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는 편지를 앞에 두고 눈을 감았다. 흘러넘치는 감정을 추스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기쁨과 슬픔, 미안함과 안타까움, 그 모든 감정이 복잡하게 뒤얽혀 안나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안나는 편지에서 시선이 좀 더 오래 머물렀던 문장을 찾았다. 삐뚤삐뚤 써져 버티고 선 글자에 괴로운 시선이 내려앉았다.
“우리가 계속 만남을 이어갔더라면 난 너와 사랑에 빠졌을 거야."
편지를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럼, 떠나간 지금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야?
“공허한 껍데기인 채 너를 사랑할 수는 없어."
글씨에 녹아있는 결의가 마음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어떤 표정으로 편지를 썼을지 엘사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런 게 어딨어. 이게 뭐야, 엘사. 대체 뭐냐구.
안나는 비어있는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고 앞머리를 마구 헝클어 헤집었다.
“네가 내게 무엇을 원하든, 네 삶에 나를 얼만큼 필요로 하든, 나는 널 위해 기꺼이 무엇이든 되어줄거야."
참았던 눈물이 기어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진정하려던 노력이 무색하게 한번 터진 눈물은 멈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눈물이 떨어져 편지가 젖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안나는 책상에 고개를 묻고 조용히 흐느꼈다.
엘사 이 바보 멍청이
엘사는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 사랑받는 자신이 괴로워질 정도로 절실하고, 진실하게. 문장으로 대놓고 쓰여있지만 않았지 편지의 모든 글자가 아프도록 사랑을 외치고 있었다. 힘겹게 편지를 써내려가며 제 생각으로 웃음짓는 엘사를 생각하니 안나는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라푼젤이 말했던 것을 엘사는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계속 시설에 있어서는 안나와의 관계를 이어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안나를 향한 문을 스스로 걸어 잠궜다. “네 곁에 있어도 될 만큼 나아지기 전까지” 안나는 이마를 책상에 댄 채 엘사의 말을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예상했어야 하는 일일지도 몰랐다. 엘사가 자신에게 의존하는 게 두려워서 “키스 금지!”라고 선언했을 때부터 이런 일이 생길 것은 예측했어야 했다. 애당초 엘사가 이런 생각을 한 것은 먼저 선을 그어버린 안나 자신이 원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니었어.
안나는 속에서 분노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당장이라도 엘사를 찾아가서 꿀밤을 한대 때려주고 누구 맘대로 밀쳐내냐고 단단히 화를 내고 싶었다. 복잡하게 뒤얽힌 오만가지 감정 중에 엘사에 대한 분노와 죄책감이 형태를 잡고 서서히 마음을 잠식해갔다.
진심으로 엘사가 나아져서 행복하기를 원했다. 서로 말로 이야기하면서 웃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라 마지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엘사가 자신을 떠나는 건 싫었다.
설마 다 나을 때까지 자신과 떨어져 있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 하물며 이게 자신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라니, 안나는 죄책감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엘사와의 관계가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던 건 사실이지만 결코 엘사가 싫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엘사 옆에 있으면 무척 즐겁고 행복했다. 아무런 가식도 없이 순수히 애정을 베푸는 엘사에게 안나는 알게 모르게 의지하고 있었다.
날 멋대로 떠나가지 마...
안나는 눈물이 새로이 뺨을 덧칠하는 것을 느꼈다. 아직 너에게는 미안하단 말도, 용서해달란 말도 못했단 말이야...
꼭 나를 떠나야만 하는 거야?
안나는 엘사에게 소리없이 원망의 마음을 전했다. 죄책감, 그리움, 걱정. 그 모든 감정을 원망으로 덧칠해 띄워보냈다. 엘사에게는 아무런 과실도, 잘못도 없다. 어쩌면 미안함을 감추고 싶어서 원망으로 감정을 얼버무리려던 것일지도 모른다. 안나는 겨우 눈을 떠서 흐려진 시야 너머로 엘사의 편지를 바라보았다.
엘사... 나 어떻게 해야 해?
천장에 걸린 엘사의 눈송이가 말없이 주인을 내려다 보았다.
*****
‘딩동~’
밑에서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리자 안나는 고개를 들고 창밖을 응시했다. 5시가 다 되어가는데 올 사람이 누가 있는지 멍한 머리로 어렴풋이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지금 집에는 자신밖에 없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후 안나는 얼굴을 문질러 눈물자국을 지웠다. 방문판매 잡상인은 아니길 바라며 안나는 1층으로 발을 옮겼다.
“생강!! 집에 있는 거 아니까 문 좀 열어봐. 피자 사왔어!”
*gingersnap : 생강 쿠키
익숙한 목소리에 안나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인터폰에 메그와 크리스토프의 얼굴이 비쳤다. 절로 현관을 향하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반가운 기색이 얼굴에 가득해져 안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네가 새 친구를 만나서 기뻐. 앞으로도 더 많은 친구들을 만들기를 바래.”
문을 열자, 반가워하던 메그의 표정이 이내 심각하게 바뀌었다.
“생강, 혹시 울고 있었어?”
안나는 서둘러 뺨을 문질렀다. 자국이 다 안 지워졌나? “아..아니..”
“덩치. 이것 좀 들어봐라.” 메그가 크리스토프에게 네모난 플라스틱 상자를 건데더니 안나를 잡아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살벌한 얼굴에 안나는 살짝 겁이 났다.
“메그 언니, 잠깐만..”
메그는 안나를 소파에 앉히기 무섭게 추궁을 시작했다. 진지하게 자신을 주시하는 표정에서 안나는 어미 흑표범이 떠올랐다.
“누가 이랬어? 누가 괴롭힌 거야? 헤라클레스야?”
“잠깐 기다려봐, 애가 무서워하잖아.” 크리스토프가 양팔에 짐을 든채 점잖게 메그를 제지했다.
“시끄러, 덩치. 안 그래도 학교에서부터 이상했는데 역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어서 말해!”
누군지 몰라도 조져놓을 거니까. 메그가 씩씩대며 자신을 이리저리 살피자 안나는 묘한 충만감을 느꼈다. 엄마인 양 자신을 살피는 모습이 웃기기고 하고, 무척 고맙기도 했다. 알쏭달쏭 알 수 없는 행복감에 안나는 실없이 웃음을 흘렸다.
“안나. 왜 그래.” 메그의 얼굴이 한층 더 심각해졌다. 웃는 얼굴이 어지간히 이상했는지 그녀는 안나의 양손을 감싸 안았다.
크리스토프가 소파 앞 탁자에 피자를 내려놓고는 메그를 따라 안나를 살폈다. 팔짱을 낀채 안나를 내려다보던 소년은 걱정이 풀렸는지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얘가 살짝 넋이 나가긴 했는데 따로 걱정할 문제는 아닌 거 같아. 일단 앉아서 피자나 먹자고.”
“지금 피자가 중요해?
메그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말이 없는 안나가 걱정되는지 계속 안나의 주의를 돌리려 애썼다. 마치 주인을 간호하려 낑낑대는 맹수같았다.
잠자코 있던 안나가 입을 열었다.
“피자 뭐 사왔어?”
“베이컨 포테이토에 소세지 바비큐 반반. 토핑으로는 버섯이랑 피망.” 크리스토프가 덤덤히 말했다.
“피망?” 안나가 살짝 풀이 죽은 채 물었다.
“피자에 얹어 먹는 건 아삭해서 맛있어. 이 참에 너 편식 좀 고치자고.”
“윽...” 안나가 짐짓 얼굴을 찌푸렸다.
메그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크리스토프와 안나를 번갈아 보았다. “안나, 너 괜찮은 거야?”
안나는 피자 상자를 열며 메그에게 말했다. “먹으면서 얘기해줄게. 근데 저 플라스틱 상자는 뭐야?”
“랄프네 아이스크림 넣은 아이스박스.” 크리스토프가 옆에서 콜라병을 따며 말했다. 안나의 눈빛이 야수처럼 변하자 크리스토프는 다리 사이로 박스를 끌어 보호하려는 몸짓을 취했다.
“안나, 밥이 먼저야. 이건 후식이라고, 후식!”
*****
메그는 손으로 턱을 괸 채 안나가 아이스크림을 몽땅 해치우는 걸 지켜보았다. 저 많은 게 다 어디로 들어가는지는 언제봐도 신기한 미스터리였다. 크리스토프도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우와...”
안나가 끊임없이 스푼을 움직이는 걸 크리스토프는 경이로운듯이 바라보았다. 삼키기도 전에 다음 숟갈을 꾸역꾸역 집어넣는 모습이 무척 신기한 듯했다.
“저게 진짜 다 들어가네.”
“말했잖아. 다 먹고도 남는다니까.”
“너 얘 아이스크림 먹는 거 전에 본 적 없었나?”
“직접 본 건 오늘이 처음.”
“신기하지?”
“신기하네.”
“뭐야! 동물원 동물 보는 것처럼 빤히 보지 말라구.” 플라스틱 통을 비운 안나가 입을 훔치며 발끈했다. 성난 토끼 같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크리스토프는 큭큭대며 웃음을 참아 넘겼다.
“다음에 또 사줘야겠네. 이거 이름이 뭐랬더라?”
“얼티메이트 쇼콜라 파르페.”
크리스토프가 푸왁하고 크게 웃으며 자지러졌다.
“무슨 쇼콜라 파르페?”
“얼티메이트. 뭐가 그렇게 웃기냐? 웃다가 뒤로 넘어가겠네, 아주.” 메그가 팔짱을 낀 채 소년에게 핀잔을 줬다.
크리스토프는 아랑곳 않고 배를 잡고 신나게 웃었다. 아이스크림 이름이 아주 제대로 마음에 든 모양인지 웃음 사이에 ‘얼티메이트라니, 세상에’ 같은 말을 혼자서 읊조렸다. 영문 모를 동물을 쳐다보듯 크리스토프를 바라보던 메그는 혀를 쯧 차더니 안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빨간머리 소녀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소년을 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자, 밥도 다 먹었겠다,” 메그가 짐짓 진지하게 운을 띄웠다.
“왜 울고 있었는지 좀 말해줄래, 생강? 숨길 생각은 하지 말고.”
*****
안나는 생각보다 이야기가 술술 나오는 것에 놀랐다. 도대체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애초에 말할 수는 있는 내용인지 고민했던 시간이 무색하게 전부 이야기하는 데에는 2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속이 시원한 게 어쩌면 자신은 누군가에게 이야기해야 나아지는 부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메그의 표정은 더없이 심각했다. 마치 굉장히 어려운 수학 문제를 마주한 사람 같았다. 얼굴을 찌푸린 채 이야기를 듣던 그녀는 이야기가 끝나자 짧게 감상평을 툭 던졌다.
“거, 되게 심각하네.”
솔직한 감상에 안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초콜릿에 피자에, 감정 분출까지 해결하고 나니 전보다 훨씬 기력이 넘쳤지만 막상 이야기하고 나니 한스의 문제는 도무지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문제는 문제다만, 근데 이거 애초에 안나가 뭘 할 수 있는 문제야?”
크리스토프가 텅 빈 피자 상자를 닫으며 말했다. 아까의 웃음기는 어디 갔는지 황금빛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안나의 의문스러운 눈초리에 소년이 잠자코 말을 이었다.
“한스가 엘사를 공격했고, 엘사는 다 나을 때까지 안나를 안 만난다. 어느 쪽이든 안나 네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 그냥 신경 끄는 게 어때?”
메그가 발끈한 채 크리스토프를 나무랐다.
“너는 무슨 말을 해도 꼭 그렇게 하냐. 가족인데 신경을 끄라는 게 말이 돼?”
“나 이거 진심으로 안나 생각해서 하는 소리야!” 소년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어제부터 쭉 생각해봤는데 역시 그냥 신경 끄는 게 제일이라구. 실제로 뭐 어떻게 할 방법이 없잖아.”
안나가 의아하다는 듯 크리스토프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제부터라니? 크리스토프 너 한스 사고에 대해서 알고 있었어?”
“네 삼촌에게 어제 불려 가서 이야기하다가 알게 됐어. 어제 밤에 나 봤었잖아. 아론 삼촌이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좀 했거든. 너 엘사 만나러 다닌 것도 삼촌에게 이야기 안 했더라?”
안나는 속으로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삼촌이 꽤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었던 건 필시 크리스토프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크리스토프치고는 꽤 덤덤해보인 것도 이미 무슨 이야기인지 알고 있어서였을 것이다.
“엘사 편지에 대해서는 몰랐지만 그것도 뭐 네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건 마찬가지니... 방법이 없으면 신경 끄는 게 정답이지.” 크리스토프가 어깨를 으쓱이며 도리가 없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가족인데 신경을 어떻게 꺼? 남일이라고 막 말하지 마!” 메그가 기어이 화를 내며 일어섰다.
“그럼 어떻게 해! 앉아서 계속 힘들게 지내라고?” 크리스토프의 목소리에도 노기가 서렸다.
“애초에 안나는 한스니 엘사니 남에게 베푸느라 제대로 된 자기 시간을 가진 적이 없었다고! 좀 엇나가긴 했다만 지금은 오히려 둘에게 신경을 꺼야 할 때야!” 크리스토프가 씩씩대며 말했다.
안나는 문득 엘사 편지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너도 회복해야 해. 이기적으로 너를 필요로 하는 우리들로부터 벗어나서. 너는 한스와 불쌍하고 말없는 엘사 이외에 다른 걸 즐길 자유를 누려야 해...”
“남을 돌보고 신경쓰는 것도 여유있을 때나 가능하지 자기가 힘들면 그것도 안 된다고. 지금은 그냥 다 잊고 쉴 때야.” 크리스토프가 노기를 가라앉히며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메그는 거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는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뮤즈 공연에 안나를 데려간 것도 안나를 즐겁게 해주려는 생각에서였다. 학교 일이니, 오빠 일이니, 하면서 삶에 치여 살던 안나에게 조금은 즐거움을 선사하고 싶었다. 크리스토프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좀 어긋나긴 했어도 지금이라면 안나가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터였다.
크리스토프가 사과의 제스처를 취하고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건 그저 맘 놓고 기다려야 할 문제야. 한스가 일단 깨어나야 하고, 엘사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만 때가 되면 알아서 연락하겠지.”
안나는 이틀 뒤의 가족 미팅에 생각이 닿았다.
“헬란드 아저씨랑 아줌마는 무슨 일로 오시는 걸까..? 카이 아저씨 말로는 내게 직접 할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메그가 소파에 앉아 안나를 주시하며 말했다.
“생강. 헬란드 부부가 너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면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안나가 갸우뚱한 눈치로 되물었다. “이유?”
“너와 헬란드 부부의 접점. 생각나는 거 뭐 없어?”
...엘사. 안나는 뻔한 대답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았다. 헬란드 부부가 자신의 찾는 일은 아마 엘사 때문일 것이다. 직접 방문할 정도의 일이라면 뭔가 자신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라고 안나는 비로소 짐작이 갔다.
안나의 표정에서 대충 감을 잡았는지 메그는 충고의 말을 건넸다.
“일단 그 사람들이 뭘 원할지는 미리 고민을 좀 해둬. 일이 커질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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