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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 카페인 - 9

불멸에관하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7.20 13: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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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 안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창을 부술 듯이 거세게 불던 바람소리마저 잠잠해지고, 쌔액쌔액 넘기는 자신의 숨소리만이 적막을 채우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침대 위에 홀로 놓인 엘사와 함께 방에 남게 되었다. 한동안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다가 손을 들어 엘사의 뺨에 손등을 대 보았다. 그녀의 뺨은 창백한 얼굴만큼 무척이나 차가웠다. 


  자신의 손이 그다음으로 향한 곳은 엘사의 차가운 손 위였다. 자신을 따뜻하게 쓰다듬어 주던 그 손은 어느새 차갑게 굳은 모습으로 자신을 외면하고 있었다. 얼어붙은 세상이 녹아내리고 마침내 엘사와 당당히 마주할 수 있던 그 날, 오랜 세월 동안 기다려온 엘사의 손을 다소곳이 잡던 자신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모든 것이 자신을 떠나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상은 모든 것을 앗아갔다. 자신을 북돋아 주던 부모님은, 자신을 지켜주던 엘사는 더 이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올라프도 곧 자신의 곁을 떠날 것만 같았다. 이제 자신이 의지할 곳은 더 이상 없었다. 


  무언가 말을 하려 입을 열었지만, 나오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꺽꺽거리는 자신의 모습에는 깊은 어둠이 잠겨 있었다. 마음속을 가득 채운 어둠은 넘쳐흘러서 눈가에 맺혔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그 눈물방울은 엘사의 멈춰버린 시간 위로 떨어졌다. 자신의 두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세상에서 빛이 그 자취를 감췄다. 이제 곁에 남은 것은 차게 식어버린 기억의 파편, 그리고 공허함 뿐이었다. 




  삐삐삐삑- 삐삐삐삑- 삐삐삐삑-


  알람이 요란하게 울렸다. 오늘도 어김없이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불을 황급히 걷어버리고 욕실로 달려갔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두 뺨에는 눈물이 한두 방울 흘러내리고 있었다.  


  왜 이러니, 안나야.


  며칠 연속으로 꿈을 꿔 본 적은 생전 처음이었다. 그것도 그냥 꿈이 아닌, 자신과 엘사가 매번 나오는 꿈이었다. 이러다 영혼마저 송두리째 빼앗겨 버릴 지경이었다. 


  저건 꿈이야. 꿈이라고.


  방금 꾼 꿈은 특히나 더욱 특이했다. 몽롱하게만 느껴지던 꿈이, 오늘은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꿈속 엘사를 어루만지던 손 끝은 얼어붙기라도 한 듯이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엘사.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되뇌였다. 눈가를 타고 흐르던 눈물방울이 미친 듯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눈물을 막고 있던 벽이 부서지기라도 한 듯 눈물은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도대체 왜?


  잠에 들기 전까지만 해도 엘사를 머릿속에 떠올리면 마냥 행복했었다. 그건 지금도 그랬다. 행복한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데 왜 눈물은 흐르고 있을까? 아무리 되물어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염없이 눈물을 훔치다 보니 어느새 출근해야 하는 시간이 되어 있었다. 그제야 급하게 짐을 챙기고 집을 나섰다. 하늘은 티 한점 없이 깨끗하게 어두웠다. 




  출근하자마자 평소 하던 대로 청소를 하고, 이것저것 미리 준비를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다른 사람들이 전부 출근할 시간이 되자, 긴장을 잔뜩 한 상태로 조용히 자리에 앉아있었다. 하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그 누구도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아니, 관심이 아예 없었다고 해야 할 터였다. 평소에 앞장서서 자신을 괴롭히던 무리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심지어 데이지마저도 자신에게 아무런 말이 없었다. 사무실은 이상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갑작스럽게 변한 분위기에 쉽사리 적응하기는 힘들었다. 머릿속으로는 아무도 말을 걸지 않을 거라고 인지했으면서도 몸은 계속 타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꽤나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나고서야 어색한 이 분위기에 조금 적응할 수 있었다. 


  아, 마침 잘 됐다.


  아무도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 틈을 타, 조용히 가방에서 한 수첩을 꺼냈다. 낡은 종이를 넘기고, 빈 공간에 펜을 들어 무언가를 적어내기 시작했다. 


  5월 31일: 고풍스러운 방, 엘사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고 나는 울고 있었음. (엘사의 몸은 얼음장같이 차가웠음)


  오늘 꿨던 꿈을 적고, 위에 적힌 내용들을 다시 한번 읽었다. 


  5월 29일: 고풍스러운 방, 엘사는 문 앞에 서 있었음, 그리고 나는 의자에 앉아 있었음. 내가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하자, 내 주변에 불꽃이 일었음. 기억나는 단어는 ‘미안해’, 뒷 말이 더 있는 것으로 추정.


  5월 30일: 넓은 빙판, 나 홀로 어딘가를 향해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음, 그러다가 장면이 바뀌어 전날 꾸었던 방 안, 이상한 숲, 그리고 한 얼음 동굴을 보았음. (얼음 동굴 가운데에 거울이 있었고, 그 거울 뒤에 엘사로 추정되는 사람이 누워 있었음. 아니, 쓰러진 건가?)


  꿈의 내용들은 하나같이 아리송했다. 하지만 날이 지날수록, 어딘가 윤곽이 잡히는듯 싶었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까 뭔가 이야기 같기도 하네.


  수첩에 적힌 내용들을 째려보며 펜대를 열심히 손으로 굴려 보았다. 


  사실 저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 아닐까? 에이, 그러면 얼마나 좋았겠어. 진짜 가까운 관계처럼 보였는데…


  왜 오늘 아침엔 그렇게 눈물이 났을까? 혹시 예지몽? 아냐, 그럴 리가 있겠어?


  아, 그러고 보니 혹시 엘사가 잃어버린 동생은 내가 아니었을까? 아냐, 너무 갔어. 정신 차려 안나!

  

  머리를 꽁꽁 싸매고 생각해 봐야 나오는 답들은 별 쓸모가 없어 보였다. 꿈은 그저 꿈이겠니 하며 수첩을 접었다. 한숨을 푹 내쉬며 가방 안에 수첩을 던졌다. 


  끼아악!


  화르륵- 가방 속이 환하게 빛나더니, 한 구석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빛은 금방 사라졌지만 눈을 크게 뜨고 바라봐도, 눈을 비벼봐도 가방이 조금 타들어간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 뭐야 저거?


  조심스럽게 가방을 열자 뜨거운 열기가 갑작스럽게 몰려왔다. 깜짝 놀라면서 손발이 쭈뼛, 그리고 허리가 바짝 곤두섰다. 열기가 사그라들고 조심스럽게 가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무것도 없는데?


  다시 조심스럽게 손을 넣어서 가방에 들어있던 물품들을 꺼내보았다. 사원증과 방금 집어넣은 수첩, 펜, 초콜릿 몇 개, 그리고 파란 도마뱀이 있었다. 별다른 것 없다고 생각해서 넘기려는 찰나, 두 눈이 번뜩 뜨였다.


  잠깐, 브루니!?


  브루니는 뻘쭘한지 주위 눈치를 조금씩 보다가 몸을 웅크리고 두 눈만 조금 비추었다.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언제 들어온 걸까, 이 도마뱀을 어떻게 해야 할까, 엘사가 걱정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마구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모든 걱정을 제치고 머릿속에 한 의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방이 왜 타버린 거지?


  엘사의 말대로라면 브루니는 홀로그램 펫이었다. 저렇게 불을 뿜어 낸다고 해서 진짜로 불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어야만 했다. 


  “안나 양!”


  옆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브루니를 가방 속에 휙 던졌다. 황급히 가방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제야 과장이 와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네, 네! 말씀하세요.”


  설마 걸린 건 아니겠지?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혹여나 자신의 잘못으로 엘사의 펫이 사라져 버린다면, 어떻게 해서 그 잘못을 갚아야 할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큼, 공문을 보낸 지가 언젠데 아직도 확인을 안 하는 겐가?”


  “아… 죄송합니다,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과장에게 대답을 하면서 마음을 겨우 놓을 수 있었다. 


  “즉시 확인하지 않을 경우 불이익이 있을 거라네, 안나 양. 자네뿐만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상부까지 전부 말일세. 조심 좀 해 주게나.”


  과장은 조곤조곤 말을 하면서도 자신을 째려보듯 바라보았다. 말을 마친 그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자, 황급히 화면을 켜서 공문을 열어보았다. 


  ****************************************

    발신인: 아를린 올라프 에젤

    수신인: Anna Doe, 5급 시민


    제목: 소환 명령


    기존 정기 검증 대상자 전원을 1지구로 소환함. 

    이 공문을 수신한 직후 바로 출발할 것. 

    기한은 크로커스력 572년 6월 7일까지이며, 

    소환 명령을 불이행할 경우 불이익이 있을 것임. 


    아를린 올라프 에젤, 직인 생략.

  ****************************************



  1지구?!


  공문을 열자마자 눈에 보이는 한 단어가 이목을 끌었다. 그리고 그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떠올리자 머릿속에 크나큰 혼란이 일어났다. 


  1지구, 사실 별 다른 의미는 없었다. 2지구가 심판부를, 그리고 4지구가 통제부를 의미하듯 1지구는 황궁을 에둘러 표현하는 단어였다. 다만 바로 그 황궁이 문제일 뿐이었다. 


  소문으로 전해지는 황궁은 수백 년 넘게 살아온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곳이었다. 권력을 탐하고, 그 권력으로 자신들의 몸을 끊임없이 젊게 만들며 살아가는 미친 사람들이 넘쳐나는 곳이라고 전해져 왔었다. 그리고, 일반인이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살아서 나오지 못하는 곳이라고 전해지기도 했었다.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헝클였다. 다시 살아서 돌아올 수 있을까, 엘사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수많은 걱정이 마음을 옥죄기 시작했다.


  아, 돌아버리겠네!






  “황궁에 갑자기 불려 가게 되었는데, 가면 다시는 못 돌아올 것 같다… 그게 걱정인 거예요?”


  “네…”


  오늘도 어김없이 카페에 들러 엘사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엘사는 그런 자신이 어찌나 안쓰러워 보였는지, 고운 두 손으로 자신의 손을 꼬옥 쥐고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들은 소문이 많다 보니 걱정이 돼요.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아니, 왜 매번 사람들은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걸까요?”


  엘사는 아무 말 없이 손등을 쓰다듬으며 자신의 말을 경청하고만 있었다. 


  “쌍, 5등급으로 태어난 게 죄인가...”


  “안나,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음… 이런 말 해도 되려나?”


  조금 고개를 들어 엘사를 바라보았다. 엘사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갸우뚱 기울었다. 


  “저도 황궁에 다녀온 적이 있어요. 그런데도 이렇게 잘 다니고 있잖아요! 사실 황궁도 별거 없어요. 그냥 사람 사는 곳 일 뿐이지. 그러니까 안나,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아무 탈 없을 거예요.”


  별거 아닌 듯 싶어 보이는 말이었지만, 그 말이 엘사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마음에 쌓여 있던 근심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고마워요, 덕분에 한결 편해졌네요.”


  손등에 전해지는 엘사의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다른 손으로 찻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맞아, 이제는 이야기해줄 때도 됐지 않았어요?”


  “어떤 걸요, 안나?”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거예요?”


  엘사는 흐흐 웃으며 말을 흐렸다. 


  “아, 웃지만 말고 좀 말해줘요!”


  볼에 바람을 가득 넣고 엘사를 째려보았다. 그제야 엘사는 웃는 것을 멈추고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사실?”


  “안나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래요. 흐흐흐.”


  “또 장난치기에요?”


  얼굴에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엘사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고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웃으니까 얼마나 예쁜데요! 흐흐, 아무런 걱정 하지 말고 잘 다녀와요. 안나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말해주니까 안심이 되네요, 고마워요. 아, 시간이…”


  시간은 어느새 자정을 훌쩍 넘겨 있었다. 


  “당장 내일 출발해야 되니까 이제 슬슬 들어가 봐야겠어요. 당분간은 못 올 것 같으니까, 그러니까, 으…”


  얼굴이 뜨거워졌다. 


  “나 다시 올 때까지 어디 가면 안 돼요!”


  엘사는 흐흐 웃다가, 얼굴에 인자한 미소를 드리우며 말했다. 


  “잘 갔다와요.”


  후다닥 카페를 나와 달렸다. 삐걱거리는 방문이 열리자마자 가방을 허공에 던지고, 정장을 벗어서 곱게 접어둔 다음 침대에 풀썩 누웠다. 


  몸만 오랬으니까 뭐 따로 챙길 것도 없겠지.


  가만히 누워 잠에 들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꽤나 긴 시간 동안 잠에 들지 못하고 뒤척여야만 했다. 계속해서 엘사의 잔상이 머릿속에 일렁였다. 


  엘사와 좀 더 가까워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생각을 끝으로, 새우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깊은 새벽, 브루니는 가방에서 뽈뽈 기어 나오더니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그러다 정장을 발견하고선, 바동바동 몸부림쳐서 정장 안주머니에 기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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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잊혀진 브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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