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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Praying prey 54~55

개구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4.05 22:32:12
조회 367 추천 55 댓글 7



1~53화.


https://sulgal.tistory.com/m/2109













143.

셰필드 테라스 23가에도 자정을 지났다는 것을 알려주듯 빗소리가 창가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한나는 생전 처음 들어와보는 이두나의 집에 긴장을 풀지 못하고 붉은 5인용 소파 위에 앉아 손가락과 다리를 떨고 있었다. 한나는 이두나의 집이 마치 개미굴 같다고 생각했다. 밖에서 볼 땐 그저 하나의 방으로만 보였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와 보니 계단을 타고 올라가야 하는 방도 있었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방도 있었다. 6개의 방 중 2개는 아주 간단한, 최소한의 생활만 가능할 밋밋한 푸른색의 침대, 책상, 의자가 전부였고, 나머지 4개의 텅 빈 방 한구석에는 커다한 종이 상자가 투명한 테이프로 칭칭 묶여 있었다.




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아렌의 성을 가지고 있어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은 존재했다. 분명 이두나 아니면 안나가 해 놓은 것이리라고 한나는 생각하면서 알 수 없는 내용으로 가득 채워진 메가라의 노트북 스크린을 힐끔거렸다. 스크랩된 기사부터 눈가에 검은 선이 칠해진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스크린 속에서 메가라의 마우스에 조종되고 있었다. 갈색 목재 테두리의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한나의 왼편에 앉아 노트북을 바로 앞 낮은 책상에 두며 작업하는 메가라의 타자 소리에 규칙적으로 섞여 들어갔다. 그런 한나와 메가라에게 오로라는 따뜻한 코코아 세 잔을 쟁반에 담아 들고 와 한나의 오른편에 앉았다.





오로라가 한 잔씩 두 사람에게 머그컵을 내밀었다. 메가라는 코코아를 겨우 한 모금 홀짝인 다음 책상에 내려놓았고, 한나는 두 손으로 받아든 잔 속의 검은 액체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달콤한 향을 가지고 있으면서 따뜻한 기분 좋은 액체에 한나는 곧잘 후 후 입을 불어가며 조금씩 마셨다. 불안했던 심리는 한나가 잔을 절반 정도 비웠을 때가 되서야 비로소 누그러졌다.


"전 한나가 안나의 쌍둥이 동생인 줄 알았어요."


오로라는 이제 겨우 두 모금 코코아를 마시고 있었다.


"머리 색만 빼고 모두 닮았잖아요."


"뭐...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네요."


한나가 코코아 잔을 책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근데 전 안나의 쌍둥이가 아니예요. 오로라 씨도 들었다시피... 전 상식적으로 태어난 게 아니거든요."


한나가 컵을 향해 손짓을 하자, 바람이 컵 안에 든 코코아를 허공에 띄웠다. 코코아는 이내 둥그런 구체 모양으로 한나의 주위를 맴돌았다.


"아마 한스란 자식이 절 만든 게 분명해요. 엘사도...멜리사는 얼음이라면, 저는 바람이예요."


한나가 손가락으로 집게를 만든 다음, 엄지와 검지를 두 번 부딪히자, 공중에 떠 있던 코코아가 하트 모양으로 모습을 바뀌었다.


"우와."


감탄하는 오로라와, 잠시 작업을 멈춘 메가라는 한나의 바람 예술을 흥미있게 바라보았다.


"다른거, 다른 건 없어요?"


어릴 적 놀이공원의 마술사를 보는 것처럼, 오로라가 한나에게 어린아이마냥 재촉했다.


"재밌네요."


메가라는 짧게 한나의 능력을 칭찬했다. 한나는 양 손의 검지손가락을 이용해 허공에 별을 그렸고, 한나의 손가락에 맞추어 바람은 허공에 별을 만들었다. 한나가 손바닥을 뻗자, 별은 한나의 손에서 멀어져 천장을 배회했다.


"나도 이런 거 가지고 싶은데...."


오로라가 우수에 가득찬 눈으로 천장의 코코아 별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나가 돌아오라고 손짓하자, 바람은 별을 코코아 잔에 다시 담았고, 식어 있던 코코아엔 다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하늘도 날 수 있어요?"


메가라의 질문에, 한나는 메가라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고, 메가라는 작은 비명을 지르며 소파 위 공중에서 바람에 안겨 둥실둥실 뜨기 시작했다.


"오, 어우, 워우."


메가라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고, 종아리를 까딱거리면서 그 부유감을 은근히 즐겼다. 놀이공원의  자이로드롭을 탔을 때의 것은 아니어도, 코코아 잔을 들고 있어 약간의 아찔함은 느낄 수 있었다.


"듣고 보니까, 엘사의 피가 그렇게 중요하다면서요."


조심스럽게 메가라를 소파에 내려놓으며 한나가 말했다.


"그거 진짜예요?"


한나는 메가라, 그리고 CIA라는 조직과 3주간의 나날 중 일부를 대담하는데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한나는 아렌, 그리고 오로라와 메가라 이외의 다른 이들을 믿기 힘들어했다. 태어나서 주입된 중요할 기억들은 모두 조작되었고, 자신을 태어나게 해준 사람은 결국 인연을 죽음에 이르게 방치하게 만들었기에, 한나는 사람 간의 신뢰를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한나는 자신이 CIA에서 들었던 대화들이 모두 진실을 담고 있진 않을 거라고 추측했다.


"절 못 믿으실지 몰라요. 저도 아직까진 농장...아니, 랭글리 소속이니까요."


메가라는 잠시 쉬고 싶다는 듯 노트북의 스크린을 닫았다. 노트북의 표면에 한국의 대기업 브랜드의 로고가 잠시 붉게 점등하더니, 잠이 들 듯 회색 빛을 띄었다.


"일단 내부적으로 논의는 나왔어요. 항바이러스제 다음으로 불사....아렌들의 입장에선 '부활'이라고 말해야겠죠. 엘사의 피에서 유독 죽은 세포를 되살리는 성분이 많이 검출되었어요. 몇가지 임상실험도 거쳤는데...죽은 뇌세포도 살아나 분열되었다는 보고도 나왔고요."



"사람까지 살린다는 보장은 없잖아요."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하지만 당신들은 사람 이외의 범주에 있어요. 우리의 상식이, 당신과...멜리사..엘사한테 통하지 않는 게 있을 거란 소리예요."


메가라가 컵에서 흘러나오는 코코아의 향을 음미하며 말했다.


"심사 중인 기밀들이 많긴 해도, 이건 말할 수 있어요. 엘사가 행하는 치유 능력의 기원은 그 재생 성분일 거예요. 그걸 적절히 개량하면...가깝진 않아도 이두나 사장님을 살릴 수 있을 정도의 시약을 만들 수 있을 거예요."


한나는 메가라의 말을 듣고 입 안을 살짝 깨물었다. 너무 추상적인 내용이었고, 근시일에 착수될 프로젝트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항바이러스제보다 순서를 앞당길 순 없어요?"


한나가 질문했다. 바이러스는 언제나 새로운 것이 창궐할 수 있고, 엘사의 피에 들어있는 항바이러스 성분은 한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확실한 사례가 없는 이상은 불가능할 것 같은데요."


메가라가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을 바라보며 말했다.


"엘사가 엄마를...아직..."


확실한 사례라면, 엘사가 이두나를 살리는 경우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모르죠. 며칠 안에 이두나 사장님이 깨어나신다면, 제가 연구팀에게 해당 케이스를 보고해 우선순위를 바꿀 수도 있잖아요?"


메가라가 컵 안에 후후 바람을 불어넣으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본 한나는 손가락으로 바람 한 줄기를 보내 메가라의 코코아를 부드럽게 저었다.


"고마워요."


알맞게 식은 코코아를 마신 메가라가 한나에게 말했다.


"한나, 한나는 연구실에서 어떻게 지냈다고 했죠?"


문득, 메가라가 한나의 과거를 물었다. 숨길 것도 없는, 잔인하고 매정한 시간들이었다. 떠올리기 싫었지만, 이제 한나에게 이뤄질 잔인한 실험들은 없었다. CIA의 연구 대상에서도 제외되었으니, 한나는 사실상 민간인이나 다를 바 없었다.


"거의 고문을 당했어요. 먹을 건 고사하고 주사기로 이상한 액체를 주입시키고... 주입당할 때마다 제 몸이 커져갔어요. 마치 두터운 갑옷을 입는 것마냥 불편했는데 지금은 괜찮고... 또..."


한나는 턱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다음에 할 얘기를 생각해냈다.


"생명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죽일 수 있는지에 대해 강제로 배웠다고 할까요... 그들은 억지로 절 재우고, 억지로 절 깨웠어요. 깨어 있는 때에는 살아있는 돼지와 사람 같은 인형, 처음엔 그저 사람 크기의 봉제인형을 주었는데, 그것들을 쏘거나 베지 않으면 천장에서 총이 나와 절 제압했어요."


"총으로 쐈다고요?"


오로라가 걱정하는 표정으로 한나의 어깨를 짚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테이저건과 비슷했죠. 감전당하지 않으려고 계속, 칼로 베고 총으로 쏘고... 얼만큼 했는지 기억도 안 나요."


한나는 메가라가 준 스마트폰을 꺼내 잠금을 해제했다. 한나의 스마트폰 배경화면에는 안나가 찍어준, 잠이 들어있는 엘사가 들어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인형들이 안나의 모습으로 교체가 되었더라구요. 또...그 자식들이 제 머리에 이상한 기억들을 심어 놓았어요."


한나는 잠든 엘사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내 그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졌다.


"안나가 엘사를...때리는 모습, 엘사가 우는 모습. 그걸 그저 바라만 보는 제 모습을 담았죠. 아니, 욱여넣었죠. 그래서... 메가라도 알다시피, 그 저택에 처음 들어왔을 때, 스칼렛... 안나를 죽이고 싶었어요."


여기서부턴 메가라와 오로라가 듣지 못한, 한나의 이야기였다. 메가라는 코코아 잔을 다시 들었고, 오로라는 말없이 코코아를 홀짝이며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이두나... 엄마.. 엄마라고 불러야겠죠. 엄마가 절 계속 말렸어요. 뭐 '스칼렛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라던가, '한번 만나서 얘기해 봐라.'던가... 사실 못 믿었어요."


"못 믿을 수도 있어요. 사람은 기억에 의존해 행동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물론 다수의 경우엔 선택을 해야 하지만, 한나 씨는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었잖아."


"사장님이 한나한테 선택지를 하나 더 주신 거네요."


오로라는 내심 사장님의 혜안에 감탄하면서도, 안나와 원만하게 소통하는 한나의 인내심을 존경했다. 한 순간에 사람을 바꾸는 건 살면서 보지 못했고, 바꿔지는 사람 또한 순순히 응했다는 사실은 오로라에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러다가... 엄마하고 좀 말다툼, 음. 말다툼을 좀 했고, 그 때부턴 마음에 혼동이 찾아오는 거예요. 속은 울렁거리고, 앞은 흐리고... 변기에 물 좀 쏟아내고 입읋 헹굴 겸 거울을 봤는데... 거울 속의 제가 안나하고 닮은 거예요. 여기서부턴 제 기억을 거의 믿지 않기로 했어요."


"거울? 한나, 거울은 못해도 하루에 한 번 정도는 볼 텐데..."


메가라는 어느 정도 짐작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한나의 말에 수긍했지만, 오로라는 한나의 말꼬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건 얘기가 끝나고 말해줄게요. 무튼간에, 안나가 애들하고 같이 저택으로 쳐들어왔을 때, 저는 엄마랑 약속을 했고... 결국 그건 반절만 지켜졌어요. 그 이후엔 메가라하고 오로라가 아는 것들이예요."

"그래서 한나, 지금 나이가 어떻게 돼요?"

오로라의 질문은 살아가면서 한 번 쯤 접하게 될 단순한 회화 중 하나였다. 하지만 한나라는 특수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심오하게 접근해야 할 주제였다.

"듣고 안 놀랄 자신 있어요?"

어느덧 한나는 코코아를 모두 비웠고, 컵을 바람에 실어 부엌의 싱크대로 안착시켰다.


"하이랜더 증후군은 아니죠?"


"오히려 반댄데...."


"미성년자?"

"...0살이예요."

자포자기하듯 한나는 나이를 말했고, 오로라는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도대체 언제부터 메가라의 허풍을 배운 거예요?"


"제가 언제 허풍을 떨었다고 그러세요?"


코코아 잔을 기울이던 메가라가 오로라에게 응수했다.


"뭐 있잖아요. 애국이니 뭐니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그건 제가 살아온 인생에 빗대어서 말한 거예요. 오로라는 그저 커피와 케이크 생각만 할 거 아니예요?"


"엘사 생각도 하거든요."


곧 두 사람 간의 유치한 설전이 오갔고, 한나의 나이는 대화의 뒷전으로 미루어졌다. 한나는 어깨를 으쓱이면서도, 지금 이 상황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걸 느꼈다. 안나, 엘사, 그리고 멜리사가 같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정겨운 대화 속에서 한나는 솔직해질 수 있었다. 저택이었다면, 엄마에게 말해주지 못해 끙끙댈 비밀도, 비로소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나자 부드럽게 혀끝을 타고 밖으로 흘러나왔다. 메가라는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을 약을 계획중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엄마, 그리고 멜리사를 살릴 수 있다는 소리였다. 한나는 문득, 모든 아렌이 모일 날을 상상했다. 분명 시끄럽고, 왁자지껄하면서 정신을 집중할 수 없을 많은 일들이 일어날 것이었다. 




하지만 한나는 오히려 그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돌아갈 곳이 있고, 받아줄 곳이 있고, 사랑을 할 수 있는 곳이 생길 것이기에, 한나는 영안실에 누워있을 엄마, 그리고 안나의 옆에 누워있을 멜리사를 떠올리며 속으로 기도했다. 한나는 스마트폰을 켜 엘사의 사진을 다시 바라보았다. 내일 아침이 밝아오르면, 한나는 메가라를 졸라 병원으로 가 엘사를 만나 돌볼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한나 생각은 어때요?"


"예?"


한나의 행복한 상상을 오로라가 깨뜨렸고, 한나는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제 머리에 꽃밭이 있다는거, 그렇게 생각하냐구요."


오로라가 잔뜩 토라졌고, 메가라는 허리를 꼿꼿이 피며 가소롭다는듯 오로라를 내려다보았다.


"어...그러니까..."


'왜 주제가 이렇게 바뀐거지.'


한나는 관자놀이를 긁으면서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마치 자신의 의견에 따르라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저는...."


그 때, 한나의 대답을 자르는 두드림이 현관에서 일어났다.


"아뜨뜨..."


깜짝 놀라 코코아를 손에 쏟은 오로라가 티슈를 뽑아 코코아를 닦았고, 한나는 문을 주시하면서도 차가운 바람을 만들어 오로라의 손등을 식혔다. 메가라는 탁자 밑에 둔 검은 보스턴 백에서 권총 두 개를 꺼내 슬라이드를 당긴 다음, 오로라와 한나에게 건넸다. 오로라와 한나가 받은 권총은 소음기와 포어그립이 부착된 시그 사우어 P320 컴팩트 모델이었다.


"오로라, 창문으로 가서 커튼 내려요."


"아니, 내가 할 수 있어요."


한나가 활짝 핀 손에 주먹을 쥐자, 창문 마다 활짝 펴 있던붉은 커튼들이 바람에 휘말려 모두 내려갔다.


"...유용하네요."


메가라가 부엌 벽으로 이동하면서 말했다.


"밖에... 누가 있는 거예요?"


오로라가 권총의 슬라이드를 약간 당겨 약실에 총알이 있는지 확인하며 물었다. 안나에게 처음 콜트를 받았을 때, 확실하게 배운 습관 중 하나였다.


"저도 몰라요. 초대한 사람은 없는데, 안나와 아이들은 병원에 있고..."


"사장님을 납치한 사람들일까요?"


"그건 아닐 거라고 봐요."


메가라가 현관을 향해 자신의 P320권총을 겨누며 말했다. 그녀의 손가락은 방아쇠울에 걸려있지 않았다. 혹시 모를 오인 사격에 방지하기 위함이었고, 검지손가락만 잘 움직인다면 현관의 기습에도 대처할 수 있는 자세였다. 한나는 천천히 몸을 숙이며 벽의 스위치를 눌렀고, 이윽고 집에는 어둠이 찾아왔다.


-메가라, 자세 그대로 유지해요. 암순응 찾아오기 전까진 움직이지 마요.-


-뭘 하려는 건데요?-


메가라는 한나가 스위치를 누른 벽을 짐작하며 눈을 돌렸고, 그곳에는 작고 푸른 빛 두 개가 어두운 허공에 어른거렸다.


-한나?-


-지금 당신들은 잘 안 보이겠지만, 난 어떤 이유에선지 어둠 속에서 사물들을 볼 수 있어요.-

-그건 왜 말 안했어요?-

-깜빡했어요. 그리고 묻지도 않았잖아요.-

한나가 문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바람에 정신을 집중해 문을 천천히 열어볼 심산이었다.


-오로라, 소파 밑으로 숨어 있어요.-


"네?"


-쉬시시.... 지금은 내 말 들어요. 방아쇠에서 손가락 빼고.-


한나는 오로라가 권총을 잡은 자세까지 훤히 볼 수 있었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있다간 자칫 중요한 순간에 같은 편을 쏴버리거나, '자살'당할 수도 있었다. 오로라는 한나의 말을 듣고 빠르게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빼고 소파 밑으로 숨었다.


-어쩔 거예요?-


메가라가 한나에게 물었다.


-일단 현관문 전등은 못 끄고 센서 방식이니까, 제가 문을 열 거예요. 제가 쏘라고 하기 전까진 쏘지 말고, 재머 켜 놔요.-


-한나, 그 능력이 얼마나 유능한지 알지만, 그건 너무....-


한나는 바람 한 줄기를 만들어 메가라의 입술을 방해했다. 메가라는 씨근대면서도 주머니에 넣어둔 재머를 작동시켰다. 그 즉시, 한나는 손으로 문고리를 잡는 시늉을 했다. 바람으로 이어진 현관 안쪽 문고리가 한나의 움직임에 반응해 철컥철컥 금속성의 소리를 냈다.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사물도 통제가 가능하단 걸 알게 된 한나는, 문고리 위의 도어락의 해제 버튼을 향해 손가락을 겨누고, 펜싱을 하듯 팔을 뻗었다. 상황과 맞지 않는 경쾌한 알람이 울리며 도어락은 해제되었고, 기다렸다는 듯 문이 벌컥 열렸다.


-아직 쏘지 마요.-


능력을 자랑하고, 현관 밖의 낯선 이를 대비하기 위해 쓴 나머지 한나는 오른손이 뻐근해짐을 느꼈다. 졸음이 한나의 눈에 앉았지만, 한나는 억지로 눈을 비비며 잠을 쫓아내었다.


"살려주세요!"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와 함께 우비를 쓴 사람이 허둥지둥 현관으로 들이닥쳤고, 한나는 손을 위로 치켜들었다. 바람이 괴한의 발을 걸어 넘어뜨렸고, 조금 큰 소리를 내 엎어진 여자는 아파하며 신음을 흘렸다. 한나는 손을 뻗어 열린 문을 향해 바람을 보내 다시 문을 닫았다. 귀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지만, 세 사람의 인기척, 그리고 주변에 사는 이웃들의 인기척 외의 것은 없었다. 빗소리만이 집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섬짓하게 창가를 내리치고 있을 뿐이었다. 한나는 비틀거리며 다시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켰고, 그만 주저앉았다.


"메가라.. 저 사람.. 확인해 봐요."


메가라는 한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권총을 우비의 머리에 겨누고 팔을 제압하고 있었다. 소파 밑에 숨어있던 오로라는 숨을 헐떡이는 한나를 보고 부엌으로 가 냉장고 문을 열어 차가운 초코우유가 든 통을 가져와 코코아 잔에 따랐다.


"한나, 괜찮아요?"


오로라가 내민 컵을 한나는 가까스로 들어 벌컥거리며 들이마셨다. 이가 시릴 만큼의 두통이 찾아왔지만 눈꺼풀의 피곤함을 쫓아낼 수 있었다.


"괜찮....겠죠."


다 비워진 컵을 오로라에게 돌려준 한나는 메가라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메가라가 우드의 후드를 벗겼다. 목소리로 성별을 예상했듯이 긴 장발을 한 여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누구세요?"


뜻밖의 질문을 한 사람은 오로라였다. 오로라는 안나에게서 배운 대로 왼손을 탄창을 받치지 않고 권총을 쥔 오른손의 손가락을 감싸는 사격 자세를 취했다. 한나는 내심 감탄하면서 권총을 여자에게 겨누었다.


"당신들...울프독 사람들이지?"


일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그 동물을 지칭하는 사람은 단 한 명 밖에 없었다. 안나 아렌, 그리고 갑자기 집에 '쳐들어온' 이 여자는 안나의 예명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


메가라가 총구를 여자의 관자놀이의 위를 겨누었다. 여차하면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의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오로라는 메가라의 태도에 놀랐지만, 한나는 3주간 메가라와 붙어다니며 눈에 담아 둔 것들이 많이 있어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 메가라는 이제 안보팔이에 질렸다고 말했으며, 그저 친구를 위해 아직 CIA에 남아있었다. 대의적인 명분은 전혀 없으니, 사의적인 명분만 남아있었다. 명분이 아무리 작아졌을지라도, 방아쇠를 건들 힘은 건재했다. 여자는 겁에 질려 있은 채로 한나를 바라보았다.


"한스, 그 새끼 찾고 싶지 않아요?"


"우리 목표가 맞긴 한데, 어떻게 알고, 당신은 누구냐니깐? 말 안하면 귀부터 자른다."


메가라가 벨트에 찬 칼집에서 나이프를 뽑아 바닥에 꽂았다. 칼날과 겨우 몇 센티미터 앞에 눈물에 글썽이는 여자의 눈이 있었다.


"제인, 제 이름은 제인이예요.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한스랑 어떤 관계지?"


메가라가 나이프를 뽑아 여자의 목에 겨눴다.


"비서였어요, 전 비서."


여자는 흐느끼면서 이름과 신분을 밝혔고, 그녀가 말한 세 마디는 아렌과 메가라가 그토록 찾고 싶어하던 최측근의 발언이었다.

















144.


희미한 빗소리를 두려워하며 두꺼운 콘크리트 괴물의 내장의 끝, 엘사가 영안실의 문을 열었을 때, 차갑게 냉각된 알싸한 공기가 폐 안으로 깊게 스며들었다. 엘사는 잔기침을 하며 어두운 영안실을 가로질렀다. 이두나, 엄마가 누워있는 케이스의 위치를 기억한 엘사는 이번에는 능력을 쓰지 않고, 직접 손으로 케이스를 끌어당겼다. 케이스는 손쉽게 미끄러져 나왔다. 엘사가 하루 전에 보았던, 하얀 수의를 입은 이두나, 그리고 엄마라고 불릴 사람이 누워 있었다.



엘사는 손을 뻗지 않고, 케이스를 낑낑대며 올라가 안으로 들어왔다. 케이스는 좁았지만, 작은 체구의 엘사에겐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엘사가 손가락으로 이두나의 어깨를 찌르자, 살아있는 듯한 부드러움과 탄성이 전해졌다. 다행이도 엘사의 능력이 적용 간격을 길게 두어도 죽은 자에게도 무리없이 유지되는 것 같았다. 안도의 한숨을 쉰 엘사는 벽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1시 12분, 앙나 언니가 언제 일어날지 알지도 못했지만, 엘사는 항나 언니가 아침에 엘사를 만나러 오는 9시 15분을 한계선으로 잡았다. 어쩌면 더 일찍 찾아올 수도 있겠지만, 엘사는 곧 여유 시간에 대한 생각을 더 하지 않기로 했다.




격양되었던 숨소리가 진정되었을 때, 엘사는 이두나의 이마를 시작으로 목, 양쪽 어깨, 복부, 그리고 다리 순으로 눈가루를 덜어 발랐다. 눈가루는 몇 초 지나지 않아 이두나의 피부에 스며들었다. 엘사는 이두나의 가슴에 귀를 가져갔다. 빗소리에 포장된 침묵이 들렸다. 엘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앙나 언니는 메가라 아줌마가 죽은 이를 살리는 약을 계획중이라고 말했지만, 엘사는 더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앙나 언니는 엘사 앞에선 겉으로 보기엔 멀쩡했지만, 이미 소중했고, 앞으로도 소중할 사람들을 한순간에 잃었다.




엘사는 알 수 있었다. 앙나 언니만큼은 아니어도, 멜리사를 구하지 못했고, 엄마라 불릴 사람을 살리기 위해 3주간 영안실에서 희망은 갈가리 찢기고, 끝도 없는 절망 속에 빠져 있었다. 살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은 생각을 전염시켰고, 앙나 언니와의 재회가 있었음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도리어 더 빠른 속도로 사고를 마비시키려 들 뿐이었다. 메가라 아줌마가 가져올지도 모르는 약은 '언제'라는 단어가 빠져 있었다. 약을 만들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았고, 기약도 없었다.



엘사는 그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이두나, 엄마를 살려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했다. 이두나를 살린다면, 그것이야말로 확실한 증거가 되어 메가라 아줌마가 더 약을 더 빨리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멜리사를 살릴 수 있다는 희망이 더욱 확실해질 것이었다. 엘사는 이번에는 이두나의 가슴 위로 만들어둔 눈가루들을 모아 얹었다. 작고 하얀 모래성은 천천히, 엘사가 느끼는 좌절처럼 무너져 이두나의 가슴 사이로 잠식했다. 엘사의 새싹같은 작은 희망은 이두나의 침묵에 밟혀 형체를 잃었다.


"아줌마...아니, 엄마..."


엘사는 이두나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언니 보러 가야죠..."


엘사는 이두나의 팔을 흔들었다. 엘사의 작은 몸짓에 이두나는 겨우 떨리듯이 흔들거렸다. 엘사는 또 다시 기침을 했다. 가시가 박힌 것처럼 아리는 고통이 일어났다. 찬 바닥에서 잔 것 때문에 감기몸살에 걸렸고, 그것 때문에 아픈 것일까 싶었지만, 앙나 언니가 준 약을 먹어도 낫지 않는 고통이라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하지만 엘사는 앙나 언니에게 이 고통을 호소할 수 없었다. 앙나 언니가 알아챈다면, 곧바로 엘사를 보호하려 들 것이고, 메가라 아줌마의 확실치 않은 약의 개발까지 이두나와 멜리사를 방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치닫게 될 것이다. 전제, 엘사는 다시금 이두나를 보며 전제를 상기시켰다.





고통은 금방 잦아들 것이고, 나중을 위해서라면 참을 자신이 있었다. 엘사는 이번에는 닫혀 있던 이두나의 입술을 벌려 눈가루들을 흘려 넣었다. 메말라 갈라져 있던 이두나의 입술 위 상처들이 조금씩 아물어갔다. 엘사는 기뻐할 수 없었다. 입안에서 이질적인 비릿한 맛이 느껴졌기 때문이었고, 그 맛은 곧 역겨움으로 변질되었다. 역함을 참지 못한 엘사는 입을 막으며 케이스를 넘었고, 바닥에 쏟아내고 말았다. 입가를 눈가루로 씻어낸 엘사는 어젯밤 먹은 식사들이 소화가 되지 않은채 알기도 싫은 액체에 섞여 바닥에 흘러내린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흐릿하게 섞인 붉은색의 액체, 엘사는 그것이 피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엘사는 고개를 들어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새벽 2시 50분, 아직 동이 틀려면 한참 남아있었고, 엘사의 체구만한 천장 쪽의 창가에는 노란 가로등 불빛이 빗방울들의 그림자를 영안실 한쪽 벽에 뎃생하고 있었다. 엘사는 시선을 영안실의 문으로 향했다. 당장이라도 엘사는 영안실을 나가, 화장실에서 입을 헹군 다음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앙나 언니의 병실로 돌아가 잠을 청할 수도 있었다. 엘사는, 다시 고개를 이두나의 케이스로 돌렸다.


"아직...은 아니야."


뱃속이 시큰거렸고,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앙나 언니, 오로랄 언니, 한나 언니에게 안겨 노곤한 잠에 들고 싶었다. 하지만 엘사는 지금 쉬어 버린다면, 그만큼 시간을 버리는 것이라는 강박을 간직하고 있었다. 엘사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케이스의 모서리를 잡고 일으키려 했지만, 중심을 잃고 넘어지면서 벽에 머리를 부딪혔다. 아윽, 짧은 비명을 질렀지만, 빗소리의 화음에 묻혀 가라앉았다. 이마를 문지르며 무릎을 짚고 일어난 엘사는, 눈가루가 녹은 손을 스웨터에 문질러 닦았다. 매끈해진 손으로 케이스를 붙잡은 엘사는, 이번에는 케이스를 넘어가는 데 성공했다. 쉴 틈이 없었다. 이미 근 하루를 의미없이 소비했고, 엘사는 그것이 위선적인 사치라고 생각했다. 일어나지 못하는 멜리사와 엄마에 비하면 너무 이기적이었다.





엘사는 눈가루를 다시 만들어, 이번에는 눈꺼풀 위에 얹었다. 엄마의 감긴 두 눈이 파르르 떨렸다. 엘사는 다시 한 번 엄마의 가슴에 귀를 가져갔다. 심장은 뛰지 않았다.


"대체...어떻게 해야 하지..."


엘사는 두 손으로 머리를 잡으며 말했다. 잠들어 있던 두통이 순식간에 찾아왔고, 엘사의 눈 앞이 흐려졌다.


"안돼... 안돼애...."


엘사는 머리를 저으며 두통과 잠에서 깨려 했다. 


"지금 자면 안돼..."


엘사는 두 손으로 볼을 때리며 말했다. 그 작은 충격에 엘사는 잔기침이 아닌, 큰 기침을 토했다. 





동이 트려면 아직 수 시간이 남았지만, 엘사의 체력은 상냥하지 못했다.

















145.


"고마워요..."



메가라는 재머를 계속 켜두기로 했고, 오로라는 코코아가 든 새로운 컵을 가져와 제인에게 내밀었다. 제인은 감사를 표하며 두 손으로 컵을 잡아 온기를 느꼈다. 아이섀도우가 옅게 칠해져 있는 관능적인 두 눈은 겁에 질려 있었고, 허리의 중간까지 내려온 머리칼은 군데군데 젖어 있어 마치 비에 흠뻑 젖은 불쌍한 길고양이를 보는 듯 했다. 입고 있는 검은색 코트는 색깔이 어두움에도 불구하고 많은 구겨짐이 눈에 띄었다.



"심문을 시작해 볼까요?"


메가라가 제인에게 가지기로 한 새로운 태도는 '친절함'이었다. 한밤중에, 더군다나 한스의 전 비서인 제인이, 그 누구도 아닌 이두나 아렌의 집에 찾아왔다는 것은 수상하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일단은 친절하게 대해 많은 정보를 빼낼 심산이었다. 궁지에 몰린 짐승을 건들여 보았자 좋은 일은 없는 법이었다.


"어떻게 여길 찾아온 거예요?"


제인은 입을 떨면서 코코아를 마셨다.


"....전 비서였지만, 한스와 애인 관계에 있었어요."


"애인?"


"결국 그 자식은....절 몸으로만 사랑했죠. 그래도 다 참았어요. 다 참았다구요. 그 자식이 이상한 실험을 해도 다 눈 감아줬어요. 그런데..."


제인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듯 떨기 시작했고, 오로라가 허둥지둥 담요를 가져와 제인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저 아이가 고문당한 걸 보았어요."


제인은 손가락으로 탁자 너머의 난로에 몸을 기대어 팔짱을 낀 한나를 가리켰다.


"나? 나 알아?"


뜻밖에 지목을 당한 한나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당신... 한스와 사만다... 사만다는 수석 연구원 이름이예요. 당신을 3호 개체라고 불렀죠."


"난 처음 듣는데."


한나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당신은 계속 돼지와 인형만 죽일 수 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기억을 주입당했죠. 그 하얀 아이...2호 개체와 스칼렛 위커란 자에 대한 기억 말이예요."



한나의 기분은 한순간에 불쾌해졌다. 이 여자는 한나를 확실히 알고 있었다. 한나 스스로 기억을 얘기한다면 몰라도, 그걸 당당히 지켜본 사람이 말한 것을 들으니 당장이라도 욕을 내뱉고 싶었지만, 지금 앞에 있는 제인이란 여성의 이미지는 동정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한나는 조용히 바람을 이용해 후끈해진 뒷머리를 식혔다.





"당신을 보니까.... 더 이상 그이랑 엮이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당장 그만두고 아톤을 뛰쳐 나왔죠."


"그래서 어떻게 여기까지 찾아온 거냐고 물었어요."


메가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한나는 메가라의 업무용 미소에 이질감을 느꼈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마치 한 몸에 두 인격이 따로 노는 것 같은 인상을 느끼게 했다.


"아톤을 나오기 전에, 제가 모을 수 있는 정보들은 모두 USB에다가 복사시켜 놓았어요. 바로 USB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아톤에서 킬러를 보내 절 죽이려 했거든요. 5명의 대역을 심었지만.... 모두 죽었어요. 4번째 대역이 죽었을 때, 가까스로 확인해 보니, 블루라운드 사장의 암살에 스칼렛을 연루시킨 정보가 들어 있었어요."


"폴 타바의 저택 말하는 거군요?"


메가라의 물음에, 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인은 비서 직에 있었을 때, 자신이 한스의 말을 따라 사람을 고용해 사장을 납치한 사실을 말하지 않기로 했다. 비서에 임하면서 벌어둔 돈은 많지만, 돈으로 신분을 지울 새도 없이 한스가 보낸 킬러들은 제인의 뒤를 쫓았다. 어딜 가든 암살의 위협이 있었다. 그래서 제인은 한스가 방치하고 있는 블루라운드의 관계자들에게 향했다. 이들에게 한 진실만 말하지 않는다면, 이들은 제인의 편에 있을 것이었다.


"네, 그래서... 전 당신들을 찾으려고 했어요. 막으려고 했죠. 하지만 5번째 대역마저 죽었을 때, 이미 스칼렛은 사장을 죽인 뒤였어요. 그 뒤로 절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여기에 온 것도 죽을 각오를 하고 온 거예요."


"그렇다면, 그 정보를 좀 주셔야겠는데요."


메가라가 손을 내밀었다. 제인은 코트 속 안주머니에서 붉고 작은 캡슐을 하나 꺼내 메가라에게 내밀었다. 메가라가 캡슐을 비틀어 열자, 그 안에는 제인이 말한 USB가 들어 있었다.


"혹시 여기에 실험에 대한 정보도 들어 있어요?"


"들어 있을 거예요. 들어 있지 않은 정보들 중에는 외워두기도 했어요."


메가라가 USB를 가지고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부팅이 완료되자, 메가라는 노트북의 포트에 USB를 꽂았다.


"당신이 외워둔 정보는 뭐가 있죠?"


"잠시만요..."


제인이 기억하려는 동안, 메가라는 스마트폰을 꺼내 녹음 기능을 작동시켰다.


"혹시 2호 개체, 1호 개체 중에서 죽은 아이가 있어요?"


"1호 개체는 누구죠? 2호 개체는 알겠는데."


한나는 2호, 1호 개체가 무엇을 암시하는지 알지 못했다. 아톤의 사람들은 한나를 3호 개체로 불렸다고 했지만, 한나는 그런 사실조차도 알지 못했고, 2호 개체와 1호 개체 또한 금시초문이었다.


"1호 개체... 멜리사. 멜리사 말이예요."


"메가라, 2호 개체는 누구예요?"


한나가 메가라에게 물었다.


"당신 휴대전화 배경화면에 있는 사람이요."


그 말을 들은 한나는, 1호 개체가 멜리사, 2호 개체가 엘사임을 깨달았다.


"멜리사는 죽었어요. 수류탄에 의해서 머리를 제외하고 전신에 수류탄 파편이 박혔죠. 파편들을 빼내고 싶지만...몸이 썩지 않고 있어서 저희가 가진 의학 지식으론 풀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을 것 같아 일단 스칼렛.. 아니, 당신들도 아는 안나 아렌에게 양도된 상태예요."


"2호 개체는요?"


"아직 살아있어요. 그 아이도 안나에게 가 있고요. 대체 뭘 알고 있으시길래 생존 여부부터 물어보는거죠?"


"3호 개체 씨, 능력을 쓰고 나면 피곤함을 느끼죠?"


"한나라고 불러요. 손하고 어깨가 뻐근하면서 엄청 피곤해져요."


"그리고 결국 졸려서 잠에 빠져들고요. 맞죠?"


"그걸 다 알면서 왜 물어요?"


한나가 의아한 듯이 말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에, 도대체 '생존'이란 단어가 어울리는지가 의문이었다.


"제가 직접 연구를 한 건 아니어도, 한스의 뒤를 보좌하면서 봐온 것들이 있어요. 그 중 하나가... 능력을 쓰면서 피로를 견디는 실험이었죠."


오로라는 피로를 견딘다는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피곤하면 당연히 자야 했고, 버텨 보았자 제정신으로 생활을 이루지 못하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처음 며칠 동안은 잠을 자지 못했을 때의 경험이 오로라로 하여금 실험의 의의가 무엇인지 알고 싶게 만들었다.


"그 실험의 결과는... 실패했어요. 완전히."


"실패했다니, 뭔 말이예요? 개체들이 다 자버렸다는 거예요?"


제인은 이젠 다 식어버린 코코아 잔을 모두 비워버렸다. 하기 싫은 말을 내뱉기 전의 워밍업을 하려는 듯, 제인은 기침을 두 번 하여 목을 가다듬었다.



"개중에는 미쳐버린 아이들도, 그저 편하게 잠든 아이들도 있었어요. 능력에는 체력이 뒷받침 되니까요. 그리고... 피를 토하며 죽은 아이들도 있었죠."


한나는 무심코 피를 토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보여주기엔 트라우마를 가져올 모습이기에 한나는 몸서리를 쳤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잠을 못 자서 죽지는 않았으니까."


"말이 좀 심하시네. 누가 들으면 죽은 게 다행인 줄 알겠어?"


한나가 바람을 만들어 제인의 목을 잡았다.


"하, 한나."


오로라가 한나의 곁으로 가 팔을 잡았다.


"아까부터 계속 사람 신경 건드는데, 당신네들 심성이 원래 다 그래?"


"한나, 진정해요."


메가라가 손을 들어 한나를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한나는 제인을 향해 뻗은 손에 천천히 오므렸다.


"한나, 제 말 들어요. 저 사람한테 더 정보를 얻어야 하잖아요. 한스, 한스 위치도 알아야 할 거 아니예요. 네...?"


오로라가 한나의 팔에 매달려 애원했다.


"그렇게 나서다간 한스 평생 못 찾아. 빨리 내려 놔요."


메가라의 목소리에서 친절함이 사라졌다. 상황이 심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한나는 쯧 혀를 차며 손을 폈고, 목을 졸렸던 제인은 캑캑거리며 숨을 갈구했다.


"한나, 현관에 가 있어요. 지금 감정 기복이 심한 건 알겠는데, 좋은 게 아니란 걸 알아둬요."


메가라가 한나에게 말했다.


"한나... 일단 화 풀어요..."


"미안해요. 멜리사하고 엘사 생각이 나서..."




한나는 오로라에게 짧게 사과한 다음,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현관문으로 향했다. 한나는 제인에게서 떨어져 있기로 했다. 제인은 아톤에 몸을 담았던 사람이니 만큼 유용한 정보원이지만, 말하는 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까이 있다간 다음에는 제인을 천장에 높이 띄워 매달아 버릴 것 같았다. 현관에 도착한 한나는, 메가라의 심문이 끝날 때까지 시간을 죽이려 스마트폰을 켰다. 새벽 4시 30분, 아직 동이 트려면 시간이 있었지만, 한나는 어서 빨리 엘사와 안나, 그리고 멜리사와 엄마를 만나고 싶었다. 전화를 걸고 싶지만, 지금은 다들 잠에 들어 있을 터였다.



한나는 배경화면 속 잠들어 있는 엘사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면서, 이 새벽이 빛을 머금은 것처럼 빠르게 지나가길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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