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팬픽]Say You Love Me 18

험버트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7.19 12:45:18
조회 684 추천 56 댓글 16




전편링크







“지각은 그나마 양반 짓이더구나.” 



엘사는 수화기 너머로 아버지가 화를 억누르며 작게 이 가는 소리를 들었다. 



“요즘은 가게 거의 나가지도 않는단 소리 들었다.”


“아빠...”



엘사는 구슬픈 소리를 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목소리를 깔고 어, 음. 어.. 고민에 빠진 듯 우울하게 말을 더듬었지만 엘사는 아버지의 말에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음... 오늘은 뭘 입을까. 엘사는 안나와의 약속에 입고 나갈 옷을 고르느라 옷장을 뒤적이는 중이었다. 



“대체 왜 그러니? 응?”


“아빠, 저...” 엘사는 멀쩡한 코를 일부러 시끄럽게 훌쩍이며 말했다. “저... 요즘 너무.. 힘들어요..”


“뭐가 힘든데? 네가 하는 일이 뭐 있어서?”


“..나이는 먹어 가는데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언제까지 이, 이렇게- 흐읍...!”



아, 이거 괜찮네. 엘사는 흑흑 소리를 내며 몸에 딱 붙는 남색 드레스를 꺼내 들었다. 



“요즘 정말.. 앞으로 어쩔지 고민이 많아요. 이러고 있는 게 맞는지, 이제 정신 차려야 하는데.”



아버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쥐죽은 듯 조용해져선 침 삼키는 소리만 내는 걸 보니 엘사의 말에 조금 놀란 것 같았다. 



“그래.. 그런 생각을 했다니 다행인데, 그래도 가게는 나가야지.”


“죄송해요, 아빠.” 이젠 신발 차례. 엘사는 방구석에 쌓아둔 구두들을 하나씩 들어 살폈다. “그- 그냥, 조금.. 조금 힘들어서...”



엘사는 목소리를 떨며 훌쩍거렸다. 



“머리가 너무 아파서 아무것도 손에 안 잡혀요. 계속 눈물만 나고 힘도 없고...”


“뭐야?!”



아버지는 몹시 놀란 듯 큰 소리를 냈다. 엘사가 매일 운다고? 우리 딸이?! 안 봐도 비디오였다. 



“너.. 괘, 괜찮니? 벼- 병원 예약해 줘?”


“아ㄴ-”


“네 엄마한텐 내가 얘기해둘 테니 잠깐이라도 집에 들어오는 게 어떻겠니.”


“아- 아니에요.” 



절대 안 될 일이지. 지각과 조기마감으로 고작 몇 시간 자리를 지킬 뿐이었지만 그래도 아예 결근하는 일은 드물었던 엘사가 요즘 그마저도 띄엄띄엄하게 된 이유 대부분은 물으나마나 안나 때문이었는데, 멀찍이 떨어진 본가로 들어가는 건 안나와의 관계에 전혀 도움되지 않을 일이었다. 엘사는 구두 중 하나를 골라 신으며 작게 흐느꼈다.



“그냥... 흑, 조금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가게도 상황 보고 더 해볼게요. 엄마한텐 말하지 마시고요, 네? 흑흑.”


“괜찮겠어?”



엄마한테 말하면 나 죽어요. 엘사는 언제나 더 무른 쪽이었던 아버지에게나 이런 허접한 거짓말이 먹힌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아는 순간 아버지는 그딴 소릴 믿었냐는 말을 들으며 혼날 테고, 엘사 역시 잘도 그딴 소릴 했겠다며 혼날 게 뻔했다. 엘사는 아버지의 말에 작게 대답하고는 거울 앞에서 옷을 대보며 시끄럽게 코를 훌쩍였다. 흠, 예쁘다. 



“그래... 그래, 그래. 울지 말고.” 아버지는 걱정 돼서 죽겠다는 투로 말하며 숨을 헐떡였다.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하고, 너무 걱정하지 마라. 하고 싶은 일 생기면 뭐가 됐든 도와줄 테니... 알겠지?”



하고 싶은 일이라.. 밥 먹고 호숫가나 갈까? 밤에 가니 예쁘더라고. 오늘은 뽀뽀정돈 했으면 좋겠는데. 미래고 나발이고 지금 엘사가 하고 싶은 일은 그런 것들밖에 없었다.




아버지와의 통화를 마친 엘사는 고른 옷을 챙겨 입고 시계를 봤다. 저녁까진 아직 시간이 꽤 남아 있었다. 음.. 가게나 한번 들려볼까? 간만에 답지 않게 성실한 발상을 해본 엘사였지만 방금 전 아버지와의 대화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는 걸 의식하니 가게 건은 까맣게 잊히고 자연스레 안나 생각이 났다. 


지금쯤 끝난 댔나? 안나와 통화할 때 학교 일정 끝내고 집에 가 있으면 약속 시각 전에 데리러 간다고 말해뒀다. 그런데.. 걔는 아무것도 없는 뚜벅이 신세니 그냥 학교까지 가서 데려오는 게 낫겠지? 차 없이 왔다갔다 힘들 텐데 참 고달프게 산다. 나 없었으면 어쩔 뻔? 


그렇게 잠시 자뻑에 빠져 히죽대던 엘사는 안나가 보일 반응을 상상하며 방을 나섰다. 보나 마나 좋아하겠지, 응.

 





*


엘사는 안나가 전 남친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그게 어디 단순히 좋아하지 않는 수준인가? 그냥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아주 극혐하며 열 내는 꼴을 몇 번 본 안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안나는 오늘도 필립과 함께 교정을 거닐었다. 엘사가 못마땅해하는 걸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사실 이제와선 좀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안나는 아직 엘사의 여자 친구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고 엘사는 안나가 그동안 만나온 덩치들과 다르게 안나의 기분을 맞춰주려 짜증 나는 일 참으면서 쩔쩔매지 않았다. 짜증 나면 화내고 날뛴다. 엘사는 필립이 아직도 안나를 좋아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모양인데, ‘앞으로 사랑할지도 모르는’ 여자 친구가 마음 남은 전 남친과 어울리는 꼴이 좋게 보일 리 없다는 것 정도는 어화둥둥 달래지는 연애만 해온 안나도 알고 있었다. 안나가 만나 온 누구든 안나의 행동에 화가 났을 거고 엘사는 그들과 다르게 참지 않을 뿐이었다. 저질러 놓은 일 탓에 귀찮게 군다고 마음대로 헤어지지도 못하니, 안나는 얌전히 엘사의 말을 듣는 척해야 했다. 안나가 그 말을 ‘듣는 척’에서 마치고 종종 필립과 어울리는 이유는 화내는 엘사를 이해하지 못해서도, 굳이 반항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인 것도 아니었다. 안나는 그저 양심과 예의가 조금 모자랄 뿐이었다. 말 안 하면 모를 텐데, 뭐. 학교를 오갈 때마다 필립을 마주쳤고 엘사는 그곳에 없었다. 그래서 같이 다녔다. 안나가 입만 조심하면 아무 문제도 없을 일이었다. 


안나는 그렇게 속 편히 필립과 시간을 보내며 시시덕댔다. 엘사는 시시콜콜한 연락은 별로 하지 않았다. 문자는 거의 받아본 일이 없었고 전화도 뭐해? 만나. 등의 용건 통보뿐이었으니 오전에 미리 엘사와 저녁 약속을 잡아놓은 안나는 마음 놓고 휴대폰을 가방 깊숙한 곳에 처박아뒀다. 그래서 휴대폰이 울리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던 안나는, 필립과 시시덕거리는 와중 엘사의 차가 교정을 배회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는 기절초풍할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야, 에.. 엘...! 숨어!!”



안나는 저승사자처럼 슬슬 다가오는 엘사의 차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필립과 함께 근처에 있던 수풀 아래로 몸을 숨겼다. 미친. 왜 말도 없이 막 와? 안나는 가방을 뒤적여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아, 전화 했었네.. 그래도! 안나는 서늘해진 목덜미를 손으로 쓸며 필립을 흘끔 봤다. 팰까? 패겠지. 아마 나 말고 얘를. 엘사가 자신보단 필립을 집중적으로 조질 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마음 놓을 수는 없었다. 저도 분명 멱살 정돈 잡힐 것 같았다. 안나가 겁에 질려 머리 굴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던 필립은 알 수 없단 표정을 지으며 수풀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교정 풍경을 집요하게 살피는 걸로 보이던 엘사의 차는 건물 모퉁이를 돌았고, 그쪽에서도 안나를 찾지 못할 테니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올 것 같았다.



“저 누나 좀 이상해. 왜 저러는 건데? 우리가 왜 숨어?”



지난 날 멱살 잡은 이유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기분이 안 좋았다는 말로 대충 넘어간 탓에 필립은 당연히 그런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저 사람이 내 여자 친구라 그렇단 소린 차마 못하겠던 안나는 엘사를 그냥 미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친구가 나밖에 없어서 집착 쩔어.”


“저 누난 널 그냥 친구로 안 보는 것 같은데? 저번 일도 그렇고 저건 꼭..”



안나는 쉿 하는 소리를 내며 필립의 말을 막았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괜히 황당하단 표정을 지어 보인 안나는 수풀 밖으로 빼꼼 눈을 내밀며 필립을 밀쳤다. “평생 혼자 놀아서 친구랑 어떻게 노는지 잘 모른대. 그냥.. 그냥 빨리 가!”


“아니... 괜찮겠어? 큰일 낼 사람 같은데.”



필립이 걱정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고 안나는 그 말에 좀 동감하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왕따라는데 짠하잖아. 나라도 놀아줘야지.”



그렇게 말한 안나가 빨리 가라며 손을 젓자 필립은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수풀 아래를 기어 조심스레 사라졌다. 이젠 안나 차례였다. 안나는 주변을 살피고 재빨리 튀어 나가 앞에 있던 벤치에 앉았다. 혼자 막 온 척, 여유를 즐기는 척.. 떠다니는 구름 수를 세며 멍하니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클락션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



고개를 드니 엘사가 창을 열고 말했다.



“타.”



엘사 오면 놀란 척해야지.. 깜짝 놀란 표정 지어 보일 걸 준비 중이었던 안나는 엘사의 말에 저도 모르게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와.. 그게 언제 적 작업 멘트?” 



그렇게 말하면서도 얌전히 조수석 문을 열고 앉은 안나는 엘사가 온 걸 이제야 알았다는 척하기 위해 덧붙였다. 



“깜짝 놀랐네.. 연락도 안 하고 막 오면 어떡해요? 엇갈리면 어쩌려고.”


“네가 전화 안 받았잖아.”


“음...” 안나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근데 왜 왔어요?”

 

“할 일 없어서.”


“일 좀 해요. 요즘은 아예 놀기만 하는 것 같아.”



이게 누구 때문인데. 기껏 데리러 왔더니 일이나 하라고? 대놓고는 아니어도 은근히 좋아하는 모습을 볼 걸 기대했던 엘사는 조금 기분이 상했다. 짜증나.. 진짜 하나도 안 귀여워. 엘사는 입술을 깨물며 안전벨트를 당겨 메고 있는 안나를 흘끗 봤다. 씨... 조금밖에 안 귀여워. 



“왜 이렇게 말이 많아? 넌 면허도 없고 차도 없으니 생각해서 데리러 왔으면 좋아해야지.”



엘사가 거칠게 차를 몰며 말했다.


안나가 대중교통에 치여 집과 학교를 오갔다면 여러 생각 할 것 없이 당연히 좋아할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안나와는 다르게 면허와 차를 가진 필립은 안나가 부탁하기도 전에 늘 기사 노릇을 자처했고, 때문에 안나는 자기 마음대로 불쑥 찾아온 엘사를 반길 이유가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이상하게 기분이 좋은 건 왜일까? 필립과 함께 있던 상황을 들킬 뻔한 탓에 심장이 덜컹이긴 했지만 저를 생각해서 데리러 왔다는 말은 썩 듣기 좋았고, 좀 우스울지 몰라도 기특하단 생각까지 들었다. 안나는 엘사를 향해 슬쩍 눈을 굴렸다. 느낀 걸 내색하지 않고 툴툴 대기만 해서 인지 엘사는 입을 내민 채 인상을 쓰고 있었다. 지금 삐진 거야? 


안나는 작게 웃으며 엘사의 어깨를 쳤다.



“아- 차 타고 가니까 너무 좋다. 완전 편하다아아-”


“시끄러워... 엎드려 절 받기지.” 엘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안나를 노려봤다. “저번에 사준 옷은 왜 안 입어? 무슨 행주 같은 걸 입고 있네.”


“뭐-.. 행주?”



안나는 입고 있는 옷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흰 셔츠에 청바지. 평범하긴 해도 완-전 잘 어울리는데 행주라니! 모욕에 대한 복수를 마음먹고 고개를 들었는데, 엘사의 차림새도 똑같이 씹어주는 걸로 갚아주려던 안나는 깜짝 놀라 할 말을 잃었다. 이제 보니 엘사는 어디 흠 잡을 데 없이..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잘 차려입고 있었다. 평소에도 깔끔하게 입고 다니긴 했지만 저렇게까지 힘준 적은 없었는데, 뭐지? 안나는 복수는 까맣게 잊고 엘사가 걸친 드레스를 뚫어져라 훑었다.



“그거 보여요.”


“뭐?”


“가슴골 보여요.”



엘사는 안나를 멀뚱히 보더니 제 가슴 쪽으로 눈을 깔았다가 다시 안나를 봤다. 뭐.. 어쩌라고? 엘사의 눈이 말하고 있었다.



“신기하니? 넌 없어?” 



있...! 진 않아요. 발끈한 안나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않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냥 벌리고만 있었다. 그런 안나를 가만히 지켜보던 엘사는 문득 심각한 표정을 짓고 눈에 힘을 줬는데,



“너... 만지고 싶구나?” 엘사가 그렇게 말하고는 입꼬리를 한껏 올렸다. “이럴 줄 알았지. 호텔로 간다.”


“무슨 소리야!!” 



안나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냐는 표정을 짓고 고개를 붕붕 저었다.   



“이렇게 입은 거 처음 봐서 그래요! 어디 들렀다 왔어요?”



히죽이죽 웃고 있던 엘사는 안나의 말을 듣고 급속도로 가라앉는가 싶더니 다시 입을 내밀었다. 



“...저녁에 좋은 데 갈 거라고 했잖아. 집에 들러 줄 테니까 너도 갈아입고 와.” 엘사는 다시 한번 안나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가는 길에 옷 사줄 테니까 지금 입고 있는 건 가져가서 싱크대나 닦아.”


“밥 먹는데 뭘 그렇게까지.. 얼마나 좋은 데 길래 그래요?”

 

“나 없으면 넌 발도 못 들일걸. 예약 잡기도 힘들어.”


“가게 이름이 뭔데요?”



안나는 가방을 뒤적이며 말했다. 검색해 볼 생각으로 휴대폰을 꺼내 든 안나는 화면을 켜자마자 눈을 크게 뜨고 숨을 삼켰다.



“뭐더라? 버나...” 


“잠깐, 잠깐만요.”



엘사의 말을 막은 안나는 정신없이 허둥거리더니 휴대폰을 두드려 전화를 걸었다. 어리둥절한 엘사가 왜 그러냐고 몇 번 물었지만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계속해서 말이 씹히자 짜증 난 엘사가 약간 소리를 높였다.



“야!! 어떤 놈이 길래 그래? 나 옆에 앉혀두고 이러는 거 진짜 짜증-” 


“엄마요.”


“아...”


 

엘사는 입술을 오므리고 운전에 집중했다. 액정을 두드리고 귀에 가져다 대길 몇 번이나 반복하던 안나는 통화 연결이 되자마자 언성을 높였다. 앞뒤 사정을 모르는 엘사는 가만히 안나의 통화 내용을 엿들었는데, ‘토요일 날 오신다면서요’...? ‘오늘은 약속 있는데’....? 통화가 길어질수록 무슨 일이 생긴 건지 훤해지던 탓에 엘사는 핸들 쥔 손에 빠득빠득 힘을 줬다. 안나가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서 잠시 뜸을 들이자 엘사의 목구멍으로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무슨 소릴 하려고 그래... 안 돼. 하지 마. 엘사는 안나를 향해 슬금 눈을 굴렸다.



“저... 엘..사...”  



안나는 눈썹을 한껏 늘어뜨리고 엘사를 바라봤다. 사과하려고 각 잡은 표정이었다.

 



아... 짜증나. 


 






*


안나의 집 앞에 차를 세워둔 엘사는 핸들에 머리를 기댄 채로 힘없이 뺨을 비볐다. 그리곤 안나를 향해 애원의 눈빛을 쐈다.



“꼭 가야겠어? 거기 진짜, 진-짜 예약하기 힘든 데란 말이야.”


“지금 요리까지 하고 계신다는데 어떻게 무시해요? 미안해요. 몇 달 만에 모이는 거라 빠지기가...”


“나한테 미리 말했어야지.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야.”


“저도 몰랐어요.. 주말에나 오신다고 했는데.”



안나도 예상 못 한 일인 것 같아 보이는데다가 가족 관련 일이라 엘사는 최대한 얌전히 말했다. 하지만 엘사는 겉보기보다 훨씬 짜증이 난 상태였다. 예약이 정말 어려운 식당인 건 맞았지만 엘사가 그렇게까지 짜증 난 건 꼭 거길 못 가게 생겨서만은 아니었다. 잘 보이겠다고 옷도 신경 써서 골라 입고 모시러 가기까지 했는데 차에 다 태워놓고서 바람맞다니. 이런 굴욕이 어딨어. 이렇게 입고 난 어디 가서 혼자 뭐하라고. 생각할수록 열이 올라가니 안나 잘못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개빡침의 샤우팅 한번은 날려주고 싶었다. 아니야, 얘 잘못 아니잖아. 참아야지.. 엘사는 이마에 손을 짚고 화를 참았다. 아니.. 그래도, 이렇게 가면 난 어쩌라고?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엘사가 조심스레 말했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안나는 얼굴을 잔뜩 구기고 소리를 질렀다. 



“안 돼요!!! 절대 안 돼!!” 



안나가 기겁하며 손을 내젓자 엘사는 깜짝 놀라 바로 앉았다. 엘사는 작게 입을 벌리고 안나를 봤다. 크게 뜬 눈엔 충격이 가득 담겨있었다. 


왜 저렇게 싫어해? 그냥 해 본 말이긴 한데... 아니, 솔직히 그러자고 할 줄 알았는데... 기겁하며 거절하는 모습을 보니 강조된 거절의 말소리 한 자 한자가 화살처럼 날아와 가슴에 박혔다. 못 들을 소리 들었다는 듯한 표정이 정말 충격적이었다. 날 보여 주기가 싫은 거야? 내가 여자라서? ...성별 때문이면 그나마 이해를 하겠지만 그래서 그런 것 같진 않았다. 그냥 친구라고 하면 되는 일인데. 내가 네 가족들 사이에 껴있는 모습을 보기 싫다 이거지? 그럴 사이는 아니니까? 그런 괘씸하기 짝이 없는 이유 때문일 거라고 혼자 결론 내린 엘사는 한참이나 말없이 안나를 바라봤다. 


엘사는 요즘, 안나와의 사이가 전보다 훨씬 나아졌단 생각을 종종 하고 있었다. 자기가 뭘 느끼는지도 모르는 멍청한 애라 문제지 사랑이 어쩌고 들러붙을 때보다 솔직하고 편해지지 않았나? 사실 로맨틱한 것과는 거리가 있긴 했다. 그래도 그건 안나가 아직 제 마음속 감정도 제대로 판단 못 하는 애송이이기 때문일 뿐,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손잡기를 넘어 키스를 원하고 포옹을 원하고.. 그런 본능적인 단계를 거치다 보면 결국엔 자신이 뭘 느끼고 있는지 깨닫게 될 걸로만 생각했다. 안나는 첫눈에 반하는 것만이 사랑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었다. 넌 아직 모르겠지만 함께 차근차근 밟아가다 보면 결국엔..., 우린 꽤 잘 어울린단 말이야. 그런데 이건 엘사 혼자만의 생각이었나 보다. 자신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저 꼬맹이는 저를 제 가족들한테 보여주기가 끔찍이도 싫단다. 매달림 당하는 쪽에서 매달리는 쪽이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굴욕적이었는데, 거기에 더해 착각 당하던 쪽에서 착각하는 쪽까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참혹할 정도로 굴욕적이었다. 엘사는 정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엘사가 굳은 표정을 짓고 말없이 한참을 바라보고 있자, 머쓱해진 안나는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가-, 가족 모임.. 오랜만이라... 어, 엄마 아빠가 불편해하실 것 같아서..”


안나는 정말 당혹스러웠다. 정색하고 소리 지를 생각까진 없었는데 저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표정을 보니 엘사는 정말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아무 말 없이 쳐다보고만 있으니 소리 지르고 화 낼 때 보다 더 무서웠다. 그렇겠지, 기분 나쁘겠지. 어물쩍 핑계 대긴 했지만 부모님께서 불편해하실 것 같단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어머니는 동네에서 알아주게 손이 컸고 틀림없이 오늘도 산더미같이 음식을 쌓아뒀을 터였다. 항상 기 막히는 양을 준비하는 것치곤 음식 남기는 걸 몹시 싫어하시는 덕에 식사 자리의 인원 추가는 누가 됐든 늘 두 팔 벌려 환영하셨다. 거기다 친화력까지 남다르고 아버지는 한 술 더 뜨니, 아무 말 없이 데려온 엘사를 낯선 사람이란 이유로 불편해할 리가 없었다. 약속 못 지키게 된 것도 미안하니 가고 싶다는 사람 데리고 가면 안나도 마음 편하고 좋을 일이었다. 안나는 엘사를 데려가고 싶었다... 집에 오빠만 없었으면!! 


안나는 아직 엘사에게 한스와의 관계를 털어놓지 않았다. 아직? 할 수 있다면 평생 속일 생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안나는 한스가 무슨 말로 엘사를 꾀어내 저를 만나게 했는지는 몰랐으니 그 공작에 별로 책임이 없었다. 만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일찌감치 털어놨으면 몇 대 맞는 걸로 용서받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뒤의 만남에서 주먹질까지 하며 연기한 건 아무리 생각해도 도를 지나쳤다. 남매가 짜고 쇼를 하며 사람 바보 만들고 속여먹었으니 용서받고 어쩌고 할 레벨이 아니었다. 사람이면 빡쳐야지. 엘사는 보통 사람보다 더더 빡칠 거고. 응.


근데 잠깐... 이대로 들켜서 헤어지면 좋은 거 아닌가? 헤어지고 싶어 했잖아. 


아직까지도 말없이 저를 보고 있는 엘사를 흘끔흘끔 훔쳐보며 쪼그라들던 안나는 잠시 그런 생각을 했는데, 머릿속에서 생각을 지우려는 듯 곧장 도리질을 했다.


그러는 이유는 안나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엘사와 약속된 시간은 다 채워내고 싶은 책임감? 일단 그건 아닌 것 같네. 처음부터 다 착각이었고 이건 사랑이 아니라고 제 입으로 말했지만 어쩔 수 없이 잇게 된 관계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엘사와 함께 있을 때면 필립이나 크리스토프와 어울릴 때랑은 다른 느낌으로 즐거웠다. 엘사는 안나가 평생 꿈꿔온 운명의 짝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친구인 것도 아니었다. 그럼 뭐야? 동화 같은 사랑만을 꿈꿔온 안나는 시간이 갈수록 엘사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드는 이유를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당장은 그저 아직 헤어지고 싶지 않단 것밖엔 모르겠다. 그러니 오늘은 엘사를 그냥 보내야 했다.


안나는 엘사의 손을 잡고 조심스레 당겼다. 



“엘사... 정말 미안해요. 내일 연락할게요..”



안나는 엘사의 손을 한번 꽉 쥐는 것으로 사과를 마무리하고 울적한 표정을 지으며 차에서 내렸다. 엘사는 끝까지 아무 말 없었다.






*


안나가 들어간 뒤에도 엘사는 세워둔 차 안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다가, 주먹으로 핸들을 내리치며 화를 냈다가, ‘오늘은 다른 사람 만나고 말지!’하는 생각으로 시동을 걸고 끄기를 몇 번. 엘사는 핸들에 팔을 기대고 고개를 숙였다. 이런 일에 힘이 빠지다니, 어이없을 정도로 자존심이 상했다. 안나가 한 말이 정말일까? 부모님이 불편해할까봐?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아무리 자위해 봐도 자신을 부모님께 보여 주기 싫어서 그런 단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그 표정... 그럴 사이가.. 아니니까. 손가락을 초조하게 까닥이던 엘사는 갑자기 핸들을 힘껏 내리치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곤 쿵쾅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불편해하실 거라고? 가보면 알겠지.


그럴 사이가 아니야? 이것도 나중 가면 알게 되겠지.



엘사는 안나의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쓰고 싶은 얘기는 첨부터 변한 적이 없는데.. 쓸 수록 능력부족을 느낀다
엘먹


추천 비추천

56

고정닉 16

0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힘들게 성공한 만큼 절대 논란 안 만들 것 같은 스타는? 운영자 24/06/10 - -
공지 음란성 게시물 등록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163] 운영자 14.08.29 167262 509
공지 설국열차 갤러리 이용 안내 [2861] 운영자 13.07.31 439696 286
1123714 ai힘을 빌리면 개쩌는 픽썰 쪄지냐 [2] ㅇㅇ(223.38) 11:41 18 0
1123713 이 음란한 갤 [1] ㅇㅇ(223.38) 11:39 10 0
1123712 안녕 털복숭이들 [1] ㅇㅇ(112.157) 11:26 9 0
1123711 청정한 헬요일 ㅇㅇ(223.62) 00:18 13 0
1123709 뒤조심)아 되게 충격적인 짤 봫는데 얘기할데가 여기밖에 없어 [7] ㅇㅇ(110.47) 06.09 69 0
1123708 디시 이미지 왜 깨져... ㅇㅇ(223.62) 06.09 12 0
1123707 누가먼저 보내나 시합! [1] ㅇㅇ(223.62) 06.09 25 0
1123706 일편단심 안개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9 28 0
1123705 넘쳐나는 go간 [1] ㅇㅇ(223.62) 06.09 31 0
1123704 축 늘어진 흰 옷에서 꼬물꼬물 기어나오는 아기 [1] ㅇㅇ(223.62) 06.09 25 0
1123703 설갤 단점 ㅇㅇ(223.33) 06.09 17 0
1123702 설하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9 23 0
1123701 그런가 [2] 설갤러(118.43) 06.09 16 0
1123700 아니 69라고 설갤러(118.43) 06.09 15 0
1123699 크 69가 와버렸다!!!! 설갤러(118.43) 06.09 16 0
1123698 엘산나를 만난게 행운이야 [5] ㅇㅇ(223.62) 06.08 32 0
1123697 배거파 [1] ㅇㅇ(110.47) 06.08 19 0
1123696 오늘막글 ㅇㅇ(223.62) 06.08 16 0
1123695 어 내일이 69잔아 ㅇㅇ(223.62) 06.08 14 0
1123694 쥬미 영화 보러옴 ㅇㅇ(211.234) 06.08 18 0
1123693 안탄절 지나면 엘탄절도 금방 ㅇㅇ(223.62) 06.08 17 0
1123692 모험가 안나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8 20 0
1123691 싯발 언제 비 그친거냐 [1] ㅇㅇ(223.62) 06.08 22 0
1123690 수상하게 칼을 잘쓰는 안줌 [2]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8 32 0
1123689 뭐지? 결혼식인가? [5] ㅇㅇ(211.234) 06.08 57 5
1123688 정령을 잡아다 예쁘게 묶어 공물로 바치기 ㅇㅇ(223.62) 06.08 23 0
1123687 혐퀘후식사 [2] ㅇㅇ(211.234) 06.08 20 0
1123686 오늘은 자동으로 실내활동 [1] ㅇㅇ(223.62) 06.08 19 0
1123685 자연스레 깊어가는 둘의 관계 ㅇㅇ(223.62) 06.08 22 0
1123684 아찜글 ㅇㅇ(211.234) 06.08 16 0
1123683 새벽글 [1] ㅇㅇ(115.138) 06.08 17 0
1123682 다다음주가 안탄절이네 곧 [2] PeopleOfArendelle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8 34 1
1123681 안나가 엘사를 [1] ㅇㅇ(223.62) 06.07 32 0
1123680 엘산나의 금요일 ㅇㅇ(223.33) 06.07 16 0
1123679 여전히 존버중 [2]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7 27 0
1123678 안나vs안나는 기존쎄 대결일듯 [1] ㅇㅇ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7 36 0
1123677 애틋하게 뺨쓰담 ㅇㅇ(223.62) 06.07 22 0
1123676 눈 깜짝할 새 킹요일 ㅇㅇ(223.62) 06.07 22 0
1123675 원하는 초능력을 얻는 대신 댓글이 부작용을 정해줌 [18] ㅇㅇ(115.138) 06.07 87 0
1123674 크으 모닝갤먹 [1] ㅇㅇ(223.62) 06.07 23 0
1123673 [그림] 원치 않은 신앙 [10] 애호박쥬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7 109 10
1123672 기억 속에서 지워졌던 창작물 [6] 케찹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6 114 11
1123671 세명이서 서로 아래 핥으려면 원을 그려야하냐 [3] ㅇㅇ(223.62) 06.06 53 0
1123670 프로즌 ost는 언제 들어도 좋아 [2] 설갤러(118.43) 06.06 26 0
1123669 크읏 이러다 울룩불룩 설줌이 돼버렷 [1] ㅇㅇ(223.62) 06.06 29 0
1123668 엘사만 만나면 움츠라드는 안줌 [2]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6 36 0
1123667 태어날 때 부터 얀데레 엘사 [2]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6 49 0
1123666 안나 [1] 써리파이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6 24 0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