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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 결혼 계약서(18)

ㅇㅇ(222.110) 2020.07.26 18:02:03
조회 892 추천 68 댓글 14



어느 덧 집에 도착했을 땐 한밤중이었다. 엘사는 차의 시동을 끄고 옆을 바라봤다. 안나는 이미 잠이 든 채 새근새근 숨을 쉬고 있었다. 

오늘 많은 일이 있었으니 피곤한 것도 당연했다. 엘사는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안나의 앞머리를 쓸며 안나를 불렀다.


“안나, 다 왔어요.”


하지만 안나는 잠에 깊게 빠진 모양인지 대답이 없었다. 엘사는 잠시 고민하다 차에서 내려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안나의 안전벨트를 풀어주면서 다시 이름을 불렀지만 안나는 여전히 잠에 빠져 있었다.


안나가 잠이 들면 좀처럼 일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엘사가 알 턱이 없었다. 결혼 이후로 한 번도 같이 잔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엘사는 잠시 고민하더니 현관을 한번 바라보고 안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결심이 선 듯, 하이힐을 벗고 잠들어 있는 안나를 안아 올렸다.


“으윽..”


짧은 신음 소리와 함께 마침내 안나가 엘사의 품에 온전히 안겼다. 자세가 불편한 듯 칭얼거리는 듯 한 소리가 들렸지만 엘사는 그 모습 마저도 사랑스러운 것 같았다. 물론 성인 여자를 안고 걸어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무겁지 않음에 감사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겨우겨우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제야 안나의 방이 2층이란 것이 떠올랐다.

하지만 엘사는 안나를 안은 채로 도저히 계단을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평지를 걷는 것과 계단을 오르는 것은 천지 차이니까. 

엘사는 마른 침을 삼키고 거실 소파를 바라봤다. 하지만 침대도 아니고 안나가 불편해 할 수도 있으니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간간히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움직이려는 안나를 보니 편한 곳에 눕혀야 할 것 같았다.

결국 엘사는 자신의 방문을 열고 침대에 안나를 내려놓았다. 침대에 누운 안나는 겨우 만족한 모양인지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아..두 번은 못해.”


엘사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겨우 숨을 골랐다. 자신의 방에 잠들어 있는 안나를 보니 그제서야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았다. 

엘사는 안나의 머리를 잠시 쓸다 이불을 덮어주곤 방을 나왔다. 마음 같아선 옷이라도 갈아 입혀주고 싶었지만 안나의 옷이 어디 있는지도 모를 뿐더러 왠지 옷을 벗긴다는 것이 망설여졌다.

엘사는 곧장 현관 밖으로 열려 있던 차 문을 닫고 하이힐을 챙겨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거실에서 자는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내일은 꼭 안나와 대화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안나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방안에 햇살이 가득했다. 안나는 겨우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어제 크리스토프 집에서 나온 후로 잠든 기억밖에 없는데 어떻게 자신이 침대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안나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왔을 때 깨달았다.

여긴 자신의 방이 아니었다.


안나는 이곳에 엘사의 방인 것을 깨달았다. 예전에 한번 들어온 적이 있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어떻게 엘사의 침대에서 자고 있는지는 더욱 의문이었다.

다행히 엘사는 방에 없는 것 같았다. 안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밖으로 나갔다. 엘사에게 물어봐야 할 것도, 말해야 할 것도 산더미였다.


“안나, 일어났어요? 좋은 아침이에요.”


안나가 비틀거리며 방에서 나오자 주방에 있던 엘사는 미소를 지으며 안나를 맞이했다.

엘사는 물을 컵에 따르고 안나에게 내밀었다.


“물 먼저 마셔요.”


“..고마워요.”


안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물을 들이켰다. 그제서야 텁텁했던 입안이 좀 가시면서 주변에 눈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엘사는 한쪽으로 땋은 머리에 흰색 반팔티와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안나는 아직 자신이 드레스를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엘사, 내가 어제..”


“왜요?”


“혹시 내가 실수한거 있어요?..일어나보니까 당신 방이길래..”


“사소한 문제가 있긴 했는데 해결했죠.”


“사소한 문제요?”


“안나가 차 안에서 잠들었는데 안 일어나길래 안고 들어왔죠. 그리고 내 방에서 재웠죠. 도저히 2층까지는 갈 자신이 없어서..”


“푸흑!..콜록, 콜록....네?”


엘사의 말에 안나는 마시던 물을 뿜었다. 엘사가 자신을 데려왔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안고 들어왔다니. 

꿈에서 어렴풋이 누군가 자신을 안는 것 같았는데 꿈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엘사는 기침을 하는 안나의 모습에 작게 웃으며 옆에 있던 휴지를 건넸다. 

얼굴이 붉어진 안나는 엘사가 건넨 휴지로 입을 닦으며 조심스럽게 엘사를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그것 외에 더 잘못한 일은 없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걱정마요.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미안해요. 내가 원래 잠들면 잘 못 일어나요.”


“그러게요, 미리 알았으면 좋았을텐데. 음, 당신이 불편해 하는 것 같아서 옷도 벗겨주려고 했는데..”


“네?!!”


“당신 안고 오느라 힘들어서 그럴 체력은 없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나왔어요. 아, 걱정 말아요. 나는 그냥 거실에서 잤으니까.”


장난스런 엘사의 말이었지만 안나는 이미 터질 것처럼 귀까지 새빨개져 있었다. 

엘사는 그런 안나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지만 더 이상 놀리면 안되겠다며 생각하며 안나를 안심시켰다.


“씻고 와요, 아침 차릴게요.”


“..내,내가 차릴게요. 나 씻고 올 때까지만 기다려요.”


“아니에요, 내가..”


“당신 아침 안 먹는다면서요.”


“네?”


“비서 분이 말해줬어요. 커피도 안 마신다고..”


안나의 말에 엘사는 많이 당황한 것 같았다. 안나가 이 사실을 알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안나는 어쩔 줄을 몰라하는 엘사 옆으로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리며 작게 소근거렸다.


“그 동안 해준 거 고마워요.”


“..속이려던 건 아니었어요.”


“알아요. 나 위해서 그랬다는 거. 그러니까 이젠 내가 하게 해줘요.”


“네?”


“나도 당신한테 많이 해주고 싶으니까. 게다가..”


“?”


“요리는 내가 더 잘 하잖아요? 그러니까 씻고 올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요.”


“그치만..”


“아내 명령! 거부할 권리는 없어요.”


그 말과 함께 안나는 가볍게 엘사의 볼에 입을 맞췄다. 엘사가 놀란 듯 몸을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이제는 그것마저도 사랑스러웠다. 

안나는 주방을 떠나기 전 절대 엘사에게 아무것도 건드리지 말라고 엄포를 놓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엘사는 안나가 입을 맞췄던 볼을 쓸었다. 붉어진 얼굴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이렇게까지 당신에게 빠질거라고.

엘사는 자신도 모르게 지어지는 미소에 볼을 긁적이며 얌전히 의자에 앉았다. 사실 자신이 요리를 할까 싶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안나의 말 대로 요리는 안나가 훨씬 잘 했다. 


엘사는 한쪽 손에 턱을 괸 채 집안을 바라보았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 맞는 아침은 모든 것이 달라 보였다.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도, 공기 중에 섞여 있는 서로의 냄새도.


엘사는 처음으로 안나와 결혼했다는 실감이 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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