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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청혼하러 가는 길(6)

ㅇㅇ(125.129) 2020.03.05 20:41:22
조회 772 추천 58 댓글 13


<오해>



마치 폭풍전야 같은 밤이었다.

감옥에서 시린 밤을 보낸 엘사도, 대책을 강구하느라 밤을 지샌 한스에게도 고통스러운 밤이었다.

크리스토프는 밤새 안나가 일어날 때까지 그녀의 곁을 지켰다.

옷을 갈아 입혀준 시종들이 그녀의 몸엔 아무 상처도 없다고 크리스토프에게 말해줬지만 그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상처의 여부를 떠나서 사랑하는 동생이 험한 일을 당했다는 사실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그를 힘겹게 만들었다.

만약 안나의 입에서 어젯밤에 관한 말이 나온다면 그는 아렌델과의 전쟁을 불사해서라도 엘사를 반드시 처형할 거라고 다짐했다.


“으음..”


“안나?”


안나가 끙끙대며 일어날 기미를 보이자 크리스토프는 안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제발 동생의 입에서 좋지 않은 소리가 나오지 않길 빌었다.


안나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겨우 눈을 떴을 때, 크리스토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나는 지금 상황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왜 크리스토프가 자신의 방에 있으며 그런 얼굴로 자기를 보고 있는지 의아했다.


“크리스토프?”


“안나, 괜찮아?”


“어?..으응. 괜찮..은 것 같은데?”


“안나,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네 편이야. 항상 네 옆에 있을 거야. 그리고 절대 너의 잘못이 아니야. 그러니까 사실대로 말해줘. 그 사람이 너에게 나쁜..짓을 했어?”


안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지금 크리스토프가 하는 말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안나는 눈만 껌벅거리며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크리스토프가 다시 안나에게 물었다.


“안나, 그 사람이 너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말해줄 수 있어?”


“자..잠깐만 그게 무슨 말이야?”


“안나, 걱정하지 마. 이미 그 사람은 감옥에 있으니까.”


“뭐?”


안나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들이쉬며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지금 뭔가 잘못 돌아가는 느낌인데 자신이 잠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했다.

대체 감옥에 누가 있다는 소리야? 안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크리스토프에게 물었다.


“크리스토프, 나..는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그 사람이라니?”


안나가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크리스토프는 한숨을 쉬며 비장한 표정으로 안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충격이 클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은 어제의 일을 목격했고 현재 감옥에 있는 엘사의 처우를 결정해야 했다.


“안나, 잘 들어. 어제 연회장에서 바람을 쐬고 싶다면서 나간 건 기억 나?”


“음..그랬던 것 같아.”


“그리고 한참 뒤에 너는 그 사람하고 같이 돌아왔어. 그런데 너는 정신을 잃은...”


“자..잠깐, 그 사람? 대체 누굴 말하는거야?”


“엘사 아렌델.”


크리스토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안나는 온 몸의 피가 차게 식는 것 같았다.

엘사.

그 이름이 들리는 순간 안나의 기억이 하나, 둘 돌아오기 시작했다.

음악과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가득했던 연회장, 처음 마셔본 술과 초콜릿의 달콤함.

바람을 쐬고 싶어서 정원으로 갔다가 엘사를 만났다.

엘사의 백금발이 너무 아름다워서 두근거렸던 기억, 엘사에게 부렸던 어리광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절하게 자신의 장단에 맞춰주던 사람.

그리고 엘사가 자신을 부축하며 연회장까지 같이 왔던. 그 부분은 드문드문 기억이 났지만 엘사의 거친 숨소리와 그녀의 목소리는 똑똑히 기억했다.


‘안나, 제발 정신차려요!’


그 목소리가 기억나자 안나의 표정은 사색이 되어갔다.

그리고 다급히 크리스토프의 손을 잡으며 소리쳤다.


“그..그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 순간 안나의 외침과 동시에 밖에서 한스가 찾아왔다는 시종의 말이 들려왔다.










감옥의 지난 밤은 꽤 추웠다.

겨울이 아니었음에도 돌로 지은 탓인지 한기가 느껴졌다.

엘사는 작은 창살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에 겨우 감았던 눈을 떴다.

몸이 말이 아니었다. 온 몸은 쑤시고 씻지 못한 찝찝함이 엘사를 괴롭혔다.

만약 이 곳에서 나가게 된다면 뒤도 안 보고 아렌델로 돌아 갈 거라 다짐했다.


철컹.


그때 여러 사람 들의 발소리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간수가 아침이라도 갖다 주는 모양이었다.

엘사가 겨우 자리에 일어나 앉자, 익숙한 얼굴 여럿이 보였다.


“엘사!!”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온 한스에 엘사는 어리둥절 했다.

거기다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는 크리스토프와 거의 울기 직전인 공주까지.

한스는 엘사를 부축하며 일으켜 세웠다.

엘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도대체 무슨 일인지 물었다.


“지금 이게..”


“...본의 아니게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엘사 공주.”


크리스토프는 엘사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옆에 서 있던 안나 역시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정말 미안해요. 나..나는 당신이 이렇게 된 줄은…”


“온전히 제 오해에서 비롯되었으니 제 잘못입니다. 이 일은 공식적으로도 사과드리겠습니다. 부디 제 동생은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길.”


“…… .”


“제 행동이 경솔했던 점,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크리스토프는 정말 미안한 표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꼭 보상해주겠다고 했다.

그에 반해 안나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엘사는 그런 안나와 크리스토프를 어이없다는 듯 잠시 보다가 한스의 부축을 받으며 감옥을 나왔다.

고작 하루였지만 상쾌한 공기가 얼마나 소중했는지 엘사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금도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엘사..”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안나가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한 발자국 나오며 말했다.


“미..미안해요, 전부 내 탓..”


“공주님.”


엘사는 부축하는 한스의 도움을 거절하며 안나를 불렀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 한스는 다음에 나올 말이 부디 공주에게 상처가 되지 않길 바랐다.


“전 빨리 방으로 돌아가서 쉬고 싶군요. 그리고..”


“....?..”


“함부로 제 이름을 부르지 말아주십시오. 아무리 같은 공주라고 하지만 기본적인 예의는 지켰으면 합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엘사는 자리를 떠났고 한스가 간단히 목례를 한 후에 엘사를 따라갔다.

안나는 그 말에 충격을 받은 듯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크리스토프가 안나를 안아주며 괜찮다고 말해줬지만 결국 울음을 터뜨린 안나를 막을 수는 없었다.










방으로 돌아온 엘사는 자켓을 벗자 마자 거칠게 던져버렸다.

한스는 시종들에게 욕조에 물을 받으라고 지시한 뒤 문을 닫았다.

그는 엘사의 화가 가라 앉을 때가지 기다릴 참이었다.


“뭐? 사과드립니다? 하! 장난해?”


“…… .”


“고작 그게 할 소리야?”


“엘사.”


한스는 엘사를 말리려 했지만 엘사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방을 왔다갔다하며 분노를 터뜨리고 있었다. 엘사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 참아왔던 불편한 감정들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애초에 내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대체 이 나라는 제대로 된 게 뭐야?”


“엘사, 진정해.”


“진정? 한스, 너 같으면 진정하겠어? 너도 한 번 감옥에 있어볼래?”


“엘사. 그래도 사과했잖아. 전쟁보다는 나아.”


사실 한스의 입장에서는 일이 이 정도에서 마무리되었다는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물론 공주가 엘사의 결백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크리스토프를 설득하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처음엔 그는 공주의 말을 믿지 않다가 한스까지 나서서 엘사의 결백을 주장하자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엘사에게 사과하러 갔던 것이었다.


“당장 짐 싸! 이런 곳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아!”


“..엘사, 어쨌든 오해는 풀렸잖아.”


“그러니까 짐 싸라고. 더는 이 나라에 있고 싶지 않으니까!”


“떠나는 건 언제든지 떠날 수 있어. 하지만 여기에 온 건 너의 상대를..”


“그게 그렇게 좋으면 너나 해! 그거 알아? 난 이곳에 올 때부터 불편했어. 온갖 가식적인 척 떠드는 사람들도, 크리스토프인가 하는 왕도, 거기다 공주까지!!”


“엘사, 너 너무 흥분했어.”


“내가? 하, 그 공주도 다신 보고싶지 않아! 전부 최악이었어! 애초에 그냥 두고 왔어야 했는데!”


“잠깐 진정하고 내 말을..”


“진정? 너도 마음에 안 들어! 이럴 거면 이 방에서 나가!!”


엘사는 한스에게 소리치며 문을 열었다.

한스를 내보낼 요량이었다. 이 방에서 진정하라고만 하는 그와 더 있다 간 자신이 돌아버릴 것 같았기 때문에. 그럴 생각으로 문을 열었다. 분명히. 


“안나 공주님!”


한스의 외침이 엘사의 귓가를 때렸다.

엘사가 문을 열었을 땐 이미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안나가 서 있었다.

엘사의 얼굴이 창백 해졌다. 왜 대체 여기 서 있는 거야?

대체 어디서부터 들은걸까?


“저..저는..그냥..다시..사과하고 싶..어서..”


울먹거리며 겨우 말을 꺼낸 안나를 보며 엘사는 굳어지는 표정을 스스로 주체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다 들은 모양이었다.


“미..안해요..”


안나의 사과는 엘사만 겨우 들릴 정도로 작았다.

엘사가 안나의 손을 잡으려는 순간, 안나는 저 멀리 뛰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엘사는 발이 얼어버린 듯 움직일 수 없었다.


한스가 천천히 엘사 옆으로 걸어오면서 말했다.


“이젠 네가 사과해야 할 차례 같은데?”


“..네 방에 가서 짐이나 싸.”


한스의 말에 엘사는 겨우 마른 침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이 나라에 온 뒤로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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