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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청혼하러 가는 길(20)

ㅇㅇ(125.129) 2020.03.27 21:45:19
조회 565 추천 57 댓글 15


엘사는 며칠째 방안에 갇혀 있는 신세였다. 루나드의 근신 처분과 더불어 문 앞의 경비병들은 엘사를 감시하고 있었다.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이 답답했지만 사실 그것보다 루나드의 반응이 더 답답했다. 근신처분 이후로 왕에게선 어떠한 말도 더 들을 수 없었다. 

차라리 속 시원하게 거절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엘사는 한숨을 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부터는 간간히 보이던 한스도 모습을 감췄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들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안색이 좋아보이는구나.”


그 순간 문을 열고 들어온 루나드의 모습에 엘사는 깜짝 놀라며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나드는 천천히 걸어와 엘사 맞은 편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가 엘사에게도 앉으라고 손짓했지만 엘사는 그럴 수 없었다. 쿵쿵대며 빠르게 뛰는 심장에 엘사는 마른 침을 삼키며 루나드를 바라보았다.


“계속 서있을 참이냐?”


“괜찮습니다.”


루나드는 더 이상 권하진 않았다. 그는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엘사는 그의 입에서 나올 말들이 두려웠다.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왔을까? 


“너도, 나도 돌려 말하는건 못하니 바로 말하도록 하지.”


“…… .”


“네가 서던의 공주와 결혼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봐라.”


“예?..”


“네가 상대에게 뭔가를 요구했으면 그 상대를 설득시킬 수 있어야지. 그러니 말해봐.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줘야 하는지.”


“…… .”


“무슨 이유로 네가 감히 왕위까지 포기하겠다는 말을 하는지 나도 들어야겠다. 설마 아무 생각 없이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닐테지.”


루나드의 말은 맞았다. 예전부터 그가 엘사에게 가르쳤던 것들 중의 하나였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요구하면 상대를 설득하거나 상대에게도 알맞은 이득이 돌아가야 한다고. 모든 것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있어야 한다는게 루나드의 가르침 중 하나였다.

엘사는 잠시 망설이다 이내 의자에 앉았다. 더 이상 거리낄 것도 없었다.


“제가 좋아하니까요. 많이.”


“젊은 날의 치기는 언제든지 있을 수 있지. 다른 이유를 대봐.”


“그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


“그건 이유가 될 수 없어. 특히 미래의 왕이 될 사람에게는 더더욱.”


루나드는 팔걸이에 한쪽 팔을 기댄 채 대답했다. 엘사의 대답은 그의 성에 차지 않았다. 그는 좀 더 근본적인 이유를 듣고 싶어했다. 엘사가 쉽게 보이지 않는 깊은 곳까지.

엘사는 루나드의 반응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렇기 때문에 필요하면 왕위도 포기했다고 말씀드린겁니다. 국혼이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거라면..”


“엘사,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구나.”


“네?..”


“애초에 네게 왕위를 포기하는 선택지가 있는 것 같더냐?”


“폐하!”


“그러니 이유를 대. 사랑이니 뭐니 하는 장난 같은 것 말고.”


“...저는 정말..”


“너의 사랑타령이나 듣자고 여기 온 것 같더냐? 설령 그렇다 해도 너에게 사랑은 이유가 될 수 없어. 넌 아렌델의 다음 왕이 될 테니까.”


“…… .”


“그에 걸맞는 이유가 있어야 하지.”


루나드는 아주 확고했다. 엘사가 아무리 왕위를 포기한다 해도 그는 절대 엘사를 놔주지 않을 기세였다. 하나 뿐인 후계자이기 때문에, 앞으로 왕이 될 사람이기 때문에 행동 하나하나에도 신중을 기해야 했고 어떠한 일을 벌일 땐 그에 맞는 명분이 있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스가 안나를 좋아한다는 말은 납득할 수 있었지만 엘사의 경우는 아니었다. 좋아한다는 것을 넘어선 무언가가 더 있어야 했다.

왕이 되어야 하는 사람이니까.


엘사는 그의 말에 온 몸이 굳어버린 듯 말을 하지 못했다. 당혹스러워 하는 엘사를 보던 루나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엘사의 대답은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엘사는 문 쪽으로 걸어가는 루나드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대체 그가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서던의 공주가 곧 아렌델로 올거다. 한스가 데리러 간지 좀 되었으니 곧 도착하겠지. 공주가 온 뒤에도 네 대답을 듣지 못하면 그 다음은 네가 더 잘 알겠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루나드는 방을 나갔다.

엘사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아주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엘사의 머리를 어지럽게 휘저어 놓은 것 같았다.

안나가 아렌델에 온다는 사실이 엘사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게다가 한스를 보냈다는 건 아직 루나드가 마음을 정하지 않았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엘사는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쓰러지듯 의자 위에 털썩 앉았다. 안나.

안나를 다시 볼 수 있다. 

그 사실이 엘사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고 있었다.










<재회>



서던의 풍경은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햇살이 따뜻하고 해바라기가 많던 나라.

마치 서던은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은 자신은 루나드의 명을 받고 공식적으로 방문했다는 것과 과연 크리스토프가 안나를 보내줄지 의문이었다. 

그가 마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얼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뵙습니다. 폐하.”


“이렇게 금방 보게 될 줄은 몰랐군요.”


크리스토프는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든 모양인지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한스는 이해한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물론 전령이 한발 먼저 아렌델에서 자신이 온 다는 말은 전했겠지만 서던의 입장에서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크리스토프와 한스는 곧장 응접실로 향했다. 한스는 안나의 안부를 묻고 싶었지만 아직 순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왕의 의중을 먼저 알아야 했다.


“잘 지내셨습니까? 서던은 여전히 아름답더군요.”


“한스, 어차피 서로 시간이 없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왜 온 겁니까?”


크리스토프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한스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그의 말에 한스는 미소를 지으며 이놈이나 저놈이나 성질 급한 것은 똑같다고 생각했다.


“루나드 폐하께서 서던의 공주님을 아렌델에 정식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초대요?”


“예. 이전에 엘사 공주와 저를 잘 대접해주신 보답으로 이번엔 아렌델에 방문해주시길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안나를?”


“예. 폐하께서도 와 주신다면 큰 영광이지만 쉽지 않은 일이니 부디 공주님만이라도 오시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스, 나는 그 말이 이해가 안 되는데..”


“…… .”


“대체 지금 무슨 일을 꾸미는겁니까? 아니, 애초에..!..”


쾅!


그 순간 갑작스럽게 문이 열리는 소리에 한스와 크리스토프는 문 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서 있는 여인이 보였다.

서던의 공주.


“엘사?..”


안나는 황급히 안으로 들어오며 엘사를 찾았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엘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나에게 목례를 했고 크리스토프는 제발 진정하라며 안나 대신 문을 닫았다.


“오랜만에 뵙네요, 공주님.”


“아..한스.”


“아쉽지만 엘사는 오지 않았습니다.”


한스의 말에 안나의 얼굴엔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렌델에서 사람이 온다는 말에 혹시라도 엘사가 오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서둘러 뛰어왔지만 엘사는 없었다.

안나는 바보같이 헛된 희망을 품고 뛰어온 자신이 너무 부끄럽기도 하고 엘사가 없다는 사실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크리스토프는 그런 안나를 의자에 앉히고 자신도 그 옆에 앉았다.

그리고 한스를 바라보았는데 일종의 무언의 압박이었다. 안나와 자신에게 제대로 설명하라는 압박.

한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들이 부담스러웠지만 자신은 반드시 안나를 데리고 가야했다.

그리고 그러려면 크리스토프보단 안나를 설득하는게 더 빠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미 폐하께는 말씀드렸지만..루나드 폐하께서 공주님을 정식으로 아렌델에 초대하셨습니다.”


“네? 저를요?”


“네. 이전에 저희가 신세를 진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폐하께서 오셔도 무관합니다만...쉽지 않은 일일 테니 부디 공주님만이라도 방문하시길 원하십니다.”


“한스, 나는 진짜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내 동생을 아렌델에 홀로 보내는 건 아무래도 쉽게 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요.”


안나의 손을 잡고있는 크리스토프를 보니 한스는 차라리 사실대로 말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 납득할만한 이유를 대지 못하면 크리스토프는 절대 안나를 보내지 않을 것이다.


“...사실대로 말씀드리는게 낫겠군요.”


“말해주세요.”


“...저는 아렌델에 돌아간 직후, 안나 공주님께 정식으로 청혼하고 싶다고 루나드 폐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 말에 안나와 크리스토프는 무척 놀란 것 같았다. 안나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크리스토프 역시 벙 찐 얼굴로 한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스는 아마 엘사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하면 이 남매는 기절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엘사 역시…”


“...?..”


“안나 공주님께 청혼하겠다고 했습니다. 필요하면 왕위를 포기해서라도요.”


한스의 말에 안나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나의 얼굴은 창백해져 있었다.

자신이 무엇 때문에 그토록 아파하며 엘사를 보냈어야 했는지. 자신의 이런 고통은 엘사를 위해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스의 말을 듣는 순간 안나는 자신이 그토록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에 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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