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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청혼하러 가는 길(18)

ㅇㅇ(125.129) 2020.03.23 13:34:37
조회 722 추천 56 댓글 17


<현실>



엘사와 한스는 아렌델로 돌아가는 길에서도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이미 서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고 서던을 나와 아렌델에 가까워질수록 현실이 차갑게 와 닿았다. 다만 한 가지, 엘사는 한스가 루나드에게 뭐라고 말할지 궁금했다. 크리스토프와 안나에게 했던 제안을 루나드에게도 그대로 말할까? 아니면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할까?

한스의 얼굴을 바라보아도 그의 표정을 읽어내긴 힘들었다. 그저 무표정으로 창 밖을 보고 있었다.

아렌델 왕성이 희미하게 보일 때쯤 한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내 얼굴을 본다고 답이 나오진 않아.”


“…… .”


그 말에 엘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둘 다 생각이 많긴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한스는 한숨을 쉬더니 다리를 꼬곤 엘사를 바라보았다. 


“가서 폐하께 뭐라고 할 거야, 엘사?”


“…… .”


“뭐, 축제에서 공주도 보고 감옥에도 갇혀보고...사랑에 빠졌다, 이렇게?”


“…… .”


“그래서 왕위도 포기할까 생각했었다, 이렇게 말씀드릴거야?”


“...나도 몰라.”


둘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내려 앉았다. 한스는 이미 루나드에게 뭐라고 할지 결정한 모양이었다. 아니, 애초에 선택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루나드는 거짓말을 싫어했으니까.

한스도, 엘사도 어쩌면 애초에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일이 겉잡을 수 없게 되었으니까.


엘사 역시 루나드에게 사실대로 말 하는 것을 고민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것은 의미가 없었다. 안나가 자신을 놔줬기 때문에. 

자신이 왜 왕위를 원하는지 안나가 아는 이상 아무리 노력해도 공주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결국 한스의 말이 옳았다.

엘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안나가 자신을 떠나게 만들었다.

아니, 안나를 떠난 것은 자신이었다.


엘사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눈을 감았다. 이제는 현실에 맞서야 했다.












엘사와 한스가 왕궁에 도착에 여독을 풀기도 전에 루나드는 두 사람을 집무실로 불렀다. 그는 성미가 급한 사람이었으므로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예상과는 다르게 서던에 오래 머물렀던 이유도 정확히 알고 싶어했다. 그리고 혹시 좋은 소식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다.


이미 차와 간단한 과자가 준비되어 있었고 루나드는 느긋하게 엘사와 한스의 얼굴을 살폈다. 하지만 모습을 보아하니 여행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엘사의 표정은 예전보다 더 어두워져 있었고 한스 역시 무표정이었다.


“그래서, 여행은 즐거우셨나들?”


“예, 폐하.”


“그래서?”


엘사와 한스는 루나드의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예상보다 오래 있었으니 조금이라도 성과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 

하지만 엘사는 도통 입을 열 줄 몰랐고 결국 참다 못한 한스가 먼저 입을 뗐다.


“서던 공주의 성년식은 잘 끝났습니다. 성년식 후에 바로 축제에 초대받아 좀 더 머물렀습니다.”


“으흠..”


루나드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한스의 말은 그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한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잠시 뜸을 들이다 이내 자세를 고쳐 앉고 루나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쉽게도 엘사 공주님의 상대는 찾지 못했습니다.”


“고작 그런 말이나 들으려고 너와 같이 보낸게 아니다.”


“죄송합니다, 폐하.”


“…… .”


루나드의 책망에도 엘사는 입을 열지 않았다. 엘사는 한스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마음 속에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안나를 더 이상 상처 입힐 수 없었다.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일을 망칠 수는 없었다.

세 사람 사이에서는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때 한스는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듯 루나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해봐.”


“폐하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저는 서던의 공주에게 청혼할까 합니다.”


“뭐?”


루나드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한스를 바라보았다. 엘사 역시 놀란 눈으로 한스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진지한 한스의 얼굴에 루나드는 얼굴을 찌푸리며 무슨 소리인지 물었다.


“서던의 공주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간결한 이유에 루나드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한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나온 적이 없던 한스였기 때문에 루나드는 이 상황이 흥미로우면서도 불쾌했다.


“정작 구해오라는 놈은 안 구해오고, 네가 상대를 찾았다고?”


“예.”


“한스!”


엘사는 한스의 이름을 소리치며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것 뿐이었다. 루나드는 엘사의 그런 반응에 불만이 있는지 물었지만 엘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른거리는 안나의 얼굴이 그러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엘사는 입술을 깨물며 입을 닫았다. 


“서던에서도 알고 있는 사실이냐?”


“예, 폐하. 폐하께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 될 것 같기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유는?”


“아렌델의 교역에 도움이 되고, 두 나라가 결혼으로 맺어졌다는 것을 알면 군사적으로도 동맹이 될 수 있으니까요. 거기다..저도 서던으로 가게 될 테니..”


“…… .”


“물론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요.”


한스는 마지막 말을 덧붙이며 루나드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먼저 말했으나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은 루나드의 뜻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게다가 자신이 서던으로 가겠다는 의지를 먼저 보였으니 엘사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는 뜻도 있었다.


루나드는 약간의 흥미를 느낀듯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두드렸다. 일을 처리할 때 그만의 버릇이었다. 사실 그에게도 한스의 말은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어찌 되었든 엘사가 왕위에 오르기 전 한스의 처우를 결정지어야 했었고 서던은 그렇게 중요한 나라는 아니었으니 한스가 가게 되더라도 적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한스는 아랑곳않고 루나드의 대답을 기다렸다. 사실 이쯤 되면 엘사가 한 마디라도 할 줄 알았지만 굳게 닫힌 엘사의 입을 열릴 줄 몰랐다.


“으흠,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니 이미 계산이 끝난 모양이구나.”


“...... .”


“긍정적으로 검토해보마.”


“감사합니다, 폐하.”


루나드의 말에 엘사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온 몸의 피가 차게 식는 것 같았다. 아무리 청혼을 거절한다고 해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아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도 체면은 서야 하니까 작위를 하나 내려야겠구나.”


루나드의 말에 한스는 감사를 표했다. 사실 그의 공식적인 지위는 평민이었다. 반쪽짜리 왕족이었지만 아무에게도 인정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루나드도 그 사실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굳이 작위를 주지 않았다. 엘사에게 어떤 위협이 될 지도 모르고 한스를 검증할 시간도 필요했다.


“혹시 공주는 더 할 말이 없는가?”


한스와의 일은 이제 다 끝났다는 듯한 루나드의 말에 엘사는 고개를 들어 왕을 바라보았다. 엘사의 얼굴은 두려움과 절망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거짓말처럼 안나의 얼굴이 눈 앞에 아른거렸다. 자신을 향해 지어주던 미소가 아직도 생생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엘사?”


한스가 이상한 낌새를 채고 작게 엘사를 부르자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엘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안나 공주와 한스의 결혼에 반대합니다.”


“엘사, 너 지금..”


거짓말처럼 엘사의 입에선 진심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오히려 마음은 편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한스는 엘사를 막으려 했지만 너무 늦었다. 

루나드는 엘사의 말에 눈썹을 치켜올리며 무슨 말인지 물었다.


“안나 공주를 제 반려로 맞고싶습니다.”


“뭐?”


“공주와 저는 서로 좋아합니다. 이미 마음까지 확인했습니다.”


엘사의 폭탄 선언에 루나드는 최대한 머리를 굴리며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평소 절대 자신을 드러내는 법이 없는 손녀가 이렇게까지 변해서 왔다는 것에 대해 놀라기도 했지만 방금까지 한스와 서던의 공주가 결혼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었는데 엘사의 말은 그의 심기를 거스르기 좋았다.


“지금 그게 무슨 말이지?”


“서던의 공주를 제 아내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폐하.”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이 필요할것 같구나.”


“...... .”


한스의 얼굴은 이미 굳어져 있었다. 더 이상 엘사의 입을 다물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는 차라리 루나드가 말도 안 된다며 거절하길 바라는게 더 승산이 있을 것 같다고 여겼다. 실제로도 그러했고.


“서던의 공주와 네가 서로 좋아한다고?”


“...예.”


“그리고 한스 너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결혼 얘기를 꺼냈다?”


“예, 폐하.”


루나드의 질문에 한스는 순순히 대답했다. 여기서 거짓을 말해봤자 아무 이득도 없었다.

루나드는 엘사의 눈을 찬찬히 보더니 흥미롭다는 듯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지금 이게 무슨 장난들이지?”


루나드의 불쾌할 수는 있어도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한 사람들 사이에 두고 싸우는 일이야 가끔씩 있던 일이었지만 엘사와 한스가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이 흥미롭기도 했지만 사실 무엇보다 자신의 손녀인 엘사가 변했다는 사실이 그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장난이 아닙니다, 폐하. 저와 공주는 서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루나드는 이 상황이 어쩌면 엘사에게 좋은 자극제가 되어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감정을 숨기는 것과 감정이 없는 것은 엄연히 달랐으니까. 서던의 공주가 어떤 사람인지는 몰라도 아주 단단히 두 사람을 홀린 것 같았다. 루나드는 엘사의 말도 검토해 볼 의향이 있었다. 비록 한스가 먼저 말을 꺼냈지만 어찌되었든 그는 더 이득이 되는 쪽을 선택할 필요가 있었다. 굳이 따져보자면 한스를 택할 가능성이 더 높았지만 고려해볼만 했다. 엘사가 그 다음 말을 하기 전까지는.


“...필요하다면, 왕위도 포기하겠습니다.”


그 순간 루나드의 눈빛이 야수처럼 변하고 찻잔들이 날아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엘사의 마지막 말은 루나드의 화를 부르기에 가장 좋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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