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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 결혼 계약서(6)

ㅇㅇ(222.110) 2020.06.27 19:49:42
조회 774 추천 61 댓글 13


안나가 집으로 돌아온 뒤로 며칠이 지났다. 다행히 두 사람은 생각보다 현재 생활이 나쁘지 않다는 것에 동의했다. 

둘 다 크게 마주칠 일이 없기도 했고 무엇보다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으면서 공존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물론 불편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직까지는 별 문제없이 지내고 있었다.


안나는 며칠사이 엘사의 새로운 면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차갑기만 할 거라고 생각했던 엘사는 비록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을지 몰라도 친절하고, 가끔은 다정하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엘사는 안나가 집에 온 뒤로 매일같이 아침을 차려 두고 나갔다. 토스트나 샐러드, 어떤 날은 과일이 전부였지만 하루라도 빼 놓은 적은 없었다. 

커피는 가끔 실패할 때가 있었지만.

퇴근 후에 안나가 엘사에게 아침을 차려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전할 때면 엘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가끔씩 안나는 그 모습마저 귀엽게 느껴지곤 했다. 이 결혼에 대해 많은 의문이 있었지만 최소한 지금 자신을 대하는 엘사의 모습은 진심인 것 같았다.


엘사 역시 안나에 대한 새로운 면을 알아가는 중이었다. 안나는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자신에게 계약서를 내밀었다는게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좋은 사람인 것은 분명했다. 

안나는 아침잠이 많고 한번 잠에 빠지면 좀처럼 일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과는 다르게 기분이 얼굴에 바로바로 드러났다. 

쉽게 안나의 기분을 파악할 수 있어서 좋을 때도 있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안나의 얼굴을 보며 눈치를 살필 때가 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안나가 자신이 만든 아침을 싫어하진 않는다는 사실이 엘사의 또다른 즐거움이었다. 

요리솜씨가 형편없는 엘사였기에 간단한 것 밖에 해주지 못했지만 안나는 항상 고마움을 표시했다. 

물론 가끔 커피는 형편없다고 솔직하게 말할 때도 있었지만.


어쨌든 두 사람은 나름대로 죽이 잘 맞았고 예상보다는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엘사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고 가방을 챙겨 서둘러 방에서 나왔다. 

출근하기 전 안나에게 아침을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가방을 소파에 올려놓고 주방으로 돌아섰을 때 엘사는 예상치 못한 광경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안나?”


“잘 잤어요?”


분명 아무도 없어야 할 주방에는 앞치마를 두른 안나가 웃으며 엘사를 보고 있었다. 

게다가 식탁에는 샌드위치와 샐러드가 준비되어 있었다. 거기에 맞춰 놓여있는 커피 두 잔.


엘사는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아무렇지 않은 척 천천히 식탁으로 걸어갔다. 

안나는 그런 엘사의 반응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는지 먼저 식탁에 앉았다.


“오늘은 내가 힘 좀 써봤죠. 빨리 앉아요.”


“..어..고..마워요.”


“평소에 당신만 하는 건 불공평하니까 준비했어요. 같이 먹어요.”


안나의 말에 엘사는 마른 침을 삼키며 겨우 자리에 앉았다. 안나는 조금은 당황스러워 하는 엘사의 모습에 작게 웃으며 빨리 먹자고 재촉했다.

엘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안나는 그제서야 자신이 만든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듯 씨익 웃어 보였다. 


“많이 놀랐나봐요?”


“네?..조금요.”


“왜요? 나는 한 번도 아침을 안 차려줘서?”


“..아뇨, 그냥 뜻밖이라서..”


“빨리 먹어보고 알려줘요, 괜찮으면 다음에 또 해줄게요.”


“아, 네..”


안나의 재촉에 엘사는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샌드위치를 바라보았다. 

항상 자신이 준비하다 오늘은 안나가 준비한 것을 보니 감회가 새롭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당혹스럽기도 했다.

누군가 자신에게 아침을 차려준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안나의 행동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난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나가 만든 것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엘사는 감사를 표하며 안나가 만든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확실히 엘사가 만든 것보다는 맛이 좋았다.

다만 딱 한가지 조금은 사소한 문제가 있었는데 자신을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했을 안나를 생각하면 말을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어때요?”


“맛있네요.”


“오늘은 커피도 잘 내려졌어요. 마셔봐요.”


“고마워요.”


“사실 오늘 연차를 냈는데 늦잠 잘까 하다가 당신이 매일 차려준 아침이 생각나서요.”


“…….”


“한번 정도는 나도 해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우리 계약도 있으니까.”


“…아, 계약서..”


안나의 말에 엘사는 왜 인지 모르게 기분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계약서라는 말 때문이었을까. 안나의 말이 틀린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일주일에 두 번 이상 같이 식사를 하는 것은 두 사람에겐 의무이기도 했다. 

최근 들어 잦은 야근으로 얼굴을 본 시간이 거의 없었으니 두 사람은 며칠 만에 오늘 처음으로 얼굴을 보는 셈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


“오늘 저녁도 같이 먹는게 어때요?”


“오늘요?”


“네. 어차피 나야 집에서 쉬니까. 아, 혹시 야근하려나?”


“...괜찮아요. 그 정도 시간은 낼 수 있어요.”


“괜히 나 때문에 일을 미룰 필요는 없어요.”


“아내가 먹자고 하는데 기회를 놓칠 순 없죠. 어쨌든 우린 부부니까.”


예상치 못한 엘사의 말에 안나는 가슴이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항상 계약서에 묶여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아내라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으면서도 묘하게 이상했다. 왠지 귀가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안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커피잔을 들었다. 엘사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그때 엘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안나에게 말했다.


“늦어서 먼저 일어날게요. 미안해요, 다 못 먹어서.”


“아, 아니에요. 어서 가봐요.”


엘사는 가방을 챙겨 서둘러 현관으로 향했다. 안나는 자신도 모르게 엘사를 배웅하며 손을 흔들었다. 

엘사는 그 모습에 조금 당황한 것 같았지만 안나의 인사를 무시하진 않았다.


“잘 다녀와요.”


“...네. 당신도 좋은 하루 보내요.”


엘사는 이 어색한 상황이 불편한듯 애써 미소를 지으며 서둘러 집을 나섰다.

현관문이 닫힌 뒤에도 안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지금 이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엘사에게 아침을 차려주고 같이 먹는 것까지는 안나가 계획한 것이었지만 현관까지 엘사를 배웅하는 것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게다가 결혼 이후 처음이기도 하고. 배웅을 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분에 안나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식탁으로 향했다.

아까부터 이상하게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아직 반쯤 남아있는 샌드위치와 식어버린 커피를 보며 오늘은 참 묘한 날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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