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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 가장 따뜻한 색, 블루 13 (下)

La vie(211.246) 2020.01.31 23:52:35
조회 723 추천 38 댓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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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

날카로운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녀의 아버지가 따귀를 날린 쪽은 벨이었지만, 그것을 받아낸 건 내 쪽이었다. 어찌나 세게 때릴 심산이었는지 맞은 뺨이 얼얼했다.

“아버지!!!!!”

벨이 소리쳤다. 그것은 거의 절규에 가까웠다. 중요한건 우리 둘 다 여전히 나체 상태였다는 거다. 이런 상태로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에게 뺨을 맞다니... 수치스러웠다. 나는 말없이 벨에게 이불을 덮어 몸을 가려주고는 나도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벨의 부모님은 그 모습을 거의 반쯤 넋 나간 상태로 지켜보다가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벨... 이게 무슨 상황이니? 엘사랑 너... 아니지? 제발..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지?”

벨의 어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역시 너를 파리로 보내는 게 아니었다. 괜히 이상한 물만 들었어. 넌 하나님께 큰 죄를 지은 거다. 그것도 아주 더러운 죄.”

“하지만 아버지, 하나님은 원수도 사랑하라 하셨을 만큼 자애로운 분이세요. 그리고 엘사도 하나님의 자녀구요. 하나님은 저희를 미워하지 않으실 거예요. 이런 저희도 사랑하실 거라 구요.”

“시끄럽다. 넌 당장 치유 받아야 해. 파리로 돌아갈 생각은 하덜덜 말아.”

벨의 아버지가 벨의 팔을 거칠게 잡으며 방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리고 벨의 어머니가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예의를 갖춘 채 내게 말했다.

“엘사... 미안하지만 그만 돌아가 주렴. 지금은 우리가 대화를 나눌 만한 상황은 아닌 것 같구나.”

그 말을 끝으로 방에는 나 홀로 남겨졌다. 나는 또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렇게 나는 홀로 파리로 돌아왔고, 그 이후로 지금까지 벨을 보지 못했다. 그녀의 소식조차 들을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연락 한통이라도 해줄 수 없었던 건가, 그녀가 원망스러웠다. 철저하게 버림받은 기분이었다. 항간의 소문으로는 그녀의 아버지가 벨을 수녀원에 쳐 넣었다는 말도 있었지만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 사건 이후 폐인이 된 나를 보살펴 준 건 메가라였다. 메가라는 어학원 시절 만난 친구로, 벨과 함께 셋이 자주 어울려 놀았던 사이라 우리의 사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친구였다. 이대로 나를 혼자 두면 안 되겠다 싶었는지 메가라는 벨과 내가 살고 있던 집에 들어와 살게 되었고, 그렇게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벨이 없으면 죽을 것 같았는데, 살 수 없을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나는 똑같이 밥을 먹고 학업을 계속하고 일을 했다. 사랑이라는 것이 이렇게 허무한 것인가. 밀려오는 회의감에 더 이상 사랑을 믿을 수 없었다. 물론 처음에는 방황도 많이 했다. 술에 빠져 살기도 하고, 메가라와 함께 클럽을 전전하며 일회성 만남, 쾌락을 추구하며 살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끝에 남는 것은 언제나 허무함 뿐 이었다. 심장이 다시 얼어붙기 시작했다. 나는 어느새 벨을 만나기 전의 나로 돌아갔다.

그렇게 감정 없는 로봇처럼 삶의 목적도 없이 그저 생명을 연장시키며 살아가고 있을 때, 너를 만났다.

그 날도 어김없이 통역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날따라 고되었던 나는 그럴 때 마다 벨과 함께 자주 갔던 개선문 위를 올랐다. 넋 놓고 야경을 바라보던 나는 옆에서 훌쩍거리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붉은 머리를 양갈래로 땋아 내린 캐쥬얼한 복장의 여자가 울고 있었다. 어깨에 카메라를 짊어진 것을 보니 처음엔 여행객인가 싶었다. 소매치기라도 당했나, 싶어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람, 이라는 생각이 들어 모른 척 하려 했다. 하지만 그게 마음처럼 잘 안됐다. 괜히 내 유학 초기 시절 모습이 떠올라 연민이 느껴졌다. 결국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어버렸다. 우리의 첫 만남은 벨과 나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었다.

처음에는 동정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아니, 사실 벨과 나의 만남과 닮은 이 인연에서 이번에는 내가 벨의 역할을 자처하며 그녀의 흔적을 곱씹어 보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다. 이렇게 하면 그녀의 마음을 이해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했고. 이기적인 마음이지만, 그랬다. 실제로 안나와 함께 있으면 그 시절의 감정이 느껴졌다. 그 때의 나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사랑에 빠졌던 그 시절의 나로.

안나와 함께 있으면 즐거운 건 사실이었다. 나이도 어리고 철부지 같은 면이 있지만 성숙한 사람이었고, 신념도 가치관도 올곧은 사람이었다. 밝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가끔씩 그녀에게서 벨의 모습이 보일 때면 두 사람을 비교질 하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적당히 선을 그으려 노력했지만 안나는 어느새 내 삶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마치 따뜻한 햇살 같았다. 안나라면 내 얼어붙은 심장을 다시금 녹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건 위험했다. 나는 또 다시 누군가를 내 삶으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욕심을 내서는 안됐다. 사랑은 나를 불완전하게 만든다. 내 서툰 사랑은 상대방에게 상처주기만 할 뿐이다. 나는 그들의 인생을 책임질 수 없다.

굳게 먹은 마음과는 달리 내 마음은 생각처럼 잘 제어되지 않았다. 내가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안나는 더 깊게 들어왔다. 물론 순수한 마음이었을 거다. 안나는 오래 만난 남자친구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더 참아야 했다. 절대 드러내서는 안 된다.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사람 인생을 또 다시 나 때문에 망칠 수는 없었다. 나만 참으면 된다. 그러면 누구도 상처 받지 않을 것이다.



*



엘사는 생각에 잠긴 채 사진을 한참동안 바라보다 쓰레기통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이내 사진을 반으로 접어 쓰레기통에 쳐 박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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