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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 여름눈송이 3부모바일에서 작성

ASIS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8.13 02:31:38
조회 272 추천 19 댓글 6

아론은 제 조카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활달하고 말괄량이 같은 성격은 영락없이 형수를 닮았지만 이렇게 가끔씩 내비치는 올곧은 모습에선 죽은 형의 모습이 보이곤 했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쉽다는 점은 정말 형과 똑같았다.

“엘사인지 앨리스인지 그 아이를 만나러 나가겠다는 거지?”

안나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는 걸 보고 아론은 엄한 표정을 풀었다. 좀 감정적이긴 해도 오빠와 달리 항상 고집보다 지혜가 앞섰던 아이를 설득하는 건 예전부터 무척 쉬운 일이었다. 지금처럼 흥분한 상태면 더더욱.

“분명 예전에 카트린과 통화를 했을 텐데. 엘사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면 이야기를 안 해줬을까?”

아론은 안나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을 보고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엘사 엄마를 아세요?” 안나는 놀람을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엘사는 잘 모른다만 카트린은 알지. 헬란드 부부는 꽤 유명인이니. 전에 무도회도 초대받아 갔었는데 너 꽤 즐겁게 놀더구나.”

안나는 어안이 벙벙함을 숨기지 못했다.

“네가 설마 와 있을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너 무도회나 파티 같은 건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론은 긴장을 풀고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안나에게도 침대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삼촌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안나는 천천히 침대에 걸터앉았다.


“통화를 엿들은 건 사과하마. 다만 네가 앞에서 들으란 듯이 통화한 건 내 탓이 아니잖니. 헬란드 부부를 어떻게 알게된 건지 궁금했는데 이제 대충 조각이 맞춰지네. 그 빨간 드레스 아가씨가 엘사구나?”


안나는 머리 속에서 생각을 정리하느라 자신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몰랐다.


“그리고 너는 정신병원에 그동안 누굴 만나러 가는지 이야기조차 안 했고, 무도회에서도 내게 인사는 커녕 엘사랑만 붙어다닌 거고?”


안나는 속이 뜨끔한 걸 느끼고 삼촌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역시 본업으로 변호사를 하고 있는 만큼 어지간히 날카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예전부터 아론은 아픈 곳만 절묘하게 콕콕 찌르는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어..죄송해요.”


안나는 속으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삼촌을 마주했다. 그리고 자신을 보며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아론을 보고 마음의 긴장을 완전히 풀었다. 아무래도 아론은 자신을 혼내러 온 게 아닌듯 했다.


“따라잡을 이야기는 좀 있다만 일단은 쉬게 두마.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테니 오늘 밤은 이만 자거라. 나와 네 이모가 얼마나 걱정했는지만 알아줬으면 좋겠구나.”


안나는 속에 따뜻함이 은은하게 번지는 걸 느꼈다. 엄격할 땐 한없이 엄격하지만 가족에 대한 애정과 심려가 밑바탕에 있는 사람. 삼촌은 그런 사람이었다.


아론은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책상에 넣었다. 오늘 밤 할 이야기는 전부 마친 듯했다. 방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그는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엘사에 대한 걱정은 일단 접어두거라. 무슨 문제가 있었다면 카트린이 네게 이야기를 했겠지. 정 불안하다면 전화하는정도는 말리지 않으마.”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안나의 방문을 닫고 나갔다.


*****


안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따금 깜박이는 눈꺼풀이 무색하게 시선은 초점없이 허공을 노닐었다. 공허하게 비어있는 눈동자 뒤로 뇌에서는 분주히 생각의 정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론의 말이 맞았다. 엘사가 다쳤다면 카트린이 자신에게 이야기하지 않을 리가 없다. 그 점 하나만으로 안나는 무척 안심이 되었다.


안나는 몸을 왼쪽으로 돌려 휴대폰 화면을 다시 확인했다. 새벽 1시가 조금 못 된 시간이었다. 삼촌이 이 시간에 어딜 나가려 하냐며 역정을 낸 것도 충분히 납득이 갔다. 더군다나 자신은 엘사의 집 주소도 잘 모르는 상태였다. 무슨 생각으로 다짜고짜 나가려 했는지 자신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행히도 자신에겐 카트린의 연락처가 있었다. 안나는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카트린에게 전화하기로 마음먹었다. 크리스토프와 메그에게도 이야기를 하긴 해야 했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참 막막했다. 한스가 친 사고의 규모가 섣불리 말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아까 크리스토프가 있었는데...어쩐 일일까... 안나는 마침 떠오른 의문을 정리하지 못하고 서서히 눈을 감았다. 긴장이 풀리니 생각이 툭툭 끊겨 참을 수 없이 졸음이 몰려왔다. 저택에서 눈송이를 그리는 엘사의 모습이 무의식적으로 머리에 떠올랐다. 애정 반, 걱정 반의 묘한 웃음을 지으며 안나는 마침내 잠이 들었다.


*****


엘사는 눈을 떴다. 안나가 만들어준 형형색색의 눈송이가 가로등마냥 자신을 내려다봤다. 꿈 속을 헤매이던 눈동자에 잠시 의아함이 비치더니, 이내 묘한 아쉬움이 대신 들어찼다. 살짝 찌푸린 미간을 사이에 두고 엘사는 두 눈을 도로 감아버렸다.

또 같은 꿈이야.


방 건너편의 원목 시계가 새벽 1시를 가리켰다. 자다가 뚝뚝 깨는 것에는 익숙해져 이제는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아예 잠을 못 잤던 처음 며칠에 비하면 지금은 오히려 상태가 나은 편이었다. 꿈의 내용을 천천히 곱씹으며 엘사는 옆으로 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온지는 벌써 2주가 지났다. 적응하려는 노력이 무색하게 엘사는 아직도 집이 익숙하지 않았다. 10년의 시설생활에 익숙해진 몸은 아직 새 보금자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정해진 규칙도, 일정도 없다. 식사 때 동행하는 사람도 없다. 무의미했던 치료 세션도, 검사도 이제는 없다.


안나를 기다리던 일상도, 없다.


엘사는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시설 생활은 외롭고, 공허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발소리만 들어도 움츠러드는 자신. 제아무리 애를 써도 나오지 않는 목소리. 4개의 벽에 둘러쌓여 홀로 헤매이던 끔찍한 감각을 엘사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보이지 않았고 들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자신의 성역에서 엘사는 홀로 갇혀 지냈다. 별빛 하나 비치지 않던 공허한 천장에 밤마다 하루하루를 날려보냈다.


안나를 만나기 전까진, 그랬다.


안나를 만난 이후 모든 게 바뀌었다. 웃게 되었다. 처음으로 방 너머의 세상이 보였다. 내일을 기대하며 잠이 들었다. 앞으로의 나날이 설레고 기대됬다.


그리고 그 중심에 안나가 있었다.


어느새 붉어진 눈시울을 훔치고 엘사는 다시 두 눈을 떴다. 오늘도 잠자긴 그른 것 같았다. 얇은 이불을 옆으로 치우고, 몸을 일으켜 보드에 기댔다. 아침까지 그대로 앉아있을 모습이 이제는 안 봐도 눈에 선했다. 끝없이 몰려드는 자괴감에 지쳐 무릎을 세우고 머리를 기댔다.


꿈에서 보이던 건 처음에는 한스였다. 제 방을 뒤지는 끔찍한 모습을 엘사는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날 복도의 짧은 몇 분은 칼로 새긴 듯 기억이 선명했다.


*****


한스가 자신을 겨냥해 주먹을 올렸을 때 엘사는 형언 못할 공포에 질렸다. 살육의 환희로 가득찬 표정에 속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도저히 사람의 표정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군데군데 일그러져 비틀린 얼굴이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괴물같았다.


전신이 공포로 딱딱하게 굳었고 붙잡힌 오른팔이 떨어질듯 아팠다. 허공에 멈춘 주먹이 보였다. 머잖아 자신은 죽어있을것이다.


악마는 이윽고 오른팔을 내질렀고, 하얗게 질린 주먹이 엘사를 향해 짓쳐들었다. 죽음을 예감한 짧은 찰나에, 엘사의 시야에 다른 무언가가 들어왔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주먹은 엘사가 아니라 바로 옆의 벽에 매다꽂혔다. 한스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결박을 풀고 오른손을 감쌌다. 콘크리트 벽이야 끄덕도 안했지만 한스의 오른손은 사정이 달랐다. 팔이 아예 나갔는지 한스는 무릎을 꿇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이 빌어먹을 년이!! 죽여버리겠어!!”


한스가 고개를 쳐들고 괴성을 질렀다. 고통이 극심한지 아득바득 이를 갈며 죽일듯이 엘사를 노려보았다. 광기서린 눈동자가 사냥감을 시야에 두고 흉흉한 안광을 뿜었다.


주먹을 피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엘사는 주먹이 닿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몸을 틀었다. 조금만, 정말 조금만 늦었어도 어떻게 됐을지 엘사는 차마 생각하기 싫었다. 닿지도 않았는데 달아오르는 오른뺨이 맞은 건지 아닌지 분간이 어려웠다.


한스가 주먹을 내지르기 직전, 엘사는 뒤에서 안나의 환영을 보았다. 자신을 응시하는 눈동자가 눈내리던 그날 밤과 똑같았다. 눈동자만 선명했던 그때와는 달리 기억의 파편이 덧씌워진 환영은 놀라울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어쩌면 정말 안나였을지도 몰랐다.


자신을 일으켜 세웠던 청록색 눈동자는 이번에는 피하라며 절박하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안나가 절박하게 외치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엘사는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한스의 결박이 풀린 이상 도망가야 했다. 안나의 환영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지만 엘사는 충분히 용기를 얻었다. 살고 싶다는 원초적 본능과 안나를 만나고 싶다는 소망은 떨리던 몸을 억지로 굳혀 진정시켰다.


옆에 계단이 보였다. 네 걸음, 아니 세 걸음. 조금만 엘사는 발을 내딛었다. 1층으로 내려가기만 한다면 당직 근무원이있을 터였다. 운이 좋으면 오큰 씨가 당직을 서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스는 물론 엘사가 도망가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 계단을 보는 엘사의 생각을 알아차린 것인지 낮게 으르렁거리고는 냅다 고함을 질렀다. “도망가게 둘 것 같냐? 네년은 여기서 죽는다!!”


한스는 왼발을 내딛어 벼락같이 쇄도해 들어왔다. 쿼터백 경력이 어디가진 않았는지 눈깜짝할 사이에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온전했던 왼팔로 엘사에게 주먹을 매다 꽂았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조명 하나 없이 어두웠던 것이 문제였을까, 그는 두번째 발을 내딛기 전 리놀륨 바닥에 맺혀 있던 작은 눈물자국을 보지 못했다. 조금만 더 냉정했더라면 보고도 남았을 것을 그는 눈앞의 사냥감에 지나치게 정신이 팔려 있었다. 힘껏 내딛은 두번째 스텝은 바닥의 물기에 균형을 잃어 뒤로 넘어갔고, 전혀 예상치 못한 미끄러짐으로 인해 한스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미 힘껏 첫 발을 내딛은 탓에 한스는 가속도가 붙은 상태였다. 그리고 계단은 고작 3걸음 앞에 있었다. 엘사는 한스가 미끄러져 계단으로 굴러떨어지는 모든 광경을 슬로우비디오인 것처럼 느리게 보았다. 미끄러져 경악으로 표정이 일그러지는 중에도 소년의 눈은 끝까지 엘사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엘사는 눈을 떠 그날 밤의 기억을 애써 흔들어 지웠다. 어둠은 더 이상 그녀의 안식처가 아니었다. 어디서 갑자기 한스의 핏발 선 눈동자가 튀어나와 제 목을 움켜쥘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안나가 자던 침대 위에서, 안나가 만들어준 눈송이를 바라보는 것만이 엘사의 유일한 안식이자 구원이 되었다.


안나에게 그날의 일을 전하려던 엘사의 노력은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시설의 카메라가 고장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신말고는 아무도 모른다고 알게 되었을 때 엘사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안나가 자신이 아니어도 저절로 알게 될 거라는 희망은 그렇게 물건너갔다. 말도 못하고 글도 못 쓰는데 상황을 알릴 수 있는 건 자신 뿐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무겁게 다가왔다.


편지에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을 뿐이다. 한스가 자신을 공격하다가 제 풀에 나가떨어졌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한스에게 위해를 가한 건 자신이 아니었다고 안나에게 변명하지 않았다. 한스가 자신을 해하려 한 구체적인 이유는 말을 하지 않았다.


엘사는 두려웠다. 한스는 자신의 추악한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앞뒤 안가리고 자신을 해하려 했다. 처음부터 맘에 안들었던 사람이, 그것도 정신병자가 제 동생을 만나는 것도 못자라 그런 음침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도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스가 두렵진 않았다.


안나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것 때문에 역겨워하며 자신을 영영 떠나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졌다. 사랑하는 오빠가 그런 자신을 막으려다 혼수 상태에 빠졌다고 알게 되었을 때 안나가 지을 표정이 두려웠다. 엘사는 안나에게 모든 것을 알릴 책임이 있었다. 하지만 안나가 자신을 영영 떠날 것을 감수할 용기는 없었다.


편지를 보내기 전에는 머리로 냉정하게 확률을 계산하고 있었다. 안나가 모든 전말을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을 떠나갈 확률을.


모든 것은 다 한스 탓이었다. 자신의 잘못이라고는 어둠 속에 꽁꽁 감춰뒀던 제 마음을 스케치북에 그려냈던 것뿐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보여줄 생각은 없었다. 설마 한스가 방을 뒤져 스케치북을 찾아내 눈앞에 들이밀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제 방은 어떻게 알았으며, 어떻게 들어갔고, 스케치북에 대해서는 또 어떻게 알았는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었다. 한스에 대해서는 무관심에 경멸을 살짝 곁들인 정도의 감정밖에 없었다. 이런 자신에 비해 한스는 아무래도 자신에게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던 모양이었다.


한스가 만약 깨어나서 안나에게 제 마음을 폭로한다면 그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된다. 그 야비한 소년은 안나의 마음에 금이 가게 할 것이고 엘사와 여태까지 쌓아왔던 관계를 파탄낼 것이다. 더구나 그에겐 안나를 지킨다는 명분도 있었다. 정신나간 미치광이라고 한들 그 역시 안나를 진심으로 위하는 사람이었다. 안나의 혈육이었다. 엘사에겐 애초부터 이길 확률이 없었다.


편지에 이야기했어야 했다. 용기를 냈어야 했다. 하지만 자신이 이야기한다해도 안나가 돌아서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아예 영영 안나를 잃을지도 몰랐다. 확률은 0이 아니었다. 그래서 엘사는 침묵을 고수했다.


하지만 그건 두려움이 만들어낸 실책이었다. 편지에 쓰든 쓰지 않든 자신이 먼저 이야기를 전해야 했다. 한스가 깨어나 먼저 그날 복도의 일을 말한다면 겉잡을 수 없이 사태가 틀어질 것이다. 그 전에 어떻게든 안나에게 해명을 했어야 했다. 그러지 못한다면 안나를 잃는 건 더이상 확률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현실로 들이닥칠 시간 문제가 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화살은 이미 시위를 떠났다. 두려움에 압도된 감정이 진정되고 비로소 이성이 돌아왔을 때 그녀는 막심하게 후회했다. 다시 편지를 쓸 엄두는 나지 않았다. 글로 써서 뭔가를 표현한다는 것이 무척 고통스러웠던 탓이다. 더구나 자기 멋대로 안나를 밀쳐내고 다음의 편지는 초대장이라며 자신만만하게 선언해놓고는, 바로 편지를 다시 보내는 꼴이 하찮고 어줍잖게 느껴졌다. 자조섞인 눈물이 또 흘러내리는 걸 느끼며 엘사는 안나의 베개에 고개를 묻었다.


안나가 무척이나 그리웠다. 안나 없이 수요일을 맞이하는 게 얼마만인지는 몰랐지만 얼마나 괴로운지는 알았다. 가슴을 갉아먹는 공허감에 뭘 어찌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어제는 차라리 그나마 나았다. 첫번째 수요일에는 가슴이 턱턱 막혀 숨쉬는 것도 힘들었던 것이다. 편지 쓸 때의 각오는 어디 갔는지 무너지지 않으려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안나의 침대 위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다음 날만을 기다렸던 것을 엘사는 기억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오늘은 목요일이다. 안나가 없는 건 마찬가지였어도 엘사는 요일이 바뀐 것에 일부러 안도하려고 했다. 계속 우울한 상태로 있기는 싫었다. 이러고 있는 건 안나를 만날 가능성만 낮출 뿐이라고 엘사는 알고 있었다.


창 밖의 햇살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시간으로 치면 대략 6시 즈음이라고 엘사는 생각했다. 오늘은 일주일에 한번, 치료사와 만나 이야기를 하는 날이다. 만약 이야기란 게 있다면 말이다.


새로운 치료사는 저번 주 목요일에 처음 만났다. 만났다기보다는 모른 척 했다는 게 정확하지만 정작 그는 크게 개의치 않는 듯했다. 자신을 인식조차 하지 않던 엘사에게 그는 인사를 건넸고, 따뜻한 말을 건넸으며, 괜찮다면 앞으로 주마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며 짧게 인사하고 떠나갔다. 2시간 정도 잡혀있을 것을 예상했던 엘사는 이야기가 30분이 채 안 되어 끝나자 조금 놀랐었다. 자신을 거쳐간 치료사가 많지는 않았지만 하나같이 처음에는 자신과 관계를 형성하려고 온갖 열과 성을 쏟아부었던 것이다. 회를 거듭할수록 짧아졌지만 첫 세션이 2시간을 못 넘은 경우는 없었다. 자신을 치료하는 것에 흥미가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이미 자신은 치료할 방법이 없다고 단정을 지은 것일까? 어느 쪽이든 그리 반가운 이유는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은 이제 변해야 했다. 더 이상은 물러날 곳이 없었다. 발끝이 아니라 얼굴을 마주보고 어떻게든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영영 이렇게 말도 못하면서 비참하게 지내고 싶진 않았다. 방 안에서의 외로운 나날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안나와 다시 만나고 싶었다. 다시 같이 초콜릿을 나눠먹고, 따스한 품에 안기고 싶었다. 좋아한다고 직접 말로 전하고 싶었다. 안나에게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다.


태양이 완전히 고개를 들고 엘사의 방을 밝게 비추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서 엘사는 안나의 파란 드레스를 떠올렸다. 자신에게 춤을 청하는 수줍은 손길이 저 하늘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 같았다. 초콜릿을 양 볼 가득 담은 빨간머리 소녀의 모습이 떠오르자 엘사는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


엘사는 창문을 열어젖히고 방 안의 어둠을 완전히 내보냈다. 결연한 태도로 밖을 응시하는 눈동자에 희망의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


더 이상은 낙담한 채로 웅크려 있지 않을 것이다. 나아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자신을 위해서. 안나를 위해서. 어떻게든, 반드시.


조금만 기다려, 안나. 엘사는 주먹을 쥔 채 안나에게 이야기를 건넸다.


곧 나도 네가 있는 곳으로 갈 거야.


너와 같은 높이에서 내 마음을 고백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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