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픽]Praying prey 82

개구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6.07 22:05:57
조회 578 추천 25 댓글 7







1~81화










210.




"바래다 줘서 고마워요."


저녁 7시가 되서야, 3-2와 안나를 태운 밴은 앵커리지 공항에 도착했다. 늦은 아침에 그쳤던 눈은 주황색 가로등의 빛을 받으며 터진 베갯잇 속에서 뿜어나오는 솜털처럼 거세졌다.


"아마 결항될 것 같은데, 어디 모텔에 가서 지내는 게 어때요?"


3-2가 주머니에서 꺼낸 지갑을 열어 다량의 지폐 다발을 안나에게 전해주었지만, 안나는 한사코 거절했다.


"마음만 받을게요. 당신도 여기까지 오는데 피곤했을 거 아니예요."


"에헤이, 부팀장 개인 계좌에서 나오는 거니까 그냥 받아요. 어차피 팀장급 정도 되면 이 정돈 푼돈이라 생각할 테니까, 어서."


3-2는 억지로 안나의 손에 지폐다발을 쥐어주고는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떴다.


"고마워요!"





안나가 밴을 향해 걸어가는 3-2의 등에 소리쳤다. 3-2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손을 들었다. 3-2를 태운 밴이 천천히 속도를 올리며 공항을 떠나자, 길에는 안나 혼자만 남게 되었다. 안나는 두껍게 입어도 으슬으슬 떨리는 알래스카의 추위를 피하고자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안나가 탈 비행기는 공식적인 항로조차 이용하지 않는, CIA에서 운영하는 비공식 항공기였다. 안나는 기록상으론 현재 영국에 거주중이었고, 작전은 사실상 비공식 작전이었기에, 안나가 미국에 있는 것 자체로도 밀입국자와 다를게 없었다. 그래서 안나는 국가 공인 영현소가 아닌 불법 영현소에서 시체 처리를 당할 뻔 했었고, 아직도 안나의 코끝에는 약품의 씁쓸한 냄새가 걸려있었다.





안나는 냄새를 지워보려 코끝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공항 안으로 들어오자, 차디찬 바람이 사라졌고 곳곳에 히터가 가동하여 추위는 구겨진 종잇쪼가리처럼 누그러졌다. 안나는 라운지로 올라가 자신이 탈 검은 비행기를 눈으로 찾기 시작했다. 비행기는 없었기에, 안나는 잭 부팀장에게 연락하려 휴대폰을 꺼내들어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잭, 나예요. 지금 공항인데, 아직 비행기가 안 온 것 같아요."


[잠깐만 기다려요. 어디보자... C-130 1기가 20분 뒤에 도착할 거예요. 안에서 잠깐 기다리다가 나와서 타고 가면 됩니다.]


"알았어요. 아, 물어볼 게 있는데. 폭발 건은 어떻게 대처했어요?"


안나는 문득, 자신을 죽음에 다다르게 한 폭발을, 잭의 CIA가 어떻게 언론에 포장시켰는지 궁금했다. 캠프파이어라기엔 너무 크고, 산불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았기 때문이었다.


[캠핑하던 사람들이 남겨둔 프로판 가스통들이 강 기슭에 뭉쳐 있다가, 캠프 파이어에서 흩날린 불씨로 인해 점화되었다고 둘러댔습니다. 언론에서도 그렇게 보도되었고, 지금쯤 그 별장은 해체되서 아무것도 안 남았을 거예요.]



"벌써 처리했어요?"


[모든 관광객이 기존 경로만을 오가는 건 아니잖아요? 뭐든지 증거 남을 건 다 지워 놔야죠. 더군다나 이런 더러운 작전이라면 더더욱.]


그건 그렇지, 안나는 흠흠 헛기침을 하며 잭의 말에 긍정을 표했다. 막 공항으로 나가려는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안나의 벤치 옆을 지나갔다. 잠깐의 소란에, 안나는 휴대폰을 갖다대지 않은 오른쪽 귀를 막아 잭의 말을 들어보려고 했다.


"뭐라고요?"


[이제 어쩌실 거냐고 물었어요!]



관광객 무리가 안나에게서 멀어지고 나서야, 잭의 말이 안나의 고막에 꽂혔다.


"아직 안 정했어요. 일단 모두 만나고, 한 며칠 쉬다가 생각해 보려고 해요. 어쩌면... 프로젝트 실험에 제가 약간의 도움을 줄 수도 있고요."


마지막이 쓰라릴 여정이었어도, 일단은 여정의 막바지를 향해 안나는 움직이고 있었다.



[실험에 자원하시려고요? 아마 안 될 텐데.]



"왜 안 돼요?"



[그거야, 당신은 이제 민간 신분이고, 우리 연구소에 드나들 만한 권한도 없잖아요. 이건 메가라 팀장도 커버 못 칠 겁니다. 설령 한다고 해도, 현재로썬 당신에게 의료팀을 정기적으로 파견 할 거라고 추측하고 있어요.]


안나는 잭이 들으라는 듯 의도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잭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안나의 심정과 정반대의 감정이었다.



[실험에 참여하고 싶은 이유가 뭔지 저도 압니다. 팀장이 떠나기 전에 저에게 설명해주고 갔으니까요. 하지만.... 너무 깊게 들어가면 안 되는 법이예요. 안나, 당신의 이력 중에는 사람의 야만성이 어디까지 드러날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작전들이 몇 개 있었죠. 리브리도 카르텔이라거나, 마약 카르텔 와해라거나... 후자의 경우는 PTSD 증상까지 가지고 있더군요.]


안나는 잭이 왜 작전을 언급했는지 그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안나가 농장의 일원이어도, 여전히 알지 못하는, 건들지 말아야 하는 수 많은 것은 장막에 가려져 있었다. 이 프로젝트 또한 그 장막 너머의 안개 속에 숨어있는 것 중 하나일 것이다.




[앞으로 누구 죽일 일은 없게 하셔야죠.]



어떻게 보면, 그건 협박과도 같았다. 안나는 이해했다. 아무리 숙련되고 죽다 살아나도 그것이 접근을 허용하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으니까. 안나는 잭의 경고를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케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하지만 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선 난 누구라도 죽일 거예요."



[저한테 협박하시는 겁니까?]


"먼저 협박한 게 누구였죠?"



그러자 잭이 웃었다. 그의 웃음에 안나도 덩달아 웃었다. 감정이 거친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두 사람은 서로에게 협박을 주고받고 있었다.



[미안해요, 사과하겠습니다. 아무튼 간에.... 전 이제 끊어야 할 것 같군요. 그 작전만 통솔하는 게 아닌지라. SSE로 받은 정보들을 분석해야 하거든요.]


"그럼 끊을게요."



붉은 전화기 버튼을 눌러 통화를 마친 안나는, 끊자마자 스크린에 저장되어지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뜬 것을 확인했다. 안나는 이 번호를 알고 있었다. 메가라와 같이 있을, 시리아의 필립스의 것이었다. 안나는 메가라가 자신의 죽음 때문에 극단적인 무언가를 했을까봐 걱정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필립스?"


그는 말이 없었다. 안나의 죽음을 알고 있다면 그가 전화를 걸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전화를 걸어놓고, 되려 입을 열지 않았다.


"여보세요?"


[방금 벨이란 사람한테 전화가 왔었어. 난 그 사람이 취한 줄 알았는데.]


"제 죽음이 너무 과장되어 있다고 생각되네요?"



[그야 여긴 중동이고, 너는 알래스카에 있으니까 즉각적인 상황 파악을 못 하잖아. 여기... 메가라는 무슨 프로젝트를 계속 지켜보기만 했고, 작전에 대해 거의 함구했거든.]



"메가라는 어디 있어요? 그리고 벨이 당신에게 전화했다니, 무슨 소리예요?"


안나는 코 끝을 긁적이면서 필립스에게 말했다.




[음... 메가라한테 얘기하지 마. 그러니까... 난 방금 전까지 작전 회의를 하다 쉴 겸 들어왔는데, 네 사망 소식 때문에 메가라가 맥주 여섯캔을 마시고 고주망태가 되서 벨 씨의 전화를 못 받은 모양이야. 부재중 전화가 열 통이나 와 있길래, 내가 대신 전화를 걸어 네 생존 사실을 전해들었어.]



"간단명료하네요. 난 또 메가라가 극단적인 상태에 빠져있는 줄 알고 걱정했거든요."




안나는 졸인 가슴을 쓸어내렸다. 메가라는 주량이 극히 적은 편이었다. 몇 번 있지 않았지만, 재직 당시 안나와 술을 몇 잔 주고받아도 어느 정도 주량이 있던 안나와는 다르게 메가라는 항상 맥주 1캔을 초과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주량의 6배나 되는 양을 마셨더라면, 그 이유는 필시 안나 때문일 것이었다.



"메가라한텐 말 안 할게요. 아, 메가라한테 허튼 짓 하지 말아요."




[그럴 일 전혀 없어. 그리고 이 사람하고 난 현재 계약 중이야. 나 알잖아. 난 내 편에 있는, 있던, 있을 사람들은 절대로 해코지 안한다는 거.]



안나는 필립스의 말을 듣고, 폴 타바로 가기 위해 C17을 탔던 기억을 떠올렸다. 약간의 수수료를 지급했어도, 필립스는 국제수배가 내려질 뻔하고, CIA의 독헌트가 내려진 상태의 안나를 흔쾌히 수송시켜 주었다. 그의 말은 경험으로 입증된 셈이었다.



"잘 알죠, 근데 계약은 또 뭐예요?"





[그런 게 있어. 보안유지를 지켜야 할 흔한 비밀 같은 거. 나쁜 건 아니야. 결과적으로 모두에게 좋은 방향으로 적용될 내용을 담고 있어.]




필립스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말들을 안나에게 전했고, 안나는 계약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의심은 하지 않기로 했다. 필립스가 했던 말의 증명을 직접 겪었고, 여기서 또 다른 반전이 있을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엘사의 능력 발현, 그리고 시력 상실이라는 사실들만으로도 절망하기 충분했다.




"프로젝트와 관련이 있나..."



그나마 추측해 볼 수 있는 거라곤, 메가라와 안나가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프로젝트 뿐이었다. 필립스는 블루라운드와 성격이 같은 군사기업의 고위 관리자 중 한 명이고, CIA는 아이들, 혹은 아이들의 능력을 무기화시키려고 했었다. 메가라가 자신과의 약속을 어기지는 않겠지만, 마음 속엔 찝찝한 의혹의 찌꺼기가 맴돌고 있었다.



[대체 그 프로젝트란 게 뭐야? 뭐.. MK 울트라 같은 거야?]



"메가라가 말 안해줬어요?"



[기밀인 것 같아서 말을 안 해준 것 같은데. 대체 뭔데 너도 프로젝트, 메가라도 프로젝트.... 이젠 귀에 딱지가 붙으려고 해. 대체 뭐야?]



"나한테 물어봐도 대답은 못 해드려요. 난 이제 민간인이고, 또 다시 독헌트를 당하기 싫거든요."



휴대폰 너머에서 가벼운 탄식이 들려왔고, '프로젝트란 단어 좀 그만 듣고 싶어.'라고 중얼거리는 필립스의 말이 들렸다.


[이제 다 끝난 거지? 널 위협할 세력도 없고, 이제 가족 품으로 돌아갈 수 있잖아.]



"그렇죠, 하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아 있는걸요."



안나는 공항 한 쪽 벽에 걸려있는 디지털 시계를 바라보았다. 7시 20분, 비행기가 오려면 아직 15분 정도 남아있었다. 창을 흘끔 바라보아도, 안나를 태울 C-130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위험한 일이야?]



"아뇨, 위험하진 않지만... 심적으로 힘든 일이죠. 그렇다고 누굴 죽이는 일은 절대 아니예요."



대신 슬픔을 죽여야겠지만요. 안나는 마음 속으로 마지막 문장을 말했다.



"많이 지칠 것 같은 일이 될 것 같아요."






안나는 고개를 떨궜다. 환한 불빛 밑으로 내리쬐여지는 인조대리석이 하얗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떠오르게 하는 그런 색깔, 안나는 문득 시야에 들어온 패딩의 색깔이 검은색이란 걸 알았다.




[음, 이게 조언이라거나 덕담이 될 지는 모르겠는데 내 철학을 얘기해도 될까?]



휴대폰 너머로 신발이 바닥의 산발적인 박수소리가 들렸다. 안나는 기억을 더듬어 필립스가 계단을 올라가고 있을 것이라 추측했다.




[적어도 네가 지금까지 겪었던 일들보다 훨씬 쉬울 걸? 물론 적응하기 힘들겠지. 하지만 총을 손질하지 않아도 돼고, 작전 정보를 머릿속에 박아둘 필요도 없지. 무엇보다도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돼. 앞으로 더 여유로워지고, 너에게 주어진 것들 모두에게 감사하게 될 거야.]




그러니까 힘 내라고. 필립스가 안나를 격려했다. 그의 말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일이 사라지면 시간이 남겠지마는 안나는 예정될 평화를 후유증 없이 받아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 끝에는 엘사가 있었다. 엘사의 짐을 제대로 덜어 줄 수 있을지 안나 스스로도 확신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럼에도 시도해야 했다. 무엇이 되었든, 이 여정을 시작한 목적이 다름 아닌 엘사를 찾는 것이었으니, 목적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



"알겠어요. 도움이 된 것 같아요."




[마음 편히 가지고, 메가라가 깨려면 6시간 정도는 기다려야 할 거야. 아마 네 여정이 끝날 즈음에는 네가 살아났단 소식을 듣고 울고 불고 난리를 칠 것 같긴 하지만 침울한 것보단 낫겠지.]



"메가라 좀 잘 부탁드려요."



[네가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잘 챙기고 있으니까 걱정말고, 이만 끊자. 다음 회의 시간 때까지 자 둬야지, 지금 안 자면 좀비가 될 것 같거든.]



"그래요? 그럼 바로 끊어야겠어요. 몸 조심해요."





안나의 당부에 필립스는 껄껄 소리를 낸 웃음을 터뜨리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통화를 마치자, 다시금 웅성거리는 공항 속 사람들의 소음이 안나의 고막을 묻었다. 안나는 사람들의 표정을 지켜보았다. 무표정인 얼굴도 있었지만, 대개는 웃고 있었다. 새로운 곳에 발을 딛는 그런 신비함이 자아낸 웃음들을 보며, 안나는 우울감을 느끼며 시계를 다시 확인했다. 12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지금쯤이면 지구 반대편의 영국에서도 한나 일행이 비행기를 타고 이그지비크로 향하고 있을 것 같았다. 안나는 무심코 인터넷에 접속해 이그지비크란 지명을 검색했다. 거의 아무것도 없는, 돌과 눈의 황무지였다. 만약 하늘과 땅을 주황색으로 처리한다면 화성에 온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을, 엘사가 있기에는 너무 황량했다.






안나의 가슴은 상처를 꿰멘 실밥이 터지듯 다시금 미어졌다.















211.




"한나, 괜찮니?"



"아뇨....편찮아요..."



한나는 입을 가리며 우욱, 끓어오르는 속을 진정시키려 했다. 난생 처음 타 보는 비행기는 한나에게 있어 극한의 공포심을 유발하는 날아다니는 거대한 관이었다. 비행기가 히드로 공항에서 이륙을 하고, 기체가 수평을 이루기가 무섭게 한나는 바람을 발에 걸듯이 뛰쳐나가 화장실로 직행해 구토를 시작했다.



'여기가 하늘이라고?'



처음 구토를 마치고 다시 이두나의 옆 창가로 앉았을 때, 한나는 밑으로 보이는 머나먼 개미들의 콘크리트 성들을 보고 다시 속이 울렁거려 두 번째 구토를 자행했다. 괜찮을 거라는 자기암시도 통하지 않았다. 식은 땀을 흘리며 눈을 감고 있는 한나의 손 위로 이두나의 손이 포개졌다.



"멀미약이라도 부탁해 볼까? 얼굴이 너무 창백한데..."


실제로, 한나의 얼굴색은 과장을 조금 보태서 머리색과 동화될 정도로 좋지 않았다.



"혹시 토하면서 피를 뱉진 않았지?"



이두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미 그녀로선 한나같은 개체에게 살려지면서 그들만의 사전증상을 알게 되었고, 제인의 설명으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한나가 능력을 과도하게 쓰진 않아보였지만 그래도 불안함을 떨쳐낼 수 없었다.



"피는 없었어요. 그냥...아까 먹은 초콜릿 진액 밖에..."



한나는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 숨을 헐떡였다.



"저기, 여기 멀미약하고 물 좀 가져다 주세요."



한나의 고통은 건너편에 앉아있는 제인과 오로라에게까지 전해졌고, 듣다못해 걱정하던 오로라가 때마침 통로를 지나던 스튜어디스에게 부탁했다. 푸른 제복 차림의 스튜어디스는 업무용 미소를 지으며 멀미약을 가지러 통로 끝 커튼 뒤로 사라졌다.


"배를 탈 걸 그랬나봐요."



오로라가 이두나에게 말했다. 이두나도 오로라의 말에 쓰디쓴 눈웃음으로 대신했다.



"한나가 배멀미까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아, 아... 그렇구나. 음..."



말문이 막힌 오로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향을 잃은 눈을 다시 앞으로 돌리다, 창가만을 계속 바라보는 제인을 시선의 목적지로 정했다. 그녀는 아렌들과 오로라에게 엘사의 진실을 알려준 뒤로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이두나는 다시 눈물을 지었으며, 한나는 급격한 감정 변화로 노랗게 타오르는 벽난로의 불을 바람 한 줄기로 찢어버린 것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이 제인을 탓할 수조차도 없었다.





두 사람, 그리고 오로라는 제인의 상사였던 한스 웨스터가드의 만행을 두 눈과 몸으로 겪어보았지만, 그녀는 엘사의 실험에 참여한 것도 아닌, 그저 권한 없는 참관인이나 다를 게 없었다. 그럼에도 제인은 무릎을 꿇고 두 아렌에게 사죄했고, 두 아렌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제인의 잘못이 아니라고 일으켜 세웠다.






오로라는 아렌가의 사람들이 생각 이상으로 순박하다고 느꼈다. 심지어 유전자만 받은 엘리사도 웃지 못할 상황에서 항상 친절함을 잃지 않았다. 옆에만 있어도 입가에 웃음이 걸리는, 부드러운 사람들이었다.



"무슨 생각 하고 있어요?"



돌이켜 보면, 오로라를 제외하고 모두 상처받은 사람들이었다. 제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저 뜻하지 않은 상하관계에 놓여 있었고, 선택의 여지 따윈 없었을 것이다.



"그냥, 안나 씨와 엘사 씨 생각만 하고 있어요. 제가 어떻게든 한스를 말렸어야 했는데."


제인의 얼굴은 창가로 돌려져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훌쩍거리는 소리로 그녀가 울고 있음을 어림잡아 짐작할 수 있었다.




"안나 씨는 잘못이 아니라고 했는데...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전 그저 방관했죠. 그리고 그 사실을 지금까지 계속 숨겨 왔고요. 안나 씨가 평정을 잃지 않도록 알려주지 않았지만... 그것이 제 죄라면 죄니까요."



"아유, 진짜."



오로라가 탄식을 했다.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할지 생각의 끈이 닳아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면 아렌처럼 부드럽게 말해서 위로해 줘야 할까. 오로라는 괜스레 고개를 돌려 이두나와 한나를 바라보았다. 한나는 이두나의 어깨에 기대어 숨을 쌕쌕 내쉬고 있었고, 이두나는 손을 한나의 이마로 가져가 열을 측정하고 있었다. 잠시 뒤, 멀미약과 물을 가지고 온 스튜어디스가 한나에게 약을 먹였다.



'저렇게 해야 되나?'


오로라는 다시 제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그녀는 훌쩍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두나처럼 '적극적'으로 위로하기엔, 오로라 내면의 성 윤리가 무너질 것 같았다. 동시에, 오로라는 자신이 말할 수 있는 최고의 위로이자, 제안을 제인에게 말하기로 했다.



{그게 죄라면요. 제가 풀 수 있는 방법을 하나 아는데...}



오로라가 몸을 제인에게 쭉 빼 귓가에 속삭였다. 제인이 흠칫 놀랐지만, 이내 오로라의 말을 경청했다. 잠시 뒤 제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오로라와 눈을 마주했다.



"그게 될 거 같아요?"



"음, 글쎄요. 그게 될지 안 될지는 하늘에 달려 있지 않을까요? 지금 당장 이 비행기가 터질 수도 있다거나, 제 빚이 탕감... 아, 이건 이미 탕감됐지. 아무튼! 앞 날은 아무도 모르는 법이예요. 그러니까, 제 의견에 한 번 베팅해 봐요. 네?"





제인의 눈에 맺힌 눈물은 은 구름 위를 지나는 붉은 노을에 감싸져 빛나고 있었다. 제인은 천진난만하다고 생각했던 오로라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나왔음에 내심 놀랐다. 그녀가 말한 제안은 파격적이었다. 이루어질 가능성은 미지수였지만, 제인의 여죄를 씻어내릴 수 있는 최고의 제안이었다. 오로라는 말했다. 앞 날은 아무도 모르는 법이니 베팅해 보라고. 이는 제인에게 손해가 남지 않는 장사였다.





제인은, 막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닦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오로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추천 비추천

25

고정닉 10

0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힘들게 성공한 만큼 절대 논란 안 만들 것 같은 스타는? 운영자 24/06/10 - -
공지 음란성 게시물 등록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163] 운영자 14.08.29 167262 509
공지 설국열차 갤러리 이용 안내 [2861] 운영자 13.07.31 439696 286
1123714 ai힘을 빌리면 개쩌는 픽썰 쪄지냐 [1] ㅇㅇ(223.38) 11:41 8 0
1123713 이 음란한 갤 [1] ㅇㅇ(223.38) 11:39 8 0
1123712 안녕 털복숭이들 [1] ㅇㅇ(112.157) 11:26 7 0
1123711 청정한 헬요일 ㅇㅇ(223.62) 00:18 12 0
1123709 뒤조심)아 되게 충격적인 짤 봫는데 얘기할데가 여기밖에 없어 [7] ㅇㅇ(110.47) 06.09 66 0
1123708 디시 이미지 왜 깨져... ㅇㅇ(223.62) 06.09 12 0
1123707 누가먼저 보내나 시합! [1] ㅇㅇ(223.62) 06.09 25 0
1123706 일편단심 안개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9 25 0
1123705 넘쳐나는 go간 [1] ㅇㅇ(223.62) 06.09 31 0
1123704 축 늘어진 흰 옷에서 꼬물꼬물 기어나오는 아기 [1] ㅇㅇ(223.62) 06.09 24 0
1123703 설갤 단점 ㅇㅇ(223.33) 06.09 16 0
1123702 설하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9 23 0
1123701 그런가 [2] 설갤러(118.43) 06.09 16 0
1123700 아니 69라고 설갤러(118.43) 06.09 14 0
1123699 크 69가 와버렸다!!!! 설갤러(118.43) 06.09 15 0
1123698 엘산나를 만난게 행운이야 [5] ㅇㅇ(223.62) 06.08 32 0
1123697 배거파 [1] ㅇㅇ(110.47) 06.08 18 0
1123696 오늘막글 ㅇㅇ(223.62) 06.08 16 0
1123695 어 내일이 69잔아 ㅇㅇ(223.62) 06.08 14 0
1123694 쥬미 영화 보러옴 ㅇㅇ(211.234) 06.08 17 0
1123693 안탄절 지나면 엘탄절도 금방 ㅇㅇ(223.62) 06.08 17 0
1123692 모험가 안나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8 20 0
1123691 싯발 언제 비 그친거냐 [1] ㅇㅇ(223.62) 06.08 21 0
1123690 수상하게 칼을 잘쓰는 안줌 [2]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8 32 0
1123689 뭐지? 결혼식인가? [5] ㅇㅇ(211.234) 06.08 56 5
1123688 정령을 잡아다 예쁘게 묶어 공물로 바치기 ㅇㅇ(223.62) 06.08 22 0
1123687 혐퀘후식사 [2] ㅇㅇ(211.234) 06.08 20 0
1123686 오늘은 자동으로 실내활동 [1] ㅇㅇ(223.62) 06.08 19 0
1123685 자연스레 깊어가는 둘의 관계 ㅇㅇ(223.62) 06.08 21 0
1123684 아찜글 ㅇㅇ(211.234) 06.08 16 0
1123683 새벽글 [1] ㅇㅇ(115.138) 06.08 17 0
1123682 다다음주가 안탄절이네 곧 [2] PeopleOfArendelle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8 33 1
1123681 안나가 엘사를 [1] ㅇㅇ(223.62) 06.07 32 0
1123680 엘산나의 금요일 ㅇㅇ(223.33) 06.07 16 0
1123679 여전히 존버중 [2]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7 26 0
1123678 안나vs안나는 기존쎄 대결일듯 [1]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7 36 0
1123677 애틋하게 뺨쓰담 ㅇㅇ(223.62) 06.07 22 0
1123676 눈 깜짝할 새 킹요일 ㅇㅇ(223.62) 06.07 21 0
1123675 원하는 초능력을 얻는 대신 댓글이 부작용을 정해줌 [18] ㅇㅇ(115.138) 06.07 87 0
1123674 크으 모닝갤먹 [1] ㅇㅇ(223.62) 06.07 23 0
1123673 [그림] 원치 않은 신앙 [10] 애호박쥬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7 106 10
1123672 기억 속에서 지워졌던 창작물 [6] 케찹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6 113 11
1123671 세명이서 서로 아래 핥으려면 원을 그려야하냐 [3] ㅇㅇ(223.62) 06.06 53 0
1123670 프로즌 ost는 언제 들어도 좋아 [2] 설갤러(118.43) 06.06 25 0
1123669 크읏 이러다 울룩불룩 설줌이 돼버렷 [1] ㅇㅇ(223.62) 06.06 29 0
1123668 엘사만 만나면 움츠라드는 안줌 [2]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6 36 0
1123667 태어날 때 부터 얀데레 엘사 [2]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6 48 0
1123666 안나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6 24 0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