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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청혼하러 가는 길(27)

ㅇㅇ(222.110) 2020.04.10 21:13:37
조회 527 추천 45 댓글 12


그 날 점심, 루나드는 안나와 엘사, 한스를 점심식사에 초대했다. 같이 점심을 먹자는 평범한 제안이었지만 일종의 명령이기도 했다. 엘사는 차라리 잘 된 거라고 생각했다. 다 모인 자리에서 루나드가 섣부른 일을 하진 않을 테니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리고 안나와 공식적으로 만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으니 엘사의 입장에선 나쁠 것이 없었다.


엘사가 식당 앞에 도착하자 멀리서 안나가 오는 것이 보였다. 안나는 엘사를 발견하자 서둘러 엘사에게 다가왔다. 엘사는 웃으며 안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딱 맞춰 왔네요.”


“응, 엘사를 볼 수 있잖아요.”


“그게 뭐에요.”


엘사는 안나의 말에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안나도 엘사가 웃는 것이 좋았는지 엘사의 손을 꽉 잡았다.

엘사는 자신의 손을 잡은 안나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팔짱을 끼도록 했다. 손을 잡고 들어가는 것보다는 이 편이 훨씬 자연스러웠다. 

안나도 엘사의 뜻을 안다는 듯 별 말없이 팔짱을 꼈다. 


“식사를 마치면 성을 구경시켜줄게요.”


“좋아요.”


“여기에도 꽤 멋진 정원이 있거든요.”


“해바라기도 있나요?”


“아쉽게도 없어요. 아, 꽤 큰 감옥은 있는데..”


“엘사!”


엘사의 말에 안나는 얼굴이 빨개지며 소리쳤다. 엘사는 그런 안나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참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안나는 엘사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속삭였다.


“노..농담이라도 하지 말아요!”


“아하하,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진짜..미워요..”


끝으로 갈수록 작아지는 목소리에 엘사는 미안하다며 안나의 볼에 입을 맞췄다. 안나는 아직 분이 덜 풀렸다는 듯 고개를 돌렸지만 팔짱을 풀지는 않았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엘사와 안나가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루나드와 한스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종이 안나를 자리로 안내했고 엘사는 한스와 같이 앉았다. 

모두 자리에 앉자 시종들이 발빠르게 음식을 갖다 놓았다. 맛있는 냄새와 함께 먹음직스런 음식이 앞에 놓였다. 


“드디어 다 같이 모여서 식사를 하는군요. 간밤에 불편하진 않았습니까? 안나 공주.”


“염려해주신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능청스럽게 대답하는 안나의 말에 엘사는 최대한 어제 밤의 일은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는 중이었다. 안나와 격렬하게 사랑을 나눴던 간밤의 일이 엘사의 머릿속을 헤집어놓는 느낌이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안나를 바라보았지만 안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고 있었다.


“다행이군요. 오늘은 무얼 할 생각입니까?”


“식사를 마친 뒤 엘사 공주님께서 성을 구경시켜주겠다고 하셨어요.”


“그런가요? 으흠..괜찮으면 제가 대신 구경시켜드려도 되겠습니까?”


“폐하, 그건...”


갑작스러운 루나드의 말에 엘사가 놀라며 대답하자 루나드는 고개를 저으며 엘사의 말을 잘랐다.

마음에 안 든다는 소리였다. 


“내가 초대한 손님이니 당연히 내가 대접해야지. 너보다는 내가 하는 게 나을 것 같구나.”


“…… .”


“감사합니다, 폐하. 폐하께서 함께 해주시면 더 영광입니다.”


엘사가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자 안나는 엘사를 보며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루나드는 그제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모두에게 식사하길 권했다. 

엘사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고 한스 역시 옆에서 이 이상한 상황에 대해 잠시 생각하고 있었다.

루나드가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안나에게 성을 구경시켜준다고 했을까? 한스는 루나드가 이미 엘사와 대화를 했고 자신의 대답도 엘사를 통해 들었을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와중에 안나를 따로 부른다는 건 어쩌면 서던의 공주에게 아직 듣고 싶은 말이 남았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안나도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속은 불안했다. 자신과 엘사의 관계를 어디까지 알고 있는건지도 몰랐고 어쩌면 엘사와는 대화가 통하지 않으니 자신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지도 몰랐다.


식사하는 내내 특별한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일상적인 안부나 서던과 아렌델의 문화적 차이, 조금은 개인적인 이야기 등등이 오고 갔을 뿐이었다. 






“그럼 이제 슬슬 일어날까요?”


식사를 마쳐갈 무렵 루나드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몰렸다. 엘사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 했으나 루나드는 손짓으로 엘사를 저지했다. 그 모습을 보던 안나는 엘사를 향해 괜찮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엘사는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한스 역시 말은 하지 않아도 루나드와 안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물론입니다, 폐하.”


“그럼 너희 둘은 마저 식사를 마치도록 해라. 나와 안나 공주는 먼저 실례하지.”


루나드와 안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식당을 빠져나가는 와중에도 엘사의 눈은 계속해서 안나를 향해 있었다. 

안나도 살짝 뒤를 돌아 그런 엘사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는 내색을 했지만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루나드의 의중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식당에서 나가자 한스는 의자 뒤로 기대며 엘사를 바라보았다.

엘사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폐하와 이야기는 잘 한 거야?”


“...모르겠어.”


확신 없는 엘사의 대답에 한스가 무슨 말인지 되물었지만 엘사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엘사 자신도 루나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말을 꺼냈을 때 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냥 알겠다는 말만 했을 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알겠다는 말이 엘사와 안나의 사이를 허락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안나와 루나드는 정원 한쪽에 놓여있는 각 의자에 앉았다. 탁 트인 정원이 잘 보이는 곳이었다. 앞에 놓여있는 탁자는 간단한 다과를 위해 있는 것 같았다.


“정원이 정말 멋지네요.”


“고맙군요. 하지만 서던의 정원도 아름답다고 들었습니다. 거기엔 해바라기가 많다고 하더군요.”


“잘 알고 계시네요! 제가 해바라기를 좋아하거든요.”


“아렌델에 해바라기가 없는게 아쉽군요.”


“서던에 돌아가면 보내드릴게요. 서던에는 아주 많이 있으니까요.”


“고마운 말씀이군요.”

 

안나는 루나드가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겨우 이런 대화나 하려고 그가 자신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어째서인지 그가 먼저 말을 하길 원하는 것 같았다.

안나의 침묵에 루나드는 눈을 깜박이다 수염을 쓰다듬었다. 어떤 면에선 그도 이 상황이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안나 공주.”


“네.”


“이런 말이 무례할 수도 있겠지만..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예, 폐하.”


“..엘사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에 안나는 놀란 듯 보였다. 안나는 루나드가 조금 더 냉정하고 현실적인 말을 할거라고 생각했다. 엘사와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으니 그만 돌아가라, 같은 말들. 안나는 루나드의 표정을 읽으려고 노력했지만 그의 얼굴에선 아무 것도 읽을 수 없었다. 그는 그저 마치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듯 안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부요. 제 전부에요.”




안나의 대답은 간단했지만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안나는 덧붙일 말을 생각하다 그만 두기로 했다. 

아마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그는 자신의 생각 이상으로 많은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루나드는 물끄러미 안나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왜 이런 질문을 하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 .”


안나의 질문에 루나드는 침묵으로 대신했다. 대답을 하기 싫다기 보다는 생각이 많아 보였다. 

어째서인지 그 모습에 쓸쓸함을 느낀 안나도 고개를 돌리곤 애꿎은 손만 만지작거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지만 간간히 들려오는 새소리와 바람소리가 그 정적을 메우고 있었다.

아렌델의 정원은 서던처럼 따뜻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매우 잘 정돈되어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어딘가 무거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루나드는 생각이 많았다. 안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이유는 대답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모든 일에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가장 이상적인 방법을 찾았다. 하지만 이번 일은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 아닌 감정적인 결정을 하려고 하니 망설임과 약간의 두려움 그리고 불안정함에 섣불리 판단할 수 없었다.

과연 엘사가 이 공주와 결혼했을 때 정말 행복할까? 그것이 아렌델에 이득이 되는 길일까? 무엇보다 서던의 공주가 엘사를 끝까지 받아줄 수 있을까?

결국 한참의 침묵 끝에 루나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엘사는 그대가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이유라고 하더군요.”


“..?..”


“행복해지고 싶다고 했습니다. 엘사는.”


“..그랬나요..”


“안나 공주. 당신은 이제 겨우 성년이 되었고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더 많습니다. 당신은 정말 엘사가 그대의 짝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저는..”


“그저 한 때 지나가는 감정은 아닐까요?”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순간, 지금 저는 온 마음을 다해 엘사 공주님을 사랑하고 있어요.”


“엘사도 그럴까요?”


뜻밖의 대답에 조금은 놀란 안나는 눈만 깜박이며 루나드를 바라보았다. 안나는 엘사도 같은 마음이라도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안나는 엘사가 아니었으니까. 만약 루나드가 똑 같은 질문을 엘사에게 한다면 분명 자신을 사랑한다고 하겠지만 어디까지나 예상이었다. 

망설이는 안나를 보던 루나드는 손가락을 두드리며 말했다.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진심을 담은 맹세라도 언젠가는 변합니다.”


“…… .”


“시간이 많이 지나면 공주나 엘사 모두 변할겁니다. 어떤 식으로든..”


“…… .”


“그게 내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배운 교훈 중 하나입니다. 사람은 변합니다.”


“...폐하의 말이 맞습니다. 저는 엘사를 만나고 변했어요. 지금도 변하고 있는 중이고요. 그리고 전 변하는 제 모습이 싫지 않아요.”


“…… .”


“그렇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엘사 공주님 옆에 있고 싶어요.”


안나의 말은 확고했다. 하지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루나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조금은 안나의 마음을 흔들었다. 뜨거운 감정은 언젠가 식을 수도 있었고 상대방이 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엘사와 나눈 마음으로 인해 좀 더 성숙해질 수 있었고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엘사도 비슷할거라 믿어 의심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사와 같이 있길 원했다.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안나의 말을 들은 루나드의 얼굴에는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이미 안나의 대답을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렴풋이 그의 눈동자 너머로 느껴지는 쓸쓸함이 안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


루나드는 더 말을 이어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나의 말을 기다리는 것 같진 않았다.

대신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안나를 뒤로 하고 몇 발자국 나아가 정원 쪽을 둘러보았다.

안나는 루나드를 잡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뒷모습임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다가가서는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루나드는 여전히 정원을 바라보며 안나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이제 안나에게 듣고 싶은 말은 다 들었다는 듯이.


“...공주는 그만 서던으로 돌아가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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