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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응답하라 200x 마지막

픽용계정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08.15 12: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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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

고3 초가을. 수능도 이젠 100일이 채 남지 않았다. 반은 고1, 고2 때와는 달리 쉬는 시간에도 조용하다. 마치 시설에서 회개한 사람들이 이렇게 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안나는 ebs 수능특강과 엠피쓰리 이어폰을 꽂은 채 영어 회화 공부를 하고 있었다. 방학 때 보충수업 나오라면 나오라고 선생들이 말했지만 독서실에서 하는 공부로도 엥간한 대학은 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달에 몰래 여행을 다녀와서 잠시 공부가 흐트러지긴 했지만 곤 원상복귀되었다. 엘사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엘사랑 다른 반인 것도 도움이 되었다. 엘사가 같은 반이었더라면 지금쯤 몰래 지루하다느니 뭐니 암호로 쪽지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니 요즘도 알바 다님?"


화이트가 쉬는 시간에 안나에게 다가와 묻는다. 알바 관둔지가 언젠데 이러는지 모르겠다.


"끊었어. 몇달 전에."


"공부 잘 되는 법 알려줄까?"


뭔데. 안나가 눈을 초롱하게 뜨며 묻는다.


"니가 명문대 가서 강동원, 강동원 알지. 걔랑 사귀는 상상하셈."


"강동원은 좀 별론데."


"그럼 그 누구냐, 원빈."


"걔도 별로."


"그럼 니가 젤 갖고 싶은 게 뭐임?"


"갤럭시 s. 요새 난리던데."


"그거 들고 트위터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상상해. 엘사랑."


엘사랑? 절친도 이젠 가세해서 날 괴롭히려나 보다.


"즐."


"쯧. 그럼 니 알아서 하셈."


여느 고3의 대화는 늘 이런 식으로 마무리된다.


------


점심시간이 지나니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아 썅 우산 안 가져왔는데. 안나가 생각한다. 태풍이 좀 늦게 온다더니 지금인가 보다. 아이들은 고3이 정신이 나갔는지 선생한테 무서운 얘기를 해달라느니 조른다. 곧 선생이 불을 끈다. 별로 무섭지는 않다.


"여기 안나 좀 불러줘."


엘사의 목소리가 들린다. 엘사의 손에는 우산이 들려 있다. 곧 반장이 안나를 부른다. 안나가 엘사의 곁으로 다가와 묻는다.


"너 우산 없던데."


"이것도 후배한테 잠깐 빌린 거야. 낼 갖다줘야 돼."


엘사는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쟤는 내가 없었다면 태풍 와서 단축해도 비 맞고 갈 앤데. 내가 뭐라고 이렇게 하는 걸까. 사귄지 2년이면 이렇게 할 법도 하다. 안나는 우산을 같이 쓰고 간다.


버스를 타면 독서실까지는 약 20분이 걸린다. 둘은 자리를 잡아 앉는다. 라디오에서는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지금 전국에 비가 내리고 있는데요. 이 비가 가을의 신호가 되려나 봅니다. 여러분은 비에 깃든 추억이 없으신가요?


왜 없겠어. 비 오는 날에 애들이 부추겨서 분신사바 한 적도 있고, 미친년처럼 비 오는 날에 30분을 달렸다가 다음 날 결석한 적도 있다. 특히 수학여행갈 때 비 오면 그만큼 좆같기도 하고, 좋기도 한 게 없다. 그래도 애인끼리의 추억은 얼마 없는 것 같다.


-----


독서실에 가자 이미 자신들의 자리를 제외하고는 쫙 다 깔려 있었다. 안나는 빨리 문제집과 전자사전을 꺼낸다. 바닥에는 우산통에 우산을 꽂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지 물이 흥건하다. 관리자는 발견하면 닦지도 않나. 옆에 앉은 엘사는 무엇인가 열중하고 있다. 아무리 봐도 공부는 아닌 것 같다. 쟤는 고3되면 한다더니 어떤 날은 하다가 안 하다가 한다. 그래도 고1 때처럼 전자사전에 sex 치지는 않으니 다행이다.


"배고프다. 라면이나 먹자."


엘사가 저녁 7시가 되니 라면을 먹자고 한다. 안나도 마침 배고팠는데 잘됐다. 고1때 엘사였으면 전자실 들어가서 싸이나 뒤적거리다 밥 먹으러 갔을 것이다. 요새는 싸이월드에 사람들이 잘 들어오지도 않으니 덜한 것 같다.


라면 물을 넣고 냉장고에서 이름표가 붙어 있는 김치와 겉젙이를 꺼낸다. 라면이 익는 3분 동안 피엠피로 드라마 녹화해둔거 본다. 그러다가 라면이 익으면 서로 먹기에 바쁘다. 역시 먹기에 진심이었던 고3 여고딩답게 이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


저녁 8시 30분. 안나는 이제 막 영어를 끝내고 수학에 들어간다. 수학의 정석 펴놓고 공식 외우고 엘사는 단어장 펴놓고 단어 외운다. 수학의 정석 기함수 파트까지 거의 다 끝낸 시점에서, 안나는 궁금한 게 하나 생겼다.


"머리나 식힐 겸 옥상에나 갔다 오자."


안나가 엘사에게 제안한다.


"콜."


-----


9월 초순이었지만 아직도 맴맴 소리가 들린다. 비는 거진 다 그친 모양이다. 안나는 본론으로 들어간다.


"너는 나중에 커서 뭐 해 먹고 살거냐?"


엘사가 대답한다.


"너랑 같이 회사 다니고, 대학 댕기고, 죽고 해야지"


나랑? 얘는 나와의 결혼과 황혼 계획을 이미 다 세워놓고 있었구나. 나는 안중에도 없는데. 얘는 생각보다 내게 진심인가 보다.


"그럼 물어본 당신은요?"


나? 사실 공부만 했고. 가끔 일탈했을 뿐인 안나는 사실 미래에 대해 막연히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일단 엘사가 못 따라온다는 가정 하에 같은 대학을 갈 수는 없을 것이고, 그럼 어쩔 수 없이 이 시간은 뒤로 한 채 남자랑 결혼하고, 별 볼일 없는 인생을 살고... 재미없다, 사실.


"나는 모르겠는데. 아직까지."


"지도 모르면서 나한테 물어보기는."


그래도 나는 어떻게는 살 거야. 뒤지진 않겠지. 엘사가 말한다. 안나가 피식 웃는다.


"그럼 수능 끝난 날에는?"


"일단 덮치고 나서 생각해 봐야지."


그리고 수능 끝나고 몇 일 간은 학교 안 나갈라구. 엘사가 말한다. 왜? 그때 졸업여행도 가는데. 아 그때는 이미 놀 거 다 놀고 가는 건데 잼없어. 수학여행이 진짜지. 엘사가 중얼거린다. 안나는 졸업여행을 가고 싶어했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될 것 같았다.


"수능 끝난다고 생각하니까 좋기도 한데 은근 이게 좆같단 말이야."


사실 시험 끝나고는 그동안 재미있었던 거 다 재미읎어진다고. 시험 기간 떄는 벽만 보고 있어도 재밌는데. 안나가 말한다. 엘사는 나는 그냥 다 재미없는데. 말한다.


"그럼 님은 재밌는 게 대체 먼데요."


"너랑 섹스하는 거."


"미친년."


내 애정표현이 너한텐 미친 년 짓이야? 이러면 언니 서운하다잉. 언제부터 언니였는데. 그렇게 따지면 내가 6달이나 언니지. 또 치졸한 나이 논쟁이 시작된다. 이 얘긴 관두자. 그렇게 언니 하고 싶으면 양언니는 친언니든 해. 어 하는 거다? 니가 약속했다? 콜콜. 협상이 어쩌다 타결된다.


"근데 넌 아까 뭘 그리 열중하고 있었냐?"


"몰라도 됨."


안나는 그러면서 큰 가방 봉지를 내민다. 안에는 사탕이 가득 들어 있다.


"요새 당도 다 떨어졌잖아. 한 오십몇개 넣어놨으니까 하루에 한 알 씩 먹어."


"웬일? 오늘이 화이트데이도 아닌데. 땡큐."


"그때 못 준거 생일 때까지 퉁쳐서 주는 거야."


그러면서 엘사가 역시 나밖에 없지? 그러는 거다. 안나가 네 언니. 한다. 엘사는 안나의 볼에 뽀뽀를 한다. 미묘하다.


-----


다시 밑으로 돌아와서 낙서로 가득한 벽면을 바라본다. 수능까지 100일 남음. 공부해라 폰 넣고. 응 니나 해. 모의고사 좆됨. 이런 낙서들이 과거의 연도로 쓰여져 있다. 안나는 그 낙서를 바라보며 내가 니들보단 잘 산다. 는 마음으로 다시 책을 편다. 그들의 고3 마지막 수험생활은 이렇게 지나간다.


----

2021

또 아침이 밝아 온다. 일찍 일어난 안나가 쇼파에 엎드린 엘사를 깨운다.


"야 야 일어나. 뭔 여기서 자고 있어. 실장님이."


엘사가 일어나 아 미쳤다. 미쳤지 내가. 이러면서 씻으러 들어간다. 5분 안에 씻으셈. 안나가 으름장을 놓는다. 엘사는 벌써 욕실로 들어간다. 안나는 쟤는 그때나 지금이나 대가리만 달라졌지 행동은 별 달라진 게 없네. 라고 생각한다.


"회사 생활하기 힘들지?"


엘사가 묻는다.


"어 학교보다 엄청."


"나두. 부하들이 존나 무시해서 죽겠어. 그래도 어쩌겠니. 윗대가리인 내가 책임져야지."


엘사가 말하낟. 안나가 한숨을 쉰다. 니나 걱정해라.


엘사가 대충 바지를 입고 가방을 들고 원룸을 빠져나간다. 이따 보자. 족발 저거 먹지 마. 오늘은 피자 콜? 이러면서. 안나는 콜. 한다. 그러다 들어와서 마스크 놓고 왔다며 마스크를 집어 든다.


안나도 금방 씻고 나와 옷을 입고 마스크 쓰고 집을 나선다. 이렇게 10년 이상을 살고 있다는 게 이상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다. 그때만 해도 다른 대학 갈 줄 알았는데 공부는 또 어떻게 했는지 같은 대학 나오고 원룸도 있다. 좋긴 하다.


그래도 가끔 그때가 그리워지긴 한다.


----


안나는 버스 타며 등교를 하는 여고생들을 보며 자신과 엘사의 모습을 보는 듯한 착각을 느낀다. 니들도 이게 추억이 될 거다. 과거는 미화되는 법이니까. 안나는 생각한다.


'빨리 코로나 끝났으면 좋겠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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