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한쪽만 모르는 근친인 것도 좋지 않냐 中앱에서 작성

ㅇㅇ(175.125) 2021.07.06 23:02:26
조회 1085 추천 48 댓글 13

한쪽만 모르는 근친인 것도 좋지 않냐 上








엘사는 갑작스레 자취를 감춘 제 익명의 사랑이 그것보다 더욱 갑작스레 소식을 전해 놀랐어. 물론, 그 사람이 미운 적 없고, 원망스러운 적 없다고 하면 거짓말일 거야. 하지만 이렇게 돌아온 지금은 그걸 다 뒤덮을 정도의 기쁨과 안도감이 밀려와.

처음으로, 한스 왕자와 만난 지 얼마 되었다고 앞뒤 안 보고 결혼하겠다 선언했던 안나의 마음이 이해됐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 없이 그 사람 하나만 원한다는 그 마음이 말이야. 그 사람을 볼 수 있으면 그걸로 좋았지.

그간 나름대로 마음 정리를 해서, 이젠 마지막 편지에 쓴 것처럼 고마운 마음이 가장 크기도 해. 제게 이런 사랑이 허락된지도 몰랐는데 선물처럼 불쑥 찾아와 알려주었잖아. 마치 자신도 이런 감정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지. ​어쩌면 신이 보낸 전령이 아닐까?​ 이제 다 알려주었으니 떠난다는 걸까?

그리고 이게 정말 마지막이라면... 굳이 부정적인 감정을 질질 끌면서 나쁜 기억으로 남기고 싶지 않아. 이건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를 위한 마음이기도 했어. 어쨌거나 이 기억을 안고 살아갈 텐데, 떠올릴 때마다 고통스러운 흉터로 남기는 건 자해와 다를 바 없거든. 그런 건 이미 충분히 겪어봤지.

엘사는 여태껏 제 본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키진 않을까, 저 사람이 눈치 챈 건 아닐까 전전긍긍하며 살아왔어. 제 안의 마법이 날뛸까봐 감정을 억누르고, 없는 취급했지. 이제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았어. 어차피 끝날 인연이라면, 어느 후회도 남지 않게 제 마음을 남김없이 다 주고, 그 사람의 마음을 모두 받아서 그렇게 이별하고 싶어.

익명의 편지로 사랑을 키운 연인을 직접 대면하는 건 처음이니까 당연히 기대되고도 긴장됐지. 거기에 이제까지의 인생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비장함과 결연함까지 덧대어졌어. 오늘밤은 분명 잊지 못할 기억이 될 거고, 꼭 그렇게 만들 거야.​

엘사는 이르게 업무를 끝내고는 곧장 하인에게 목욕을 준비해달라고 했어. 지난번에 외국에서 온 사절대가 선물한 향료를 쓸까 고민하다가, 그냥 평소에 좋아하던 향료를 썼지. 중요한 때에 모험을 할 수는 없으니까.

낮보다는 연한 화장을 하고, 머리를 올릴까, 풀까 하다 그냥 평소처럼 하나로 땋아 내리기로 했어. 너무 신경 쓴 것처럼 보여도 좀 그렇잖아. 가운 차림으로 한참을 고민하다 가벼우면서도 기품 있는 드레스를 디자인해서 입었지. 마지막으로 은은한 향이 코끝에 맴도는 향수를 뿌린 엘사가 발코니에서 그 사람을 기다렸어.

오늘따라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껴서 달도 별도 잘 보이지 않아. 습관처럼 불안한 마음이 샘솟으려 해서 황급히 시선을 내렸을 거야. 시간이 된 것 같은데 발코니 근처 어느 곳에도, 발코니에서 내려다보이는 광장의 어느 곳에도 사람이 보이질 않아. 결국 마지막까지 얼굴을 보이지 않는 건가? 실망할 즈음,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제가 모르는 사이에 안나가 왔나 싶어서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데, ​세상에, 그 사람이야. ​

그런데 꿈에서나 그리던 얼굴이 보이긴 커녕, 요상한 차림만이 엘사를 반겨. 복면이 콧잔등까지 내려와 있고, 그 위엔 모자가 씌워져 있는 게, 사랑이 아니라 꼭 암살을 하러 온 사람 같았지. 순간, 사랑을 빌미로 살인을 계획한 한스 왕자의 만행이 머리를 스쳤지만, 이미 편향된 사고는 위험 가능성을 무시했어. 게다가 1대 1의 상황이라면 엘사가 더 유리하다고 볼 수도 있고. 어쨌건 엘사는 저 수수께끼의 인물이 제 연인이라 믿기로 하고 그를 관찰했어.

드러난 얼굴의 부분이라곤 안나처럼 청록색인 눈동자와 입과 입주변, 그리고 턱 정도였어. 그런데 수염 자국 하나 없이 솜털만 피어있는 살결은 엘사보다 더 부드러울 것만 같았지. 얼굴 아래론 검은 천으로 된 이국적인 옷과 그것을 다 가리고 있는 망토, 기다란 부츠를 착용하고 있는데, 건장한 성인 남성이라기엔 실루엣이 얄쌍해. 나이를 가늠하자면 갓 성년을 지났거나, 성년을 곧 앞둔 소년 같아 보였지. 키도 엘사보다 아주 조금 더 커보여. 전통적으로 키가 큰 아렌델인 남성 치곤 작았지.

​나이가 어려서 숨어있던 건가? 병을 얻거나 사고를 당해서 얼굴이 온전치 못한 건가? 이국적인 옷차림을 보면, 안나의 말처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인가?​ 확실히, 외국인이라면 아렌델인의 신체 조건과는 다를 수도 있을 것 같았지. 근데 성 안까지는 어떻게 들어온 거지? 혼란스러웠지만, 그 모든 걸 뒤로 하고 반가운 마음이 앞서.



"당신이군요!"

"이제야 당신의 앞에 나타나는 결례를 용서해주시길."



툭툭 튀기는 발음과 발성. 아렌델어가 모국어가 아닌 외국인이 분명했어. 목소리도 앳되고 높은 것이 확실히 나이가 어린 것 같았지. 모자를 벗어서 가슴에 얹고 정중히 인사하는 태도는 귀족적인 것이었지만, 대개 귀족인사라면 여왕의 앞에서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는 두건과 복면을 두르고 있진 않아.



"왜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 거죠? 아니, 그건 상관 없어요. 내가 다가가면 될 일이니. 그보다, 왜 내게 얼굴을 보이지 않는 거죠? 그래선 안 될 일이라도 있나요?"

"당신에게 안겨줄 것은 오직 상처요, 우리에게 남을 것은 눈물이기 때문입니다."

"상처는 이미 받았고, 눈물도 이미 흘렸어요."



엘사가 성큼성큼 다가올수록 그 사람은 뒷걸음질 치며 거리를 유지했지만, 결국 벽에 닿고 말아.



"무엇이 문제죠? 당신이 떠돌이여서요? 당신이 아직 어려서요? 아니면 범죄라도 저질렀나요? 그래서 도망자 신세인 건가요?"

"당신의 마음에 저지른 그 죄만이 나를 결백하지 않게 할 것입니다."



그간 쌓인 물음을 빠르게 물어보던 엘사가 오묘한 답변을 듣고는 잠깐 멈추었어. 그리고 진정된 태도로 안나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했지. ​정말 이렇게 끝인가요?​ 모든 걸 꿰뚫는 것 같은 올곧은 눈빛에 안나가 시선을 돌렸어. 그에 엘사가 자신을 보라고 재촉하곤 기어코 고백했지. ​당신을 사랑해요. ​



"나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난 떠나야합니다."

"... 정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인사를 받아야겠네요."



엘사가 더욱 다가오더니 그 사람의 볼에 손을 얹었어. 수수께끼의 인사는 벽과 엘사 사이에 가로막혀 차마 피하지 못했지. 그리곤 엘사가 복면 아래 드러난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개어서 입맞춤을 나누는 거야. 방황하는 얼굴 모를 연인의 손을 잡아 제 허리께에 얹고 더욱 열렬한 사랑을 보내는 엘사의 과감한 모습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면모였지.


그래, 아무도. 안나도 예상하지 못했단 거야.

두건 뒤에서 깜짝 놀란 안나는 제 친언니의 애달픈 키스에 순간 사고회로가 멈추는 듯 했어. 게다가 제 손을 이끌어 허리께에 얹고서는 마치 만지라고 하는 것 같은 그 꾹 누르는 손길이 너무나 낯선 엘사였지. ​엘사가 이런 면이 있었다고? ​

​내가 위험한 사람이면 어쩌려고 무턱대고 입술부터 내어주는 거야?​ 동생으로서의 자아가 걱정과 핀잔을 늘어놓는데, 안나의 입술과 손은 속도 없이 좋다는 신호만 머리로 보냈어. 그날밤 마셨던 핫초코만큼 따뜻하고, 그것보다 더 달콤해. 그 위에 올렸던 마쉬멜로우만큼 부드러워. 입술과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할수록 다른 건 모두 희미해져. 그리고 조우한 건, 가장 바닥에 있는 욕망이야.

그래, 외면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동안 얼마든지 그만둘 기회가 있었다는 거 알아. 우유부단해서 미루는 척 했지만, 사실 그 모든 순간 안나는 동생이 아니라 연인으로 남기를 선택했던 거야. 안나는 이대로 제 알량한 연극이 성공적으로 끝나도 저는 영영 돌이킬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 엘사는 일상을 찾아도, 그걸 지켜보는 자신은 또다른 연극을 시작해야 할 거야.

안나는 차라리 이대로 시간이 멈추기를 바라고 있는데, 안나에게서 떨어진 엘사는 혼란스러운 표정이야. 안나는 순간 정체가 들켰나, 심장이 철렁하는데 의외의 말을 해.



"여자였군요, 당신. 그래서 날 피한 거였어."



엘사는 제 연인의 입술과 손이 귀족 소년의 것이라기에도 너무 부드럽다고 느꼈어. 그리고 더욱 가까이 붙었을 때, 떠올리지 못했던 가능성이 번쩍 머리를 스쳤을 거야. 옷과 망토에 가려져 눈으로는 볼 수 없었지만 제 가슴에 뭉클하게 닿는 것은 다른 여인의 가슴이 분명했거든.

그래, 목소리도 너무 높고, 수염 자국이 어찌 그리 하나도 없을 수가 있을까. 피부도 입술도 너무나 부드럽고, 키가 작을 순 있지만 손은 남성의 것이라기엔 제 손과 비슷할 정도로 작고 얇은 편이야. 그 두건 뒤엔 여인의 얼굴이 있어 가릴 수밖에 없던 거겠지. ​그래서 그렇게 섬세한 글을 쓴 거고, 그래서 내게서 도망치는 거야.​

모든 정황이 딱딱 맞아 떨어졌어. ​이 바보 같은 사람, 그게 무슨 문제라고. ​



"나는 그런 거 신경 쓰지 않아요. 당신이 여자라서 정체를 숨기고 도망치는 거라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어요."



잘 빠져나가겠다 싶었는데 사랑 앞에 후진 없는 엘사 때문에 안나는 옴짝달싹도 못하게 생겼어. 아이러니 하지만 엘사는 자신의 친언니가 맞는 게 확실했지. ​닮아도 하필 이런 점이 닮다니!​ 더이상 엘사에게 휘말리다간 정체가 밝혀지고 말 거야. 이제까지의 수가 전부 무효했으니, 안나에겐 이 상황을 뒤집을 새로운 전략이 필요했어. 제발 먹혀들길 빌며, 글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언어를 고쳐 신하의 언어로 말했지.



"이제 더는 숨길 수 없으니 말씀 드립니다. 폐하, 저는 이 성에서 늘 폐하를 뵙던 사람입니다. 아렌델의 국왕께선 저 같은 자가 아니라 타국의 왕자와 혼인을 하는 게 올바른 정치적 결정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곳을 떠나기로 했고, 이미 짐을 꾸려두었습니다. 이미 제 마음도 정리했으니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일입니다."

"나의 사람이라면 나의 명령으로 붙잡아 둘 수 있다는 것을 알텐데. 그걸 거역하겠다는 말인가요?"

"폐하를 위한 일입니다."



상대가 떠돌이라면 자랑을 하고 다녀도 호응을 얻지 못하고 사라질텐데, 아렌델 사람이고, 특히 성에서 일하는 자라면 소문이 힘을 얻을테지. 내부자라는 이유로 모든 증명을 면제받으면서 말이야. 그래서 자칫 여색가라는 추문에 휘말리기라도 하면, 엘사 뿐만 아니라 아렌델의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을 게 뻔했어. 엘사가 뭘 더 하려는지는 모르지만, 여기서 멈추는 게 높은 사람의 결정에 부합하겠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을 정치적 사안으로 만드는 게 엘사에게 괴로움을 안기는 일이라는 걸 알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여기서 끝나기를 바랐어. 이토록 사랑하는 사람의 정체가 친동생이라는 걸 알면 충격이 상당할 테니까. 더이상 자신을 위한 문제가 아니게 된 만큼 더 간절했어. 그 마음이 전해졌는지 엘사는 생각에 잠기는 듯 했고, 둘 사이 침묵이 길어졌어.

엘사는 마지막 밤을 사랑으로만 채우고 싶었고, 오로지 감정에만 충실하고 싶었는데, 제 속도 모르고 외부의 일을 끌어와 사이에 놓는 연인이 야속했어. 애초에 엘사는 이 사람과 잘 풀린다고 해도 결혼까지는 못할 것을 예상했거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품은 거지. 제가 결혼이란 걸 하게 된다면 국가적 실익에만 집중해 선택한 상대와 하게 될 것이고, 사랑 같은 건 고려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야. 자유로이 떠날 수 있는 연인은 제가 아닌 다른 사랑을 찾아 영원을 기약할 수 있겠지만, 자신은 아니란 말이야.

그 생각이 엘사의 의지를 다지게 했어. ​당신이 내게 첫 이별을 알려주기 전에, 다른 것부터 알려주어야 맞는 순서겠지.​ 엘사가 정적을 깨고 말했어.



"당신이 이 성에서 나를 보던 사람이라면, 나는 내 옷을 항상 만들어 입는단 것도 알고 있겠죠? 그리고 손짓 한 번으로 저 문과 창문을 얼릴 수 있다는 것도."



그러면서 문고리와 창문의 잠금장치를 얼려버렸어. 그뿐만이 아니야, 다시 한 번 다가와 안나의 복면에 손을 얹는 엘사의 소매가 불에 타들어가듯이 사라지고 있었지. 소매 뿐 아니라, 다리를 감추고 있던 드레스 자락도 마찬가지였어. 엘사의 의중을 읽은 안나는 크게 당황했지. 앞뒤 없이 달려드는 건 자신이지, 엘사가 아니었잖아. 



"하룻밤은 기다릴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하룻밤 정돈... 나와 보낼 수 있겠죠."

"어떻게 저 같은 사람과 폐하가..."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초야를 치루고 싶은 마음도 이루어주지 않고 떠나려고 하는 건가요? 당신의 흔적을 남겨주어야 내가 당신을 더욱 오래 기억할 수 있을 거예요."



이제는 정말 거의 나체가 되어가는 엘사의 몸에 안나는 필사적으로 시선을 두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럴 순 없었어. 엘사가 안나의 복면을 벗기려고 했거든. 안나는 필사적으로 막아냈지만 엘사는... 마법이 있잖아. 정말 미안하다고 속삭이고 마법을 써 안나의 손을 뒤로 붙잡았어.

먼저 수수께끼 연인의 모자부터 벗기고, 그 뒤로 두건을 풀었어. ​안나와 같은 머리색이네. 누구지?​ 외국 출신 시종의 얼굴들을 떠올리며 얼굴을 가린 천을 풀어냈지. 천이 바닥에 떨어지고, 제 연인의 정체를 확인한 엘사가 그대로 얼어붙었어.



"... 이, 이게..."

"엘사, 내가 다 설명할게. 일단 옷부터 입고,"



뒷걸음 치는 엘사의 다리에 힘이 풀려서 풀썩 주저앉으면 안나가 서둘러 달려가 붙잡는데, 엘사는 그 손을 뿌리쳐버려. 안나를 노려보는 엘사의 눈이 그렁그렁해지더니 투둑, 몇 방울이 바닥을 향해 떨어져.



"내가 정말 미안-"

"나가."

"엘사, 미안해. 처음부터 이러려던 건 아니었어, 믿어줘."

"나가라고!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인 거야? 이 모든 게 다 네 지독한 장난에 불과한 거니? 그것도 모르고 난...!"



숨이 고르지 못해 괴로운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는 엘사는 상처 받다 못해 심장이 짓밟힌 듯 했어. 안나는 저러다 숨이 넘어갈까봐 걱정스러워서 떠나지 못하는데, 엘사는 그걸 잘못 해석하고는 자신과 안나 사이에 투박한 얼음벽을 만들어내 어느새 문고리가 녹은 문쪽으로 밀기 시작했어.

​엘사, 엘사!​ 불러대는 안나를 무시한 엘사는 안나가 어쩔 수 없이 밀려나 방 밖으로 나가자마자 문을 죄다 얼리는 것도 모자라,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게 벽까지도 얼려버렸어.

천장에선 종유석처럼 고드름이 내려오고, 바닥에선 석순처럼 고드름이 올라왔지. 동굴에 스스로를 가둔 채 심장이 아프게 울리는 가슴께를 부여잡고 끅끅대며 울던 엘사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바닥에 던져진 모자와 두건을 바라보았어. ​어떻게 저런 것으로 날 속일 생각을 했을까? 왜 그런 식으로 날 속였을까. 왜 나를 사랑한다고 속였을까. 왜- ​

엘사는 자신이 상처 받은 것이, 동생이 저를 속였기 때문이 아니라 연인이 저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란 것을 깨달았어. ​그럼 그렇지, 내가 이런 감정을 누릴 자격이 있을 리가 없는데.​ 있는지도 모를 신이 원망스러웠지. ​내가 아무리 싫어도, 이런 방식은 피할 수도 있었잖아요... ​

한층 더 비참해진 기분 속에 모자와 두건을 주워들어 품에 안고 코를 박고 호흡하며 체취를 느꼈어. 울음이 천에 먹혀들어 먹먹한 소리를 만들었지. 자신이 그 사람과 가까워질 수록 편안해진다고 느꼈던 건, 익숙한 동생의 체취였기 때문이었던 거야. 그런데 왜 자신은 아직 이걸 끌어안고서 놓질 못하는 건지 몰랐어.

엘사를 가장 괴롭게 하는 것은, 그 모든 게 가짜였음에도 제 마음만은 진짜였다는 거야. 아마 안나인 것을 모르고 초야를 치뤘다면 기쁨으로 가득차 황홀함을 느꼈겠지. 아니, 어쩌면 안나인 걸 알아도 똑같을 지 몰라. 여전히 그 키스가 달콤할지도 몰라. 그런 게 엘사를 두렵게 했어. 그게 안나임이 밝혀진 지금도 여전히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그 사실이.


그래서 엘사는 안나를 노골적으로 피했어. 마치 대관식 전처럼. 안나를 무시하고, 안나와 스케줄을 다르게 해서 만날 일이 없게 했어.

하지만 그런 날이 길어질수록 엘사의 마음은 점점 곪아만 갔지. 마음에서 그치지 않고 몸에 병이 나서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어. 엘사는 괜찮다고 하면서 업무를 강행하다가 픽 쓰러진 이후 강제로 침상에 눕혀져 간호를 받았어. 의원은 원인을 알 수 없대고, 그저 부족한 영양과 수면,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었지.

열이 올라 몽롱한 정신 속에 떠오르는 것이 안나였기 때문에, 엘사는 없는 기운으로도 피식 피식 웃어버렸어. 정말 웃기는 일이야. 동생의 장난질에 속아 마음을 줘버리고, 진실을 알고 나서도 병이 나 쓰러져서는 동생을 떠올리는 자신이라니. 그 괘씸한 얼굴이 어찌나 보고싶은지, 그 거짓된 입술에 어찌나 입 맞추고 싶은지. 

하지만 그래서는 안되잖아. 같은 배에서 난 친자매가 연인이 된다니. 떠올리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 일이어야 했어. 게다가 이 사랑은 제 일방적인 짝사랑이라는 문제도 있었어. 안나는 일찍이 사랑을 약속한 남자친구도 있었고, 그냥 장난으로 시작한 게 일이 커져버린 거니까. 재능이 있었을 뿐이지, 진짜로 저를 연모하는 마음에 그런 건 아니잖아.

생각해보면 안나가 제게 복수하는 마음이 있었나 싶기도 해. 제가 준 상처를 되갚아주고 싶어서 이런 일을 꾸민 거지. ​말도 안 되는 일인가?​ 하지만 그 무엇이든 친동생과 사랑에 빠져 상사병에 걸린 자신보다는 말이 되지 않을까?

열이 높으면 헛것이 보인다더니, 이제는 안나의 환각까지 보여. 안나 공주가 접근하는 걸 놔둔다면 누구라도 투옥하겠다고 으름장을 놔서 절대 그럴 리가 없는데도 말이야. 아, 환상 속의 안나가 저를 보고는 눈물을 닦더니 점점 다가와. 그리고 제 입에 입을 맞춰. ​환상이니까, 화답해도 괜찮지 않을까?​ 엘사는 안나의 날개죽지에 손을 올리고 키스를 받아주었어. 이상하게도 생생한 느낌은 이게 현실인 것처럼 착각하게 했지.

키스가 이어질수록 흐릿했던 모든 것들이 선명해져. 심장이 기분 좋게 뛰고, 혈액이 달리는 기분. 간지러운 감각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이 얇은 입술을 울리면, 질척거리는 소리가 귓전을 울리고, 달은 숨이 차올라.

​이건 현실이야.​ 엘사가 안나의 어깨를 확 밀어냈어.



"가까이 오면 죄를 추궁하겠다고 했을 텐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찾아왔어. 엘사도 내가 보고싶었잖아. 엘사도 내가..."

"네가 아니라, 네가 꾸며낸 그 사람이 보고 싶은 거야. 착각하지 마. 네가 이런 식으로 적선하듯이 키스해주고, 듣기 좋은 말 몇마디 해주면 내가 금세 일어날 것 같니? 그건 날 더 비참하게 만들 뿐이야."

"엘사, 제발..."



눈에 눈물을 매단 안나가 고개를 푹 숙이더니 갑작스레 소리쳤어. ​나도 혼란스러워!​ 그리고는 어린아이처럼 으앙 울어버려. ​나도 미치겠다고!​



"처음엔 장난이었어. 연애 한 번 안 해본 우리 언니 놀려나보자, 그런 마음이었다고. 그런데 편지를 쓰면 쓸 수록, 점점 내 마음까지 움직이는 걸 어떡해. 그래서 그만둬야 하는 줄 알면서도 조금 더 써보자, 조금 더 써보자, 욕심 부리면서 멈추질 못했어. 엘사와 나눈 편지가 너무 좋아서. 편지를 받은 엘사가 눈을 빛내면서 누가봐도 사랑에 빠진 것처럼, 그렇게 얘길 하는데, 그게 너무 좋아서."



안나가 손을 들어 자기 두 눈을 꾹 가리고는 불안정한 숨을 뱉어내면서 서럽게 울어댔어. 그리곤 흐으윽, 후우, 히이익, 후우, 숨을 고르더니 끙끙거리는 소리와 함께 목울대가 일렁이는 걸 입술을 꾹 깨물면서 삼키고 크응, 코를 들이마시고 눈에서 손을 떼고 말을 이었어.



"엘사는 내가 연기한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진 거라고 했지? 근데 나는 아니야. 나는 엘사를 알고, 엘사를 보면서, 엘사에게 빠진 거란 말이야. 알겠어? 나는 이 모든 걸 다 아는데! 근데도 엘사한테 사랑을 느꼈단 말이야. 나 진짜 무서워 죽겠어. 이러면 안되잖아...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아..."



결국엔 다시 울음이 터져서 엘사의 품에 고개를 박고는 엉엉 울어버리는 안나야.

엘사는 어린 사랑이 제 품을 적시는 걸 느끼곤 실소했어. 자신을 괴롭게 하던 두가지는 연인이 저를 사랑하지 않는 것과, 자신이 제 친동생을 짝사랑한단 건데, 그게 해결된 거잖아. 그것도 제 연인이자 동생이 저를 사랑한다는 방식으로. ​그럼 이제 어쩌지?​ 자신의 몫은 진작에 울어두어서 그런지, 아니면 안나가 너무 울어대서 그런지 이젠 눈물도 안 나와.

한참 울던 안나가 이제 진정됐는지 울음을 그치고 빼꼼히 고개를 들어 엘사를 쳐다보았어. ​킁, 엘사?​ 엘사는 얼굴이 퉁퉁 부어서 엉망인 안나의 얼굴을 보고도 사랑스러움만 느껴졌어. 끌어당겨 품에 안고는 닿는 대로 쪽쪽 뽀뽀해댔지.

품에서 놓아주자 눈물 자욱이 가득한 얼굴로 기쁨에 가득 찬 웃음을 짓는 연인의 얼굴이 꽤나 웃음을 안겨주었어. 참으로 오랜만에 큭큭거리면서 웃음을 터트린 엘사가 홀가분한 한숨을 쉬었지. 그 숨을 타고 엘사의 몸에 갇힌 열기가 빠져나왔어.



"우리 정말 어쩌면 좋을까?"

"어, 그러게..."



아직도 상황파악 중인 것 같은 안나가 너무 귀여워서 손가락을 세워 콧등을 톡 치고, 말랑한 볼을 살짝 꼬집었어.



"부모님이 아시면 정말 쓰러지시겠다."

"아... 근데, 그럴 일 없으니까. 아니, 이렇게 말하면 안 되나?"

"뭐? 안나, 하, 이런 애가 어떻게 그런 글을 썼나 몰라."

"나 책 완전 많이 읽었거든. 큼, ​성자의 손을 더럽히는 입술의 죄로, 거룩한 성전을 어지럽히는 죄를 감추고자 하니, 당신의 입술로써 다시 한 번 세례해 주십시오.​"



안나가 엘사의 손을 끌어다가 손등에 키스하고, 고개를 가까이해 입술을 겹쳤어. 가벼운 키스 한 번, 간질거리는 기분에 엘사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어. 안나의 편지를 받았으니, 엘사가 답장할 차례야. 엘사가 머릿속 도서관에서 인용할 문구를 찾았고, 지금 상황에 어울리는 작품이 하나 떠올랐어.



"​이젠 당신의 죄가 내 입술로 옮겨졌네요.​"

"​내 입술의 죄를? 오, 이 얼마나 부드러운 꾸중인가! 나의 죄를 다시 돌려주십시오.​"



대사를 찰떡같이 받아준 안나가 다시 한 번 쪽, 가벼이 키스했어. 그러나 세례의 비유가 나왔으니까, 여기선 발코니 장면이 나오는 게 더 적절할 거야. 엘사가 말한 대사는 파티장에서 나온 대사였으니, 말하자면 시간을 역행해버린 거지. 그걸 알아챈 안나가 콕 집어 말했어. ​허나 순서가 어그러진 것 같습니다, 나의 사랑.​ 엘사가 한쪽 눈썹을 들썩였어. 그걸 굳이 짚고 넘어가야 하냔 눈치였지. ​오늘밤 내 발코니의 문은 꼭꼭 닫아둘 줄 알아요, 로미오. ​



"폐하? 저는 아렌델의 안나이지, 몬태규 가의 로미오가 아니랍니다. 그 댁 도련님은 유모가 놓아준 줄을 타고 발코니로 올라가지만, 저는 방문을 열고 들어올 줄 아는 지혜를 지녔지요. 폐하께선 캐퓰릿 가의 줄리엣인지요? 듣자하니 그 댁 아가씨는 만난지 일주일도 안 된 남자 때문에 죽음에 이르렀다는데... 저는 여태껏 폐하께서 딱 싫어하시는 인물상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제까지 실컷 인용해놓곤 시치미를 뚝 떼는 안나 때문에 어이가 없어진 엘사가 ​이젠 뭘 인용하려고 그래?​ 묻는데, 안나가 ​글쎄? 나도 모르지.​ 말해.



"로미오와 줄리엣은 말이 아름답긴 하지만, 마지막에 죽잖아. 난 죽기 싫어. 엘사랑 천년만년 살면서 사랑할래. 아, 아까 우리 어쩌면 좋냐고 했지? 딱 이러면 되겠다. 그치?"



그 어떤 비유와 인용구보다 이런 대책없는 말이 더 듣기 좋으면 어떡하자는 건지. 엘사가 칭찬하듯이 안나의 앞머리를 정리해주었어. 어린 연인은 더욱 득의양양하게 말하겠지.



"내가 하나 새로 쓸까봐. '부모님한테 들키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천년만년 사랑하는 엘사와 안나.' "



​그러면 되겠네.
그치? 그러면 책 판 값으로 우리 초콜릿도 사 먹고...​

시덥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킥킥대는 둘이야. 그렇게 침대에 엉켜서 누워있다가, 어느순간 까무룩 잠에 빠져들겠지. 둘 다 요근래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감정의 격무에 시달렸으니 당연한 일이었어.










-----


사실상 본 내용은 여기서 끝이야. 하편은 시간 상 바로 붙어나오는 내용이긴 한데, 가벼운 에필로그라고 보면 돼.



추천 비추천

48

고정닉 7

1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힘들게 성공한 만큼 절대 논란 안 만들 것 같은 스타는? 운영자 24/06/10 - -
공지 음란성 게시물 등록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163] 운영자 14.08.29 167262 509
공지 설국열차 갤러리 이용 안내 [2861] 운영자 13.07.31 439696 286
1123714 ai힘을 빌리면 개쩌는 픽썰 쪄지냐 [1] ㅇㅇ(223.38) 11:41 6 0
1123713 이 음란한 갤 [1] ㅇㅇ(223.38) 11:39 7 0
1123712 안녕 털복숭이들 [1] ㅇㅇ(112.157) 11:26 6 0
1123711 청정한 헬요일 ㅇㅇ(223.62) 00:18 12 0
1123709 뒤조심)아 되게 충격적인 짤 봫는데 얘기할데가 여기밖에 없어 [7] ㅇㅇ(110.47) 06.09 66 0
1123708 디시 이미지 왜 깨져... ㅇㅇ(223.62) 06.09 12 0
1123707 누가먼저 보내나 시합! [1] ㅇㅇ(223.62) 06.09 25 0
1123706 일편단심 안개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9 25 0
1123705 넘쳐나는 go간 [1] ㅇㅇ(223.62) 06.09 31 0
1123704 축 늘어진 흰 옷에서 꼬물꼬물 기어나오는 아기 [1] ㅇㅇ(223.62) 06.09 24 0
1123703 설갤 단점 ㅇㅇ(223.33) 06.09 16 0
1123702 설하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9 23 0
1123701 그런가 [2] 설갤러(118.43) 06.09 16 0
1123700 아니 69라고 설갤러(118.43) 06.09 14 0
1123699 크 69가 와버렸다!!!! 설갤러(118.43) 06.09 15 0
1123698 엘산나를 만난게 행운이야 [5] ㅇㅇ(223.62) 06.08 32 0
1123697 배거파 [1] ㅇㅇ(110.47) 06.08 18 0
1123696 오늘막글 ㅇㅇ(223.62) 06.08 16 0
1123695 어 내일이 69잔아 ㅇㅇ(223.62) 06.08 14 0
1123694 쥬미 영화 보러옴 ㅇㅇ(211.234) 06.08 17 0
1123693 안탄절 지나면 엘탄절도 금방 ㅇㅇ(223.62) 06.08 17 0
1123692 모험가 안나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8 20 0
1123691 싯발 언제 비 그친거냐 [1] ㅇㅇ(223.62) 06.08 21 0
1123690 수상하게 칼을 잘쓰는 안줌 [2]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8 32 0
1123689 뭐지? 결혼식인가? [5] ㅇㅇ(211.234) 06.08 56 5
1123688 정령을 잡아다 예쁘게 묶어 공물로 바치기 ㅇㅇ(223.62) 06.08 22 0
1123687 혐퀘후식사 [2] ㅇㅇ(211.234) 06.08 20 0
1123686 오늘은 자동으로 실내활동 [1] ㅇㅇ(223.62) 06.08 19 0
1123685 자연스레 깊어가는 둘의 관계 ㅇㅇ(223.62) 06.08 21 0
1123684 아찜글 ㅇㅇ(211.234) 06.08 16 0
1123683 새벽글 [1] ㅇㅇ(115.138) 06.08 17 0
1123682 다다음주가 안탄절이네 곧 [2] PeopleOfArendelle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8 33 1
1123681 안나가 엘사를 [1] ㅇㅇ(223.62) 06.07 32 0
1123680 엘산나의 금요일 ㅇㅇ(223.33) 06.07 16 0
1123679 여전히 존버중 [2]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7 26 0
1123678 안나vs안나는 기존쎄 대결일듯 [1]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7 36 0
1123677 애틋하게 뺨쓰담 ㅇㅇ(223.62) 06.07 21 0
1123676 눈 깜짝할 새 킹요일 ㅇㅇ(223.62) 06.07 21 0
1123675 원하는 초능력을 얻는 대신 댓글이 부작용을 정해줌 [18] ㅇㅇ(115.138) 06.07 87 0
1123674 크으 모닝갤먹 [1] ㅇㅇ(223.62) 06.07 23 0
1123673 [그림] 원치 않은 신앙 [10] 애호박쥬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7 106 10
1123672 기억 속에서 지워졌던 창작물 [6] 케찹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6 113 11
1123671 세명이서 서로 아래 핥으려면 원을 그려야하냐 [3] ㅇㅇ(223.62) 06.06 53 0
1123670 프로즌 ost는 언제 들어도 좋아 [2] 설갤러(118.43) 06.06 24 0
1123669 크읏 이러다 울룩불룩 설줌이 돼버렷 [1] ㅇㅇ(223.62) 06.06 29 0
1123668 엘사만 만나면 움츠라드는 안줌 [2]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6 36 0
1123667 태어날 때 부터 얀데레 엘사 [2]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6 48 0
1123666 안나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6 24 0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