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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 결혼 계약서(49)

ㅇㅇ(222.110) 2021.05.16 22:43:40
조회 439 추천 36 댓글 8



유리에 비친 엘사는 마치 다른 세상에서 나와 안나에게 나타난 것 같았다.

어깨에 올려져 있는 서늘한 손과 다정한 음성이 그토록 그리던 사람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환영에 지나지 않았던 엘사는 현실이 되어 다가왔다.


“오랜만이네요, 안나.”


힘주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안나는 온 몸이 굳어버린 듯 움직일 수 없었다.

야속하게도 창문에 비친 푸른 눈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부지런히 녹색 눈동자를 쫓고 있었다.

분명 기다렸던 순간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피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엘사를 보면 무슨 말을 할까, 수천 번, 수만 번을 고민했다.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네고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을거라 생각했지만 그건 자만이었다. 고개를 돌려 엘사는 보는 순간 하고 싶은 말이, 흘러 넘치는 감정이 너무 많아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었다.


“잘 지냈어요?”


다시 한번 다정하게 물어오는 말에 안나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안나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심장은 쿵쾅거리며 빠르게 뛰고 있었고 눈에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몸이 떨림이 점점 심해질 때쯤 엘사의 손이 어깨에서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쯤 하시죠.”


허니마린은 불쾌한듯 엘사의 손목을 붙잡고 안나에게서 떼어냈다. 소개는 하지 않았지만 그는 눈 앞에 이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백금발에 흰 피부와 푸른 눈동자를 가진 사람은 흔치 않았다. 거기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안나를 보니 확신이 들었다.


“보아하니 그쪽이 엘사 블랙우드씨겠군요.”


“..절 아시나요?”


“허니마린 스웨인입니다. 사업하면서 블랙우드를 모르기는 힘들죠. 그보다..”


“...?..”


“안나가 불편해하는 것 같은데 그만 가주시죠.”


날 선 목소리에 엘사는 인상을 찌푸렸다. 허니마린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분하게도 그의 말이 옳았다. 안나는 자신을 반기는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못 볼 사람을 봤다는 듯 많이 놀란 것 같았다. 그리고 애초에 두 사람이 먼저 만나고 있었으니 방해꾼은 오히려 자신이었다.

엘사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한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실수했네요. 미처 생각 못했어요. 미안해요, 안나.”


엘사는 허니마린이 아닌 안나를 보며 말했다. 사과 받아야 할 사람이 안나이기도 했지만 허니마린과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미묘하게 거슬리는 것이 엘사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그럼 이제 그만 가주시죠. 저희가 아직 식사가 덜 끝나서요.”


“초면 치고는 말이 좀 험하시네요, 스웨인씨.”


“그쪽이 먼저 무례하게 나오고 있지 않나요?”


“저는 당신한테..”


“..그만.”


점점 높아지는 언성 사이로 들린 안나의 말은 순식간에 두 사람의 입을 닫게 만들었다.

안나는 더 이상 놀란 것 같지도, 울 것 같지도 않았다. 어느정도 진정이 된 모양인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 가운데 섰다.


“둘 다 그만해요.”


“하지만 안나, 저 사람 때문에 당신이..”


“이제 괜찮아요, 걱정 말아요.”


안나의 단호한 모습에 허니마린은 더 이상 나서지 않았다. 안나는 엘사에게 한발자국 가까이 다가갔다. 몇 달 만에 보는 얼굴이 녹색 눈동자에 가득 담겼다. 변함없이 늘 생각했던 그대로였지만 어딘가 수척해보이는 모습에 마음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안나.”


엘사가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렀지만 안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더 이상 방해하지 말라는 듯이.


“그만해요, 엘사. 미안한데 난 이 사람과 저녁을 먹는 중이었어요. 그러니까 그만 가줘요.”


“...미안..해요. 그냥 잘 지내는지 묻고 싶었어요.”


“사과는 필요없어요. 잘 지내니까 그만 가요.”


“…….”


“가줘요. 엘사.”


조금의 틈도 없이 단호히 잘라내는 안나의 태도에 엘사는 목을 쓸며 뒤로 물러났다.

사과조차 받고 싶어하지 않는 안나가 야속했지만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무례한지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말을 건 것이 잘못이었다.

그냥 모른 척 지나갔어야 했는데.

엘사는 두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곧장 자리를 떠났다.


엘사가 떠나자마자 안나는 힘이 풀린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겨우 의자에 앉았다.

허니마린이 괜찮은지 물었지만 거기에 대답할 힘조차 없었다.


“안나, 안색이..”


“..괜찮아요. 미안한데 오늘은 이만 가봐야겠네요.”


“데려다 줄게요. 많이 놀란 것 같은데 일단 제 차로..”


“아뇨, 그냥 알아서 갈게요. 미안해요. 다음에 만나요.”


안나의 거절에 허니마린은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에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허니마린은 알겠다는 듯 겉옷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힘들어보이는 안나가 괜히 먼저 일어나는 것보단 자신이 먼저 떠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래요. 먼저 가볼게요. 집에 들어가면 꼭 연락줘요.”


“..네. 미안해요.”


“미안하면 다음에 차라도 한잔 해요. 오늘 제대로 못 마셨으니까.”


멋쩍은 웃음과 함께 허니마린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레스토랑을 나섰다. 허니마린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그제야 안나는 앞에 놓여있던 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아직도 두근거리는 심장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떨리는 몸이 얼마나 놀랐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안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진정하려 애썼다. 허니마린도 이런 자신의 상태를 짐작하고 자리를 비켜준거라 확신했다. 엘사가 나타난 이후 안나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자신의 데이트 상대를 바로 돌려보낼 정도로 엘사는 안나 안에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엘사.

엘사 블랙우드.


몇 번이나 되뇌며 가까스로 눈을 떴을 때야 서서히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도시의 야경과 주변의 소음, 비어있는 의자, 그리고 바보같이 떨고있는 자신.

안나는 터져 나오는 실소에 고개를 저었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이 상처받고 힘들어 했는데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그걸 잊기 위해 오늘도 이렇게 나왔던 것인데 엘사는 거짓말처럼 자신의 눈 앞에 나타났다. 그 와중에도 많이 야윈 엘사의 모습에 걱정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그 사람은 분명 잘 지내고 있었을텐데. 그랬으니 자신의 앞에 나타나 그렇게 태연하게 말을 꺼냈을텐데.

아직 마음은 바보처럼 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엘사를 놓치 못하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던 안나는 앞에 놓인 작은 초가 꺼질 때쯤 자리를 떠났다.













안나를 만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처음엔 그저 한스를 찾아 사원들과 함께 한 잔 할 생각이었다. 마침 호텔 레스토랑에 식사권이 생겨 갔다는 말에 따라 간 것이 화근이었을까. 레스토랑에 들어선 순간 알 수 있었다. 창가에 앉아있는 갈색 머리의 그 사람을.

그 뒤부터는 잘 생각이 나질 않았다. 마치 본능에 따라 당연히 그래야 했던 것처럼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그토록 피하고 싶어 했던 그 사람이 마침내 눈에 가득 담기자 느낄 수 있었다.

정말 당신이구나.

그 동안 방황하던 마음이 안나에게 닿자마자 햇살을 만난 눈처럼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안나는 엘사에게 그런 존재였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하지만 자신을 보던 안나의 표정은 그 동안 엘사가 생각해왔던 것이 아니었다. 안나는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슬픈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눈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지만 단호한 태도는 그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 동안 자신이 안나에게 줬던 상처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모든 것은 안나를 위한다는 변명이었지만 아니었다.

어쩌면 자신을 위한 변명이었을 수도 있고 안나는 언제까지나 이해해 줄거라는 오만이었을지도 모른다.


거기다 안나가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안나와 엘사는 이혼했고 엘사는 감옥까지 간 적이 있으니 누가 봐도 엘사는 안나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아직 다 지우지 못한 미련이 마음 속 깊이 남아 안나라는 사람을 붙잡고 있었다. 이성적으로는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은 아직 안나를 보낼 준비를 하지 못했다.


엘사는 호텔 밖으로 나와 멍하니 서 있었다.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로 아무 생각없이 서 있었다.

마치 가야 할 곳을 잃은 새처럼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자신을 보던 안나의 눈빛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냥 눈물이 났다. 자신도 모르게 볼을 타고 떨어지는 눈물에 닦을 생각도 나지 않았다. 엘사는 아주 천천히 그 자리에 웅크려 앉았다.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몇몇 사람들이 엘사를 이상하게 보고 지나쳤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엘사의 눈동자는 점점 빛을 잃어가는 것 같았다.


“..왜 이러고 있어요.”


그때 누군가 엘사의 앞에 다가와 말했다. 검은 구두가 눈앞에 보이자 엘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처음엔 눈물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안..나..”


속삭임에 가까운 작은 목소리에 안나가 몸을 낮춰 엘사에게 시선을 맞춰왔다. 오랜만에 서로 마주한 눈동자가 마치 바다처럼 느껴졌다.

푸른 색과 녹색의 경계에 있는 바다.

안나는 손을 뻗어 엘사의 눈물을 닦았다.


“아까 물어봤죠? 잘 지내냐고. 나 잘 못 지내요.”


“…….”


“울고 싶은 건 난데 왜 당신이 울어요.”


안나의 말은 답을 원치 않는 질문 같았다. 엘사는 목이 메어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목소리를 쥐어짜내 대답하려 했지만 안나는 상관 없다는 듯 차가운 엘사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리고 아무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엘사는 안나가 이끄는 대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자신이 아닌 안나가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지금 엘사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같이 걸어갔지만 대화는 없었다. 가끔 들리는 상대의 숨소리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손은 놓지 않았다.

차가운 엘사의 손과 따뜻한 안나의 손은 서로를 꼭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두 사람은 호텔방에서 서로를 마주보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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