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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청혼하러 가는 길(22)

ㅇㅇ(125.129) 2020.03.31 21:58:33
조회 594 추천 56 댓글 14


안나와 한스가 아렌델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 덧 노을이 지는 때였다.

마차에서 내리는 안나의 손을 잡아주며 한스는 공주가 긴장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공주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때 시종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아렌델이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안나 공주님.”


“감사합니다.”


“여기서부턴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한스는 시종의 말에 자신이 안나를 방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으나 시종은 고개를 저었다.

대신 그에게 루나드가 집무실에서 기다린다는 말을 전했다.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공주님.”


“나중에 봐요, 한스.”


“...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안나는 불안해하는 한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나라고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아렌델에 온 이상 충분히 각오했던 일이었다. 

시종은 안나를 데리고 복도 저편으로 사라졌다. 한스는 안나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한참을 그대로 서있었다. 그도 알고 있다. 지금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한스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 한쪽에서는 벽난로에 장작이 타고 있었다. 난로를 피울 정도의 날씨는 아니었지만 루나드의 취미 중 하나였다. 

불타는 벽난로 앞에서 생각을 정리하는 건 그의 오랜 습관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한스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그가 앉아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다녀왔습니다, 폐하.”


“...... .”


“다행히 공주님께서 흔쾌히 오겠다고 하셔서..”


“공주는 어떤 사람이지?”


“예?”


루나드는 한스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한스는 루나드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루나드는 여전히 장작더미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다시 물었다.


“공주는 어떤 사람인지 물었다.”


“..공주님은 다정한 분입니다. 아름다우신...”


“그런 대답 말고.”


루나드는 한스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한스에게 다가왔다.

한스는 루나드를 피하진 않았지만 자기도 모르게 몸이 경직되는 것 같았다. 그는 마른 침을 삼키며 루나드의 말을 기다렸다. 

루나드는 마치 사냥감을 앞에 둔 포식자처럼 입맛을 다시는 것 같았다.


“공주의 무엇이 그리 좋았지?”


“...따뜻한 분이라서요. 같이 있으면 기분이 좋았습니다.”


“따뜻한 사람이라...친절하다는 뜻이냐?”


“그것과는 별개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루나드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한스에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다시 천천히 벽난로 앞으로 돌아갔다. 한스는 참았던 숨을 내쉬며 루나드를 바라보았다. 

왕의 의중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단순히 안나에 대한 호기심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더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공주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공주와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구나.”


“폐하?..”


“그만 가봐. 엘사가 기다리지 않겠느냐.”


루나드는 한스가 어떻게 나올지 다 알고 있다는 듯 손짓하며 나가보라고 했다. 순간 불안감이 한스를 엄습해왔다. 안나와 루나드의 저녁 식사. 그것도 단 둘이.

한스는 그 자리에 자신도 끼워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루나드의 말을 어길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루나드가 말했던 것처럼 엘사의 방으로 향했다.







한스는 엘사의 방에 들어가기도 전에 엘사를 만날 수 있었다. 근신이 풀린 모양인지 엘사의 바깥 출입이 자유로워 보였다. 한스를 발견한 엘사의 표정이 굳어져 있었다. 

한스가 왔다는 것은 이곳에 안나가 있다는 소리였다.


“한스!”


“오랜만이네.”


“어..언제 온거야?”


“방금.”


“안나는?”


자신의 양 어깨를 잡으며 다급하게 물어보는 엘사에 그는 얼굴을 찌푸렸다. 안나와 엘사 둘 다 어딘가 비슷한 면이 있었다. 

소중한 것이 생기면 그 외의 것들은 잘 안보는 점. 물론 엘사가 훨씬 심했지만.


“무사히 도착했어.”


“지금 어딨어?!”


“폐하와 식사 예정이야. 단 둘이.”


“뭐?”


“너와 나는 빠져 있으라는 엄명이야.”


한스의 말에 엘사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갔다. 루나드가 안나에게 뭐라 할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물론 안나를 다치게 하는 일은 없겠지만 안나의 마음을 상처 입히는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엘사는 고개를 저으며 곧장 식당으로 달려가려 했다.

그 순간 한스가 엘사의 팔을 잡았다.


“폐하의 명이야.”


“그렇지만..!”


“진정해. 아직 아무 일도 안 일어났으니까.”


“...... .”


“기다려봐. 게다가 공주는...”


“..?..”


“네 생각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야.”


한스의 말에 엘사는 말문이 막힌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 대로 안나는 강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아는 그 누구보다 더 심지가 곧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한스가 엘사의 팔을 놓자 엘사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한스는 이미 저 멀리 어딘가 다른 곳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네게 할 말이 있다고 했어.”


“뭐?”


“공주가 네게 할 말이 있다고, 그래서 온 거라고 했어.”


“그게 무슨...”


“만나면 알게 되겠지.”


“...... .”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어...최소한 나는 그래.”


“한스?”


“나도 더 이상 모르겠다.”


그 말을 남기고 한스는 천천히 엘사에게서 멀어져갔다. 한스의 얼굴은 쓸쓸함을 넘어서 마치 무언가 포기한 사람 같았다. 안나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엘사는 알 길이 없었다. 엘사는 멀어져가는 한스를 붙잡고 싶었지만 그가 그러길 원치 않는 것 같았다. 대신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안나가 머무는 방을 찾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안나를 만나야 했다.

더 이상 제자리에 주저 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아렌델의 식당은 서던에 비해 화려한 편이었다. 긴 탁자와 의자들이 정렬되어 있었고 황금으로 칠이 된 장식들과 등불의 빛은 식당의 분위기를 아늑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안나가 드레스를 갈아입고 시종의 안내를 받아 식당에 도착했을 때 루나드는 이미 공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나가 들어서자 루나드는 자리에 일어나 안나에게 다가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렌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안나 공주.”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편하게 안나라고 불러주세요, 폐하.”


안나는 살짝 무릎을 구부리며 루나드에게 예의를 갖췄다. 루나드의 첫인상은 엘사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사람이었다. 오히려 크리스토프와 비슷한 이미지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자신을 내려다보는 루나드의 눈 너머는 엘사와 닮아 있었다. 깊은 호수처럼 끝을 알 수 없는 진한 눈동자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엘사는 그 너머를 알고 싶게 만든 사람이었다면 루나드는 조금 더 위험한 느낌이었다. 일종의 두려움. 안나는 어렴풋이 그걸 느끼고 있었다.


“나머진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합시다.”


루나드는 안나를 위해 의자를 빼주었고 안나는 간단한 목례로 감사하다는 말을 대신했다.

루나드도 자리에 앉자 시종들이 잔에 물을 채워주고 음식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안나는 자신을 보며 미소 짓는 그가 단순히 식사나 같이 하자고 부른 것은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정확한 의중은 모르겠지만 분명 자신에게 할 말이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여행은 편안했습니까? 한스가 무례하게 굴진 않았나 모르겠군요.”


“덕분에 편하게 왔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루나드는 가볍게 웃으며 포도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안나는 그의 예상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단순히 어린 공주일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만나니 자신의 생각이 빗나갔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몸에 밴 예절이나 말투 등은 왕족이니 당연히 어느정도 예상했지만 자신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눈동자를 보면서 엘사와 한스가 왜 그러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일전에 저희 아이들이 신세를 많이 졌다고 들었습니다.”


“오히려 같이 축제를 즐겨 주셔서 저희가 감사했죠.”


“하하하, 안나 공주도 아렌델에서 충분히 즐기다 가셨으면 좋겠군요.”


“감사합니다.”


루나드는 일부러 의미 없는 대화만 이어가고 있었다. 아직은 안나에 대해 더 알아야 했다.

단순히 공주에 대한 정보보다는 대화를 하면서 나오는 습관이나 말투, 행동 등에서 안나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기 위해 애쓰는 중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러는 것을 아마 안나도 알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엘사 공주님과 한스는..”


“아, 그 둘은 오늘 일이 있어서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내일은 다 같이 차라도 한잔 하도록 하죠.”


안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안나도 이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마치 포식자가 사냥하기 전 사냥감을 탐색하는 것처럼 루나드는 아주 천천히 안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거의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폐하.”


“말씀하시지요.”


“오늘 저를 부른 이유, 말씀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단순히 식사만 하자고 부르신 건 아닌 것 같아서요.”


안나는 차라리 자신이 먼저 말을 꺼내는게 낫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피하지 못할 상황이라면 직면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 예상대로 안나는 루나드의 눈에서 아주 약간의 흔들림을 보았다.


실제로 루나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안나의 말에 놀람을 넘어 흥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엘사나 한스라면 절대로 하지 못할 말이었다.

그런데 이 어린 공주는 자신이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꽤 루나드의 마음에 들었다. 루나드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수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대략적인 내용은 들었습니다.”


“으흠, 그래요?”


루나드는 뜸을 들이며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마치 안나가 먼저 주제를 꺼내 보라는 듯한 태도였다. 그는 이 공주가 어디까지 나올 수 있는지 궁금했다. 정말 엘사나 한스에게 알맞은 사람이 될 수 있는지.


“..폐하, 저는 엘사 공주님께 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합니까?”


“왕위를 포기하면 안 된다고 말씀드리려 합니다.”


“...외부인이 왕위를 논한다는 건 모양새가 좋지 않군요. 안나 공주.”


“하지만..”


루나드는 거침없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안나는 그 이유에 대해 더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설령 안나가 루나드와 뜻이 비슷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엄연한 외부인이기 때문에 더 조심해야 했다. 


“하지만 나도 동의합니다. 엘사는 왕위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


“외부인 때문이라면 더더욱.”


안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게다가 루나드의 말은 정확하게 자신을 가르키고 있었다. 일종의 경고이기도 했다. 더 이상 엘사를 흔들지 말라는 경고. 안나와 루나드의 의견이 일치한 것은 다행이었지만 그 방향은 서로 달랐다. 안나는 거센 폭풍우 한 가운데 혼자 떨어진 느낌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사히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제 넘었던 것 같습니다, 폐하.”


“엘사를 생각해서 한 말일 테니 넘어가도록 하지요.”


루나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저 식사를 이어갔다. 안나는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다. 

자신과 의견이 일치했음에도 불구하고 루나드는 마치 엘사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루나드가 원하는 것이 따로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안나는 입맛이 사라졌다. 

과연 그가 경고만 하는 것일까? 아니면...


“한 가지..궁금한게 있긴 한데..”


“네?..”


예상치 못한 루나드의 말에 안나가 고개를 들어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루나드의 표정은 마치 궁금한걸 넘어서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마치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 같은 느낌.


“과연 그대가 차기 아렌델의 왕비에 어울리는 사람인지 궁금하군요.”


루나드의 마지막 말은 안나의 숨소리마저 집어삼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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