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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 결혼 계약서(48)

ㅇㅇ(222.110) 2021.05.03 23:11:08
조회 466 추천 37 댓글 9



꿈이었다. 아니, 꿈이어야만 했다. 깜깜한 어둠 사이로 희미하게 빛나는 길을 따라 무작정 걷고 또 걸었다. 친구도, 가족도 아무도 없이 오직 홀로 나아갈 뿐이었다. 끝없는 고독과 외로움은 가끔은 고통으로, 분노로 바뀌곤 했다. 그렇게 하염없이 걷다 보면 절망 앞에 무릎을 꿇는 듯 했다. 어디로 가는지, 자신이 누구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기나긴 여정에 지쳐 쓰러질 때쯤이면 누군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

지만 눈을 뜰 기력조차 없는 엘사는 그게 누구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저 누군가의 손길을 느끼며 정신을 잃는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헉..헉..”


엘사는 거친 숨을 몰아 쉬며 눈을 떴다. 억지로 고개를 들어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제야 옷이 젖어 있을 정도로 식은땀을 흘렸다는 걸 알았다. 벌써 며칠 째 계속 꾸는 악몽은 엘사를 고통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새벽 4시 48분.

땀으로 젖은 얼굴을 몇번 쓸곤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이렇게 악몽에서 겨우 벗어난 날엔 다시 잠을 잘 수 없었다. 엘사는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그리고 늘 하던 대로 뉴스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경제, 사회, 문화 등등 가리지 않고 다 읽는 엘사였지만 읽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다. 


‘해밀턴, 위기를 딛고 다시 승승장구’

‘아그나르 해밀턴, 투명한 경영을 약속.’

‘블랙우드가 추락한 지금, 해밀턴의 세상’

‘안나 해밀턴, 해밀턴의 차기 후계로?’


한참동안 뉴스 헤드라인만 보던 엘사는 습관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해밀턴이나 안나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마다 최대한 보지 않으려 했지만 피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어떤 날은 호기심에, 어떤 날은 다른 누군가로부터, 또 어떤 날은 라디오에서 들려오곤 했다. 엘사는 긴 한숨을 쉬며 인터넷 창을 닫았다. 더 이상 해밀턴에 관한 얘기는 듣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엘사와 블랙우드에게 중요한 날이었다. 블랙우드에서의 새로운 첫 날이었다.











아그나르는 오랜만에 딸과 함께하는 점심이 기뻤지만 엘사와 헤어진 이후 힘들어하는 딸의 모습은 그의 걱정거리였다. 회사에선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안나에게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 그의 이런 생각에 맞추어 안나에게 선 자리가 들어왔다.

상대의 평판도 괜찮고 무엇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안나가 이 상황을 이겨내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아그나르는 앞에 놓여있는 와인을 마시며 안나에게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고민이었다.


“아빠, 그 표정..”


“어?..나?”


“항상 저한테 하실 말씀 있을 때면 그 표정 지으시잖아요.”


안나는 이미 익숙하다는 듯 샐러드를 마저 입에 넣고 얌전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아그나르는 헛기침을 하더니 와인 잔을 내려놓고 안나를 바라봤다. 이렇게 된 이상 사실대로 털어놓는 수밖에 없었다.


“흠흠, 어디까지나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 걸 알아다오.”


“대체 뭐길래 이렇게까지 분위기를 잡으실까?”


“그 동안 네가 많이 힘들어 한 거 안다. 쉽지 않았겠지. 지금도 그럴테고..”


“..아빠, 그 얘기는..”


“상담도 싫다고 하니 더 이상 권유하지도 못하고 지금까지 이렇게 지내왔지.”


“…….”


“그래서 말인데 마침 너에게 선 자리가 들어왔는데 한번 보는 게 어떨까 싶구나. 어쩌면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겠지.”


“..저는..”


안나는 거절하려 했으나 차마 입 밖으로 내진 못했다. 자신을 보는 아그나르의 표정에서 그가 얼마나 안나를 걱정하고 있는지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대로 안나는 여전히 힘들었고 불안정했다. 일을 할 때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있기 일쑤였다. 

어떤 날은 창문 너머로 엘사가 보이는 날도 있었고 어떤 날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웃는 얼굴이, 조금 낮은 목소리가 너무나 생생하게 들렸지만 그것들은 금방 먼지처럼 사라지고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렇게 며칠, 몇 달이 지나니 안나는 자신이 점점 미쳐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안나의 상태를 아그나르가 모를 리 없었다.


“안나, 한번 나가봤으면 좋겠구나. 내가 아니라 널 위해서.”













정신 없는 하루였다. 회장 대행으로 업무를 시작하자마자 서류가 순식간에 산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거기에 계속 이어지는 회의와 담당자들과의 만남. 루나드의 빈자리를 엘사가 혼자 채우려니 여간 버거운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한스나 파비가 도와준다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하아...”


“피곤하시죠?”


“그러게요.”


“오늘은 이것만 하면 끝나는데 마무리 하고 한잔 할까요? 안 그래도 오늘 비서실 회식인데.”


은근히 기대하는 듯한 한스의 말에 엘사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쉬고 싶었다. 정신없이 몰아치는 일 덕분에 최소한 몇 시간 동안 안나에 대한 것들을 잊을 수 있었다. 물론 문득문득 생각날 때도 있었지만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었다.


“미안하지만 난 그냥 집에 가서 쉴게요.”


“에이, 그러지 말고 가요. 거기다 오늘 첫 날인데.”


“첫 날이니까 쉬는거죠. 다음에 한잔 해요.”


단호한 거절에 한스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해하는 엘사를 보니 더 이상 권유하고 싶지도 않았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그는 마무리 된 서류 몇 개를 들고 대신 마음이 바뀌면 알려달라는 말과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엘사는 손을 흔들며 한스를 배웅하고 쇼파에 몸을 뉘었다. 그가 떠나자마자 찾아온 고요함의 파도가 엘사를 덮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안나의 기억들이 하나 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안나. 안나 해밀턴.


엘사는 마른 세수를 하며 다시 일로 돌아가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귓가에 안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고 눈만 감으면 붉은 갈색 머리가 아른거렸다. 부드러웠던 손과 따스했던 체온이 느껴지는 것 같았지만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미 돌아선 안나에게 엘사가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저 멀리서나마 행복하길 빌어주는 게 고작이었다. 분명 이게 옳은 일이었다.


“..안나..”


조심스럽게 불러본 이름은 흔적도 없이 산산이 부서졌다. 안나는 더 이상 엘사의 곁에 없었다. 

이 사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안나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엘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켓을 집어 들었다. 

도저히 혼자 있을 수 없었다.











퇴근 후의 저녁. 분위기 있는 호텔 레스토랑에서 좋은 음식과 값비싼 와인까지.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음식은 맛있었고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심지어 맞은 편에 앉아있는 상대마저 완벽했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친절했고,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도 잘 들어주었다. 아주 멋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안나의 눈은 다른 곳을 쫓고 있었다.


“이름을 불러도 될까요?”


“네..네?”


갑작스러운 말에 안나는 말을 더듬으며 미안한듯 미소 지었다. 바보같이 엉뚱한 생각을 하다 그의 말을 듣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하지만 상대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꺼냈다.


“이름으로 불러도 괜찮은지 물어봤어요. 오늘 굉장히 신경쓰이는 일이 있으신가봐요.”


“네?..아..죄송해요...”


“뭘 사과까지 해요. 농담이에요. 그럼 이제 이름으로 불러도 될까요?”


“아..물론이죠. 부디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스웨인씨.”


“저도 이름으로 불리고 싶은데요, 안나.”


“..허니마린.”


“이제야 좀 낫네요. 저는 우리가 좀 더 친해지길 바라요.”


허니마린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그제서야 만족한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허니마린 스웨인. 블랙우드가 없어진 후 해밀턴을 바로 밑에서 추격해오는 신생 기업의 후계자였다. 그리고 동시에 오늘 안나의 선 상대이기도 했다. 

지금은 그저 밥을 같이 먹는다는 명분이었지만 알 사람 들은 다들 알고 있었다. 오늘의 만남을 기점으로 해밀턴과 스웨인이 손을 잡을 수도 있다는 것을. 스웨인과 해밀턴 모두의 입장에서도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물론이에요, 스웨인은 해밀턴의 가장 큰 사업 파트너..”


“아뇨.”


“네?”


“저는 해밀턴이 아니라 안나라는 사람과 친해지고 싶어요.”


예상치 못한 대답에 안나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처음엔 장난이 아닐까 했지만 허니마린은 진심인 것 같았다. 웃고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때보다 거침없이 다가와 닫혀있는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은 할 수 있다는 듯, 안나에게 문을 열어달라 요청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스웨인씨..아니, 허니마린. 저는…”


“안나, 그냥 솔직하게 말할게요. 제가 돌려 말하는 걸 못해서요.”


“…….”


“저와 진지하게 만나보실래요? 전 당신에게 호감이 가거든요.”


“..저는..”


“지금 대답 안 해도 괜찮아요. 하지만 진지하게 고민해봤으면 좋겠어요. 만약 저와 만난다면 한 가지는 약속할 수 있어요. 언제나 솔직할 거란 거.”


“…….”


“절대 당신을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거에요. 한번 생각해봐요, 안나.”


대체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일까. 안나는 갑작스러운 고백보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허니마린의 태도가 놀라웠다. 그는 꾸미기 보다는 직설적으로 말하는 사람이었고 거짓말을 할 것 같은 사람도 아니었다. 어쩌면 안나가 바라는 이상적인 상대가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솔직한 모습이 그 동안 안나가 꼭꼭 숨겨두었던 작은 상자를 연 것 같았다. 그토록 잊으려 노력했던 모든 것들. 거짓말에 지쳐 안나가 먼저 떠나야 했던 이유.


엘사.


안나는 거절 대신 입을 닫았다. 조금이라도 말을 꺼냈다간 엘사에 관한 모든 기억과 감정들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허니마린 역시 심상치 않은 모습을 느꼈는지 부담을 줄 생각은 없다면서 천천히 생각해보라는 말과 함께 안나를 배려했다.


“당신을 곤란하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저 한번 생각해봐요.”


“…….”


안나는 애써 미소를 짓고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봤다. 아주 조그마한 일에도 엘사의 생각을 떨칠 수 없는 자신이 한심스러웠고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미안했다. 자신의 마음은 아직도 엘사를 그리워했고 안나는 이런 감정을 무시하기 위해 상자 속에 꼭꼭 숨겨두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으니까. 이것이 그 동안 안나가 터득한 방법이었다.


어두운 창 너머로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안나는 엘사의 모습을 그려봤다. 한쪽으로 땋은 백금발에 흰 피부, 자신을 향해 웃는 파란 눈동자, 검은 수트에 흰 셔츠를 입은 엘사의 모습이 창 너머로 보이는 것 같았다. 언제나 자신이 기억하는 그 모습 그대로인 엘사. 이 순간에서조차 점점 더 선명해지는 엘사의 모습은 안나를 더 한심스럽게 만들었다.

창문에 그려진 엘사는 천천히 손을 뻗어 안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마침내 안나의 어깨에 손이 닿았을 때 너무나 익숙한 낮은 목소리가 안나의 귓가에 들렸다.


“안녕, 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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