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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 결혼 계약서(9)

ㅇㅇ(222.110) 2020.07.05 00: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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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가 차를 끌고 크리스토프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술에 취해 거실 바닥에 잠들어 있었다. 

안나는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는 술병들과 안주들을 피해 크리스토프에게 다가갔다.


“크리스토프! 정신차려!”


“으응...조금만 더 마실래...”


“크리스토프!” 


안나가 그를 계속 깨웠지만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알 수 없는 말만 늘어놓고 있었다. 

결국 그를 깨우는 것을 포기하고 거실 구석에 놓여있던 담요를 갖고 와 그에게 덮어주었다.

안나는 이미 잠이 든 사람에게 차마 화를 내진 못하고 인상을 구긴 채 소파에 앉았다. 기껏 걱정하면서 온 자신이 너무 한심해지는 순간이었다.


안나가 화장실에서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이미 진득하게 취해 있었다. 

그는 내일 출장에서 돌아올 예정이었지만 일정이 달라진 모양이었다. 게다가 회사 동료들과 이미 거하게 마신 것 같았다.


크리스토프는 울면서 뭔가 말하고 있었다.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울음소리에 놀라 그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그는 어지간해서는 우는 법이 없었다. 크리스토프가 했던 말을 전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다만 드문드문 들리는 말은 자신의 결혼으로 인해 너무 힘들다면서 보고싶다는 내용이었다.

안나는 차마 그에게 지금 가겠다고 말할 수 없었다. 엘사와 식사 중이었고 중간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상대가 누구든 무례한 일이었다. 

하지만 한동안 만나주지 못한 미안함과 간절한 부탁에 안나는 결국 크리스토프에게 가기로 결심했다.


엘사에게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엘사와는 계약으로 이루어진 관계였지만 크리스토프와는 애정으로 이루어진 관계였다. 최소한 아직까지는.

안나는 크리스토프에게 일종의 부채감을 갖고 있었다. 갑작스런 결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옆에 있어준 것도 있지만 그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안나의 고집 때문에 여기까지 온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안나는 크리스토프에게 최대한 많은 것을 해주고 싶었다.


안나는 복잡한 심경으로 크리스토프의 얼굴을 바라보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엘사에게 연락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었다.


집을 나오는 동안 안나는 최대한 엘사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엘사의 얼굴을 보면 죄책감이 들어 크리스토프에게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단순히 미안한 감정은 아니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여러 감정들이 섞여 안나에게 엘사를 보면 안 된다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엘사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사생활에 간섭한 적이 없었다. 계약서의 내용을 떠나서 엘사는 안나에게 일정거리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그것은 안나가 바라는 일이기도 했고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엘사와 같이 지낸 날들은 안나의 마음을 다른 형태로 바꿔 놓는 것 같았다.


마치 새하얀 도화지에 얼룩이 퍼져 나가듯 아주 조금씩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싹트는 기분이었다.

안나는 핸드폰을 한번 쓸곤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엘사에겐 연락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엘사가 자신의 연락을 기다릴 리 없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이렇게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로는 아무 것도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안나는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안나는 어제 저녁에 나간 뒤로 돌아오지 않았고 엘사는 그런 안나의 연락을 기다리다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밤새 연락이 없던 안나 덕분에 엘사의 기분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사실 엘사는 지난 밤 안나에게 연락을 해볼까 수없이 고민했었다. 애꿎은 핸드폰만 만지다가 결국 의자에 집어 던지고 침대에 눕는 것을 계속 반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락하지 않은 것은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계약서 상 서로의 사생활은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과, 안나가 감히 자신이 아닌 그를 택했다는 사실. 그리고 가장 중요했던 이유.

안나의 표정에서 이 주제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읽었기 때문이다.

안나가 자신이 아닌 크리스토프를 택했다는 것도 화가 났지만 곤란해 하는 안나의 표정이 엘사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마치 이것은 자신이 물어보면 안 될 영역 같았다. 물어봤다가 오히려 상처를 받는 것은 엘사 자신이 될 것 같은 느낌에 입을 다물었다.



이러한 이유들은 엘사가 안나에게 연락하는 것을 망설이게 만들었고 엘사도 결국 자신이 먼저 연락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존심도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엘사는 밤새 끙끙거리다 잠을 한 숨도 자지 못하고 출근해야 했다. 엘사는 거칠게 가방을 들고 곧장 현관으로 향했다. 

오늘은 주방에 갈 이유가 없었다. 자신이 준비해야 할 것도, 아침을 먹을 사람도 없었다.


이 날은 안나가 집에 온 뒤로 엘사가 아침을 차리지 않은 첫 날이었다.












한스는 혹시 겨울이 아닐까 생각했다. 최소한 엘사의 사무실만큼은.

원래 말수가 적은 엘사이긴 했지만 오늘은 무언가 달랐다. 공기가 얼어붙는다는 것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한스는 마른 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엘사에게 다가갔다.

그는 서류 몇가지를 엘사에게 내밀며 농담을 건넸다.


“우와, 오늘 기분이 상당히 안 좋아보시네요.”


“…….”


“혹시 싸우기라도 하셨나요? 어제 같이 저녁 드신다고..”


“일에 집중하세요.”


“...요청하신 자료입니다.”


“저번 프로젝트 자료는 어딨죠?”


“아직 정리 중입니다.”


“일처리가 늦네요.”


한스는 엘사의 말에 입을 닫았다. 그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오늘 엘사를 건드리면 안 된다고. 

단순히 아침이라 기분이 안 좋은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엘사는 단순히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을 넘어서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왜 화가 났는지 그는 알 길이 없었다. 어제 퇴근 전까지 친절하던 사람이 갑자기 이렇게 변했다는 것은 퇴근 후 무슨 일이 있다는 증거였다.


한스는 엘사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일적으로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항상 적당한 선을 유지했다. 

하지만 오늘은 마치 오랫동안 굶주린 늑대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아무나 먹어 치울 기회만 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이.


그런 엘사를 보면서 집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었지만 물어봐선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드는 불길한 예감 하나 더.


엘사는 스트레스나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좀처럼 집에 들어가질 않는다.












한편 안나는 크리스토프와 대화할 기회를 찾고 있었지만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 안나는 출근해야 했고 크리스토프는 좀처럼 일어나질 못했다. 

결국 안나는 간단한 아침을 차려 두고 크리스토프의 집을 나와 곧장 집으로 향했다. 

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출근 준비를 해야 했다. 크리스토프와의 대화는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지금은 그것보다 더 급한 것이 있었다.


엘사에게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할까.


지금은 집에 가도 엘사는 없겠지만 저녁에는 싫든, 좋든 엘사를 봐야했다. 게다가 어제 먼저 자리를 뜬 것은 자신이었으니 거기에 대한 사과도 제대로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의 말을 엘사가 그대로 받아들여줄지는 의문이었고 그 전에 말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도 문제였다.

안나는 집에 가까워질수록 속이 메스꺼워지는 것 같았다. 


마침내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을 때 다른 날과는 다른 위화감에 몸을 떨었다. 

엘사가 없는 것은 확실했지만 무언가 분위기가 달랐다. 안나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서둘러 2층으로 올라갔다.

출근준비를 하면서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생각하던 와중에 핸드폰의 화면이 깜박였다.

안나는 핸드폰을 확인한 순간 깨달았다. 


유난히 차가웠던 집안 공기와 냄새. 그 누구도 아침을 먹은 흔적이 없었던 주방.

안나는 습관적으로 입술을 깨물다 핸드폰을 가방에 넣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엘사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보낸이: 엘사 블랙우드

당분간 회사 일 때문에 못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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