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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 카페인 - 5

불멸에관하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6.23 02:2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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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삐삐삐삑- 삐삐삐삑- 삐삐삐삑-


  “으음…”


  비몽사몽 한 상태로 눈을 비볐다. 익숙한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이리저리 해진 벽지와 한눈에 봐도 골동품 같아 보이는 전자기기들, 그리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는 정장 한 벌. 13년 동안 마음의 대피처가 되어 주었던 자신의 방이었다. 


  으으으… 몸이 굼뜨고 차가웠다. 손을 뻗어 침대 위를 더듬었다. 조금이나마 자신의 몸을 덥혀주던 이불은 침대 한 구석에 박혀 있었다. 


  아오, 씨. 투덜거리며 이불을 다시 덮고 쪽잠을 청했다. 오싹한 한기가 이불의 틈으로 파고들어 자신을 괴롭혔다.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어써도, 어림도 없다는 듯이 한기는 자신을 괴롭혔다. 더불어 간밤의 꿈이 슬며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두 눈을 크게 뜨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는 기억에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았다. 


  몽롱한 의식 속에 한 여성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한다. 먼지가 끼고 잔뜩 엉킨 백금발이 허리춤까지 내려오고, 순백의 드레스는 얼룩이 잔뜩 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녀의 동공이 흔들리고,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리고 자신은 어느 공간의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의자와 그곳에 고풍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앉아 있는 자신이었다. 


  미안해, ….. ……, …. …….


  자신의 입이 천천히 열린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모여 문장을 이루었다. 자신의 주위에 불꽃이 맹렬하게 피어오르고, 그 불꽃은 몸을 태워갔다. 


  대체 무슨 꿈이지?


  방금까지 그 불꽃 곁에 있었던 것처럼 온몸이 뜨거웠다. 방금까지만 해도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건만, 그 꿈을 머리에 떠올리는 순간 열기가 가득 차올랐다. 


  백금발… 엘사?


  주변인 중 마땅히 떠오르는 사람은 카페 주인, 엘사뿐이었다. 


  어지간히 빠졌나 보네, 그런 꿈도 다 꾸고 말이야. 


  삐삐삐삑- 삐삐삐삑- 삐삐삐삑-


  다시 두 번째 알람이 울렸다. 투덜거릴 새도 없이 출근 준비를 해야만 했다. 집에서 나가기까지 한 시간, 침대에서 일어나 낡아서 삐그덕거리는 수도꼭지에서 콸콸 쏟아지는 물을 맞았다. 이상한 방향으로 삐쭉 뻗어있는 머리를 정리하고 세수를 마친 후 냉장고를 열었다. 안에 가득 차 있던 초콜릿이 와르르 쏟아졌다. 


  아, 이런. 


  후회하면서 초콜릿들을 다시 냉장고에 쑤셔 넣고 나서야 봉투에 가득 담긴 남은 초콜릿들이 보였다. 몇 개 꺼내서 서류가방 속에 넣고 그중 하나는 입에 집어넣었다. 따뜻하고 포근한 활기가 가득 채워졌다. 


  오늘은 이걸로 버틸 수 있겠지. 


  카페 주인은 어떤 생각으로 자신에게 이런 큰 선물을 준 것일까, 자신의 머리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오늘 밤에 다시 한번 물어보리라 결심을 하고 집을 나섰다. 


  평소와 별 다를 바 없는 조용한 길을 걸었다. 길거리에는 여러 사람이 의식을 잃고 누워 있었다. 서로 싸우기라도 한 듯 각자의 주먹은 팅팅 붓고, 얼굴에는 피멍이 가득했다. 그리고 이상한 가루를 뻐끔뻐끔 피워 대며 환각을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역시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아주 조용한 길이었다. 


  [5급 시민, 통제부 개인국 여행허가과 소속 안나 도 (Anna Doe) - 확인 완료. 4지구 진입 허가.]


  그 조용한 길을 지나, 역시나 변함없는 게이트를 건너자 또 다른 조용한 길이 나왔다. 단 하나의 차이 - 길에 쓰레기가 있는지, 없는지 - 만을 두고 있었다. 


  그래도 그 길을 걸어가는 자신에게는 어제와 다른 점이 있었다. 매번 길을 걸으며 오늘은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면, 오늘은 엘사의 얼굴이 그 자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엘사를 떠올리면서 어제의 일을 회상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자신은 통제부에 도착해 있었다. 오전 5시 50분, 평소와 같은 시간이었다. 


  [5급 시민, 개인국 여행허가과 소속 안나 도 (Anna Doe) - 출근 확인되었습니다. 규정 출근 시간 -130분.]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평소와 다름없이 자리에 가방을 두고 패널을 켰다. 오늘의 회의 일정이 화면에 차르륵 펼쳐졌다. 일정에 맞춰 모든 자료를 정리한 다음, 다른 사람들이 출근하기 전까지 준비해 두는 것. 그것이 자신의 첫 번째 일과였다. 


  나도 회의 좀 껴 주지, 망할.


  작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그마치 9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일하면서 회의에 들어가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게 투덜대면서 첫 번째 일과를 마쳤다. 곧바로 자리에서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나섰다. 사람 아무도 없이 텅 빈 사무실 안을 이곳저곳 누비면서 먼지 한 톨 없이 청소하는 것, 그것이 자신의 두 번째 일과였다. 


  사무실이 조금씩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할 무렵이 되어서야 간신히 청소를 다 끝낼 수 있었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져 있는데도 몸은 여전히 후끈후끈했다. 후, 덥다. 뻘뻘 흐르는 땀을 닦으며 자리에 앉았다. 옆에는 어느새 데이지도 출근해서 업무 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짧게 눈인사를 하고 잠시 숨 좀 돌리나 싶었을 때, 과장이 자신을 호출했다. 


  “앉아.”


  과장은 책상 위에 다리를 올려놓고 자신을 깔보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의자에 앉았다. 과장이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은 바닥을 바라보는 것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이번엔 헛짓거리 안 했지?”


  “... 네.”


  “진짜지?”


  “... 네,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의심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과장은 다리를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성과 욕설이 방 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구타만 없었을 뿐이지, 이 모든 과정은 마치 구시대의 고문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 명심해, 니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바뀌는 건 없어.”


  “네.”


  “가 봐.”


  꾸벅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누더기가 되어 버린 마음을 이끌고 터덜터덜 자리로 돌아왔다. 한 달마다 반복되는 일과였다. 이제는 익숙했다.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화면의 시간은 7시 5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업무 시작까지 5분이 남은 시간이었다. 텅 비어있던 사무실도 어느새 북적북적거렸다. 


  "안나, 괜찮아?"


  "응."


  "대체 어쩌다 저런 사람한테…"


  옆에서 데이지가 자신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뭐라도 짧게 이야기를 나눌 틈조차 주지 않고 호출해댔다. 오전이 허무하게 흐르고 나서야 짧게 숨을 돌리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아, 맞아. 카페 알려줘서 고마워."


  "어땠어?"


  "뭐… 그냥 그래. 가끔 갈만하더라."


  가방에서 초콜릿 한 개를 집어 입에 넣었다. 달콤함이 혀를 감돌았다. 


  "당장은 내 앞길이 먼저지 뭐."


  아, 빨리 퇴근하고 싶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카페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막간을 이용해서 데이지와 잡담을 나누는 동안에도, 한참을 시달리며 잡일을 하는 동안에도 엘사의 얼굴이 뇌리에서 사라지지를 않았다. 


  그리고 오후 6시를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씩 퇴근하기 시작할 무렵, 자신은 다시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었다. 다시 한번 바닥을 쓸고, 어지러운 사무실을 정리했다. 모든 뒷정리가 끝나고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8시, 무려 두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붙잡고 길을 걸었다. 저 멀리 길 건너로 카페의 모습이 보였다. 긴장되어 떨리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카페 앞에 섰다. 머릿속은 여전히 엘사 생각으로 가득했다. 


  아이 씨, 뭐 때문에 왔다고 하지?


  문을 바로 앞에 두고도, 엘사를 보게 되면 어떻게 말을 건네야 할지 고민하면서 시간을 의미 없이 보냈다. 


  안녕하세요? 아니, 너무 사무적이야. 계세요? 멍청아, 그럼 당연히 있겠지! 저기요? 아니 이것도 아닌데…


  벌컥-


  “안나? 안 들어오고 뭐 해요?”


  엘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민망한 기색을 애써 숨기며 어색하게 웃었다. 


  “어서 와요.”


  엘사는 배시시 웃으며 자신을 가게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여전히 카페 안은 아무도 없이 한적했다. 엘사는 입구 근처에 뻘쭘하게 서 있는 자신을 카운터 앞 테이블로 안내해 주었다. 엘사와 바로 눈이 마주치는, 바로 어제 앉았던 자리였다. 


  “특별하게 마시고 싶은 거 있어요?”


  “아무거나 괜찮아요.”


  “그거 참 어려운 답이네요.”


  엘사는 잠시 고민에 빠진듯 싶었다. 미간을 좁히고 끙끙 소리를 내면서 한참을 고민한 후에야 뭔가를 결정한 듯 표정이 밝아졌다.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요!”


  엘사는 쿠키 몇 개를 테이블 위에 얹어두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주방에서 여러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테이블을 톡톡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내심 기대했다. 


  쿵-


  꺄아악!


  그러나 그런 기대가 무색하게 주방에서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공사라도 하는 것처럼 무언가를 부수고 태워버리는 듯한 소리였다. 


  “괜찮아요!?”


  테이블을 박차고 주방으로 달려갔다. 카페에 왜 있을지 모를 화덕에서 커다란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주변의 벽지가 타지 않는 것이 용할 정도였다. 


  “아, 아무 일도 아니에요! 불 조절을 잘못해서 그만…”


  화덕 위에 놓여 있던 무언가는 새까맣게 재가 되어 있었다. 첫인상으로 머릿속에 새겨졌던 엘사의 이미지에 금이 가고 있었다. 


  “어…”


  엘사는 황당해하고 있던 자신을 황급히 주방에서 내보내 자리에 앉히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이거 괜찮은 거 맞겠지?


  이상한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엘사는 안나를 주방에서 황급히 내보내고 가림막을 다시 쳤다. 화덕 안에서 심술이 잔뜩 나 보이는 도마뱀이 자신을 삐진 듯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왜 그러니!?”


  엘사의 표정에는 당황이 잔뜩 담겨 있었다. 도마뱀은 불을 뿜어 벽에 그림을 새겼다. 


  “안나? 하지만 넌 아직 안나를 만나면 안 된다고 말했잖니. 조금만 더 참아 주렴.”


  도마뱀은 심술궂은 표정을 짓고 엘사에게서 돌아섰다. 


  “어후, 얘 삐진걸 또 어떻게 풀어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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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쉬어가는 편!

아직도 뿌려야 되는 떡밥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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