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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안나 서머즈 Anna Summers, PA 19

번밀레(211.206) 2020.02.05 01:33:17
조회 896 추천 53 댓글 17

전편


“안나….” 엘사는 안나의 등을 쿡 찔렀다. 안나는 시체처럼 잠든 채였다. 코 고는 소리가 그렇게 요란한데 잠이 잘 오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엘사 침실로 쳐들어와 건물을 하나 올리는 것처럼 들리는 수준인데.


그렇게 쿡쿡 찔러대도 안나는 대답 대신 코만 골아댔다. 엘사는 안나를 옆으로 강하게 밀쳤다. “안나!”


안나가 갑자기 몸을 돌리며 팔꿈치로 엘사의 입을 때렸다.


“아야!” 엘사가 갑작스러운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데 안나가 소리쳤다. “내 팔꿈치!”


엘사는 충격 때문에 머리가 띵하고 아랫입술이 타는 것처럼 아팠다. 엘사는 아픈 입술을 부여잡고는 훌쩍거렸다.


다른 사람이랑 잘 때 성병 조심하라고들 하던데 타박상이 웬 말이람.


“입이 박살난 것 같아요.” 엘사가 투덜거렸다. 피가 나나? 엘사는 혀로 이와 부딪힌 부분을 훑어보았다. 피는 안 나네. 다행이야. 출근해서 입술에 생긴 피멍을 해명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진짜 해명이라도 한다고 치면 여친이 지진이 나도 세상모르고 자는 사람인 것도 모자라 잘못 깨웠다가는 사단난다고 얘기하는 게 나을지, 아니면 주차 문제 때문에 바이크 동호회랑 시비가 붙어서 주먹다짐을 했다고 얘기하는 게 나을지도 알 수가 없었다.


안나는 비몽사몽 몸을 일으키더니 팔꿈치가 쑤시는지 계속 매만지고 있었다. 엘사는 혹시라도 또 뭐가 날아올까 재빨리 몸을 뒤로 뺐다. 안나는 엘사를 보며 눈만 꿈뻑꿈뻑 하더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미안해요.” 안나가 고분고분 말했다. 안나가 손을 뻗어 엘사의 볼을 어루만지는 통에 이불이 흘러내렸다. 안나는 엘사의 얼굴을 돌려 피해상황을 파악했다. “멍은 안 들겠네요.”


“그래도 아파.” 엘사가 일부러 심술궂게 엄살을 부렸다. 고통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안나에게 정신이 팔렸으니까. 지난밤에 방해가 될 만한 잠옷은 벗어던지고 잤으니.


안나는 히죽 웃더니 몸을 숙여 자기가 때린 그 부위에 입을 맞추었다. “자요.” 안나가 말했다. 안나가 엘사 얼굴 앞에 제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있자 머리가 흘러내려 커튼처럼 두 사람 얼굴을 덮었다. “얼른 나으라고 키스 해줬어요.”


“아직도 아픈데.” 사실은 아프지 않았지만 안나가 그 부위에 키스를 해주었다. 안나는 엘사의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었다. 안나의 입술은 엘사의 코와 볼과 눈썹을 지나 목으로 내려가더니 귀 뒤의 민감한 부분으로 향했다.


엘사의 몸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 다리 사이가 뜨끈해지며 안나를 끌어안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다. 안나가 혀로 귀 뒤를 핥자 엘사는 몸을 부르르 떨며 약하게 신음소리를 내고는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았다.


“아니… 잠깐. 이제 출근해야 해요.” 엘사가 말했다. 젠장. 일이라니. 왜 출근시간이 매일 오는 거지? 이제 막 꿈같은 주말을 안나와 함께 보낸 참인데 이제는 옷을 입어야 한다니.


안나는 엘사 목에 얼굴을 파묻고는 웅얼거렸다. “스케줄 바꾸죠 뭐. 해외 지부 매니저랑 회의는 빼버리고 거기에 ‘안나와의 뜨거운 섹스’를 넣어요.” 엘사가 거칠게 웃음을 터뜨렸다.


엄청 당기네.


독일의 거만하고 상대하기 힘든 사업 상대와의 회의를 안나가 잡아놨었다. 엄밀히 따지면 대리인을 보낼 수 있는 자리였지만, 안나 말로는 더 적극적으로 자리에 모습을 비출수록 이미지가 더 좋아진다나.


안나는 몸을 더 가까이 붙이더니 엘사의 맨 엉덩이에 다리 한쪽을 올리고는 손으로 엘사의 옆구리를 쓸기 시작했다.


엘사는 주체할 수 없다는 듯 안나의 가슴 위에 손을 올리더니 유두를 매만졌다. 안나의 가슴은 엘사의 손에 딱 맞았다. 안나를 애무하고 있자니 오늘 오후에 이사회와 회의가 있다는 사실조차 까먹을 정도였다….


젠장.


엘사는 끙 소리를 내더니 안나를 부드럽게 뒤로 밀었다. “오늘 오후에 이사 회의도 있었어요.” 엘사가 기대하던 바를 생각한다면 차라리 심의 기간을 두고 회의를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번 회의를 하면 도움이 된다고 한 건 안나잖아요.”


안나는 오만 상을 찌푸리더니 다리를 오므리며 뒤로 물러났다. “좋아요. 침대 밖으로 나갈게요. 엘사를 위해서요.”


안나는 침대 밖으로 굴러 나가며 커버까지 벗길 뻔했다. 첫 경험으로부터 벌써 이 주나 지났지만 엘사는 안나의 알몸에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안나가 방 반대편으로 걸어가는 동안 엉덩이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안나가 깔끔한 속옷을 찾아 허리를 구부릴 때 엘사는 약간은 은혜로운 마음으로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느새 엘사의 옷장 앞에는 안나의 옷이 가득 찬 가방 하나와 블라우스, 드레스가 걸린 행거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안나가 자기 엄마를 보고 온 뒤 엘사 집에도 자기 옷을 두어야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안나는 전에 본 원더우먼 팬티를 한 손에 들고는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집었다. 커튼이 처진 어두운 방에서 핸드폰 화면이 안나의 얼굴 위를 비추었다. 안나는 화면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이게 시발 무슨 말이야?” 안나가 요란하게 소리 지르는 통에 엘사는 야한 생각에서 깨어났다.


“에?” 엘사가 멍청하게 물었다.


“하그리브스 씨한테서 메일이 왔어요. 당신이 오늘 아침에 이사회의 참석하는 게 맞는지 확인해달라고요.”


“오늘 오후 아니에요?” 엘사가 물었다. 공황감이 뱃속으로부터 밀려 올라왔다. 분명 회의는 오후에 있는 것으로 알았다. 어제 세 번이나 확인을 했으니까. 안나는 자리에 선 채 핸드폰을 두드리더니 이메일을 확인하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아… 미친….” 안나가 욕을 내뱉더니 엘사도 볼 수 있게 핸드폰을 돌렸다. 하그리브스가 보낸 또 다른 메일이 있었다. 이사회의를 아침 여덟 시 사십오 분으로 옮긴다는 내용의. 지금 시간을 보니 아침 여덟 시였다.


“아, 세상에, 엘사, 정말 미안해요. 주말동안 메일 확인을 안 했어요. 이건 금요일에 왔었네요. 제가 확인을 해야 했는데. 가끔 이렇게 멍청한 짓을 하네요. 우리 만나는 일에만 너무 몰두하느라 일에는 신경을 전혀 못 썼어요.”


엘사는 두려움에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온전한 공포에 사로잡혀 안나가 무어라 떠드는 중에도 이미 머릿속이 백짓장이 된지 오래였다.


“지난번 회의에 빠진 걸로 엄청 뭐라고 하네요…. 진짜 최후의 결정인가봐요. 얼른, 안나, 생각해. 뭐라도 생각해. 좋아. 까칠한 독일사람이랑 회의쯤이야. 당신은 절대 이사회의에 빠져서는 안 돼요. 저쪽 회의에는 당신이 갑자기 아파서 유감스럽게도 참석하지 못한다고 말 할게요. 살살 구슬리면 화는 내지 않겠죠. 이사회의는 혼자 가서 박살을 내줘요. 점심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요.”


계획이라기보다는 다짐에 가깝게 들렸다. 엘사는 안나와 점심시간에 회의록을 점검할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내가 좋은 CEO가 되길 바라는 거 맞겠죠? 왜 더 적극적으로 날 막으려는 것 같죠?”


“막는 게 아니에요. 이런 일도 있는 거죠.” 안나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안나는 침대 위로 반쯤 올라와서는 엘사의 볼을 감싸고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잘 할 거예요. 자, 오늘 일정을 위해서 저 멋있는 욕실 같이 쓰는 걸로 해요.”


엘사는 싱긋 웃고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안나를 따라 욕실로 향했다. 할 수 있어. 시간이 바뀌기는 했어도 회의를 잘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안나가 곁에 있는 한-


안나가 샤워기를 들고 얼음장 같이 차가운 물을 끼얹었을 때 엘사의 입이 떡 벌어졌다.


“왜요?” 안나가 물었다.


“나랑 회의 따로 들어가는 거예요?” 엘사는 절망을 감추지도 못 한 채 말했다. 이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어.



-


나는 못해요. 엘사는 테이블 아래로 올라프베리를 꺼내 자판을 두드렸다. 엘사는 회의실 안에 앉아있었고 하그리브스가 의장으로서 일장연설을 하고 있었다. 늘 그렇듯 장황한 말로 회사를 위해 엘사가 맡아야 할 책무에 대해 떠드는 중이었다. 새로운 내용은 없었지만 엘사는 저 사람이 말을 마치면 무어라 반응을 해야 한다는 건 알았다. 호텔 밖으로 나가기 전, 급하게 아침을 먹으며 안나와 미리 노트를 검토하기는 했다. 정확히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회의실에 앉아있는 모든 사람들의 딱딱한 표정에서는 적대감이 느껴졌다. 손이 땀으로 흥건해지고 온 몸의 세포가 긴장 때문에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안나가 옆에 없다면 할 수 없었다. 할 수가 없었다.


안나의 답장은 거의 실시간이었다. 엘사가 문자라도 보낼까 핸드폰을 계속 잡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내가 옷 버슨 모습을 상상해요 ;p


엘사는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 했다. 엘사는 재빨리 핸드폰을 붙잡고는 행여 누구라도 문자 내용을 보지는 않았을까 주위를 살폈다. 그런 엘사를 눈치 챈 사람은 없었다.


곧 내가 말할 차례에요. 엘사가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바라며 답장했다.


노트 읽어요 그리고 이따 무슨 상을 받을지 생각해요.


상이요?


이따가 내 옆에 꼭 끌어안고서 귀에다 키스해줄게요….


쩜 쩜 쩜? 정말로? 엘사의 얼굴이 슬슬 달아올랐다. 엘사는 다시 회의실을 빠르게 눈으로 훑고는 자기 넥타이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왜 굳이 넥타이를 맸을까? 이것 때문에 엄청 더운데. 젠장.


아직 아무도 엘사가 하그리브스에게 집중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엘사는 사람들 모두 멍하니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말을 많이 할 수가 있지? 엘사는 다시 고개를 숙여 자판을 두드렸다.


그거 ‘완전’ 불공평한데.


그래요? 내 약점도 알고 싶나요... ;)


이제는 몸 전체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엘사는 이 자리에서 품위를 지킬지 혹은 지키는 척만 하고 약점을 물어볼지 사이에서 갈등하기 시작했다.


나 지금 회의 중이에요. 바보.


나도 그래요. ;)


젠장. 저 이모티콘은 안나가 평소에 짓는 야한 윙크와 똑같았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엘사도 거울을 보면서 안나의 매력 넘치는 윙크를 따라하려고 애쓴 적이 있었다. 윙크보다는 끔찍한 냄새를 맡아 죽을 상 짓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회의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있는 탓인지 야한 문자를 보고나니 평소보다 더 몸이 달아올랐다. 이거 정상인가?


고민을 하느라 너무 시간을 오래 끌고 있자니 다시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한 번 볼까요, 하그리브스가 아직도 떠들고 있죠?


엘사는 잠시 하그리브스에게 집중했다. 콧소리 섞인 말이 귀로 흘러들어왔다. “…우리 회사의 품질과 서비스에 있어 오래 전해져 온 전통으로….”


…맞아요.


그래서요?


…알겠어요. 말해봐요.


위즐턴 사 파티에서 내 머리 빗겨줄 때 생각해봐요….


엘사는 긴장되는 순간에는 상상을 더욱 구체적으로 떠올렸다. 보통은 자기가 일으킬 지도 모르는 사고나 재난을 상상하곤 했지만. 안나의 문자를 읽고 나니 안나에게 키스하며 불꽃같이 빨간 머리카락을 손에 쥐고 끌어당기는 모습이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몸으로 안나를 꽉 밀어 붙인 채로. 안나가 손을 어떻게 놓고 입은 어떻게 하고 있으며, 어떤 소리를 낼지, 맛은 어떨지를 상상했다. 안나와 시간을 보내고 싶은 욕망이 반드시 필요한 신체적인 욕구와도 같이 느껴졌다. 공기, 물, 음식, 잠, 그리고 안나. 엘사가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들. 엘사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 남자는 왜 아직도 말을 하지?


엘사는 아무도 모르게 회의실을 눈으로 훑었다. 한스가 집중이 산만한 엘사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얼굴을 마구 찌푸리며 웃어보였다. 엘사는 얼굴을 더 빨갛게 물들이고는 주머니에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그러더니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앉아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려놓고는 회의실 정면으로 주의를 돌렸다. 마치 아주 부적절한 상상을 하지 않기라도 한 것처럼.


일 분도 채 지나지 않아 하그리브스가 말을 마쳤다. 엘사는 말을 하려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안나가 자기 긴장을 풀어준 것도 모자라 자기를 기쁘게 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엘사는 손이 떨리기라도 할까 태블릿을 꽉 움켜쥐고서 입을 열었다.


“우선 지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자 합니다. 제 사유서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갑자기 몸이 좋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렌델 사에 헌신을 기울이지 않다고 받아들이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엘사의 목소리는 청아했지만 안나와 함께하던 평소보다는 조금 빠르게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게 차라리 편했다. 말을 하면서 회의실을 둘러 볼 여유도 있었다. 엘사는 안나의 조언대로 말을 이어나가며 회의실 안 사람들과 눈을 마주쳤다.


엘사는 지난 회의에서 하려던 말들을 했다. 회사에 대한 헌신이나 지금 자리에서 몸소 나서 진행한 프로젝트의 목록과 자질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킨 합병 건에 대해서까지. 엘사는 자기 과오를 인정했다. 비록 준비할 때는 ‘여태 썅년짓해서 죄송요.’ 같은 말을 썼었지만, 안나가 ‘표현을 하지 않았다’나 ‘지나치게 전문적이었다’와 같은 표현으로 고쳐주었다. 엘사는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자기가 어떤 과정을 거쳐왔는지를 강조했다.


목소리는 컸지만 겸허한 말들이었다. 딱딱했던 표정들이 슬슬 녹더니 임원 몇몇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기까지 했다.


엘사는 바들바들 떨면서도 말을 마쳤다. 말을 꽤 많이 했지만 더듬지도 않았다. 하그리브스가 다시 연단으로 오르자 엘사는 핸드폰을 꺼냈다.


해냈어요 :) 안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일주일 뒤에 공개 주주 총회가 있습니다.” 하그리브스가 말했다. “아렌델 씨가 우리 회사의 CEO로서의 역할을 계속 수행할 수 있을지에 대해 건의사항을 낼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그 뒤에는 위즐턴 사와의 합병에 대한 회의가 이어질 예정입니다.”


회의가 끝나고 엘사는 모든 사람들과 악수를 하며 작별인사를 했다. 회의실 문이 닫히자 엘사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점심거리 들고 사무실로 와요. 상 줘야겠어요. ;)



-



엘사는 뛰지 않았다. 하지만 스시가 들은 식료품점 봉투를 들고서 엘리베이터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엘사의 모습에 주변 사람들이 이상한 시선을 보냈다. 엘사의 머릿속에는 안나가 한 가득이었다. 예의범절에 대해서 말해줘야 할 게 두어 가지 있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엉덩이도 찰싹 때리고.


“엘사!” 엘사는 어깨 너머로 고개를 돌렸다가 자기 쪽으로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카이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엘사는 자리에 멈춰서는 마주 손을 흔들며 방금까지 비서 엉덩이 때리는 상상을 했다는 사실을 숨기려 했다.


“카이, 잘 지냈어요?” 엘사가 물었다. 마치 십 대로 돌아간 것처럼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카이는 엘사에게 있어 삼촌과도 같았지만, 안나를 사무실에서 쫓아내려고 한 뒤로는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 때 기억을 떠올리자 엘사의 볼이 물들었다.


“아주 좋아요. 요새 통 보질 못했네요. 잘 지내시나요?”


약간은 신랄한 질문처럼 느껴져 엘사는 몸을 살짝 움츠렸다. “좋아요. 점심 먹으러 가려고요.”


카이는 봉투를 바라보았다. 반투명한 재질이라 안에 들은 도시락이 두 개인 게 보였다. “서머즈 씨랑 잘 지낸다는 걸로 보면 되겠지요?” 카이가 물었다.


“아… 그럼요. 잘 지내요.” 얼굴이 더 빨개졌고 카이도 눈치를 챈 게 분명했다. 아버지의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 자신과 안나 사이를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아버지 영혼을 불러서 직접 말하는 거랑 다를 게 없는 일일 테니. 사실은, 그것보다도 더 나쁠 게 분명했다. 어쩌면 아버지 영혼이 자기 침실로 들어올지도 모르고. 욕실도 마찬가지고. 식탁이며 거실에 있는 소파며… 아주 나쁜 생각이었다. 이런 상황일 때 안나의 야한 문자가 필요한데….


“듣자하니… 요새 아주 잘 하고 계신다지요.” 엘사는 카이가 머뭇거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거지? 요즘 덜 지랄맞다고? 정확하게는 아니겠지만 하여튼 비슷한 말이겠지.


“아,” 엘사가 더 멍청하게 말했다.


“다음 주 주말에 회사에서 바비큐 파티를 한다면서요.” 카이가 말했다. 분명 평서문이었지만 질문처럼 들렸다. 도플갱어한테 바꿔치기라도 당했나?


“회사 단합 차원에서요.” 엘사가 말했다. 젠장, 한심하게 들렸겠지.


“장족의 발전이네요.” 약이라도 빨았어?


“임직원들의 주인 의식을 고취시켜야죠.”


카이의 눈 한 가득 기대감이 가득했다. 무언가 일어난다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거대한 무언가가 바뀌고 있다는 걸. 카이는 엘사가 직접 말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제 점심 먹으러 가야 해서요.” 엘사가 서둘러 말했다. “안- 서머즈 씨 점심을 사가기로 해서요. 지금 배고플 거예요.”


어엄청 배고프겠지. 엘사는 빠르게 휙 미소를 짓고는 다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엘사-” 엘사는 버튼을 누르며 카이를 다시 보았다. 엘사를 바라보는 카이의 표정은 혼란스러우면서도 행복해보였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기쁘네요. 어릴 때 이후로 이렇게 행복한 모습은 처음이에요.”


“…고마워요, 카이.”



-



“정말 믿을 수가 없어요. 엘사한테 뭔가 마법이라도 부렸죠.”


“합이 잘 맞아서 그래요. 엘사는 나한테 평범하게 대해주고 나는 엘사를 밖으로 꺼내주는 거예요.” 완전 꺼내줬지. 안나는 한스에게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안나는 어떻게든 실망감을 감추려고 노력했다.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안나를 반긴 건 엘사가 아니라 한스였다. 문자를 괜히 보냈나봐. 아니면 너무 잘 보냈나봐. 안나는 지금 한스가 여기서 떠나고 엘사가 오길 간절히 바랐다. 엘사는 이 분 전에 아래에 있다고 문자를 보냈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지?


당연하게도 한스는 안나가 집중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래서 일은 일단 제쳐두고, 다른 일은… 잘 되고 있어요?”


안나는 한스 얼굴 위로 떠오른 의기양양한 미소를 보고는 혀를 삐죽 내밀었다. “만약 그렇다면요?”


“그러면 엄청 도발적으로 눈썹 찡그리면서 가장 진심을 담아서 축하해주게요.”


“뭘 축하해요?”


세상에, 엘사가 스시 봉투를 들고 회의실에 들어오는 모습은 마치 태양이 뜨는 것 같았다. 엘사는 한스를 보고는 놀란 듯 두 사람을 번갈아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한스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오늘 아침 회의에서 발표를 성공적으로 마친 걸 축하해야죠. 이제 엘사 씨를 쫓아내려면 더 극단적인 수가 필요할 테니까요.”


엘사는 한스의 손을 힘을 주어 꽉 쥐었다. 아, 귀엽기도 하지. 어색하게 웃는 엘사의 모습을 보며 안나가 생각했다.


“이제 진짜 가야겠네요. 우리 크리스피가 아침에 일을 하나도 안 했을 게 뻔하니까요….” 한스는 손을 흔들더니 문을 향해 슬슬 걸어갔다. 일부러 크리스토프 이름 틀리는 거였네. 한스는 문이 닫히기 직전에 안나만 볼 수 있게 슬쩍 윙크를 날렸다.


문이 덜컥 닫히자마자 엘사는 팔짱을 끼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독일사람들 잘 구워삶았어요?” 엘사가 물었다. 안나는 재빨리 엘사를 보고는 히죽거리며 웃었다. 내가 이 사람이랑 사귄다니.


“아, 그럼요.” 안나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안나는 책상 위에 다리를 꼬고는 걸터앉아 엘사에게 몸을 기댔다. “다들 회의 시간에서 반 정도는 핸드폰만 붙들고 있던데요. 자기들 중개인들이랑 대화하면서요. 열심히 참여한 건 나 하나였어요.”


“물론 그랬겠죠.”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 안나는 대학 신입생 시절, 자기에게 포커를 가르쳐줬던 룸메이트에게 조용히 감사를 표했다. “당신은 어땠어요?” 안나가 물었다. “그래도 의견이 한쪽으로 기울지는 않았어요.”


엘사의 얼굴이 더 빨갛게 물들었다. 안나는 엘사가 눈을 위아래로 훑는 걸 보았다. 안나는 오늘 드레스를 입었는데, 지금 엘사가 자기 다리부터 머리까지 쭉 훑은 게 분명했다. 엘사 시선이 도로 돌아오기도 전에 드레스를 벗은 건 좀 짓궂었을지도 모른다. 특히나 엘사가 자기 드레스를 벗기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알면서도.


안나는 입술을 깨물며 최대한 매혹적인 시선을 보냈다. 안나는 한 손을 짚고는 몸을 기댔다. 그러고는 다른 손을 들어 올려 엘사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요.”


엘사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문가를 보더니 다시 안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좋은 생각인 것 같은데.”


엘사가 한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안나를 만지지는 않았지만, 스시 따위로는 채워지지 않다는 듯 잔뜩 굶주린 눈빛으로 안나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그냥… 다음 기회로 미루는 건 어때요?” 엘사가 곧바로 말했다. 엘사는 팔짱을 풀고는 자기 넥타이를 만지작거렸다.


안나는 손을 뻗어 그 파란 실크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엘사는 그 손짓에 끌려와 안나의 허벅지에 착 달라붙었다. 안나는 넥타이를 꼭 쥔 채 몸을 숙여 엘사에게 입을 맞추었다.


“다음까지 못 기다려.” 엘사는 대답 대신 손을 뻗어 안나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는 고개를 뒤로 확 젖혔다. 안나는 엘사의 손길에 이성의 끈을 놓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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