 나가 책은 벤치 밑에 숨겨두고, 담요만을 가져와 이미 찬 이불을 꽁꽁 말아 앉아있는 엘사의 위에 담요를 한 번 더 걸쳐주었다.

"추우면 감기 걸리고, 그럼 일을 못하시잖아요. 저한테 이야기도 못 들려주실 테고요."

안나는 너그럽게 말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러드쇼어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엘사는 말하기 싫은 듯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러드쇼어는 아버님이 내게 주신 첫 번째 영지였어. 나는 그곳을 신경써서 관리했지, 지금처럼 세율을 낮추면서 회계인들을 모두 끌어모았고, 더 나아가 린든...지금은 실패했지. 관광 지구로도 만들 계획이었어. 하지만 그곳의 토착 귀족들이 말썽이더구나. 안나, 문제를 내줄게. 시민들에 대한 세금이 줄어들면 부족분을 어디서 충당해야 할까?"

엘사의 퀴즈의 답은 간단했다. 타 지역의 세금을 들여오거나, 아니면 원래 있던 곳의 다른 이에게서 충당하거나. 엘사의 정답은 후자에 가까우리라 안나는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귀족들의 반발이 심했나 보네요."

"그래, 아주 심했어. 자신들의 권위는 하늘이 내리고, 세대에 거쳐 물려받은 건데, 면세의 혜택은 당연한 거라고 하였지."

"면세라... 공주님도 사실상 면세 아닌가요?"

뜻하지 않은 질문에 엘사의 얼굴에 당황이 스쳤지만, 이내 그녀는 불안한 평정심을 유지시켰다.

"하지만 난 지금도, 그때도 지출을 최소화했어. 지금의 성을 보려무나, 감옥같지 않니? 아주 최소한의 인테리어만 손을 보고, 나에게 들어오는 모든 재정은 필요한 만큼만 쓰는데다, 남는 재정은 시민들에게 환원하고 있어. 내게 면세라는 말은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구나."

엘사는 두 손으로 머그잔을 잡고 후후 불며 말을 마쳤다.

"어느날이었지. 러드쇼어에 큰 폭풍우가 몰아쳤어. 러드쇼어는 다른 곳보다 지대가 낮아 하굿둑이 필수불가결한 존재였고, 그 때의 것은 너무 오래되어서 개축이 필요한 상황이었지, 내가 가지고 있는 재정과 시민들의 세금으로 겨우 공사가 이루어 지려 했었지. 하지만..."

엘사는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몸을 다시금 떨었다. 그 날의 일을 기억하기 싫다는 듯, 그녀는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물이 역류해서, 노동자들을 휩쓸고, 도시를 휩쓸었어. 러드쇼어는 한순간에 죽음으로 변하고 말았지. 재정은 바닥이 났지만, 귀족들은 폭풍우가 오자마자 도시를 버리고 도망갔고, 그들이 있던 저택에는 고래잡이란 청부살인 집단이 자리잡았지. 때를 틈타 들어온 새끼 강조개들은 도시 곳곳에 터를 잡고 남은 자들에게 산성 용액을 쏟아부어 죽여댔어. 난 할 수 있는 만큼 시민들을 보호하려 했지만 내게 돌아온 것은... 비난 뿐이었어. 시민들, 그리고 도망간 귀족들 모두 날 욕했지. 14살의 내가 할 수 있었던 게 과연 무엇이었는지, 넌 알 수 있겠니?"

이번엔 안나가 침묵했다. 만약 안나가 14살의 엘사라면, 그 귀족들에게 악을 써대며 욕을 한 뒤, 씩씩대며 울었을 것이다.


"난 그저 곧이곧대로 욕을 받아마셔야 했고, 울음을 참아야 했어. 내 방에 돌아와서도 난 울음을 참고, 이불을 둘러 쓴 채로. 복도에서 수근대는 시종들의 뒷담을 들어야 했지."

"들어야...했다..."


안나는 무심코 공주의 앞에서 한숨을 쉬고 말았다. 이 어찌 가련한 인생을 사는 공주란 말인가? 안나는 차라리 엘사가 린든에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린든은 엘사에게 사치를 보장해주지 않지만, 웃을 자유, 울을 자유, 아무것도 안하고 널브러져 누워 있을 여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괜찮은 것 같아. 하도 많이 듣다 보니까...익숙해졌거든."


어느 정도 식은 핫초코를 호로록 마시면서, 엘사가 한층 푸근해진 목소리로 안나에게 말했다.


"고마워. 내 얘길 들어주어서. 아무도 들어주려 하지 않았는데. 너만은 나를 위해 귀를 기울여 주는구나."


'주종 관계라서요...?'


안나는 무심코 꺼낼 뻔한 말을 목젖에서 다시 삼켜낼 수 있었다. 만약 저 짧은 한 마디를 내뱉었다가는, 엘사가 안나를 울면서 해고할지도 모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대신 안나는 엘사를 위해 다른 말을 생각해 냈다.


"그동안 힘드셨겠어요."

정말, 짧은 말 한 마디였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껏 태연함을 유지하던 엘사의 잔잔했던 호수에 물결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똑, 또독.엘사의 눈에서 눈물이 고여 방울이 되었고, 핫초코 위로 방울방울 떨어졌다.

"어, 어어, 죄송해요. 죄송..."

"아니야, 아니야..."

엘사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 찰나의 순간에, 안나는 엘사의 입가에 지어진 희미한 미소를 엿볼 수 있었다.

"그 말을 해주는 사람도, 네가 처음이야."

엘사가 말했다. 안나는 그것에 놀라워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말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엘사의 눈물은 이어 흐느낌으로 변했고, 한참 동안 안나의 곁에 머물렀다. 그녀의 울음이 그쳤을 때, 시계는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전 근무를 보러 가야.."

안나는 비워진 머그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엘사에게 말했다. 여전히 이불을 둘러싸 얼굴만 내밀고 있는 엘사는 그런 안나가 떠난다는 것에 불안함을 느꼈는지, 표정에 걱정이 역력했다.

"어차피 넌 나를 보호하는 수호경이잖니. 여기 있으렴."

"여긴 제 근무환경이 아닌데..."

안나는 주저했다. 사실, 안나도 나가기 싫은 마음이 없잖아 있었다. 차가웠던 엘사의 방은 촛불들로 인해 다시금 훈훈해졌으며, 안나가 있어야 할 성 내 복도는 추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안나는 한참을 고민하는 척 하다가, 이내 못 이기겠다는 듯 벽 한 구석에 놓여 있는 스툴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이리 가까이 와 주면.... 안 될까?"

엘사가 부탁하자, 안나는 침대 옆으로 스툴을 옮겼다. 그제서야 안심이 된다는 듯, 엘사는 이불을 조금 풀고 침대에 누웠다. 안나도 침대에 눕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안나는 그저 스툴에 앉아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렇게 아침이 되도록 잠을 자는 엘사의 옆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안나의 정신은 아득해졌다. 밤샘근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잠을 자는 사람 옆에서 잠을 자지 말라는 것은 고문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안나는 이러한 점에서 방관자의 표식에 감사해야 한다고 느껴야 했다.

그가 찾으라는 룬이 아니었다면, 며칠 전의 안나의 체력으론 진작 곯아떨어져야 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피곤하긴 해도, 버틸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안나는 방관자의 검은 눈, 그리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엘사의 푸른 눈을 보며 생각했다. 과연 자신의 삶이 이단들의 신이 즐겨할 만큼재미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한 나라의 공주, 엘사에게 자신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의문이 쉽사리 가기도 전에, 엘사의 눈은 다시금 천천히 감기기 시작했고, 그녀의 손은 안나의 손 위로 포개어져 있었다.
동이 틀 때 까지의 짧은 새벽 동안, 엘사는 악몽을 꾸지 않았다.





96.

가면사 메가라 그레이스 양이 귀족들에게 금전적인 후원을 하며 사치를 부린다는 첩보가 들어왔네. 그랜드 마스터로 명하겠네. 메가라 그레이스가 참석하는 가면 무도회에 숨어 들어가 그녀에게서 악덕스러운 귀족들의 명단을 입수하고, 그녀를 암살하게나.
-암살단 아렌델 지부, 그랜드 마스터 케니르.



"때가 되었나..."


나흘 뒤, 암살단 지부의 최고위 직위인 그랜드 마스터 케니르의 밀지를 전한 암살단원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멜리사는 자신이 급조한 가면을 로브 밑으로 씌워 썼다. 그녀가 향할 곳은 보일 여사의 저택이었다. 메가라 그레이스의 단골 손님이자 귀족인 그녀는 귀족의 세금 징수에 극단적인 반대 성향을 띄고 있었고, 의회에서 그녀의 추종자가 많은 상태였다. 또한 왕실을 금전적으로 지원하는 상황에서, 그녀의 입김은 누구보다도 강하게 작용되었다. 불행한 상황이라면, 암살과 심문 대상이 보일 여사가 아닌, 메가라 그레이스란 점이었다. 멜리사는 생각했다.


보일 여사를 직접 죽인다면 반대파가 숙청될 위험이 아주 컸다. 그러기에 인연이 있고 리스트를 가지고 있을 그녀의 지인, 메가라 그레이스에게서 정보를 캐내는 게 중요했다. 멜리사는 드레스가 아닌 퀼로트와, 검은색과 남색이 어우러진 정장을 입은 채로 저택 입구로 향했다. 마스터 어쌔신까지 오른 그녀이기에 체격은 무릇 깨나 힘을 쓰는 남성과 다를 바 없는 체격을 가지고 있었기에, 목소리만 제외한다면 모든 게 완벽한 신사나 다름 없었다. 근처 폐건물의 지붕에 길고양이처럼 손쉽게 오른 그녀는, 주변의 건물과 보일 여사의 저택의 차이점을 알 수 있었다. 죽음과 삶, 그 경계선이 완벽하게 교차하고 있었다. 역병이 창궐한 지금, 거리에는 이제 우는 자들이 눈에 띄게 보일 정도였다. 오히려 린든에서 보았던 우는 자들의 수가 더 적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우는 자들을 제거하는, 다리가 매우 긴 기계 다리를 목마처럼 타면서, 우는 자와 구걸하는 빈민들에게 소이 화살을 쏘아대는 거신 기병들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미친 놈들."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저택은 그녀의 망원경으로 보아도 호화스럽기 그지없었다. 소형 열기구가 저택 주위를 떠다니고 있었고, 온갖 색색의 불꽃들이 펑펑 터지며 한밤중의 모든 이들을 깨웠다. 창문을 열고 보일 여사의 저택을 바라보는 빈민, 그리고 그들을 향해 달려드는 우는 자들과 쥐들, 그들을 잡는 도시의 경비대와 거신 기병들. 마치 뒤틀려진 먹이사슬을 보는 것 같았다. 병에 걸린 쥐 한마리만 저택 안에 들어간다면, 가장 취약할 자들은 여사와 함께 할 귀족들이었고, 이것이 멜리사의 혀를 차게 하는 세상의 아이러니한 이치 중 하나였다. 망원경을 접은 멜리사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달빛에 드리워진 건물의 그림자의 보호 아래에서 쥐 떼, 우는 자들, 그리고 거신 기병을 피해 나아갔다. 두 명의 경비대가 그녀를 발견할 뻔 했지만, 한 사람은 목 뒤를 주먹으로 가격했고, 나머지 한 사람은 티비안식 조르기로 목을 깊게 졸라 기절시켰다. 기절한 몸을 거신 기병과 다른 경비대가 발견하지 못하게 한 건물의 쓰레기통에 옮겨 처박은 그녀는 그들에게서 권총과 총알을 노획했다. 가급적이면 비살상으로 나아가야 했지만, 정체를 들킨다면 최대한 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탈출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로브 안쪽에 따로 만들어진 빈 홀스터에 장전된 고래기름 권총을 끼운 그녀는 어느 새 저택의 입구에 서성이는 경비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주변엔 초대장을 잃어버려 발을 동동 구르며 "내가 보일 여사에게 초대를 받았다니까!"를 연신 외치는 유명한 미술상 번팅, 그리고 방벽 뒤에서 가면을 쓴 채로 담소를 나누다 바람에 초대장이 날아가 잃어버려 넋을 잃은 신원 미상의 세 명의 귀족들도 볼 수 있었다. 


"초대장을 보여주시죠."


입구에서 경비가 그녀를 제지했다. 그녀는 케니르가 밀지에 같이 첨부한, 위조된 보일 여사의 초대장을 경비에게 건넸다. 만약 초대장이 위조란 사실을 걸린다면, 멜리사는 경비가 가진 권총에 즉각 총살될 수도 있었다. 5초 뒤, 멜리사는 가면이 불길해 보인다는 경비의 말을 뒤로 하고 입구를 통과할 수 있었다.


"어머, 당신 가면 좀 봐요. 너무 디테일하지 않아요. 괴물적으로 말이예요."


"불길함을 가져다주는 것 같군, 역병 처럼 말이야."


입구에 다다르자마자, 그녀의 앞에 한 쌍의 귀족 커플이 멜리사, 정확히는 그녀의 가면을 향해 말했다. 물론, 악의는 없을 것이었다. 멜리사는 자신도 가면을 익명으로 메가라에게 요청해 만들어달라 했어야 하나 잠깐 후회했지만, 이미 그녀는 안으로 들어온 상태였다. 지금 다시 나간다면, 경비병의 의심을 살 것이 분명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지나치기 전, 그들의 바지 뒤쪽에 달린 동전 주머니를 악담에 대한 복수 겸 소매치기한 그녀는 일부러 짤랑거리는 동전 주머니의 소리를 내며 자리를 내뺐다. 저택의 앞마당에도 경비는 삼엄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다면 곧바로 울릴, 고래기름으로 전원이 공급되어 웅웅대는 경보기가 한 가운데에 놓여 있었고, 줄을 따라 주유된 고래기름 통을 장착시키는 개폐식 충전구가 눈에 들어왔다. 멜리사는 혹시 몰라 기억해 두기로 했다. 휘발성이고 조금만 잘못 다뤄도 터지기 쉬운 가공된 고래기름이 든 통이었기에, 도망칠 때 주의를 환기시킬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부디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는 경비들을 지난 멜리사는, 곧이어 저택의 문을 열어젖혔다. 문을 열자, 온갖 화려한 불빛들과 팡파르의 조각들이 그녀를 맞이했다. 그녀는 순간 정체가 들킨 줄 알고 로브의 손목에 감춰진 암살검과 권총을 장비하려 했다. 하지만 이내, 그것은 착각에 불과하단 것을 깨달았다. 팡파르는 로비 뿐만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든 펑펑 터지고 있었다. 마치 모든 참석자들의 생일을 한꺼번에 축하하려는 것처럼, 여사의 사치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나중에도 분명 타겟이 될 거예요. 그런 사치를 하는 빌어먹을 쌍년이라면 말이죠.'

벨은 임무를 나서려는 멜리사의 등에 대고 보일 여사를 평가했었다. 그렇다. 당장은 대상이 아니지만, 보일 여사는 머지않은 폭동과 시위가 아렌델을 피로 물들게 할 때도, 반혁명 세력에 붙어 의회를 쥐락 펴락 할 게 분명했다. 그 점을 상기시키며 멜리사는 곧바로 계단에 오르려 했으나, 빛의 벽과 경비가 그녀를 제지했다.
"
죄송합니다. 2층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여사님들의 개인 공간이기도 하고, 공사중이라서요. 부득이한 불편한 점은 이해해 주시리라 믿겠습니다."

'여사들?'


멜리사는 순간, 자신이 착각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보일 여사는 한 명을 지칭하는 게 아니었다. 보일 여사라는 명칭을 달고 있는 여자는 총 세명이었고, 저마다의 성향 또한 다른 것으로 알고 있었다.  리디아 보일, 에스마 보일, 웨에버릴 보일. 그 중 한 사람이 보일 가를 이끌고, 의회를 독점하고 있었다. 하지만 멜리사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특정할 수 없었고, 특정할 시간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메가라 그레이스를 찾아야만 했다. 눈을 조금 돌리자, 특유의 흰색 가면을 쓴 주시자들도 그녀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주시자와 적대 관계인 암살단인 만큼 신중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알, 알겠습니다. 말해줘서 고마워요."


최대한 남성의 목소리로 대답한 그녀는 경비가 더 의심하기 전에 자리를 떴다. 저택에 들어왔으니, 이제 메가라 그레이스를 찾아야 했다. 좋은 점과 나쁜 점이 하나씩 있다면, 메가라 그레이스가 여자란 점이었고, 나쁜 점은 가면을 썼기에 아무도 그녀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물어가며 찾아야 할 수도, 정 아니라면 2층으로 조용히 잠입해 메가라 그레이스를 특정할 단서를 찾아야 했다.  그 때, 그녀의 앞으로 다가오는 한 여성이 있었다. 나방 가면을 쓰고 검은 조끼와 바지를 입은, 각선미로 보아 여성인 듯 싶었다.

"초면인 것 같고, 처음이신 것 같은데... 제 말이 맞죠?"

멜리사는 그녀의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갓 방목한 양처럼 당신의 걸음걸이가 굳어 있네요. 어쩌다가 보일 여사님께 초대를 받으셨어요?"


난감한 질문이었다. 멜리사는 이런 경우에 대비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당장 그녀의 목에 칼을 꽂아넣을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그녀는 가면에 드리워진 어둠 속에서 무엇으로 변명을 해야 할지 고르다가. 벽 한 쪽에 놓여있는 몰리 전쟁 훈장을 발견했다.


"몰리 전쟁 때 참여했습니다."


"아, 그 엄청난 반역 사건의 영웅 중 한 분이셨군요. 생각보다 누추한 가면을 쓰고 계서서 다른 이인줄 알았어요. 당신에게 무례를 저지를 뻔한 저를 용서하시길."
다리를 조금 숙여 조숙한 인사를 그녀가 건넸다.


"그건 그렇고, 이 파티가 열린 이유를 아시나요?"


"아뇨, 모릅니다만..."


"바로, 한 사람을 위해서 열린 거라네요. 누구였더라. 가면사였는데..."


'메가라 그레이스!'


멜리사는 잠자코 이름모를 그녀가 정보를 더 불기를 바라면서 조용히 있었다.


"메가라 그레이스 씨를 기리기 위한 파티라고 하네요. 이번에 끝내주는 가면을 만들었다고 해서 왔는데... 사실 당신을 제외하고 가면을 쓴 사람들은 모두 메가라 씨의 작품을 쓰고 있는지라, 누가 누군지 모르겠네요."

"퍼즐 같군요. 맞춰지지 못하는."

"좋은 비유네요. 우리 음료수 한 잔 같이 하실까요? 제 이름은 화이트예요, 화이트 양이라고 불러주시기 바랄게요."

"네, 네, 화이트 양."

"어머, 이제 보니 당신..."

화이트가 입을 채 열기 전에, 멜리사는 그녀의 입을 막고 구석으로 끌고 갔다.

"쉿, 무슨 말 하려는지 압니다. 하지만 몰리 전쟁에 참여한 것은 맞아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따. 정확히는 말단 암살단원이었던 멜리사가 최전방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는 지휘관이 템플러라는 첩보를 입수하였고, 그의 휘하 병사를 기절시켜 옷을 빼앗아 입은 다음, 포화와 총성이 오가는 전쟁터 한복판에서 조금은 유능히 병사들을 지휘했던 그의 목을 암살검으로 목과 가슴을 찔러 죽였다. 결국, 그 작은 전투에선 지휘관이 죽음으로써 아렌델 군은 패배를 얻었지만, 결과적으로 몰리 반란은 막아낸 셈이었고, 목적은 충분히 이뤄낸 셈이었다.


"정말 궁금투성이신 분이군요. 우리 같이 오늘 밤을 적셔보는 건 어때요?"


"아뇨, 죄송합니다만 사양하겠습니다. 찾는 사람이 있어서 말인데..."


"제가 도와드릴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일단, 가면부터 바꾸는 건 어때요?"


화이트 양이 멜리사에게 고래 머리를 한 가면 하나를 건네 주었다. 너무 사실적이라 꺼림직했고, 고래의 살점에 머리를  둘러쓰는 기분이었지만, 은밀하게 움직이려면 화이트 양의 말을 따르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게 멜리사의 판단이었다. 잠식 고개를 돌려 얼기설기 엮었던 가면을 벗자마자 고래 가면을 뒤집어 쓴 멜리사는, 화이트 양이 자신의 얼굴을 보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음, 한결 나아 보여요. 이제야 파티의 일원처럼 보이네요. 자, 그래서 누굴 찾으시죠?"

"메가라 그레이스 양에게 볼 일이 있는데, 당신 말대로 찾기 어려워 보이네요. 하나같이 가면투성이니 원..."


멜리사가 분수대에서 뿜어나오는 자색 음료수를 마시며 한숨을 쉬었다. 특유의 시큼함이 깃든 서코노스 산 포도로 만들어진 음료수인 듯 했다.


"메가라 그레이스라면 아마 2층에 있지 않을까요? 보일 가의 여사들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그들의 방에서 밀회를 즐기고 있을 지도 모르겠네요. 아니면 한 명 한 명에게 물어봐 단서를 찾는게 나을 지도요. 근데 무슨 일인데 그렇게까지..."


"새 가면을 의뢰하려고 합니다. 당신들이 그러는 것처럼, 보셨잖아요. 제 가면이 심미안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대충 거짓말로 이유를 둘러댄 멜리사가 고개를 쭉 빼고 주변을 살폈다. 그녀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의심은 곧 시간 문제였다. 2층으로 가는 계단은 빛의 벽으로 가로막혀 있고, 만약 그쪽으로 움직인다면 경비의 총에 맞다 빛의 벽에서 뿜어나온 고압 전파에 맞아 한 포대의 잿더미로 남아버릴 게 뻔했다. 그렇다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물어보는 건 너무나도 시간 낭비였다.

"나중에 의뢰하는 건 어떨까요?"

화이트 양이 묻자 멜리사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아니면 안 됩니다. 머지않아 카르나카1)로 떠나야 할 일이 있고, 거기서 그녀가 만든 가면을 자랑하고 싶거든요."

멜리사는 하는 수 없이, 가장 원초적인 방법을 택해야 했다.

"잘 마셨어요, 화이트 양, 나중에 만난다면 여기가 아니라 카페에서 얘기를 나눌 수 있다면 좋겠네요."

"카페 어디요?"

"글쎄요, 아마... 르 포로코프?2)"

"르 포로코프라... 좋아요, 언젠가 그곳에서 다시 만나 얘기를 할 수 있기를, 신비로운 여신사분."


다시금 인사를 건네 작별을 고한 화이트는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멜리사는 화이트가 몸을 돌리자마자 통로를 빠져나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의아하게 쳐다보는 경비병을 무시하고 그녀는 초대장이 품 안에 접혀져 간직되어 있는지 다시금 확인한 다음, 입구로 다시 나간 뒤 근처의 폐건물로 들어가 옥탑방으로 올라갔다. 다행스럽게도 건물을 점령한 우는 자들은 없었다. 만약 그들 중 한명이라도 있다가는, 그녀의 권총이 불을 뿜어야 했고, 모든 일이 허사로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운 좋게도, 폐건물은 저택과 밀접하게 붙어 있었고, 도약한다면 창틀 내지 차양에 매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2층에 수없이 나 있는 창문들 중 어느 곳이 열려 있는지는 보일 여사와 경비대들만 알 것이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은 그녀는, 최대한 옥탑방의 벽에 붙어 달릴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이내 전력을 다해 뛴 그녀는 창틀을 박차고 날카로운 쇠창살로 이루어진 저택의 벽을 밑으로 둔 채 허공을 뛰어넘었다. 2초 뒤, 간신히 창틀에 매달린 그녀는 하마터면 경비에게 들킬 뻔 했지만, 경비는 그저 우는 자의 울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어온 것이라 생각해 이내 어둠 속의 멜리사를 확인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창틀에 매달린 멜리사는  손을 뻗어 창문을 열려고 시도했다. 타캉타캉, 불행하게도, 첫 번째 창문은 잠겨 있었고, 멜리사는 두 번의 똑같은 행동을 반복해서야 네 번째 창문이 열려 있음을 확인하고 고개를 빼꼼 내밀어 안쪽을 확인했다. 때마침 경비가 창가를 지나려 했고, 찰나의 순간에 멜리사는 고개를 숙여 그의 시선을 피했다. 경비의 발걸음이 멀어지자, 천천히 창문을 넘어 2층으로 들어온 멜리사는 천천히 경비의 뒤로 몸을 숙여 따라간 뒤, 그가 눈치채기 전에 재빠르게 목을 졸랐다. 약 10초 뒤, 축 늘어진 그의 몸을 근처 창고에 처박은 그녀는 다시금 발소리를 죽이기 위해 몸을 숙이며 움직였다. 발소리와 말소리 하나에 모든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담배와 위스키 좀 모아둘까?"

"그럴까? 요즘 물가가 많이 올랐다던데."

경비들의 대화소리가 가까워지자, 멜리사는 근처의 방으로 뛰어들었다. 다행히도 빈 방이었지만, 하필이면 화장실이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변기에서 흘러나오는 악취를 참으며 문 가까이에 귀를 댄 멜리사는, 곧 두 경비 중 한명이 볼일을 보려고 화장실로 들어오려는 낌새를 눈치챘다.

'큰일났다.'

순간, 멜리사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한 마디였다. 멜리사는 곧바로 몸이 시키는 대로 했다. 경비가 문을 열려 하지 곧바로 발로 차 그를 넘어뜨렸고, 무슨 일인가 싶어 접근하는 또 다른 경비의 목에 암살검을 사출시켰다. 검의 끝이 그의 척추 신경을 끊어버린 것을 느낀 그녀는, 욕을 뇌까리며 일어나려는 경비의 입에 권총을 물렸다. 잠시 뒤, 팡파르 소리와 함께 방아쇠가 당겨졌고, 그의 머리도 반쯤 날아갔다.

"좆됬네, 씨발."

멜리사가 욕을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시체를 화장실에 옮긴 다음, 흘러나온 뇌 조가리들을 집어 변기통이 넣고 물을 내렸다. 영 꺼림직해 손까지 씻어낸 그녀는 다시 화장실 밖으로 나와 천천히 복도를 나아갔다. 잠시 뒤, 배선 장치를 발견한 그녀는 그것이 경보기가 되었건 빛의 벽이 되었건 둘 중 하나를 해제하는 장치라고 생각해 배선 장치를 꺼내들었다. 리와이어 패널을 열고 배선 장치를 장착시킨 그녀는 이내 스위치를 눌렀다.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둘 중 하나는 무언의 변화가 이루어졌을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멜리사는 여전히 몸을 숙인 채 메가라 그레이스가 몸을 의탁하고 있을 법한 방의 열쇳구멍을 통해 안을 살폈다. 이 과정에서 추가로 두 명의 경비를 목을 조르고 창밖으로 던지는 등의 과정이 있었다. 하지만 좀처럼 그녀는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다시 1층으로 옮겨가야 되나.'

이렇게 생각한 멜리사는, 사실 정보가 애초에 잘못 되었는가도 싶은 의심이 마음 한켠에 새싹이 틔워진 것을 느꼈다. 진실은 없다. 모든것이 허용된다. 암살단의 신조이자, 멜리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맹신의 문구였다. 그리고 그 진실의 행방이 묘연한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그녀에게서 약 두 블록 떨어진 곳에서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재빠르게 몸을 모퉁이 뒤로 숨긴 멜리사는 접이식 망원경으로 동태를 살폈다.

"...글쎄 이번에 첩보대장이 저에게 사귀자는 프러포즈를 하지 뭐예요?"

붉은 장미장식이 어우러진  가면, 그리고 가면에  맞는 붉은 옷을 입고 나온 여자가 뒤따르는 여성에게 말했다. 그녀는 검은 고양이 가면을 하고 있었다.


"흠, 하이람 버로스 첩보대장도 당신의 가면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군요. 조만간 하나 만들어주지 않겠어요? 만약 만들어 드린다면, 제가 당신의 후원자가 되어드릴수도 있답니다."

"여부가 있겠나요. 더할 영광이죠."

'메가라 그레이스!'

멜리사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첩보에 따라 암살, 혹은 심문의 대상인 메가라가 바로 망원경 코앞에 있었다.

"그럼 전 잠시 내려갔다 올테니, 더 머물도록 해요. 손님들은 언제나 넘치는 법, 전 그물을 끌고오도록 하는 어부처럼요."

"예, 예, 조심히 갔다오십셔..."

계단을 타고 내려가 모습을 감춘 보일 여사의 뒤로 고양이 가면이 연신 굽신거렸다. 잠시 뒤, 아무런 소란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확인한 멜리사는 자신의 배선장치가 경보기를 해제시켰음을 깨달았다. 만약 빛의 벽을 건들었다면 보일 여사 중 한명은 꼼짝없이 불타 죽었을 것이고, 저택의 경비는 한층 더 강화되어 임무는 실패로 끝났을 것이 분명했다.

"후아, 더워 죽겠네..."


그리고, 비로소 가면을 벗어 땀에 젖은 메가라의 모습은, 밀지에서 나온 초상화 속의 그녀와 일치했다. 그녀는 멜리사가 근처에 있는 걸 모르는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멜리사는 손목 밑의 암살검을 사출한 다음, 천천히 그녀가 들어간 방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문을 열려고 문고리를 돌리려 했지만, 고리는 돌아가지 않았다. 안쪽에서 잠군 듯 했다. 정체가 들킨건가 싶어 멜리사는 열쇠구멍으로 안을 들여다 보았지만, 그건 아니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담뱃대를 뻐끔거리며 보일 여사를 기다릴 메가라의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문 틈새에 암살검을 넣고, 잠시 뒤 힘껏 비틀어 열은 멜리사는 메가라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그녀의 안면에 주먹을 날려 기절하게 만들었다. 침대에 힘없이 쓰러진 그녀를 보고, 멜리사는 재빠르게 문을 닫고 문고리 밑으로 의자를 밀어넣었다.






1):제국 남부에 위치한 서코노스의 수도

2):1686년 개업한 프랑스 최초의 카페이자,볼테르, 루소 등의 유명인이 단골이었으며 현재도 운영중인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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