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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메] 아폴론 안나와 아르테미스 엘사 3

엘산나픽용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09.06 01:4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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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음글 https://gall.dcinside.com/snowpiercer2013/812533





※타캐주의







3.









안나는 그 후로 하루하루 태양 마차만을 몰았다. 예전처럼 그것이 즐거워서가 아니었다. 그저 안나가 매달릴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었다. 그나마 이게 엘사가 싫어하지 않는 일이었으니까. 엘사가 신경 쓰기나 할까 싶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나는 시간에 맞춰서 마차에 올랐다. 정해진 궤도 하늘을 달리고 나면, 그녀의 등 뒤로 달이 떠올랐다. 안나는 떠오르는 달을 확인하며 태양 마차의 옆에서 잠이 들곤했다. 그러면 적어도, 여전히 그들이 끊어질 수 없는 실로 연결되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태양과 달, 그들은 떨어져서 존재하지만 동시에 절대 떼어서 생각할 수는 없는 존재들이니까.



안나는 요즘 따라 옛날에 있었던 일에 대해 꿈을 꾸곤 했다. 아주 어릴 적의 꿈을. 그때의 엘사는 언제나 안나에게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안나와 눈을 마주치고, 그 하얗고 부드러운 뺨을 안나의 뺨에 부비곤 했다. 가끔 견딜 수 없이 아주 무서운 일이 있을 때면, 공포에 압도당한 안나의 머리를 엘사는 덮듯이 꼭 끌어안았다.




"괜찮아. 안나. 내가 있잖아."




그러면 정말 모든 게 괜찮아지곤 했다. 처음 올림포스에 들어섰을 때의 기억도 역시 여전히 생생하다. 구름 위의 아름다운 궁전, 그렇지만 아름다움에 감탄하기도 전에 안나는 자신을 응시하는 헤라의 서슬 퍼런 시선에 몸을 움츠린 채 숨을 삼켜야 했다. 그런 안나의 손을 붙잡으며, 엘사는 당당히 올림포스의 대전에 들어섰다. 엘사는 안나에게 말했다.




"겁먹을 것 없어. 너는 태양이고 나는 달이니까. 아무도 우리를 함부로 할 수 없어.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항상 서로가 있어. 같이 있을 때도, 떨어져 있을 때도. 우리는 언제나 같은 길을 함께 걷고 있는 거야."




그러니 괜찮을 거야. 내가 엘사의 뒤를 쫓고, 엘사가 내가 달려온 길에 달을 띄우다 보면 언젠가는 모든 것을 뒤로할 수 있을 거야. 우리는 자매니까. 우리는 태양과 달이니까. 안나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하늘과 신전을 태양 마차로 오가며 안나는 1년, 2년, 10여년을 오로지 일에만 매진했다. 수많은 영웅이 태어나고 수많은 영웅들이 죽고 그보다 많은 인간들이 생과 사를 반복했다. 그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안나에겐 엘사의 증오로 번득이던 눈동자가 여전히 어제 본 것처럼 생생했다. 신들의 기억은 그들의 삶만큼이나 길고 질겼다.



그러던 어느 날 여전히 신전에 틀어박혀있던 안나에게 전령의 신 헤르메스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찾아왔다.




"안나! 큰일 났어요!"

"무슨 일인데?"




그날도 태양 마차의 옆에서 처량하게 몸을 웅크리고 있던 안나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처음에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생각이었던 안나는 창백한 얼굴로 늘어놓는 헤르메스의 말에 벌떡 일어서 신전을 서둘러 나섰다.



안나가 아폴론 신전에서 칩거를 하는 동안 안나의 자식 중에 의술에서 가장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던 아스클레피오스가 죽은 이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마법의 약을 만들어낸 것이 문제였다. 죽은 인간의 영혼은 지하 세계의 지배자인 하데스의 소유였고 죽음은 하데스의 권한이었다. 지하 세계에 속해야 할 자를 함부로 살려 지상으로 데리고 오는 것은 하데스를 무시하는 일이었으며 명백한 월권행위였다. 안나가 알았다면 일이 커지기 전에 아스클레피오스를 말렸을 테지만 안나는 그간 절망에 싸여있느라 자신의 자식들을 돌볼 여력조차 없었던 것이다.



이 일로 하데스는 크게 분노했고 제우스에게 이는 세상의 질서를 해치는 일이라며 강력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그러자 골치가 아파진 제우스는 하데스의 분노의 원인인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벼락을 내리쳐버렸다. 자비없이 마른 하늘에서 그의 몸에 내리꽂히는 벼락을 맞은 가엾은 아스클레오피스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고 한다.



안나가 헤르메스가 알려준 장소에 도착했을 때, 안나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부릅뜬 눈이 흔들렸다. 벼락을 맞아 온몸이 타들어간 채 죽어있는 제 아들을 보아서인지 아니면 그런 그의 곁을 지켜주고 있는 영원같이 아득한 시간이 지난 후에 오랜만에 본 엘사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안나는 쉽게 그들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엘사는 안나의 자식들에게 그렇게 애정을 주지 않았다. 안나는 항상 자식들에게 엘사를 이모로 여기고 대하도록 가르쳤지만 엘사는 그들을 한번도 조카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엘사가 검게 탄 아스클레오피스의 손을 잡고 그의 곁을 지켜주고 있다는 것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잠시 멍하니 그 둘을 번갈아 바라보던 안나는 곧 정신을 차리고 아스클레오피스에게로 달려갔다.




"아스클레오피스…!!"




안나는 끔찍한 살이 탄 냄새가 나는 아스클레오피스의 시신을 끌어안았다. 그의 아버지는 어느 나라의 왕자였고 그는 인간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천재적인 두뇌를 지녔고 어릴 때부터 의학에 관심을 보였다. 안나는 그런 그에게 의술을 가르치기로 마음먹었고 제자인 케이론에게 아스클레오피스를 맡겼다. 그리고 그가 성인이 되었을 때, 그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실력의 의술을 가지게 되었다.


안나의 걱정이 제일 필요 없는 자식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였다. 그런 그가 죽었다. 인간이 너무 뛰어나고 신들의 눈에 보기 거슬린다는 이유로. 안나는 떨리는 손으로 고통스러운 얼굴로 눈을 감은 아스클레오피스의 뺨을 쓸었다. 검게 타버린 그의 피부 위로 안나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런 안나를 말없이 내려보던 엘사가 바닥에 두었던 활을 줍고 일어나 몸을 돌렸다. 안나는 히끅히끅거리며 울면서도 떠나려는 엘사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잠깐, 엘사, 흑."

“…”

“아스클레오피스를 보내는 동안만, 그때까지만 같이 있어 줘. 제발 부탁이야.”




엘사의 옷자락을 잡은 안나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엘사의 시린 푸른 눈이 안나의 떨리는 손을 응시하는 게 느껴졌다. 잠시 동안 엘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고운 숨만을 내쉴 뿐이었다. 안나가 아주 작은 희망을 가질 찰나, 이내 엘사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더니 몸을 비틀어 안나의 손아귀에서 소매를 빼내었다.




"나는 아스클레오피스가 오리온을 위해 노력해준 과거 때문에 이곳에 있었을 뿐이야."

“엘사…! 우린 자매잖아! 슬퍼할 동안…. 잠깐만 옆에 있어 주는 것도 안되는 거야?”

“자매라… 그때도 말했지? 우리가 그럴 만큼 친한 자매냐고. 만약 그랬다고 하더라도 그렇다면, 그렇게 잔인하게 굴어서는 안 됐지. 아폴론. 이 황금 화살이 오리온의 심장을 꿰뚫을 줄 알았다면 그때 네 심장을 꿰뚫어버렸을 텐데.”




엘사가 자신의 손에 든 황금 화살을 응시하다가 차갑게 등을 돌려 사라졌다. 엘사는 활을 들지도, 활시위를 당기지도 않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확실하게 안나의 심장을 꿰뚫었다. 엘사의 날카로운 말이 황금 화살보다도 날카롭고 고통스럽게 안나의 심장에 파고들었다.



차라리 그 화살로 내 심장을 꿰뚫어버리지.



엘사가 오리온을 죽인 그 화살을 언제나 들고 다닌다는 것을 안나도 건너건너 들었다. 그 화살을 왜 그렇게 소중하게 품고 다니는 건지 안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그게 오리온이자, 안나를 향한 증오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할 뿐이었다. 안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화살로 내게 복수라도 해주지. 그럴 가치가 없다는 거니? 내 심장을 그것으로 꿰뚫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줄 만큼의 가치는 나에게 없다는 거야?



안나는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푹 숙인 안나의 얼굴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한없이 떨어져내렸다. 안나는 아끼던 아들을 벼락이라는 비참한 방식으로 잃은 것이 슬픈 건지, 아니면 엘사가 안나의 애원에도 매정하게 쏘아붙이고 가버린 것이 더 슬픈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엘사의 부재가 더 고통스러운 것이라면 여태껏 자식을 사랑한다고 자신했던 스스로가 가증스러워서 견들 수가 없을 것 같았기에.




한참을 안나는 그곳에서 울었다. 그리고 그 울음이 멎었을 때, 안나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이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끝없는 자기혐오와 절망이 안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아스클레오피스의 시신을 수습하고 안나는 자신의 황금 활과 은화살을 쥐었다. 그리고 안나의 아들을 죽인 벼락을 만드는 키클로페스의 동굴로 향했다. 그들은 활화산 아래에서 제우스의 번개를 만들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깡깡, 규칙적인 소리가 동굴을 웅장하게 울렸다. 안나는 은화살을 꺼내어 활에 재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화살을 쏘아버렸다. 열심히 망치질을 하던 키클로페스 삼 형제 중 하나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쿵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자신의 형제가 쓰러지자 바로 옆에 있던 키클롭스가 그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하지만 그의 죽음을 확인하기도 전에 그 역시 화살에 목숨을 잃었다. 마지막 키클롭스는 살기 위해 도망쳤다. 안나는 달음박질하는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활시위를 당기고 놓았다. 은색의 화살은 어김없이 세번째 키클롭스의 심장에 박혔다.

*키클로페스 삼형제 : 제우스의 무기인 벼락을 만드는 자들. 한 명 한 명은 키클롭스라고 부른다.



안나는 은화살에 심장이 꿰뚫린 키클롭스 다리를 붙잡아 질질 끌고 올림포스를 올랐다. 붉은 핏자국이 길게 이어지다 끊겼을 때쯤 안나는 제우스의 앞에 도달했다. 놀라서 안나를 바라보는 제우스의 앞에 안나는 그 시체를 던져버렸다. 녹색의 눈동자가 광기로 번득였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아폴론!"

"제 아들을 저와의 상의도 없이 징벌이라는 이름으로 죽이셨을 때, 이런 결과를 예상하셨어야죠!"




안나는 악에 받쳐 소리쳤다. 제우스가 왕좌에서 길길이 날뛰었지만, 안나 역시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안나의 가슴속에서 시작된 시커먼 불길이 안나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파괴해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안나 그 자신까지도.





당신은. 알았어야 했다.

당신이 겨눈 벼락은 그 아이만을 태우는 것이 아니라는걸. 그 아이를 아끼는 나 역시 그 벼락에 불타 고통스럽게 된다는걸.

당신이 겨눈 게 한 사람이어도, 그걸 맞는 이가 그뿐이라는 건 아니라는 것을.


그는 무지했다. 어리석었다. 눈앞의 상황이 거슬려서, 신경 쓰여서 생각을 거치지 않고 그저 그 원인을 치워버린 것이다. 그 행동에 망설임은 없었다. 옳은 일이라 여겼다. 오만하고 또 오만한 일이다.


제우스는 망설이지 않았다. 안나 역시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고 이번 역시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안나의 화살이 제우스를 겨누었다. 제우스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지고 그의 손에도 벼락이 들려있었다. 하지만 끝내 안나는 화살을 쏘지 못했다. 바람을 가르고 날아온 황금빛 화살이 안나의 불붙은 가슴을 꿰뚫었기 때문이었다. 안나는 자신의 가슴을 뚫고 나온 붉은 피가 묻은 화살을 내려 보았다. 가슴에 뜨거운 고통이 번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안나마저 삼킬 것 같았던 불길이 차디찬 화살에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엘사….



화살 끝을 손으로 움켜쥔 안나는 정신을 잃었다.



그로부터 3일 후에 안나가 깨어난 곳은 낡은 헛간이었다. 그곳에서 인간 왕의 소지기로 1년 동안 일하는 것이 안나에게 내려진 벌이었다. 인간의 밑에서 종으로 일한다는 것은 안나의 높은 자존심에 상처 입혔지만, 그 정도로 그친 것에 천만다행일지도 몰랐다.



정신을 잃은 안나를 두고 제우스는 당장에 타르타로스에 집어넣겠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그의 상징이자 무기인 벼락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건, 그 정도로 타격이 큰일이었다. 하지만 레토가 눈물을 흘리며 안나를 가엽게 여기라고 호소했고 그런 레토를 끌어안은 채 자신을 응시하는 엘사의 존재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거기다 분노를 핑계로 모르는 척하고 타르타로스에 처박아 버리기에는 이미 안나의 심장에는 황금 화살이 꽂혀있었다. 이미 어느 정도 제지를 받은 아폴론을, 그것도 태양의 신을 성깔대로 타르타로스에 가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제우스는 안나의 신격을 잠시 박탈하고 인간의 밑에서 종노릇을 하는 정도의 벌밖에 내리지 못했다. 키클로페스 삼형제를 되살릴 때까지.



안나는 아무 생각 없이 일만 했다. 가끔 황금 화살이 꿰뚫었던 가슴이 따끔거렸지만 그 고통이 안나는 싫지 않았다. 오히려 반갑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럴 때면 안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미소 지었다. 제 가슴의 상처에서 안나는 엘사의 존재를 느꼈다. 홀로 태양의 신전에서 달빛을 받으며 잠들었을 때보다 오히려 그 순간이 더 나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다보니 1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안나의 체벌이 끝나는 날, 올림포스에서는 안나의 귀환을 축하하는 파티가 열렸다. 키클로페스가 모두 멀쩡하게 돌아오고 나니 내심 일이 귀찮아졌다는 이유로 냉큼 손주를 죽여버린 것이 신경 쓰인 제우스는 안나에게 아스클레오피스를 의술의 신으로서 뱀주인 별자리로 만들어 그의 일생을 기려주겠다고 제안했다. 이성이 돌아온 안나 역시 더는 그 일로 제우스와 싸울 생각이 없었기에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제우스는 아무래도 좋았다. 안나에게 더 중요한 건 엘사였다. 하지만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엘사의 아름다운 백금발은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오지를 않았으니까. 안나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1년 내내, 안나와 함께했던 통증도 상처도 신격이 돌아오면서 깨끗하게 사라졌다. 그게 안나는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그저 공허했다.



안나는 황금잔에 담긴 포도주와 넥타르를 꾸역꾸역 목에 흘려 넣었다. 그제야 조금씩, 조금씩 기분이 나아졌다. 주량을 넘도록 안나는 술을 마셨다. 파티의 주인공이 술을 마신다는 데 말리는 신은 없었다.



결국 안나는 까무룩 술기운에 취해 잠들고 나서야 술을 들이키는 것을 멈추었다.











+











그 후로 안나는 일 년 365일을 취해있었다. 제정신인 날이 더 드물 지경이었다. 어느 날은 안나에게 포도주 통을 산처럼 가져다주면서,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가 "나보다는 네가 술의 신 같다?"라며 웃었다. 안나는 그런 그에게서 비틀거리며 술통을 빼앗아 입에 통째로 술을 털어 넣었다. 그리고 밤이면 안나는 인간 여자를 데리고 와 품에 안았다. 이전까지 안나는 대부분 남자를 품에 안았다. 자손 번식이 목적인 만큼 여신인 안나는 남자를 안는 것이 더 합리적인 선택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 안나의 침실에서 헐떡이는 것은 모두 여자였다. 그리고 하나같이 누군가와 조금씩 닮은 점이 있었다.




그날도 안나는 술병을 끌어안은 채로 자고 있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여자가 아닌 남자가 그 옆에 누워있었다. 그는 백금발의 미청년이었다. 피부가 창백할 정도로 새하얬다. 남자치고는 멸치처럼 마른 몸이 흠이었지만, 안나는 오히려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나신으로 자고 있던 안나는 날카로운 시선을 느끼고 흠칫 잠에서 깨어났다. 흐릿한 눈을 깜빡이며, 안나는 상체를 일으켰다. 그곳에는 엘사가 서 있었다. 안나는 몇 년 만에 보는 건지 모를 엘사를 보며 멍하니 웅얼거렸다.




"꿈…? 엘사?"

"한심한 소리 그만하고 일어나."




엘사가 침대를 발로 쾅 차버렸다. 그 충격에 안나의 옆에 침대 끄트머리에서 불쌍하게 몸을 웅크리고 자고 있던 남자가 침대 아래로 고꾸라졌다.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남자는 싸늘한 엘사의 눈빛을 받고는 허둥지둥 옷을 집어 들어 몸을 가린 채로 도망쳤다. 안나 역시 정신이 번쩍 들어 다급하게 옷을 입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방탕한 생활을 본다 해도 안나는 한 번도 부끄러워하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모습을 엘사가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끔찍하게 부끄러웠다. 안나는 머리카락만큼이나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다리를 옷에 끼워 넣으며 말했다.




"무, 무슨 일이야?"

"어머니 일이야."




그 말을 듣자마자 안나의 눈이 매서워졌다. 더는 말이 필요 없었다. 안나는 옷을 입고 활과 화살을 챙겼다. 그들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레토의 일이라면 함께 발을 벗고 나서곤 했다. 둘 사이에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이 생긴 지금조차 둘 중 누구도 이 일에 마음을 합치는 것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들은 울고 있는 레토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의 마음을 상처 입히고 그 이름을 더럽힌 어리석은 이들을 내려보았다. 구름 위에서 제우스의 자식 중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자매가 화살을 겨눈다. 일말의 자비도 없는 그들의 화살이 감히 레토의 이름을 입에 올리고 조롱한 이들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 천박한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인 조용한 동조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살아남은 이는 정신이 번쩍 들어 자신의 귀를 찢어버리고 광인처럼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간 이뿐이었다. 모두가 그를 미친놈이라고 손가락질했지만, 그 자리에서 정신이 멀쩡했던 건 오로지 그뿐이었다. 그들은 신을 모욕한 벌로 저승의 뱃사공 카론의 배를 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스틱스 강을 건너지도 그렇다고 그곳을 떠나지도 못한 채 영원히 그 주위를 떠돌게 될 것이다. 굶주림과 고통에 허덕이면서.



복수를 마친 둘은 한참을 서 있었다. 달콤한 복수는 끝났으니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예전처럼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속이 시원하니 어쨌니 그런 시시한 이야기를 나눌만한 사이는 더 이상 아니었기에 그들의 사이에는 침묵만이 맴돌았다.



안나는 처음에는 분노로 인해 아무런 자각을 하지 못했지만 서서히 옆에서 자신과 함께 있는 엘사의 존재를 느끼면서 오랜만에 살아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심장이 쿵쿵 뛰고 행복했다. 엘사의 숨소리, 차갑게 사냥감을 내려보는 시선, 모든 감각을 찌르는 듯한 아득한 존재감. 그 모든 게 아찔했다.



하지만 복수의 시간은 끝났고 여전히 자신을 증오할 엘사에게 섣부르게 말을 걸 수는 없었다. 그저 눈치를 보는 강아지처럼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엘사를 흘긋흘긋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데 금방이라도 뒤돌아 가버릴 것 같았던 엘사가 안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은 여전히 차가웠고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지만 분명 그녀는 안나를 눈에 담고 있었다.




"신격을 돌려받은 건, 축하해."

"아, 으응, 응. 고마워. 엘사."

"그때는… 사정이 있어서 못 갔어."




그래? 사정이 있었구나. 안나는 바보같이 헤헤 웃었다. 엘사에게 자신이 무해하다는 것을 관철하기 위해 안나는 최선을 다했고, 여전히 날카로운 목소리였지만 대화가 어느 정도 이어진다는 것만으로도 안나는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용기가 부풀어 올랐다. 지금이라면 조금 어리광을 부려도 되지 않을까?




"엘사, 우리 같이 술 마실…"

"바빠."




대실패.


안나는 얼굴이 흙빛이 되어서 얼굴을 푹 숙였다. 응, 바쁘구나. 그렇지. 사실 나도 할 일 많아. 안나는 울상이 되어서 횡설수설했고 기어코 눈물까지 뚝뚝 흘렸다. 안나는 제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쓱쓱 닦아내며 스스로에게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게 무슨 추태야 안나! 당장 눈물 안 그칠래? 태양신이 자존심이 있지. 네가 어머니라는 걸 자랑스럽게 말하고 다니는 자식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아?



그런데, 그런 안나를 보던 엘사가 깊은 피곤함이 베여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떨떠름한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라면,"




잘했어. 이럴 때는 눈물이 최고지. 안나는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어 스스로를 칭찬하고는 밝은 얼굴이 되어 엘사를 신전으로 이끌었다. 이미 안나의 신전에는 디오니소스에게 받아놓은 술들이 가득 준비되어 있었다. 신전 한쪽에 가득 쌓여있는 술통을 질린 눈으로 보며 엘사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엘사가 자신의 신전에 들어와서 자신과 함께 술을 마신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던 안나는 그런 엘사의 반응조차 좋았다.



그들은 술잔에 술을 따랐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해서 할 말이 많을 것 같았는데, 그들 사이에 놓인 복잡한 감정들 탓에 정작 입에서 나오는 말은 없었다. 그 어떤 것도 쉬운 화제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저 술을 마시고 잔을 채우고, 또 술을 마셨다. 그것만을 반복했다. 안나가 모아놓은 술통은 빠르게 비어갔다. 안나도 엘사도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리고


술을 마시고 술잔을 부딪치는 소리만 나던 신전에서, 조금씩 다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은밀하고 거친 숨소리. 신음 소리. 몸이 부딪치면서 나는 물기 어린 소리들….


매일 밤 안나의 침실에서 나곤 하던 소리였다. 그 소리가 오늘도 밤새 이어졌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가 돼서야 깨어난 안나는 아픈 허리와 깔깔하고 쉬어버린 목을 매만지며 부스스한 머리로 잠에서 깨어났다. 안나는 반사적으로 엘사를 찾았지만 엘사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밤의 기억이 새카맸다.

묵묵히 술만 마시던 엘사, 그리고 마찬가지로 술만 마시다가,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서 입을 열었던 것 같은데… 그 후의 기억이 흐릿했다.



…뭐지?



그리고 한 달 뒤, 안나는 자신이 임신한 것을 알게 되었다. 안나는 그 상대가 누구였는지 몰랐지만, 막연하게 엘사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 침실에 불러들였던 백금발의 남자이겠거니 했다. 얼굴도 흐릿하고, 이름도 기억이 안 나는 남자였지만, 안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좋은 혈통을 널리 퍼트리는 건 좋은 거지."




라며 태평한 소리를 중얼거릴 뿐이었다.






























제우스에게 분노하여 활을 겨눈 것은 아들을 죽인 것에 대한 분노도 있지만..."엘사가 날 싫어해. 이렇게 살아서 뭐 해 차라리 죽자!"라는 자포자기한 심정 + 제우스가 아들을 죽인것=안나가 오리온을 죽인 것을 동일시해서 스스로에 대한 혐오, 분노이기도 했어.



오리온을 죽여서 엘사가 상처받았고, 그로 인해 엘사와 자신의 사이가 멀어졌으니까.



리메 전에는 이 점을 나타내지 못했는데, 리메한김에 표현해봤어. 더 조잡해진 것도 같지만 ㅠㅠㅠㅠ 그래도 속 시원하네.



다음 편은 엘사 시점!



참고로 마지막은 오리온이 죽고 난 한참 후야. 신들에게는 찰나일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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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700 아니 69라고 설갤러(118.43) 06.09 15 0
1123699 크 69가 와버렸다!!!! 설갤러(118.43) 06.09 16 0
1123698 엘산나를 만난게 행운이야 [5] ㅇㅇ(223.62) 06.08 3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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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694 쥬미 영화 보러옴 ㅇㅇ(211.234) 06.08 18 0
1123693 안탄절 지나면 엘탄절도 금방 ㅇㅇ(223.62) 06.08 1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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