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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 결혼 계약서(14)

ㅇㅇ(222.110) 2020.07.15 22:24:04
조회 814 추천 67 댓글 17


안나는 다급히 엘사의 팔을 잡고 최대한 사람이 없는 곳으로 향했다. 

중간중간 그들을 이상하게 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엘사는 아무 말없이 안나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예상치 못한 엘사의 행동에 당황한 것은 안나 뿐만이 아니었다. 모두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엘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안나는 직감했다. 지금 당장 엘사를 데리고 나가야 한다.

안나는 사람들에게 대신 사과하며 엘사의 팔을 잡고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엘사가 벌인 일은 아마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 분명했다. 

블랙우드의 후계자가 자신의 가문이 주최한 파티에서 손님에게 모욕을 준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더군다나 블랙우드의 파티 손님은 나라에서 내노라 사람들이었다.


한참을 걸어 겨우 사람이 없는 곳을 찾은 안나는 그제서야 잡았던 팔을 놓고 엘사를 바라봤다.

엘사가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 것도 처음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행동에 안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지금 화를 내야 할까? 아니면 왜 그랬는지 물어봐야 하나?

엘사는 입을 꾹 닫은 채 안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먼저 입을 여는 일은 없을 거라는 듯이. 

안나는 결국 인상을 쓰며 엘사에게 물었다.


“대체 왜 그랬어요?”


“...당신을 모욕하잖아요.”


“엘사.”


“거기서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아내를 욕한건데..”


엘사의 말에 안나는 말문이 막혔다. 아내를 욕해서 참을 수 없었다고? 아니 그러면 자기한테도 참으라고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자신에게는 가만히 있으라고 하고 정작 엘사는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었다. 대체 이 고집스러운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럼 나한테도 참으라고 하지 말았어야죠!! 당신은 괜찮고 나는 안 돼요?”


“…….”


“아니, 대체..!...하아, 당장 가서 제대로 사과해요.”


“..싫어요.”


“싫어요? 이런 일 한 두 번 겪어요? 갑자기 왜 이러는데요? 엘사, 사과하고 와요.”


“사과 안 해요.”


엘사의 고집에 안나는 속이 타 들어가는 것 같았다. 엘사가 지금 사과하지 않으면 이 일은 더 큰 문제가 되어 돌아올 것이 분명했다. 

그때는 정말 손을 쓸 수도 없을 것이었기 때문에 안나는 어떻게 해서든 엘사를 설득해야 했다.


“엘사 블랙우드, 당신 진짜...정말 이럴 거예요?”


“…….”


“자존심 때문에 못 가겠으면 내가 대신 갈게요. 당신 말처럼 내가 당신 아내니까 나라도 미안하다고 하고 올 게요.”


“안나!”


엘사는 그건 용납할 수 없다는 듯 안나의 앞을 막아 섰다. 그들이 안나를 욕보였기 때문에 이런 일을 벌인 것이었는데 안나가 자신을 대신해 그들에게 고개를 숙이러 간다는 것은 엘사에게 있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엘사가 자신을 막아 서자 안나는 인상을 쓰며 엘사를 쏘아붙였다.

과정이야 어떻든 엘사가 사람들에게 사과하게 만들어야 했다.


“왜요? 그건 싫어요? 당신이 말했잖아요. 나는 당신 아내라고. 그러니까 내가 대신 가서 고개 숙여야죠.”


“…… .”


“싫어요? 그럼 같이 가서 사과할까요?”


“…… .”


“엘사. 고집 그만 부려요. 지금 해결 못 하면..”


“..생각하긴 해요?”


“네?”


“우리가 부부라고 생각하긴 해요?”


엘사는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보였다. 짙푸른 눈동자가 오늘따라 더욱 진하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안나는 갑자기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부부라고 생각하냐고?


서류상으로 그들은 완벽한 가족이었다. 하지만 안나가 진심으로 엘사를 가족으로 생각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안나에겐 다른 사람이 있다. 그것도 결혼 전부터 사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엔 자신이 엘사를 좋아한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그저 같이 사는 룸메이트고 친구이기 때문에 이런 감정이 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다가오는 엘사를 보면서 조금씩 마음이 변한 것도 사실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엘사는 안나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하지만 사랑이라고 말 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분명 그랬다. 엘사의 저 말을 듣기 전까진.


부부라고 생각하냐는 말을 듣는 순간, 안나는 그토록 외면하고 싶었던 현실이 눈앞에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안나와 엘사는 부부였지만 절대 정상적인 관계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안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고집에서 시작된 우유부단함이 엘사를 상처 입히고 있었다. 

안나가 엘사에게 물들어 갈수록 엘사는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다. 

이제 안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엘사에게 이 감정을 말해야 할지, 아니면 끝까지 묻어둘지.

안나는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엘사는 자신을 피하는 안나의 침묵에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엘사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이곳에서 울 수는 없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고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안나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모든 일의 원인은 그저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었다. 엘사는 마른 침을 삼키며 겨우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내가 경솔했어요.”


“…….”


“가서 사과 할 게요. 나중에 봐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엘사는 안나의 옆을 지나쳐 다시 사람들 틈으로 섞여 들어갔다. 

안나는 엘사를 잡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엘사를 보며 안나는 점점 숨이 막혀오는 것 같았다. 

상처받은 엘사의 모습이 안나의 가슴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안나는 엘사가 떠난 뒤에도 한참을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엘사의 말이 자신의 온 몸을 조여오는 것 같아 숨을 쉬기 어려웠다. 

안나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누군가 안나에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안나, 너는 엘사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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