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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Praying prey 66~67

개구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4.26 21:3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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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요청글





1화~65화

https://sulgal.tistory.com/m/2109






168.

밤이 저물자, 세 사람은 낮에 얘기했던 첫번째 가족행사의 예행연습을 하러 침대로 올라갔다. 하지만 잠이 바로 오진 않았기에, 스탠드 가져와 책상에 올려놓아 불이 꺼진 방을 비추어 아늑하게 만들었다. 멜리사의 이글루가 잠시 떠올렸고, 안나는 향수에 잠겨 당시의 안락함을 추억했다.



'좁구나....'



침대의 오른쪽에 누운 안나는 가운데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책을 읽는 이두나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나는 담요를 머리 끝까지 덮은 채로 이두나의 팔꿈치를 조물락거리며 스마트폰이라는 물건을 연신 만지고 있었다. 한나에게 있어 위키피디아는 지식을 담은 보배와도 같았고, 좀처럼 지식 습득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그런 한나를 한편으론 부럽게 보던 안나는 여지껏 구형 휴대폰만 써왔던지라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메가라가 준 임시 휴대폰도 나름 최신형이었지만, 엘리사의 사진을 보는 것 외에는 켜야 할 일이 없다시피 했다. 할 일이 없어 시간만 죽이게 된 안나는, 한나에게서 다시 받은 원고를 틈틈히 읽어보며 잠이 들기까지의 기운을 죽이고자 했다.



"무슨 책 읽고 계세요?"



안나가 이두나에게 물었다. 흘끔, 시선을 조금 돌려 보았을 때, 그곳에는 지렁이처럼 늘어진 알파벳들이 즐비했다. 도통 뜻을 알 수 없는 글자들을 보면서, 안나는 좋지 않은 예감을 느낄 수 있었다.



"네가 어릴 적에 썼던 단편 동화란다. 읽을 수 있겠니?"



그리고 그 예감은, 어김없이 적중하고 만다. 분명 이상한 내용으로 가득 채워져 있을 터였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다 꽁꽁 숨겨두고 싶었지만, 상대는 엄마였다. 안나는 눈썹을 씰룩거리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언니가 동화도 썼어요?"


스마트폰에서 시선을 뗀 한나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 과정에서 팔꿈치를 간질였고, 이두나는 움찔 떨며 흐흣 하고 웃었다.


"어으, 죄송해요."


"괜찮으니까 계속 해도 좋단다."


한나는 그 말을 듣고, 쭈뼛겨리며 이두나의 팔꿈치에 엄지와 검지를 다시 가져갔다. 안나는 한나가 약간의 불안 증세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다. 피젯 토이처럼, 무언가 불안할 때 큐브나 점토처럼 만질수 있는 무언가를 통해 심리적 불안을 떨쳐낼 수 있고, 한나는 이와 비슷한 해결법을 찾아낸 것 같았다.


"무슨 내용이예요?"


기억나지 앉는 유년기 속 하드커버 노트 속에서, 안나는 어린 안나가 어떤 내용으로 종이를 물들여 놓았을지 궁금했다.


"용에 납치된 언니 공주를 찾는 동생 공주의 이야기였단다. 들어 보겠니?"


"읽을 수 있으세요? 어디..."


안나는 다시 책 속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도저히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이 줄지어 있었고, 겨우 읽을 수 있는 글자는 '앙나'(ANNNA)와 '엘쌰'(ELSYAA) 뿐이었다.



"...못 읽겠어요. 고대 상형 문자 수준인데요 이건."


안나는 이 대목에서, 이두나가 얼마나 안나와 엘사를 그리워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안나도 읽지 못한 동화를, 이두나는 태연하게 읽고 있었고, 그것이야말로 자식에 을 향한 사랑의 결실이었다.



"그럼 읽어줄 테니 잘 들어보렴. <옛날 옛날에, 아렌이라는 어느 바닷가에 있는 멋진 나라에 앙나와 엘쌰 공주님이 살았어요.>"



기억에 없는 옛 집을 배경으로 지어진 동화인 것 같았다. 특이하게도, 안나는 자신과 엘사를 공주라고 칭했다. 옛날이었다면 의기양양했겠지만, 지금은 의기소침한 상태로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스칼렛 위커의 껍데기를 벗어낸 안나 아렌의 내면은 다른 이들처럼 부드러웠다.


"<앙나 공주님은 엘쌰 공주님을 데리고 성 밖으로 나가 백성 아이들과 같이 놀았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거대한 돌들이 떨어지기 시작한 거였어요!>"



이두나는 과장된 목소리로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안나는 그 순간, 어린 시절의 안나가 되어 있는 듯한 착각을 가졌다.



"<그런데 글쎄, 돌 속에서 거대한 검은 용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지 뭐예요? {크아앙, 너희들을 데려가서 내 아내로 삼을 것이다!}>"



"제가 진짜 그렇게 썼어요? 엄마, 제가 못 읽는다고 꾸미는 거 아니예요?"



안나는 얼굴이 뜨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엔 멋지다고 생각해 썼을 수도 있지만, 이미 기억 속에서 지워진 내용을 나이를 먹고 듣자니 상당히 부끄러웠다.



"정말이란다. 네가 동화를 쓰면 나한테 자신있게 들려주곤 했었어. 글씨를 읽긴 힘들었지만 너희들을 그리워서 한 글자씩 해석해 읽을 수 있었는데..."



이두나가 잠시 책을 내려놓고, 양 옆에서 담요 속에 파묻힌 한나와 이불을 덮고 있는 안나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간지러워요..."


한나가 담요 속에서 몸을 꾸물거렸다. 이두나는 검지손가락으로 한나의 이마를 살살 쓸었다. 히힛거리며 한나가 간지러운 웃음을 내뱉었다.


"힘들지 않으셨어요?"


"아주 힘들었지. 안나 네가 말해준 이야기들을 잊지 않으려고 기억이 날때마다 녹음시켜서 기록으로 남긴 적도 있는데, 들어보겠니?"



"나중에 들려주세요. 음...작전 뛰기 전에 들을게요."


"집중이 안될 수도 있을텐데..."



안나는 걱정하는 이두나의 팔에 코를 부비었다.



"괜찮아요. 이미 마음은 확고해졌거든요."



안나는 다음 작업을 넘어야 할 장미덩굴이라고 생각했다. 커터를 들어 자른다고 하여도, 다시 자라나 안나를 찔러댈 것이다. 하지만 나아가야 했다. 이 일만 끝난다면, 총과 칼을 들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럼 계속 들려줄테니, 소감을 말해주렴."


이두나가 들려준 이후의 이야기들은, 약간 식상하다고 느낄 수 있는 스토리라인을 따라갔다. 앙나 공주는 대장장이에게서 총과 갑옷을 챙긴 다음, 눈 덮인 북쪽 산으로 넘어가 용을 잡고, 그곳에 있던 엘쌰 공주를 데리고 돌아와 행복하게 산다는 엔딩이었다. 막상 들어보니, 안나가 앞으로 해야 할 작업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들었다.



"어떠니, 너의 처녀작을 들어본 소감이?"



"어... 평이한데요. 딱 클리셰를 따라간 것 같아요."


"왜? 난 재밌는데."



자칭 0살의 쌍둥이 동생이 안나에게 반박했다. 한나는 이미 스마트폰을 꺼두고 이두나가 들려주는 동화 이야기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집중하고 있었다.


"엄마, 다른 것도 읽어주면 안 돼요?"



오히려 한나가 이두나에게 안나가 지은 다른 동화들을 재촉했다. 이두나는 웃으며 안나에게 눈을 돌렸고, 안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두나가 한나에게 안나의 또 다른 동화인 '토마토공주와 파인애플 왕자'를 읽어주는 동안, 잠시 놓아 두었던 원고를 읽어 보았다. 여전히 고칠 것 투성이였다. 몸담았던 CIA에서 클레임을 걸 내용들을 최대한 배제하고 써보려 했지만, 어디부터가 라인에 들어가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나중에 메가라와 상의해서 정보 수록 수위를 조절해야 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안나는 처음 엘리사를 만났을 때의 내용에 눈을 돌렸다.




아이의 눈이 떨고 있었다. 자존감이 결여된 듯 연신 '제가 안했어요'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나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나는 오로라에게 했던 당근 주기 법칙을 기억했다. 다만 이번의 경우엔 당근이 아니라 마음의 이불을 덮어 줘야 했다.




처음엔 덮어 주었다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면 마음의 이불은 되려 엘리사가 멜리사와 함께 안나에게 덮어준 것 같았다. 실제로, 폴 타바의 호수에 빠졌던 이후엔, 아이들의 죽음 이후론 발작 증세가 나타나지 않았다. 엘리사의 눈가루, 멜리사의 얼음은 지금도 안나의  몸 속 곳곳에 흐르고 있었다. 아이들은 떠나가면서도, 안나에게 남아있는 발작 증세를 지워주었다. 약간의 불안 증세만 제외한다면, 안나는 스칼렛 위커의 컨디션에 근접해졌다. 아직 메가라에게선 소식이 없었고, 안나는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서서히 잠이 눈꺼풀에 소복이 쌓이기 시작했다.


"엄마, 저 먼저 잘게요."


안나는 이두나의 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잠깐만, 한나, 조금만 기다리렴."


이두나는 책을 잠시 배 위에 올려놓은 다음, 안나의 머리를 옆구리로 끌어왔다. 안나는 이두나의 푸근한 옷 냄새에 금방이라도 잠에 들 것 같았다. 하지만 적어도 몇십 초 동안은 참아보려고 노력했다. 이두나의 새끼 손가락이 안나의 콧등을 한 번 쓸어내렸다. 안나가 유일하게 기억했던 엄마와의 추억, 그 추억이 안나의 잠에 눈꽃처럼 솔솔 피어내렸다. 안나는 이두나의 두 번째 '코 톡톡'을 하기도 전에 의식을 잃고 잠에 들었다. 완전히 의식을 잃기 전, 안나는 내일 한나와 CQB를 연습할까 생각했다.






안나는 아무도 없는 캠핑장에 서 있는 꿈을 꾸었다.
















169.

[코끼리까지 언급한 걸 보면, 단순한 일은 아닌 걸로 생각되는데요.]



필립스의 전화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당신들에게 브레이크 포인트가 될 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엮어볼 만한 정보를 가지고 있거든요."


필립스는 금고에 책을 다시 넣어 놓고, 냉장고에서 아침에 먹다 남긴 그라탕 그릇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전자레인지의 작동음에 필립스는 상대방의 대답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잘 못 들었는데, 다시 얘기해 주시겠어요?"


[대가를 원하지 않냐고 물었어요. 우리한테 꼭 필요한 정보인가요?]


"당나귀들을 누르고 싶으시다면, 나쁘진 않을 겁니다. 물론 대가는 확실히 받고 싶군요. 구두 계약이 아니라 서면 계약으로 말이죠. 팩스 가능해요?"


[잠시만 기다리도록 해요. 계약서에 제 서명을 받아야 하니까요.]


"그리고, 이거 다 녹음되고 있습니다."


필립스는 실실 웃으며 팩스를 켰다. 잠시 뒤, 종이 한장이 팩스에서 빠져나왔다. 종이엔 정보 제공과 관련된 약관이 쓰여 있었고, 두 사람이 사인해야 할 공란에는 이미 한 사람의 사인이 휘갈겨 있었다. 필립스도 펜으로 공란에 사인을 했고, 팩스의 스캐너에 종이를 올려놓아 상대방에게 문서를 전송시켰다.


[그래서, 당신이 얘기하고 싶은 게 뭐죠?]


"아무래도 민주당 내 의원 중 누군가가 러시아 쪽과 유착을 한 것 같습니다."


[자세하게 설명해 보세요.]


"저도 모두 얘기할 순 없습니다. 정보제공자를 소개시켜드리고 싶은데, 그 사람은 지금 자고 있거든요. 하지만 정황을 짚어보니, 마약과 관련된 내용이 들어있는 것 같더군요. 러시아의 아톤을 아십니까?"


[지금 이 시기에 그 기업을 모른다면 멍청이 아닌가요?]


이미 아톤과 울프독의 얘기는 몇 주 전부터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만큼 큰 이슈가 되어 있었다. 아는 것이 사실상 당연할 정도로, 러시아와 미국의 여론 공방전은 세상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아톤에서 마약을 가지고 약을 조제한다더군요. CIA 쪽에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걸 보면, DEA의 규정에 어긋나는 모양입니다. 또, 한스 회장이 황금 초승달에서 거래를 한 것으로 보이는 모습이 찍힌 블랙박스 영상도 있다고 하네요. 무엇보다 이쪽 지대에서 나온 마약들은 멕시코를 거쳐 미국으로 들어가는거, 에스메랄다 의원님도 잘 아실 거 아닙니까."


[이 정보가 민주당을 끌어내릴 수 있을 수단이란 게 전 이해가 가지 않네요. 대체 왜?]


에스메랄다는 오래 전, 자신을 상원 의원직까지 앉히게 모든 선거 전략을 동원해 당선에 성사시킨 퀸메이커의 말을 믿지 못했다. 그가 예측 불허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선거 때에는 그저 수긍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민주당이 압승했음에도 필립스의 전략을 토대로 최소한의 좌석 이탈만을 발생시켰고, 의석수 100 중 48명의 공화당 의원들이 직책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백악관에서 지침이 떨어졌다더군요. 마약 사건 폭로 및 경로 수색 작업을 취소하라고 하던데,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필립스는 다 데워진 그라탕 그릇을 조심스럽게 꺼내, 사무용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그라탕에선 흐물흐물  녹아내린 치즈의 짙은 느끼함이 향으로 치환되고 있었다.


"만약 백악관, 그리고 그 당에 속하는 의원들이 줄줄이 마약 관련해서 묶여 있다면, 다음 경선과 대선 때 공화당이 반사 이익을 볼 것 같은데요?"


[필립스, 그러니까 당신은 지금 게이트를 벌이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군요.]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불곰-마약 게이트라고 할까요?"


[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어요. 그 요원이 가져온 증거의 출처는 정확한가요?]


필립스는 낚시를 하고 있었다. 정계의 큰 손인 에스메랄다란 대어를 어떻게든 낚을 수 있다면, 메가라 요원의 근심도 해결하고, 그 과정에서 필립스는 수증이익 수준의 대가를 받을 수도 있었다. 어떻게든 잘 구슬려서 공화당 사람들을 동조시켜 게이트를 열어보는게 중요했다.


"ASIC이란 정보 조사를 업으로 삼는 기업집단이 있는데, CIA 측 조사 요원과 합동 조사를 벌이고 있습니다. 아톤의 회장이 자주 가는 별장 위치까지 찾아낼 정도인데, 이 정도라면 믿어보시지 않으시렵니까? 제가 보여드린 카드패는 충분하다고 봅니다만."


에스메랄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심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전 선거캠프의 퀸메이커가 벌이는 도박에 베팅을 하느냐, 아니면 지금 이 지위에 만족하느냐의 문제였다. 필립스는 정치인들의 딜레마를 잘 알고 있었다. 사무실이 아닌, 집무실의 권좌에 앉기 위해 갈망하는 짐승들의 경기를, 샐리맨더의 업무 총괄 관리자직을 맡기 전까지 질리도록 보아왔다. 이들은 돼지의 탈을 쓴 도박꾼들이었다.


[....그 요원은 지금 자고 있다고요?]


"맥주 두 캔 마시고 구토를 했는데도 취해서 침대에 드러누워 자고 있습니다. 해보시게요?"


대어가 찌를 주둥이로 건들기 시작했다. 필립스의 심장은 벌써부터 뛰기 시작했다. 남을 말로 구슬릴 때 벌어지는, 특유의 생리 현상이었다.


[녹음도 했다면서요. 그럼 허위로 드러나도 당신에게 덤터기를 씌울 수 있으니까.. 한 번 맛보고 싶은 제안이네요.]


필립스는 속으로 '나이스!'를 외쳤다. 메가라의 정보를 전해주면, 코끼리들이 힘을 합쳐 성명을 발표해 당나귀들을 제압할 수 있다. 이는 국민 정서의 흐름을 바꿀수도 있다는 소리와 다름이 없었다.


[요원이 잠에서 깨어난다면, 지금 이 번호로 전화 부탁해요. 직접 대화해 보고 싶으니까.]


"의원님? 제안이 하나, 아니 두 개 정도 있습니다. 들어보시겠습니까?"


[무슨 제안인데요?]


"이런 귀중한 정보를 중개해 주었는데, 제가 받아 먹을 커피가루는 있어야지요. 첫 번째로, 지금 CIA 내 라인들을 한 번 정리해 주셔야 겠습니다. 나중에 당신들에게 독이 될 사람들이 좀 뭉쳐있는 모양입니다. 국장이란 사람과 요원이 통화를 했지만, 백악관의 지침이 아닌 국장들이 시선을 돌리기 위한 특단의 지침이라면, 국장들이 아톤과 유착되어 있을 겁니다. 그 말은 즉, 러시아의 입김이 CIA 내에도 퍼져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겠죠. 그리고 현 국장인 매티어스도 민주당 출신 아닙니까?"



에스메랄다는 필립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했다. 제압하려면 제압하되, 싹을 잘라내 공화당 라인을 심어두란 소리였다.



[추천할 사람이 없는데, 혹시 적임자라고 생각할 법한 사람이 있는지 알려줘요.]



마냥 잘라낸다고 해도 적임자가 없으면 유명무실한 기관으로 남게 될 터였다. 에스메랄다는 필립스에게 물어보았다. 여러 사람을 만나보고, 항시 전략을 담아두는 그라면 마땅한 적임자를 추천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지금 당신에게 정보를 제공할 요원 정도면 어떠십니까?"


[그 사람의 직책이 어떻죠?]


"국장하고 컨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수석그룹의 팀장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쁘지 않네요. 이름이 어떻게 되죠?]


"아마도... 메가라? 메가라라고 하더군요."


[알겠어요. 그 사람과 대화를 하면 적임자인지 알 수 있겠죠. 두 번째 제안은 뭐죠?]



필립스는 처음엔 샐리맨더가 시장을 독점할 수 있는, '일감 몰아주기'의 성격을 띈 계약 독점을 제안하려고 했다. 하지만 곧 제안을 바꾸기로 했다. 편향이란 의심을 사면 어떤 정보든 캐내려는 산업 스파이들이 쥐도새도 모르게 샐리맨더로 침투할 수 있었다. 훗날 필립스가 에스메랄다에게 제안한 이 녹취록이 세상에 공개된다면, 당나귀가 악일지라도 공화당은 민간인의 사주를 받아 게이트를 열은, 무능의 극치를 대중들에게 선보일 수 있었다.


"지금 발의중인 법안 중에, '군비 축소', 그리고 '병력 철수'와 관련된 건이 있는 것 같던데... 후퇴할 만큼 충당할 병력과 자원들을 다른 곳에서 차출해보지 않으시려나 싶어서요?"


[당신들에게 입찰할 권리를 주라, 이말인가요?]


"전쟁은 비즈니스란거 아시잖습니까. 저흰 전쟁으로 돈을 벌고, 직원들은 사지에서 실전을 경험하죠. 업계 사람들 실력은 제가 보장하겠습니다."


전쟁은 죽지 않는 암세포와도 같았다. 세계 평화를 위해 세운 국제기구들도 완전히 전쟁을 죽이지 못한다. 전쟁을 몰아내지 못한다면, 전쟁에 기생하는 벌레가 되어 무한한 영양분을 빨아먹어야 했다. 현지 정부와 계약을 맺는 것, 그리고 군에 고용되어 작전을 수행하는 기존의 두 방법에서 겨우 하나를 더 추가한 것 뿐이었다. 군비 축소를 하되, 그 자리를 민간 기업이 대체하는, 이른바 아웃소싱을 필립스가 제안했다.


"그리고 저흰 여러분께서 지원해줄 군비보다 더 적은 비용으로, 현재 군에 비대하는 직원들을 충당할 수도 있고요."


이는 에스메랄다의 업적에도 들어갈 수 있는 제안이었다. 가성비를 노려 동일한 효율로 안보와 국격을 챙긴다. 이미 기업 내의 복지 제도는 굳혀져 있을 터이니, 정부 차원에서 지원하는 보조금과 계약금 이외에는 따로 생각할 당장의 지출은 없어도 무방했다.


[...제 사람들을 설득해 볼테니, 기다려 주겠어요?]



"상의해 보세요. 게이트가 세워지면, 수락한다는 의미로 알겠습니다. 만약 이를 어긴다면, 이 녹취록과 계약서를 세상에 풀어버릴 테니까, 어기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170.


메가라는 꿈 속에서, 매티어스 국장와 카이 부국장에게 쓴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나마 메가라의 편에 들었던 위틀톤 부국장은 형체 따위도 없었고, 그조 두 거대한 산들이 메가라에게 '아톤 작업을 포기해'라는 말을 기괴하게 섞인 기계음이 가득한 근거를 들어대며 고막을 어지럽혔다. 악몽에서 깨어났을 때, 메가라는 에어컨이 틀어져 있음에도, 온 몸이 땀에 흥건하게 젖어있음을 느꼈다.



찝찝함을 온몸으로 수긍하면서 일어났을 때, 암막 커튼 사이로 새어 나오는 햇빛이 메가라의 침대맡을 비추고 있었다. 선득하게 턱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으며, 메가라는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 8시 16분, 악몽을 꾼 것과 달리 마법에 걸린 것처럼 간만에 푹 잔듯 싶었다. 하지만 전날 맥주를 마시고 먹은 케밥을 쏟아낸 탓에 위장은 쓰라림만이 가득했다. 비틀거리는 손으로 냉장고 문을 힘겹게 연 메가라는 안에서 1리터 들이 생수 한 통을 꺼내 그대로 입을 대고 마셨다. 통의 절반을 다 비운 뒤에야 메가라는 입을 떼었다.



"어떻게, 잠은 잘 잤어요?"


메가라의 등 뒤에서, 익숙하지 않는 목소리가 들렸다. 필립스가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수프 두 접시를 들고 서 있었다. 메가라는 지금 자신이 어떤 옷차림인지 깨달았다. 어제 입었던 정장 바지와 흰색 와이셔츠가 땀에 절여 잔뜩 구겨져 있었다.


"이게 잘 잔거라고 생각한다면,  글쎄요."


메가라는 필립스가 내민 수프 접시를 받아들었다. 붉은 국물에 적셔진 적당한 크기의 고기들이 들어있는 굴라쉬였다. 메가라는 고기를 숟가락으로 한 스푼 떠 맛을 확인했다. 약간 매콤한 것만 뺀다면 고기는 적당히 간이 배어있었고, 끝맛이 새콤한 특이한 식감이었다.


"맛있네요. 직접 한 거예요?"


"밤은 길고, 오늘 새벽엔 책을 읽고 싶진 않아서 솜씨좀 발휘했죠."


메가라는 국물을 숟가락으로 호로록 떠마시면서, 눈 앞의 신비주의 사내와 다르게 자신은 극단적 현실주의자같다고 느꼈다. 분명 지난 밤 같이 맥주를 위장에 들이부었을 터인데도, 이 남자는 숙취도 거의 없이 멀쩡해 보였고, 기어코 새벽을 투자해 굴라쉬를 메가라에게 대접했다.


"그렇게 깨 있으면 피곤할 텐데."


"제 직위는 자유출근제라서. 그리고 말했잖아요. 난 재택근무도 할 수 있는 환경을 두고 있어요. 까고 말해서, 이 기지의 우두머리가 난데 누가 태클을 걸 수 있겠어요?"


메가라는 필립스의 말을 듣고 지금쯤 새벽의 잠을 거닐고 있을 안나를 생각했다. 그 애라면 충분히 필립스를 언변과 실력으로 제압하고도 남았다. 그리고, 지난 밤 의식을 잃기 전 국장과의 통화내용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작업은 취소되었고, 안나의 복수, 그리고 친언니인 엘사를 찾을 방법은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무심코 숟가락이 손가락을 벗어나 그릇에 담겨지자, 의자를 끌어와 말없이 굴라쉬를 먹던 필립스의 수저질이 그대로 멈췄다.


"어떡하면 좋아요."


"작업 취소된 거요?"


"안나가 많이 고대하고 있을 텐데... 이 작업을 성공시켜야 할 이유가 또 있거든요."


메가라는 숟가락으로 굴라쉬를 휘저었다. 숟가락의 뒤로 굴라쉬의 국물이 잠깐 갈라지다, 이내 상처 없이 평평하게 아물어졌다.


"어떤 이유죠?"


"거기까지 아실 정도의 관계자는 아니잖아요, 필립스?"


"그런가요? 뭐, 아무래도 좋습니다. 아,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하나씩 있어요. 어느 것부터 들으실래요?"



메가라는 그것이 잠에 빠지기 전, 필립스가 말한 '마법 같은 행동'의 결과들이 아닐까 의심했다. 나쁜 소식이 켕기긴 했지만, 좋은 소식도 있다고 한 그였기에, 메가라는 일단 나쁜 소식부터 들어보기로 했다.


"나쁜 소식부터 말해 주시겠어요?"


메가라가 굴라쉬를 한 숟갈 뜨며 필립스에게 말했다. 필립스는 입술을 씰룩거렸다. 채 깎지 못한 짧은 수염들이 그의 안면근육을 타고 넘실거렸다.


"저번에 그런 말을 하셨죠. 이 일이 완전히 끝나면 CIA를 나오시겠다고."


"그랬었죠."


메가라가 아직 CIA에 잔류한 이유는 순전히 안나와 관련된 일들을 마무리짓기 위해서였다. 메가라의 CIA 내 경력은 업계에서도 대우받을 수 있었으며, 명분이 걸린 안나의 일들을 끝내면 더 이상 남아있을 이유도 목적도 없게 된다. 메가라는 안나가 혼수상태인 동안 필립스에게 신변 보호를 요청하면서 퇴사 이야기를 나누었고, 필립스는 지금 이 주제를 언급하고 있었다.


"계획이 좀 틀어질 수도 있어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제 퇴사 계획이 왜요."


더 높은 로열티를 준다고 하여도 고사하고 나가려는 메가라였다. 차갑고 더러운 곳에 발이 아닌 온 몸을 담궜고, 이는 한계에 다다랐는데, 필립스는 이상하게 메가라에게 CIA 추가 잔류를 암시하는 말을 꺼냈다.


"새벽, 아니, 저녁이죠. 당신이 술에 취해 꽐라가 되어 침대에 거죽데기처럼 자고 있었을 때, 전 당신에게서 들은 것을 토대로 제 오랜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어떤 지인인데요?"



"그냥, 높은 곳의 친구들(자신을 도울 수 있는 지위와 권력이 있는 사람)들을 좀 알고 있습니다. 현 CIA 국장과 부국장들이 모두 민주당 출신이더군요? 메가라, 당신에게 물어보건대, 혹시 민주당 소속입니까?"


"공화당인데요."


필립스가 성향을 묻는 말을 한 이유를 메가라는 알아낼 수 있었다. 그는 필시 공화당에 연줄이 닿는 정계 인사를 알고 있다.



"공화당의 에스메랄다 의원을 아시겠지요? 제가 그분의 선거 활동 당시에 메이커 역할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원 때였나, 그 때 그녀에게 상원으로 가기 위한 선거 노하우를 전수해주고 샐리맨더에 취직했죠."


"그게 뭐 어쨌다고 그래요?"


"당신에게 기회를 드리겠다는 겁니다. 지금 위치에 만족하십니까?"



메가라는 굴라쉬를 떠먹으며 필립스의 말을 정리했다. 내부 라인이라도 새로 정리하려는 가 싶었지만, 어떻게 정리한다는 것인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불만족스러운데, 올라가도 불만족이예요. 필립스, 말해봐요. 그 사람과 어떤 거래를 했길래 제 성향부터, 퇴직 계획까지 묻는 거죠?"



필립스는 잠시, 그릇을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는 그의 눈이 메가라의 눈을 향했다.



"게이트를 열 겁니다. 아시죠? 청문회 열리고, 국회 출석하고 그런 거. 하지만 청문의 대상은 당신이 아니라, 민주당 쪽이예요."


"이 자료들로 청문회를 연다고요?"


"한 번 걸어볼 만 하지 않아요? 미국의 골칫거리 중에서 마약과 불법 이민을 한꺼번에 막을 수 있어요. 당신들이 추구하는 애국과 안보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기회인데다가, 당신의 신분 상승을 한 차례 더 이룰 수 있단 말입니다."


"제 신분?"


메가라는 수석 그룹의 팀장직에도 만족하고 있었다. 그 이상인 부국장, 국장급의 인사가 되면 손가락 하나로 지시하게 되는 모든 것이 현장 요원부터 시작해 다른 나라의 정세를 바꿀 수도 있을 권력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권력은 마약과도 같았다. 메가라는 그 마약에 휩쓸려 울프독의 머리를 향해 권총의 방아쇠를 당긴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자제했던 권력의 유혹은, 다시 한 번 메가라의 손 끝을 타고 올라왔다.



"백악관에서 직접 지침을 내렸든, 국장들이 백악관이라 속이고 당신에게 지침을 내렸든 간에, 적어도 게이트로 공론화 된다면 CIA 내 민주당 라인은 한 차례 쓸려나갈 겁니다. 공화당 라인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은...메가라 당신이고."



"의무예요?"


선택을 해야 했다. 새장 밖을 나갈 것이냐, 아니면 더 넓은 새장으로 이동할 것이냐. 새장 밖은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만, 불확실한 미래가 기다린다. 넓은 새장은 더 넓은 공간을 주어지지만, 자유롭지 못한다. 대신, 생활을 영위할 더 많은 먹이가 주어진다.


"의무라... 일단 에스메랄다 씨와 얘기를 한 다음에 공화당 사람들이 게이트를 열 거예요, 이후에 당신의 인적성을 평가할 거고, 그 때 결정나는 거겠죠."


"자율 선택일 수도 있단 거네요."


"뭐, 국장직이 국민의 의무인 것도 아니잖습니까?"


필립스는 멀티캠 패턴의 바지 주머니에서 작은 쪽지를 꺼내 메가라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예요?"


필립스는 별 거 아니란 듯, 허허 웃어버렸다.



"별 거 아닙니다. 비축해둔 커피가루를 사야 할 돈이 필요해졌거든요. 그리고 우리 사이에 벌어질 또 다른 투자를 위해서죠."











171.


필립스, 하나만 더 물을게요. 민간인이 정치에 개입한다면, 그것이 유착이 될 거란 거, 알고 계신가요?



유착이라뇨? 전 유대를 하는 것 뿐입니다.














172.


한나가 내지른, 역수로 쥔 젓가락이 안나의 관자놀이로 날아들고, 안나는 손등으로 한나의 손목을 쳐 흘려보낸다. 한나는 순간, 젓가락을 쥔 손을 폈다. 호선을 그으며 날아간 젓가락은 이내 다른 손에 쥐어졌고, 안나의 허벅지로 직격한다. 겨우 다리를 비틀어 젓가락을 피한 안나는, 발을 한나의 안쪽 다리까지 깊숙이 들여보냈다. 한나는 갑자기 다가온 안나의 숨결에 집중을 흐트릴 수밖에 없었다. 안나는 그 즉시, 다리를 안쪽으로 굽혔고, 발을 걸린 한나는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몸이 바닥에 부딪히기 직전, 안나는 한나의 몸을 잡아 일으켰다.


"잠깐 쉬었다 하자."


끌어안긴 한나는 달뜬 숨을 쉬면서도, 안나의 변함 없는 눈빛에 매료되었다. 한나는 젓가락을 떨어뜨렸고, 조심스럽게 다가온 이두나가 젓가락을 집어 끝부분을 매만졌다. 날이 서도록 갈아낸 젓가락은 자칫하면 상해를 입힐 수도 있는 송곳으로 전락되어 있었다.


"안나, 도구를 안 쓰는 건 어떠니?"


이두나는 한나와 안나에게 이온음료가 든 페트병을 각각 건네주며 말했다. 메가라에게 식전 문자 외의 다른 소식이 없는 지금, 안나는 한나를 파트너 삼아 농장에서 배워왔던 기본 훈련을 다시금 기억하며 연습하고 있었다. 3일이 지난 지금도, 안나는 새벽에 찾아오는 어스름처럼 먼저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는 것을 시작으로, 이두나를 따라다니며 졸라 겨우 받아낸 MEU 피스톨로 사격 자세부터 시작해 칼리아르니스(필리핀의 전통무술, 에스크리마로도 불린다.)를 접목시켜 총부리와 손잡이로 적의 목과 상체를 가격시키는 연습을 빼먹지 않고 하루의 절반을 투자했다.



또한, 감각이 잊혀지지 않기 위해 한나에게 파트너가 되어달라고 부탁했고, 한나는 긴장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새 언니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반갑게 수락했다. 이 과정에서, 안나는 한나에게 칼리아르니스를 가르쳤다. 안나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한나 아렌은 안나 아렌이 될 운명이었고, 안나의 부재를 대신해 이두나, 그리고 나중에 올지도 모르는 엘리사와 멜리사를 지켜야 될 사람이었다. 생후 1개월도 채 안된 아이에겐 너무 가혹했지만, 한나 말고는 대체할 사람은 없었다. 크리스토프, 그 사람이 국내 파견직이니 이두나의 요청으로 아렌의 경호를 맡게 될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굳건한 사람이라도 독을 묻힌 다트를 장착한 취관을 막을 수 없고, 주사기를 장착한 우산에 찔리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당장의 CIA와 경찰의 지원으로도 아톤의 견제를 유지하고 있을 정도였다.



"도구를 써야 더 능률이 좋아지거든요. 뭐..엄마가 말하시니 자제해 볼게요."


이두나에게서 젓가락을 받아든 안나는 엄지와 검지로 젓가락을 집은 다음, 부엌의 수저통을 향해 젓가락을 던졌다. 거실에서부터 호선을 그리며 날아간 젓가락은 튕기듯이 수저통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턱 밑에 고인 땀을 손등으로 훔치는 안나에게, 한나가 뚜껑을 열은 페트병을 내밀었다.


"고마워."


"뭘."


"그냥, 모든 게 다."


3일 동안, 한나는 불평도 없이 안나의 부탁을 모두 들어주었다. 서글서글한 웃음이 볼에 걸려있는 한나는 한없이 기뻐하고 있었다. 안나는 한나의 이마에 걸린 굵은 땀방울을 손가락으로 쓸어 닦았다. 그리고 들고 있던 페트병의 뚜껑을 열어 한나의 입에 갖다대었다. 한나는 두 손을 잡고 쭈뼛거리며 이온음료를 꼴깍거리며 조금씩 입안으로 흘려보냈다. 수분을 보충한 쌍둥이 자매는 이내 소파에 몸을 기대어 누워 숨을 돌렸다. 차갑게 식은 땀이 소파에 닿아 소름이 돋았다.


"칼리는 할만 해?"


"어? 응, 템포가 빠르지만.. 같이 하니까 좋아."


"힘들면 말해. 이미 넌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건 대부분 가르쳤으니까."


안나는 연습 내내 한나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한나의 움직임은 안나보다 느렸다. 그리고 투박한 감이 없지는 않았다. 한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인형과 돼지를 쏘고 죽이는 연습을 했다고 가족 행사를 만들면서 털어놓았다. 그 때 본능적으로 배워둔 근접전의 개념을 한나는 착실하게 칼리아르니스에 적용시켰고, 안나가 배워왔던 칼리와는 조금 다른 면이 있었다. 방금 전에도 관자놀이에 젓가락을 꽂으려던 한나의 동작도 칼리에서 배웠던 동작과는 거리가 있었다. 만약 안나가 손등을 쓸 수 없었더라면, 이것이 실전이었다면 그대로 뇌사에 빠졌을 수도 있었다. 안나는 그런 한나를 보면서, 학습력이 뛰어난다고 생각했다. 개체들의 특성일지도 모른다. 인위적으로 태어났으니, 그 과정에서 조작을 못할 것은 없으리라.


"아니야, 계속 알려줘."


"괜찮겠어?"


한나가 안나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안나는 슬며시 한나의 팔에 목을 기댔다.


"배우지 않는 것보다 훨씬 낫잖아?"


"그건 당연하지. 엄마는 이런 거 하시기엔 힘이 드셔. 물론 너도...힘이 무리가 있지만. 머리가 좋잖아. 머리가."


안나가 한나의 땀에 찬 머리를 손바닥으로 꾹꾹 눌렀다. 흠흠, 한나는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이온음료를 마셨다.


"엄청 열심이시네요. 두 사람."


둘을 유심히 지켜보던 오로라와 제인 중, 오로라가 쌍둥이에게 말했다.


"막, 영화배우처럼 엄청 멋있어요!"


안나는 오로라에게 칼리아르니스를 알려줄까도 생각했다. 제인은 기본적인 호신술 정도는 익혀 두었다고 했으므로 문제될 건 없지만, 오로라는 신체 감각이 굼뜨다 못해 관절이 고장난 인형같았다. 다른 표현을 빌리면 몸치와 거의 대등한 수준이었다. 어쩔 수 없이, 오로라에겐 CAR(Center Axis Relock:중심축 유지자세)파지법만을 가르쳤다. 침입을 당한다면 근접전이 될 것이고, 조준 사격보단 지향사격으로 탄막을 만들어 심리적인 압박과 부상을 안겨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나와 안나는 이미 살인을 여럿 해보았기에 거리낌이 없지만, 오로라의 킬카운트는 아직 0에 머물러 있었다. 불의의 일이 아닌 이상, 카운트는 유지해야 했다.


"안나, 저 궁금한 게 있는데, 막 짚라인 타고 습격하는 경우도 있어요?"


오로라가 한껏 과장된 자세로 트롤리를 잡는 시늉을 했다. 제인은 그것을 보고 웃기다는 듯 입가로 손을 가져갔다.


"작전 내용은 기밀이지만, 그런 적이 있긴 했어요. 박격포같은 장치에다 갈고리를 매단 투사체를 발사해서 절벽 사이에 줄을 연결해서 넘어간 적이 있었죠."


"우와... 그 작전은 성공했어요?"


"성공했으니까, 제가 여기 있는 거겠죠?"


안나는 오로라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자연스레 웃으며 말했다. 그 때, 탁자 위에 놓아둔 안나의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휴대폰을 들었을 때, 발신인에는 메가라가 띄워져 있었다.


"메가라네, 무슨 일이지?"


메가라의 문자는 점심에 와야 했다. 하지만 아직 오전과 정오 사이의 10시 17분이었고, 메가라가 연락을 하는 경우는 몇 가지 없었다. 엘리사와 멜리사의 연구, 아니면 한스를 처리하는 작업. 후자의 가능성이 높았다. 안나는 별 기대감을 품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응, 무슨 일이야?"


[...TV 켜봐.]


메가라의 목소리는 목이 잠긴 것처럼 무겁기 그지없었다. 불길한 예감에, 안나는 곧바로 리모콘을 들어 난로 위 벽걸이 TV를 향해 전원 버튼을 눌렀다. 부팅된 TV는 뉴스 채널의 화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금발의 남성 앵커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속보를 전달하고 있었다. 세 아렌과 두 외부인은 화면 밑으로 송출되는 자막에 주목했다.




<미 공화당의 에스메랄다 상원의원이 공식 청문회를 열다.>
<아톤은 마약 기업인가? 민주당과 얽혀 있다?>
<마약-불곰 게이트가 확실해질 지도 모른다.>


"....성공했네."


해야 할 일은 어느새, 안나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대폭로는, 안나로 하여금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희열의 두근거림이 아닌, 불안함의 두근거림이었다. 메가라는 말이 없었다. 안나는 메가라의 무응답에 의아했다.


"왜 대답이 없어?"


[좀 지쳐서, 잠을 못 잤거든.]


"3일 동안 잠을 안 잔건 아니지? 필립스한테 부탁을 했는데 널 케어하지 않았단 소리야?"


[아냐, 그 사람은 날 엄청 배려했어. 기지에서 하루 잔 뒤로 나머지 이틀은 못 잔 것 같아. 워싱턴 사람들과 물밑작업을 해야 했거든.]


워싱턴 사람들 중에는 에스메랄다 상원의원이 있을 터였다. 안나는 메가라가 정치 인맥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무뚝뚝한 깡패같았던 인상이었던 그녀는 안나가 CIA에서 나와 있을 동안 발품을 팔아 반경을 넓혀 가고 있었다.


"작업은 언제 시작이야?"


[ASIC하고 협업한 결과 이슈가 터지기 전에 찌라시가 러시아로 퍼졌나봐. 아톤 측에 겨우 심어둔 소식통이 한스의 부재를 알렸어. 우린 그 즉시 별장들의 움직임을 위성으로 감시했지.]


"혹시 슬로베니아의 루블라냐야?"


제인의 계산에 따르면 한스가 별장 중에서 최장기로 머물던 곳은 루블라냐 별장이었다.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물어보고 싶었다.


[아니, 코북 밸리의 코북 강이야. 가까운 곳에 한스가 있길 바랬어?]


"이쪽에서도 나름 가설을 세워가며 찾아봤거든. 근데...거긴 미국이잖아."


[DEA와 FBI에게 협조를 부탁했는데, 여기도 한스의 내통자가 있다면 무산될지도 몰라.]


"그럼 어떡해? 나 혼자 가야 해?"


혼자 작업을 하게 된다면, 이두나가 안나를 절대 보내지 않을 것이다. 안나는 이두나의 구속을 저항할 수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


[아직 확정된 건 없어. 걱정하지마. 지부에 있는 위장 물품들이 있으면 될거야, 실리콘 마스크 기억 나지? 한 번 써봤잖아. 그거하고 FBI와 DEA 표식 장비들이 몇 있으니까. 최악의 상황에는 우리가 위장을 쳐서 국내 작업으로 돌릴거야.]


"위험하지 않아?"


명분이 세워지고, 중간에 훼방을 놓을지라도, 해외로 돌려야 할 총구를 안으로 돌리는 건 아주 위험했다. 직위 해제가 아닌 징역을 살다 나올 수 있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필립스가 알아서 해결할거야.]



안나는 메가라의 잠긴 목소리에서, 알 수 없는 확신을 느꼈다.







173.

그럼 끊을게.

메가라, 끊지 말아봐. 너 진짜 괜찮은거 맞지?

... 괜찮아.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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