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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 결혼 계약서(17)

ㅇㅇ(222.110) 2020.07.25 11:25:35
조회 735 추천 66 댓글 11

엘사가 집에 돌아왔을 때 집안은 고요한 적막이 감돌고 있었다.

엘사는 안나를 부르며 집안을 돌아다녔지만 그 어디에서도 안나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엘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2층을 바라봤다.

한 번도 가본적 없는 장소. 엘사가 다시 안나의 이름을 불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엘사는 짧은 한숨과 함께 마침내 2층으로 올라갔다. 곳곳을 다니며 안나를 찾았지만 허탕이었다.

엘사는 당연히 안나가 먼저 돌아왔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텅 빈 집안을 보니 조금씩 불길한 기운이 엄습해오는 것 같았다.

혹시 오다가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엘사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며 핸드폰을 꺼내 서둘러 안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길 몇 번, 안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엘사는 다시 전화를 걸면서 황급히 1층으로 내려왔다. 제발 아무 일이 없길 바라면서.

엘사는 차키를 챙겨서 현관으로 향했다. 안나를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세번째 전화를 걸 때쯤, 마침내 핸드폰 너머로 소리가 들렸다. 엘사는 다급하게 안나의 이름을 불렀다.


“안나?!”


“전화하지 마.”


낯선 음성에 엘사는 그 자리에 멈췄다. 처음 들어보는 음성. 낮은 남자의 목소리.

엘사는 본능적으로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질투와 분노가 차오르는 것 같았다.

왜 당신이 안나와 같이 있어? 내가 전화하는 건데 왜 안나가 아닌 당신이 받아?

엘사는 입술을 꽉 깨물며 최대한 이성적으로 노력하려고 애썼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안나가 괜찮은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만일 생각한 그 사람이 아니더라도 안나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엘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깔고 그에게 물었다.


“안나 어딨어.”


“나랑 있으니까 전화하지 말라고.”


“안나 바꿔.”


“신경 꺼.”


“신고하기 전에 바꿔.”


“뭐?”


“안나 목소리 듣기 전까진 당신 못 믿어.”


“무슨 근거로 신고를 해? 알려지면 그쪽도 무사하지 못 할 텐데?”


“어디 끝까지 가볼까? 누가 먼저 죽나 보자고.”


엘사의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핸드폰 너머는 조용했다. 엘사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솔직히 말하면 그의 말 대로 신고를 하는 순간 서로 다 같이 죽는 것 밖에 되지 않았다. 안나 해밀턴의 실종신고가 경찰서에 접수되는 순간 언론사는 물론이고 세간의 이목이 여기로 쏠릴 것이 분명했다. 그러다 결혼 계약서나 안나에게 애인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겉잡을 수없이 일이 커질 수도 있었다. 엘사는 자신이 다치는 것은 상관없었지만 안나가 받을 상처를 생각하면 신고는 답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

그저 안나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한 협박용에 더 가까웠다.


“엘사?”


한참의 정적 끝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사는 그제서야 경직되었던 몸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안나의 목소리는 괜찮아 보였지만 확실하게 해야 했다.


“안나, 괜찮아요? 어디에요? 내가 지금 갈게요.”


“엘사, 괜찮아요. 정말 아무 일도 없어요.”


“그래서 어디에요? 데리러 갈게요.”


“괜찮아요. 금방 들어 갈게요.”


“지금 갈 테니까 어디인지 알려줘요. 내 눈으로 봐야겠어요.”


“엘사, 오지 않아도 괜찮..”


“내가 안 괜찮아요!!”


“..엘사..”


“나 지금 당신 걱정돼서 미칠 것 같아. 그러니까 괜찮은지 직접 확인해야겠어요. 어디인지 말해요.”


예상치 못한 엘사의 말에 안나는 선뜻 말을 잇지 못했다. 엘사는 억지로 화를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안나는 엘사가 어떤 심정인지 전부 알 수는 없었지만 자신이 그렇게 만든 것 같아 미안했다.

엘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오직 안나만 생각하고 있었다.


오랜 침묵 끝에 안나는 엘사에게 크리스토프의 집 주소를 알려주었다. 핸드폰 너머로 금방 가겠다는 말과 함께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나는 전화를 끊고 크리스토프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표정으로 그저 의자에 앉아있었다.


“...곧 그 사람 올 거야.”


“…….”


“정말 미안해.”


“넌 진짜 미안한게 뭔지 몰라.”


“..내 탓 인거 알아.”


“…… .”


“크리스토프, 혹시 내가 해 줄 수 있는게 있다면..”


“...왜? 키스라도 해주게? 아니면 마지막 인사라도 할까?”


“크리스토프..”


“..제발 그냥 가.”


“…….”


“부탁이니까 그냥 내 눈 앞에서 사라져.”


그는 머리를 감싸 쥐며 고개를 숙였다. 분노에 사로잡혀 안나에게 헤어질 수 없다고 말했었지만 그것 뿐이었다.

아직 안나를 사랑하고 있는 그였기 때문에 차마 안나에게 상처를 주거나 다치게 하는 일은 할 수 없었다. 강제로 안나를 안거나 집에 돌아가지 못 하게 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해서까지 상처를 주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크리스토프도 잘 알고 있었다. 안나가 결혼한 순간 자신들의 관계는 어떤 식으로든 끝냈어야 했다는 것을. 그저 아닐거라 믿으며 눈을 가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자신과 안나는 그저 불륜일 뿐이었고 지금까지 참아준 엘사에게 감사의 인사라도 해야 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이라도 안나가 솔직하게 말해줘서 다행인 일인지도 몰랐다. 서로가 더 상처받기 전에 일찍 끝내는 편이 나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게 맞았다. 하지만 마음은 쉽게 인정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때 안나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크리스토프의 등을 감싸 안았다. 그 온기에 크리스토프의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지금이 마지막 순간임을 알 수 있었다. 그간 지내온 시간들에 비하면 싱거울 정도로 짧게 끝난 마지막이었다.


이미 마음이 떠난 사람에게 아무리 매달려 봤자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엘사가 크리스토프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안나는 이미 밖에 나와서 엘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엘사가 서둘러 차에서 내리자 안나는 애써 미소를 짓고 손을 흔들며 엘사에게 다가갔다.

엘사는 다급히 안나를 품에 안았다. 정말 괜찮은게 맞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조금은 충혈되어 있는 안나의 눈을 보니 자신의 마음이 더 쓰린 것 같았다.

안나도 별말없이 엘사의 품에 안겼다. 자신을 걱정하며 다가온 엘사의 모습에 안나는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차마 우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안나, 괜찮아요?”


“응, 괜찮아요.”


“어디 다치거나 아픈 건 아니죠?”


“당신은 걱정이 너무 많아요.”


“안나..”


“지금 안 괜찮은 것처럼 보여요?”


걱정말라며 애써 웃는 안나의 모습에 엘사는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잠시 참아야 할 것 같았다. 안나가 우선이었다.

엘사는 안나를 부축하며 차에 태우고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 아주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차에 속력이 붙을 수록 안나가 사이드 미러로 멀어지는 집을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엘사는 묻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묻지 않았다.

슬퍼 보이는 안나의 표정이 지금은 아무 대화도 원치 않는 것 같았다. 엘사는 어쩌면 안나에게 잠시 시간을 줘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안나와 그가 무슨 이야기를 했든 서로에게 그다지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 같았다.


대신 엘사는 창문을 살짝 열고 바깥 공기를 들이마셨다. 바깥의 바람 소리와 소음이 흘러 들어오면서 차 안의 정적을 깨고 있었다.

잠시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추자 엘사는 조심스럽게 안나를 바라보았다. 안나는 어느새 눈을 감고 있었다.

엘사는 자신의 눈에 안나의 모습을 하나하나 새겨 넣었다. 다시는 안나를 잃고 싶지 않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신호등이 초록빛으로 바뀌자 엘사는 묵묵히 차를 출발시켰다.

차가운 밤공기 사이로 달리는 길이 오늘따라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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