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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메] 아폴론 안나와 아르테미스 엘사 8화

엘산나픽용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10.23 02: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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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캐주의※※

※※잭다섯글자 등장 주의※※







모음글 https://gall.dcinside.com/snowpiercer2013/812533










8.











팔랑, 팔랑―



안나는 종이가 바람에 넘어가는 듯한 소리에 눈을 떴다. 아침을 알리는 새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밤의 기억이 통째로 사라질 만큼 폭음을 했으나, 다음날의 숙취는 그에 비하면 제로에 가까웠다. 오히려 상쾌한 기분으로 안나는 몸을 일으켰다. 하품을 늘어지게 하고 안나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했다.



마지막 기억은 술창고였는데, 어찌 된 일인지 안나는 방 침대에 누워있었다. 님프들이 아침에 안나를 발견하고 옮겨놓은 것일까.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긁적이던 안나는 시야 끝에 들어온 이 시간 이 장소에 있을 리가 없는 존재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엘사…?"




엘사였다. 창가에 있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로 엘사가 잠이 들어 있었다. 꼬아진 그녀의 무릎 위에서는 밤새 읽은 책의 페이지가 바람에 팔랑팔랑 춤을 추고 있었다.



안나는 놀라운 광경에 숨을 멈추고 벌떡 일어났다. 밤에 자신의 신전에 돌아갔다가 오후가 되어서야 다시 볼 수 있는 엘사였는데 눈을 뜨자마자 엘사를 보게 되다니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었다.




'밤새, 여기 있었던 건가?'




고른 숨을 쉬며 바른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잠든 엘사를 바라보자 심장이 저도 모르게 콩닥대었다. 그 경쾌하고 달콤한 박동을 손으로 가슴을 눌러 숨기며 안나는 살금살금 엘사의 곁으로 다가갔다.




'자는 얼굴은… 오랜만에 보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멈춰 선 안나는 쭈그리고 앉아 엘사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보았다. 어렸을 때는 항상 함께 잠들고 함께 잠에서 깨었다. 엘사와 떨어졌을 때 모든 것이 힘들었지만 가장 힘들었던 건 잠을 잘 때였다. 엘사는 어땠을지 몰라도 안나는 한동안 제대로 잠들지 못했었다. 초반에는 그래도 꽤 친절하게 대해주었던 헬리오스가 퀭한 안나의 눈을 보고서 수면제를 구해다 줄 정도였다.



안나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무릎 사이로 턱을 기댄 안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색색 거리는 따듯한 숨이 손끝을 간질이는 느낌에 팔부터 목 끝까지 행복의 전율이 일었다.




'그래.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잖아.'




욕심만 버리면 닿을 수는 없어도 곁에 있을 수 있다. 그것만으로 안나는 행복했다. 최상의 형태는 아니어도, 최악의 형태는 아닌 것으로 족했다. 뻗은 손을 거두고 안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뭐 해? 거기서."




다소 잠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나는 화들짝 놀라 웅크렸던 상체를 폈다. 어? 엇, 당황으로 눈을 데굴 굴리는 안나를 안개에 잠긴 듯이 나른한 푸른 눈동자가 응시하고 있었다.




"그냥, 깰까 봐."

"…아넬사는?"




잠에 취한 듯이 낮게 울리는 허스키한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미간을 찌푸린 채로 눈을 꾹꾹 누르고 있었지만, 평소의 날선 느낌이 보이지 않았다. 안나는 덩달아 진정되고 둥글어지는 것을 느끼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아직, 확인 안 했는데…조용하니까 자고 있지 않을까."

"…자고 있다고?"




안나의 등 뒤의 요람 쪽을 본 엘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엘사의 얼굴에서 빠르게 나른함이 쓸려가고 당황이 깃들었다. 그리고 평소의 예민하고 날카로운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 찰나의 순간, 끝나버린 아침의 기적이 사라져버리는 것이 안타까워 안나는 탄식했다.




"그럼 저건 뭔데?"

"아, 응?"




아쉬움을 애써 삼키며 그제야 뒤를 돌아본 안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넬사가 곤히 자고 있을 요람에서 하얀 무언가가 흩날리고 있었다. 솜? 이불의 천 조각? 안나 역시 상황 파악을 못하는 사이 엘사가 의자에서 일어나 아넬사에게로 단숨에 다가갔다. 안나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이건 눈?"




요람에 누운 아넬사의 손에서 하얀 눈이 분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푸른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자신의 손에서 나오는 하얀 눈가루를 신기하게 보던 아넬사가 엘사와 안나의 얼굴을 보고 꺄르르 웃었다.


그 웃음에 반응하듯이 안나의 얼굴이 밝게 빛났다.




"엘사, 내 딸이 신이 될 거야!"




안나의 자식들은 대부분이 인간이었다. 오랜 시간을 사는 신들에 비해 인간의 삶을 너무 찰나여서 안나는 그 점이 항상 안타까웠다. 하지만 아넬사는 적어도 -자식의 죽음을 대비할 방법이 있을 리가 없지만-너무 갑작스럽게 늙고 사라져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너무도 기뻐, 안나는 아넬사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안나와 달리 엘사의 얼굴은 가라앉아갔다.




"그 남자가 눈의 신이었다고 했던가…"




엘사가 작게 중얼거렸다. 너무도 작은 속삭임이어서, 아넬사를 들어올려 빙글빙글 돌고 있는 안나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내 아이가 아니었네.



엘사의 이성이 속삭였다. 잘 됐네. 더 이상 신경 쓸 필요 없잖아.



그렇지, 하지만 심장에서 피가 차갑게 도는 듯한 이상한 감각이 몸에 번졌다. 엘사는 대부분의 안나의 자식들을 싫어했다. 안나의 피를 가졌으나 동시에 다른 존재의 피가 섞인 이들. 안나를 떠오르게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안나의 남자들을 떠오르게 하는 그 아이들이 엘사는 지독히도 싫었고 미웠다. 혐오스러웠다. 그들을 보면 안나에게 뒤엉킨 불쾌한 살덩이들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것을 떠올리며 불쾌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널 따르는 신도들에게는 그 누구보다 순수하기를 요구하는 주제에 네가 하는 생각은 천박하기 그지없구나! 네가 욕하는 이들과 뭐가 다르니? 엘사!



그럴 때면, 엘사는 스스로에게 증오스럽게 속삭이곤 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안나와 아넬사를 감싼 따스한 공기가 순식간에 이전과 다르게 느껴졌다.




"축하해."




엘사는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낮게 속삭였다. 그제야 안나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엘사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미 익숙하게 감정을 갈무리한 엘사는 감정을 억누른 단단한 가면을 쓴 상태였다. 익숙하고 이제는 낯설어진 가면이었다. 안나는 불안함에 손을 뻗었으나 안나의 손끝에 닿는 것은 없었다.



그저 한걸음 뒤로 갔을 뿐인데, 엘사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있었다. 태양빛이 찬란한 낮에 암막 커튼으로 드리운 밤이 성큼 엘사에게로 다가와 있었다. 어느새 모호해졌던 낮과 밤의 경계가 그들 사이에 성큼 드리웠다.




"축하연이 필요하겠네. 만약 연회를 연다면, 꼭 참석할게."




야속한 약속의 말에 안나는 그저 고맙다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









아테나는 테이블 위의 체스 말을 만지작거리며 근심이 가득한 얼굴의 아폴론을 응시했다. 엘사와는 가깝게 지내는 아테나였지만 안나와는 다소 껄끄러운 관계였다. 이성의 신인 아폴론, 지혜의 신인 아테나… 의외로 잘 맞을지도 모르는 둘이었지만 닮았기에 오히려 먼 관계도 있는 법이었다.


그들은 라이벌이었다. 그들의 삶에 절대적인 두 존재의 신뢰와 애정을 더 많이 손에 넣기 위해 경쟁하는.




"…체스 상대나 해주러 온 것은 아닐 테고, 무슨 볼일이야?"




사실, 아테나는 안나가 무엇 때문에 자신을 찾았는지 대충 짐작은 가고 있었다. 그들의 공통분모는 제우스와 아르테미스였고 아테나가 알기로는 현재 제우스와 아폴론 사이에는 큰 불화가 없었다. 하지만 아르테미스와는….




"이거, 곧 있을 아넬사의 신 발현 축하연 초대장인데… 오라고."

"초대장?"




안나가 조심스럽게 내민 초대장을 건네든 아테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꽤나 정성스럽게 꾸며진 초대장을 앞뒤로 돌려보던 아테나가 하나를 주머니에 넣고 똑같은 또 한 장의 초대장을 흔들었다.




"이건?"

"엘사한테 전해줘…요."




반말에 아테나가 눈썹을 꿈틀하자 안나가 힘겹게 말을 공손히 했다. 쩔쩔매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씰룩이는 입술을 초대장 끝으로 누르며, 시큰둥한 목소리로 답했다.




"어렵지는 않지만, …직접 전해주는 게 낫지 않나?"

"그럴 수 있으면, 진작에 했지."




안나가 욱해서 이를 악물며 웅얼거렸다. 엘사는 연회에 초대해달라는 말만을 하고 갑작스럽게 아폴론의 신전을 나가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심지어 본인의 신전에도 돌아오지 않고 님프들 몇 명만 데리고 이리저리 사냥터만 쏘다녔다. 낮에는 어디론가 숨었다가 밤에만 나타나서 항상 사용하던 사냥터를 방치한 채로 그리스 전역의 숲속을 돌아다니는 탓에 안나로서는 엘사의 위치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헤르메스에게도 부탁해 봤지만, 안 그래도 엘사한테 제우스의 말을 전하러 갔다가 눈빛에 살해당할뻔했다며 거절당했고… 농사의 신이자 대지의 신인 데메테르에게도 부탁해보았지만 특유의 자애롭지만 엄한 미소를 지으며 '그 아이가 원한다면 내 힘을 빌리지 않아도 곧 기회가 오지 않겠니?'라며 거절당했다.



결국 남은 선택지는 아테나였다. 안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나, 12주신들 중에서 엘사와 가장 가까운 이는 쌍둥이 자매인 안나가 아닌 이복 언니 아테나였다. 어쩌면… 그보다 깊은 관계 일지도 모르지, 안나는 치솟는 감정을 무릎을 꾹 눌러 뭉개며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튼, 부탁할게요. 꼭 와달라고 전해줘요."

"그렇게까지 부탁하는데, 어쩔 수 없지. 알았어."




역시, 당신은 엘사가 어디 있는지 아는구나. 녹색의 눈동자가 꿈틀거렸다. 생각이 얼굴에 드러나는 안나를 응시하던 아테나는 살짝 고개를 틀어 열려있는 창을 바라보았다. 열린 창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 들어와 아테나의 뺨을 간질였다.




'어린애…'




아폴론은 어린애였다. 올림푸스 주신들 중에서도 어린 축에 속하기도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는 감정적인 면에서 전혀 성장을 하지 못했다. 이성의 신이라며 모습은 성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에로스와 감정적인 면에서는 다름이 없다.


자기감정에 빠져있느라 정작 중요한 것을 보지도 알아채지도 못한다. 아테나는 자리에 일어서서 열린 창문으로 다가갔다. 잠시 바깥을 응시한 아테나는 힘주어 창을 닫았다.




"그런데, 그 자리에 상대는 데리고 올 거니?"

"상대?"

"눈의 신이라 했던가? 아넬사의 아빠."




네 잠자리 상대. 아테나의 눈동자가 모든 것을 꿰고 있다는 듯이 안나를 응시했다. 불쾌한 기분에 안나가 와락 인상을 찌푸리며 날카롭게 답했다.




"그건 왜 물어? …요?"

"그냥, 궁금해서. 그쪽도 신이라며."

"신경 꺼요. 남의 일에 요즘 따라 관심들이 많네."




안나가 신경질을 부리며 일어섰다. 볼일이 끝났으니 불쾌한 대화는 피하고 싶다. 괜히 성질 긁는 소리를 듣고 앉아있다가 싸움이나서 될 것도 안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안나는 대충 인사를 하고 훌쩍 떠나버렸다. 아테나 역시 창가에 몸을 기댄 채로, 성의 없이 배웅하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난 안나의 빈자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굳게 닫았던 창문을 열고 상체를 내밀었다.




"초대장, 어쩔까?"

"…"




원래도 사냥을 좋아하던 엘사였지만, 요즘은 짙은 피 냄새를 몰고 다니곤 했다. 생명의 냄새이기도 하고 죽음의 냄새이기도 한 이 묵직하고 날카로운 냄새는, 전쟁의 여신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거부감 없이 카산드라는 붉은 피가 묻어있는 엘사의 뺨에 손을 뻗었다. 푸른 눈이 천천히 아테나를 응시했다.




"어쩌면 좋을까요. 모르겠어요."




엘사의 눈썹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요즘 따라 내 판단을 못 믿겠거든요."




지친 듯이 아예 눈을 감고 엘사는 아테나의 손에 뺨을 기대었다. 자신에게 기대오는 지친 작은 새 같은 엘사의 모습에 아테나의 곧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심장이 지끈거리며 뛰었다.




"탈출구가 될 수도 있고 족쇄일 수도 있다고 했잖아요."




엘사가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내들었다. 얼마나 만지작거렸는지, 종이의 끝이 조금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옅은 한숨과 함께 다시 눈을 뜬 엘사가 물끄러미 자신의 손에 들린 종이를 응시했다. 언니 말대로….




"사실은… 족쇄이길 바랐나 봐."




이제는 의미 없는데. 엘사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테나에게 최선의 선택은 초대장과 함께 저 종이를 엘사의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것일 거다.


엘사는 안나를 완전히 포기했고 아테나에게로 도망쳐왔다. 과거에 지쳐 오리온에게 도망쳤듯이. 아테나는 오리온처럼 자신에게 도망쳐온 엘사를 멍청하게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제 손안에 들어온 승리를, 아테나는 단 한 번도 놓쳐본 적이 없었다. 승리의 여신의 날개를 꺾어 제 손에 넣었듯이, 엘사를 영원히 가두어둘 완벽한 안식의 덫, 온실을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테나는 쓰게 웃었다.



아테나가 원하는 것은 세상의 질서에 적응하고 순응하는 엘사가 아닌 질서의 저 밖에서 자유롭게 누비는 엘사였다. 그녀의 날개를 꺾어 껍데기를 취한다 한들 아테나는 승리자의 얼굴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평생을 승리밖에 모르고 살았던 전쟁의 신 아테나는 결국에 최악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찾아가 보는 게 어때?"

"..."

"그때 가서 초대장은 어떻게 할지 결정하면 되는 거잖아."




엘사는 끝내 답을 하지 않았지만, 아테나는 결국 그 종이를 펼쳐보리라는 것을 알았다.




"고마워요. 캐스."




설령 이 선택이 후회스러울 날이 올지라도, 그 말을 듣기 위해서라면 아테나는 결국 언제나 같은 선택을 할 터였다. 사랑 때문에 이성의 신이 철부지 어린아이가 되었듯, 승리의 여신 역시 그로 인해 영원한 패자가 되어버렸으니까.











+








잭 프로스트


그리스 밖에서 왔다는 이국 서리의 신.

외모 푸른빛 도는 백발에 푸른 눈동자, 비쩍 마른 몸, 창백한 피부.

최근 크레타의 술집을 들락날락한다는 정보.

그가 최근에 목격된 술집의 위치는…(중략)


* 특이사항 : 인간들에게는 모습이 보이지 않음.




엘사는 아테나의 쪽지에 적힌 대로 크레타로 향했다. 광기와 포도주의 신인 디오니소스의 숭배자들로 이루어진 이 지역에는 한 골목마다 있는 것이 술집이었다. 우선 최근에 목격되었다는 술집부터 확인해보았으나, 그곳에서는 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인간들에게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수소문을 할 수도 없어서― 엘사는 그가 이 정보대로 이 술집으로 이루어진 이 도시의 술집 중 하나에 그가 있기를 바라며 하나하나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아무리 술집을 뒤져도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는 이 서리의 신 덕분에 지칠 대로 지쳤을 때쯤, 엘사는 구석진 곳에 자리 잡은 술집에서 눈에 익숙한 이를 발견했다. 포도알처럼 동글게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바에 늘어트린 채로 코를 골며 태평하게 자고 있는 그 자를 본 엘사의 얼굴이 무심코 찌푸려졌다. 하지만 이내, 그라면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엘사는 그에게 다가가 술에 취해 잠든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엘사의 손길에 이리저리 흔들거리던 금발이 휙, 고개를 치켜들고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보라색 눈동자가 엘사를 바라보았다.




"응? 뭐야… 누군가 했더니 아르테미스잖아? 크레타에는 무슨 일이야? 딸꾹."

"찾는 자가 있어. 푸른빛 도는 백발에 푸른 눈, 몸은 빼빼 말랐고 피부가 창백해서 곧 죽을 것같이 생긴 놈 못 봤어?"

"어… 곧 죽을 것같이 생긴 놈? 아르테미스가 곧 죽여버릴 놈이 아니고?"




눈에서 살기가 감도는 데? 딸꾹, 디오니소스가 그의 눈만큼이나 보랏빛이 감도는 술병을 껴안은 채로 낄낄대었다. 술에 취해서 분위기를 전혀 파악 못하고 농담이나 흘리며 킬킬 거리는 그의 모습에 제대로 대화를 나눌려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을 내린 엘사는 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어어? 얼빠진 소리를 내는 디오니소스를 잡아끌어 거칠게 앞뒤로 흔들자, 그는 어억-하고 죽는 소리를 내며 구역질을 하려 했다. 엘사는 그가 진짜로 구토를 해버리기 전에 바닥에 내팽개쳤다. 우웨엑-!! 한바탕 뱃속에 든 것을 토해내는 그의 위로 술집 주인이 성을 내었다. 엘사는 그런 그를 한번 흘긋 보고는, 그에게 청소비로 쓰라며 금화 주머니를 던져주었다. 주인은 돈과 엘사, 그리고 바닥에서 구토물과 함께 뒹구는 단골손님 디오니소스를 번갈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이 정도 금액이면 청소 값은 물론이오 며칠 장사를 안 해도 되는 금액이었다. 주인은 "혹시 술이 더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씀하시오."라고 말하고는 단골손님에 대한 관심을 끊어버렸다.




"이게 무슨 짓이야?"

"백발, 푸른 눈, 마른 몸, 창백한 피부의 남신."




서늘한 엘사의 목소리와 표정에 디오니소스의 나약한 분노는 순식간에 불어가버렸다. 저 무시무시한 처녀신에게 무슨 죄를 지었길래, 저렇게 죽일듯한 표정으로 찾아다니나… 디오니소스는 알지도 못하는 남신이 불쌍해졌다. 하지만 불쌍한 것은 불쌍한 거고 디오니소스에게는 알 바가 아니었다. 자신이 저 무자비한 여신의 손에 360도로 돌려지는 것과 이름도 모르는 아무개의 처참한 재앙,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후자를 택하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닌가.




"아까 여기서 북쪽 부두에서 술 마시고 있는 걸 본 거 같기도 하고…"

"북쪽 부두?"

"그래, 잔뜩 취해서는 신세한탄을 늘어놓고 있던데-"




엘사는 즉시 술집을 나섰다. 디오니소스는 얼굴에 묻은 토사물을 대충 털어내고 다시 바에 앉았다. 포도주의 신에게는 갑작스러웠던 아르테미스와의 만남도, 지금 당장 자신의 고자질로 인해 아마도 화살 세례를 받게 될 불쌍한 남신도 중요하지 않았다. "아까 술 더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 했지? 포도주 가져와!" 디오니소스가 방금 전의 일을 깔끔하게 잊어버린 듯이 쾌활한 목소리로 주인장에게 외쳤다. 게워낸 김에 새롭게 시작할 음주, 그에게는 그것이 제일 중요했다.




한편, 엘사는 디오니소스가 말한 북쪽 부두로 향했다. 그의 말대로 백발의 남자가 부두에 걸터앉은 채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그의 몸은 젓가락처럼 빼빼 말라 있었고 창백한 피부가 술기운에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엘사의 푸른 눈이 번쩍이고 사냥감을 노리는 뱀처럼 쉭 하는 소리를 내며 뻗어진 손이 남자의 뒷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가 반응할 틈도 없이 엘사는 순식간에 그를 잡아끌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의 종이 쪼가리 같은 힘없는 몸이 바닥을 뒹굴고, 그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을 땐 엘사의 예리한 황금빛 화살의 촉이 그의 코앞에서 위협적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잭 프로스트?"

"네, 넵?!"




남자가 정신이 번쩍 든 목소리로 답했다. 눈앞에서 날카로운 예기를 띈 화살촉이 반짝이고 있는데, 아무리 취해있다고 해도 정신이 안 들래야 안 들 수가 없었다. 그는 소심하게 손을 들어 항복 표시를 하고 무릎을 꿇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라고 말하는 듯한 비굴한 자세에도 엘사의 눈은 서늘하게 빛났다. 오히려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가슴속에서 분노가 더 날카롭게 벼려지는 듯했다. 이런 놈이… 아넬사의 아빠라고? 안나는 대체… 안나의 취향이 썩 좋지 않다는 것과 눈이 높은 편은 아니라는 것은 엘사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너 정체가 뭐야? 어째서 안나에게 접근했지?"

"저, 정체라뇨? 그냥… 어…안나…? 아! 호, 혹시 그때 방에 들어왔던…!"




엘사의 푸른 눈이 더욱 싸늘해지자 잭은 몸을 움츠렸다. 뭐지, 이 여자는 누구길래 나한테 이러는 거지? 엘사의 경멸 어린 표정에 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하고 도망치듯이 뛰쳐나왔던 그때의 상황을 떠올린 잭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울컥 올라오는 서러움에 미쳐 억누르지 못한 눈물이 후두둑, 후두둑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갓 성인을 넘긴듯한 남자가 눈앞에서 펑펑 우는 모습은 그다지 보기 좋은 관경은 아니었다.




"부, 불순한 의도 같은 건 없었어요! 전 그냥, 절 볼 수 있는 존재는 오랜만이어서- 치, 친구가 되고 싶었을 뿐인데…"

"…"

"게다가, 아- 안나랑 저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요."




잭이 억울하다는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엘사의 눈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어쩌다 보니 같이 방에 들어가서, 하, 할뻔하기는 했지만, 진짜 안 했어요! 안나의 몸에는 손끝 하나 안 댔다고요!”

“내가 본 광경은 네 말과 달랐는데.”

“안나한테 물어보세요! 하려고 했던 건 맞는 데, 안나가 저를 보면서 자꾸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러서… 다른 사람의 대용품으로 절 생각하는 사람이랑 관계를 맺을 만큼 바보는 아니라고요. 제가 원한 건 절 봐줄 사람이었어요.”




잭이 비참한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떨궜다. 상처가 가득한 얼굴은 연기라기에는 너무 진실성이 있었다. 그럼, 정말로 안나는… 이 자와 관계를 가진 적이 없다고? 이 자가 아니라면, 이 자가 아니라면-




"엘사!"




엘사가 움찔했다. 반응이 오자 잭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날 밤 이후 남몰래 원망하고 저주했던 그 이름이 이 무서운 여자에게서 자신을 구원할 단 하나의 이름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는 손뼉을 치며 확신 어린 어조로 외쳤다.




"분명 안나가 키스하면서 저보고 엘사라고 했어요!"




활을 쥔 엘사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활이 내려가자마자 그는 바퀴벌레처럼 빠른 발걸음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활을 들어 그의 심장에 화살을 꽂을 수도, 도망치는 다리를 관통할 수도 있었지만 엘사는 그저 폭탄 발언을 하고 사라지는 그의 등을 응시할 뿐이었다.




- 엘사라고 했어요




차갑게 식은 손가락이 엘사의 얼굴을 가렸다. 손끝의 닿은 얼굴이 속도 없이 뜨겁다. 눈을 질끈 감자 안나의 붉은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쾌락에 젖은 안나가 내뱉는 열기에 젖은 자신의 이름은 어땠을까? 아… 엘사는 그 음성이 어떤지 정확히 알았다. 귓가에 쏟아지는 뜨겁고 촉촉한 숨결, 끈적하고 열기 띤 신음 사이로 내뱉어지는, 그 혀가 아릿할 만큼 달콤한 그 음성….


어느새 시간은 흘러 붉은 노을이 진다. 엘사의 하얀 피부가 노을빛에 발갛게 물들어갔다.



바다가 일렁이는 소리에 엘사의 이성이 돌아왔다. 엘사는 바다 저 멀리를 응시했다. 우르르 밀려들었다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마치 헛된 희망에 빠져 허우 적되는 엘사에게 정신을 차리라 힐책하는 소리같았다.



오리온. 그래… 내가 그녀를 통해 다른 이를 찾았다고 해서, 안나 역시 그랬을 것이란 보장은 없다. 그건 나의 욕망을 물속에 비추었을 뿐. 그곳에 안나는 없다.



술에 취해서 내뱉은 아무 의미 없는 말일 것이다. 또다시 멋대로 착각했다 좌절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자. 엘사는 스스로를 다잡았다.



엘사가 집중해야 할 것은, 달콤한 거짓 현상이 아닌 쓰디쓴 진실이었다. 엘사는 자신의 아이를 부정했다. 그깟 감정을 못 이겨서, 제 자식을 미워하고 버리고 도망쳐버렸다. 신이라는 자가… 자신이 다스리는 짐승보다도 못한 짓을 했다.




스스로가 부끄럽고 경멸스러워 엘사는 고개를 떨구었다.
















+














엘사가 떠난 후에 아넬사는 불쑥 불쑥 울음을 터트렸다. 곤히 잠을 자다가도 누군가를 찾으며 눈을 번쩍 뜨고 울었고, 님프들과 재밌게 놀다가도 허공에 손을 뻗으며 엉엉 울었다. 세상이 무너져내린 듯이 가슴이 미어지게 우는 안나를 끌어안아 달래며 안나는 울음을 삼켰다. 아넬사는 아직 말을 할 수 없었지만 아넬사의 울음이 무엇 때문인지를 안나는 알 수 있었다. 같은 마음이었으니까. 어쩌면 매 순간 목 놓아 울고싶음에도 차마 자식 앞에서 울지 못하는 안나를 대신해서 아넬사가 울어주는 건지도 몰랐다.



그날 밤도 안나는 엉엉 우는 아넬사를 끌어안은 채로 토닥이며 잠재웠다. 훌쩍이며 잠든 아넬사도 그런 아넬사를 지켜보는 안나도 지쳐잠든 밤이었다. 커튼을 활짝 열어둔 창문으로 달빛이 스며들어와 은은하게 방안을 비추었다. 그 달빛으로나마 엘사의 존재를 느끼며 모르피스의 영역을 헤매고 있는 모녀의 위로 긴 그림자가 졌다.


스르르, 커튼이 조심스럽게 쳐지고 어둠에 자신을 숨긴 이가 조심스럽게 침대에 다가갔다. 잠든 두 얼굴을 내려보았다. 모두가 백금발과 푸른 눈에 홀려 눈치채지 못했지만 색이 어둠에 잠긴 지금 둘의 얼굴은 판에 찍은 듯이 똑같았다. 조심스럽게 침대 앞에 무릎을 꿇은 엘사는 아넬사의 눈물로 부은 눈가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부모에게 버려진다는 것, 부모에게 방치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알면서 엘사는 그 고통을 제 자식에게 겪게 했다. 너무 울어 조금 부어오른 눈에서 조심스럽게 손을 뗀 엘사는 망연하게 일어섰다. 참을 수 없이 보고 싶어 이 자리에 왔으나 그 순수한 눈빛에 자신을 보이기에는 스스로가 너무도 가증스럽고 수치스러웠다. 울다 지쳐 잠든 모습을 보니 더 그러했다. 부끄러움에 마른 세수를 하며 떨리는 숨을 토해내던 엘사는 비틀, 방을 나서려 했다.




"잠깐-"




그 순간 안나가 엘사의 팔을 낚아챘다. 방금 전까지 지친 얼굴로 잠들어있던 안나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안나의 녹색의 눈이 번쩍이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입을 다물고 있는 엘사를 안나가 물끄러미 응시했다.




"꿈이야?"




안나가 힘을 주어 엘사를 잡아당겼다. 엘사는 반사적으로 쳐내려다가 오히려 안나의 강한 반발에 안나의 얼굴 코앞까지 몸을 기울여야 했다. 안나가 색색… 안 좋은 꿈을 꾼 듯 불안한 숨을 내쉬며 흔들리는 눈으로 엘사를 응시한다. 엘사가 빠져나가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안나도 쉽게 놔주지 않았다.




"꿈이라도 좋아. 그냥, 여기 있어. 엘사."




엘사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불안함을 그대로 내보이는 모습에 거절을 예감하고 안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 꿈에서조차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구나."




이미 이게 꿈이라기에는 지나치게 현실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안나는 '내 꿈'이라는 핑계로 엘사에게 매달렸다. 엘사의 손목을 쥔 안나의 손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이런 말할 자격 없다는 것 아는데…"




안나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엘사가 자꾸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은 자신의 잘못이라는 것을 안다. 애초에 우리가 둘로 갈라서게 된 것도, 오리온의 일로 최악으로 치달은 것도, 그 후에 찾아온 기회를 술기운에 망쳐버린 것도… 전부 자신의 충동 때문이었다. 엘사가 안나에게서 떠나간다면 그건 분명 오롯이 안나의 잘못 때문이리라. 엘사가 잘못한 일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런데….




"가족으로 있어준다고 했잖아."




안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엘사에대한 원망이 차올랐다. 전부, 전부 내 잘못이라는 거 아는데…. 그래도 그렇게 말했잖아. 기대하게 해놓고 이렇게 설명도 없이 저버리고 가면 안 되는 거잖아. 그냥 문을 닫고 밀어내 버리면 안 되는 거잖아.



나는 언제까지고 문 앞에서 너를 기다릴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옳은 것은 아니잖아.



그리고 적어도…




"내 잘못으로 아넬사까지는 버리지 말아줘."




변명일지도 모른다. 사실은 아이를 인질 삼아 서라도 엘사를 잡고 싶은 안나의 이기심일지도 몰랐다. 혈연이 큰 의미가 없는 신계에서 엘사에게는 안나의 자식을 돌볼 의무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안나는 드디어 가진 그들 사이의 유대를 잃고 싶지 않았다. 동정을 기반한 지나가는 작은 약속일뿐일지라도 그것을 비굴하게 꿈에서 물고 늘어져서라도 안나는 엘사를 붙잡고 싶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내가."




가족….


그 말에 도망가려던 엘사의 비겁함마저 무너져내렸다. 무릎을 꿇고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달빛이 그녀의 쏟아져 내린 머리카락을 눈물처럼 타고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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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감정의 폭이 너무 큰것같기도 하고... 극단적인것도 같지만... 워낙 감정의 골이 깊다보니 이리 튀었다가 저리 튀었다가 하면서 서로 적응해 가는 거라고 생각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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