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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 결혼 계약서(11)

ㅇㅇ(222.110) 2020.07.07 22:29:53
조회 934 추천 71 댓글 16


차가운 물이 피부에 닿자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흐르는 물을 얼굴에 끼얹자 그제서야 머리가 돌아가는 것 같았다.

엘사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생각했다.


‘정신차려, 엘사. 이제 와서 약해지면 안 돼.’


엘사는 물을 잠그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며칠 새에 피부는 엉망이 되었고 눈 아래는 다크서클이 진하게 생겼다.

오늘따라 탁한 눈동자가 아픈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것 같았다. 엘사는 눈을 비비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최대한 멀쩡하게 보여야 했다.

피부를 타고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엘사의 셔츠를 적시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엘사는 휴지로 대충 얼굴을 닦고 화장실을 나왔다.


엘사는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려 애쓰고 있었다. 그는 안나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안나에게 화풀이를 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안나가 잘못한 것은 없었으니까. 그 빌어먹을 계약서에 의하면.

결국 엘사는 모든 문제는 자기 감정에서 나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저 엘사 혼자 화를 내고 고집을 피우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이건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진짜 문제는 엘사는 지쳐 있었고 더 이상 이렇게 지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엘사는 사무실로 돌아오자 마자 놓여있는 간이 소파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감정을 하나씩 눌러 담기 시작했다. 안나와의 결혼 생활은 오직 계약서를 기반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거기에 이런 감정들은 쓸데없는 일을 만들 뿐이었다.


적당한 거리를 두며 안나를 적으로 두지 않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결혼 생활이었다.

그리고 엘사는 지금까지는 아무 문제없이 잘 해내 왔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안나가 자신이 아닌 크리스토프에게 간 것을 안 순간 마음 속 아주 깊은 곳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안나는 너의 아내이자 네 것이라고. 설령 계약서로 이루어진 관계라 해도.


순간적으로 들끓는 소유욕에 엘사는 헛구역질이 났다. 그건 자신이 바라는 관계가 아니었다.

안나는 자신의 아내이기 이전에 해밀턴 가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엘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해밀턴과 블랙우드 가의 동맹을 위해 엘사와 안나는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동등한 위치여야만 했다. 어느 한쪽이 소유하는 것이 아닌.


엘사는 눈을 감고 머리를 비우려 애썼다. 이제는 안나에게 답을 줘야 했다.

안나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하지? 그냥 오늘은 만나지 말까? 차라리 문자로 대화할까?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쯤 누군가 노크를 하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경쾌한 발걸음 소리가 그가 누구인지 말해주고 있었다.


“어? 계셨네요. 다행이다.”


“...좀 쉬고 싶으니까 나가요.”


“음, 점심 예정이 생기셨는데요.”


엘사는 한스의 말에 겨우 눈을 떠 고개를 돌렸다. 싱글벙글하며 웃는 한스의 모습에 엘사는 순간적으로 기분이 나빠지는 것 같았다.

엘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점심은 그냥 사무실에서 쉴 테니까 다음으로 미뤄요.”


“안 되겠는데요.”


“...네?”


한스의 거절에 엘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그가 했던 말을 되짚어보며 엘사는 한스에게 다가갔다.

그런 모습에 한스도 엘사의 기분이 상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오히려 그에게는 기쁜 일이었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상사의 고통은 즐거운 법이었다.


“오늘 점심에 약속이 잡히셨습니다.”


“..뭐라구요?”


“음, 곧 있으면 회의 끝나니까 모셔올게요. 중요한 약속인 것 같으니 빠지시면 안 됩니다.”


“잠깐만, 그게 무슨 말이예요?”


엘사는 한스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약속이 잡혔다는 것은 무슨 말이고 대체 누굴 데려온다는 거야?

엘사는 갑자기 밀려오는 두통에 머리를 쓸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한 말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내가 점심 약속이 있다구요?”


“네.”


“누구랑?”


“그건 직접 만나서 확인하시죠. 저는 시간이 다 되어서 이만.”


“자, 잠깐만! 한스!!”


엘사가 한스를 붙잡기도 전에 그는 알 수 없는 웃음만 남기고 미꾸라지처럼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엘사는 한참을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며칠 밤을 샌 엘사에게 지금 이 상황은 도저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체 어느 비서가 상사 본인도 모르게 약속을 잡고 내용은 알려주지도 않는다는 말인가?


엘사는 앓는 소리를 내며 짜증난다는 듯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곧장 한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스는 안나의 회의가 끝나는 시간에 딱 맞춰 회의실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의실 문을 열고 안나와 팀원들이 나왔다.

안나는 한스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곤 팀원들에게 뭐라고 한 뒤 곧장 한스에게 걸어왔다.


“가실까요?”


“네.”


한스의 말에 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본 게임으로 넘어갈 차례였다.

안나와 한스가 엘사의 사무실까지 가는 동안 한스의 주머니에선 핸드폰 진동이 끊임없이 울렸다.

안나는 조금 의아한 눈으로 한스를 보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전화 온 것 같은데 안 받으셔도 되나요?”


“네, 괜찮습니다. 스팸 전화라서.”


“그래요?”


안나의 말에 한스는 걱정 말라며 미소를 지었다. 한스는 왜 전화가 울리는지 잘 알고 있었다. 분명 엘사가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을 터였다.

하지만 모처럼 온 기회를 망칠 수는 없었다. 그는 안나를 엘사에게 데려다 줘야 했다.


“엘사는..어때요?”


조금은 망설이는 듯한 질문에 한스는 슬쩍 안나를 바라보았다. 회의 전과는 다르게 안나의 얼굴에선 약간의 망설임이 묻어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정말 엘사를 보러 가도 되냐는 듯이.


“뭐, 누구든 며칠 동안 밤을 새면 상태가 좋진 않죠.”


“…….”


“팀장님.”


한스는 걸음을 멈추고 안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안나는 한스가 갑자기 멈추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안나가 무슨 일인지 묻자 한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안나에게 속삭였다.


“실장님이 성격이 좀 안 좋긴 하지만 팀장님께서 너그럽게 봐주시면 좋겠네요.”


“네?”


“저 정도로 상태가 안 좋은 적은 저도 처음 보거든요. 뭐, 분명 실장님이 잘못 하셨겠지만 그래도 신혼이잖아요? 두 분.”


“무슨 말씀이신지 잘..”


“오늘은 두 분이 꼭 화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안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박였지만 한스의 입은 굳게 닫혔다.

그는 대답 대신 한쪽으로 몸을 비켜 안나에게 길을 터주었다.

그때 안나의 눈에 들어온 갈색 문.

그제서야 깨달았다. 안나는 지금 엘사의 사무실 앞에 서 있었다.


안나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한스를 바라보자 그는 염려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가보라고 손짓했다.

안나가 떨리는 손으로 노크를 하려고 하자 한스는 능숙하게 대신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곤 안나의 등을 살짝 떠밀어주며 작게 속삭였다.


“너무 괴롭히진 마세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사무실의 문이 굳게 닫혔다.

이제 이 방 안에는 오직 안나와 엘사 뿐이었다.












소파에 앉아있던 엘사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한 마디 해 줄 요량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전화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사라져버린 한스에게 화풀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상대를 확인한 순간 엘사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뗄 수 없었다.

“..오랜만이에요, 엘사.”

안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엘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안나는 당황스러워 하는 엘사의 표정을 보니 모든 것이 명확해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문제는 엘사가 아닌 안나 자신일지도 몰랐다.
안나는 천천히 엘사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음, 여긴 손님한테 앉으라는 말도 안 해요?”

“...앉아요.”

안나가 자리에 앉자 엘사는 불안한 눈으로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마치 자신을 경계하듯이 바라보는 엘사의 모습에 안나는 가슴 한구석이 저린 것 같았다.
거기다 많이 야위고 지친 듯한 모습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바보같이 밥은 제대로 먹긴 하는거야?
안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엘사를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꼴이 말이 아니네요. 밥은 잘 챙겨 먹어요? 잠도 못 잔 것 같은데..”

“...왜 왔어요?”

“며칠 만에 본 건데 할 말이 그거 밖에 없어요?”

안나의 질문에 엘사는 침묵으로 대답했다. 안나는 이 상황에 숨이 막힐 것 같았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에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쨌든 일의 발단은 자신이었으니 책임을 지는 것도 자신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속에 있는 모든 말을 해 줄 수는 없었다. 어설프게 말했다간 오히려 서로에게 상처만 주고 더 멀어질 것 같았다.
두 사람 모두를 위한 길.
안나는 이미 답을 정한 상태였다.

“왜 답장 안 했어요? 오늘 점심 먹자고 했잖아요.”

“어쨌든 만났으니 된 거 아닌가요? 그래서 왜 왔어요?”

“...자선 파티에 대해 논의할 것도 있고..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그럼 해요.”

퉁명스런 엘사의 말에 안나는 작게 웃었다. 예상대로 엘사는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 뿐이었다. 안나는 엘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안나는 이 대하를 최대한 담백하고 솔직하게 풀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편이 서로에게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아주 약간의 거짓말도 섞어서.

“당신한테 미안하다고 말 하고 싶어서 왔어요.”

“뭐가 미안한데요?”

“전부.”

“..?..”

“그날 먼저 일어난 건 미안해요.”

“..사생활은 간섭하지 않기로 한 건 서로 동의한 일이니까 미안해 할 필요 없어요.”

“그래도 미안해요. 사생활을 떠나서 무례했어요.”

“사과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신경 안 쓰니까.”

“정말 신경 안 써요?”

“네.”

“그럼 왜 그래요?”

“네?”

“왜 나 피해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엘사의 눈이 흔들렸다. 오늘따라 짙은 녹색 눈동자가 엘사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안나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무표정으로, 조금은 어딘가 슬퍼 보이는 얼굴로 엘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사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쥐곤 고개를 돌렸다. 도저히 안나를 바라 볼 수 없었다.

“...피한 적 없..”

“그날 이후로 계속 나 피하잖아요. 내가 연락해도 답도 없고, 집도 안 들어오고.”

“그건 회사 일이..”

“당신 거짓말에 서툰 거 알아요?”

“..좋을 대로 생각해요.”

“엘사.”

안나는 엘사의 말을 끊고 잠시 숨을 골랐다. 이렇게 해서는 해결이 날 것 같지 않았다.
엘사는 아직 자신과 대화하길 원치 않는 것 같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엘사가 뭐라고 하든 이제 솔직하게 말해야 했다. 이 이상으로 일이 복잡해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이 어떻든 간에 이것이 서로를 위한 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아, 그냥 솔직하게 말 할 게요.”

“…….”

“며칠 동안 많이 고민했어요. 왜 나를 피할까? 당신 말 대로 계약서 상 아무 문제없는 일인데.”

“…….”

“날 위해 당신이 한 일들..알고 있어요. 알게 모르게 배려해 준거. 그런데 갑자기 차가워진 모습을 보니까..”

“..?..”

“그제서야 깨달았어요. 나는 엘사 블랙우드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구나.”

“…….”

“당신은 어떤 사람일까? 왜 당신은 화가 났을까? 그리고..”

“…….”

“..왜 나는 당신이 보고싶었을까.”

“..네?”

엘사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안나가 뭐라고 하는 거야?
엘사의 되물음에 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소파에 기대 엘사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보고 싶었다고? 엘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혹시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안나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 순간 안나는 그런 엘사는 상관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엘사에게 다가갔다.

“당신에게 꼭 말하고 싶었어요.”

“안나?..”

한 걸음 씩 엘사에게 가까워질수록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안나가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절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안나는 두근대며 뛰고 있는 심장을 무시하며 엘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안나와 엘사는 부부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필요에 의해 계약서로 이루어진 관계였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합리적이어야 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이미 그어 놓은 선을 넘을 필요는 없었다. 그 선을 넘는 순간 안정적인 관계는 한쪽으로 기울어질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이 관계에 쓸데없는 감정은 필요치 않았다.

마침내 엘사의 코앞까지 갔을 때 안나는 부드럽게 엘사의 볼을 쓸었다.
그 순간 낮은 목소리가 엘사의 귓가에 작게 울려 퍼졌다.

“헷갈리게 나한테 더 이상 잘 해주지 마요. 나 그런 거 싫어해, 엘사.”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안나는 다시 엘사에게서 멀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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