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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 결혼 계약서(24)

ㅇㅇ(222.110) 2020.08.18 18:27:00
조회 593 추천 52 댓글 13


위즐튼과의 만남은 생각보다 빨리 성사되었다. 마치 그쪽에서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두 사람이 사업 때문에 만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일이 아니었지만 이목이 쏠릴 수도 있었다. 엘사는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어느 쪽에서 만나든 조심해야했다.

블랙우드에서 보면 루나드의 귀에 들어갈 것이 분명했고, 해밀턴에서 보면 안나가 알게 될 가능성이 컸다. 

아직 두 사람이 이 일에 대해서 알아서 좋을 것이 없었다. 특히 루나드에게는 더더욱 알리고 싶지 않았다. 

물론 루나드의 눈과 귀는 어디에나 있었기에 알리고 싶지 않다고 해서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최대한 피할 수 있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결국 두 사람은 해밀턴 근처의 작은 레스토랑에서 만나기로 했다. 

최대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만나고 싶다는 엘사의 뜻도 있었고 위즐튼도 이해한다는 듯 순순히 응해주었다.  


엘사가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먼저 와서 엘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위즐튼은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왜소한 체격의 남자였다. 

하지만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의 눈빛은 독사처럼 날카롭고 먹이를 기다리고 있는 포식자에 가까웠다.


“반갑습니다. 해밀턴 부회장 위즐튼입니다.”


“엘사 블랙우드입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편하게 엘사라고 불러주세요.”


“얘긴 많이 들었습니다. 블랙우드에 굉장한 인재가 있다고 말입니다. 여러 의미로..”


위즐튼은 웃고 있었지만 엘사가 그 숨겨진 뜻을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일전에 엘사가 친 사고를 포함해 아마 여러 소문이 그에게도 전달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엘사는 별 다른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저희 꼬마 아가씨랑 지내는게 힘들진 않은가 모르겠군요. 아직 철이 덜 드셔서..”


“염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꼬마 아가씨라고? 철이 덜 들어?

엘사는 갑작스런 그의 말에 당황한 것을 감추려 애써 미소를 지었다. 

위즐튼은 마치 안나가 자신의 손녀라도 되는 마냥 인자하게 말을 꺼낸 것 같았지만 엘사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 사람은 안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위즐튼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복잡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머릿속에서 경고가 울리는 것 같았다. 

이 사람은 위험하다.


“그래서...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프로젝트 때문에 물어볼게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아, 네. 몇 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서요. 아니, 사실 한 가지라고 해야 하나요..”


위즐튼은 여유 있는 표정으로 엘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마치 무엇을 물어보든 이미 대답은 정해져 있다는 듯이. 

순간 엘사는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마치 입을 벌린 뱀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그만 둘 수는 없었다. 

그의 대답을 들어야했다.

어쩌면 그의 대답이 이 상황을 타계할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렌델 프로젝트. 해밀턴이 받아들인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여기 음식 괜찮지 않아요?”


“맞아요, 다음에 또 오고 싶어요! 팀장님 다음주에 한번 더 오시죠!”


“그래요.”


팀원들의 재잘거림 사이에서 안나는 익숙하게 카드를 꺼내 직원에게 내밀었다. 

해밀턴 근처에 있는 이작은 레스토랑은 아직 크게 알려지지 않은 맛집이었다. 깔끔한 분위기에 음식도 괜찮아서 안나도 종종 오는 곳이었다. 


“팀장님, 밖에 있겠습니다.”


“그래요.”


입구가 좁은 탓에 팀원들은 먼저 나가고 안나는 차분히 계산을 기다렸다.

그때 들려온 익숙한 웃음소리에 안나는 본능적으로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봤다. 익숙한 얼굴이 누군가와 앉아있었다.

위즐튼 부회장.

안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그나르와 그는 사이가 좋은 편이었으나 안나와 위즐튼은 앙숙이었다. 

나이가 많이 차이나는 탓도 있었지만 사사건건 안나에게 간섭하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엘사와 결혼할 때도 정말 잘 된 일이라며 앞으로 미래가 기대된다는 말을 해댔을 때 그의 면상에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직원이 계산을 끝내고 다시 안나에게 카드를 주자 안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자신을 알아차리기 전에 빨리 사라지고 싶었다.


그런데 위즐튼 앞에 앉아있던 사람, 어디서 봤던 것 같은데..


안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뒤를 돌았다. 그리고 천천히 위즐튼이 앉아 있는 곳으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아는 척을 하고 싶진 않았다. 그저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저 회사에서 우연히 만났던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자신이 착각한 것일수도 있었다.

그렇게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위즐튼과 담소를 나누며 웃고 있는 사람이 엘사라는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위즐튼은 처음부터 이걸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여유 있는 표정을 지으며 찻잔을 들었다.

엘사가 이렇게 나올거라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전부 예상 안에 있었던 일이라는 듯이.


“첫 질문으로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군요.”


“대답을 들어야겠습니다.”


“뭐 뻔한 것 아닙니까? 블랙우드와 해밀턴의 협업으로 서로가 이득을 취한다, 너무 당연한 질문을 하고 있군요.”


“그게 전부는 아닐텐데요. 이미 아실거라 생각합니다. 저도 아는 사실을 부회장님께서 모르시진 않겠죠.”


“…….”


“그래서 더 말이 안 되거든요. 해밀턴이 이 계약에 응했다는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겁니까?”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계약 뒤에 있는 것을 알고 싶습니다.”


“뒤에 있는 것?”


“저는 블랙우드와 해밀턴 사이에 모종의 계약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엘사의 말에 위즐튼은 알 수 없는 미소만 짓다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엘사는 인상을 쓰며 그의 시선을 쫓았다. 모종의 계약은 엘사가 가진 정보를 전부 취합했을 때 내릴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결과였다. 

그렇지 않고서는 해밀턴이 절대 이 계약에 서명할 리 없었다. 그것이 블랙우드와 해밀턴인지, 루나드와 위즐튼 간의 계약인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분명 표면상으로 보이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있었다.


위즐튼은 차를 마시며 엘사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엘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경험을 쌓은 그에게 엘사는 손쉬운 먹이감에 불과했지만 몇 가지 고려해야 할 것이 있었다.

엘사가 루나드의 유일한 손녀라는 점. 그리고 과연 엘사가 자신을 찾아온 것이 엘사의 의지인지, 루나드의 의지인지 알 필요가 있었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고 엘사를 바라봤다. 엘사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놓치지 않은 위즐튼은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엘사는 위즐튼을, 아니 위즐튼의 대답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질문 상대가 잘못된 것 같군요.”


“네?”


“회장님께서 저를 믿지 못하시는건지...아니면 손녀를 믿지 못하시는건지...”


“무슨..”


“가서 직접 물어보는게 낫지 않겠습니까? 회장님께서 저희 만남을 모르실 것 같진 않군요.”


“...그 말은 뒷거래가 있었다는 말씀이신가요?”


“뒷거래라니..저는 그저 일적으로 회장님과 담소를 몇 번 나눴습니다.”


“…….”


“질문에 대한 대답은 충분한 것 같으니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회장님께 안부 전해주세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위즐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사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듯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그저 웃으며 레스토랑을 떠났다. 

그가 떠난 뒤에도 엘사는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거래가 있었나? 하지만 대체 무엇에 관해서? 루나드와 위즐튼 간의 거래였을까?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는 회사간의 거래였을까?

루나드는 이미 이 만남에 대해 알고 있을까? 어쩌면 위즐튼의 말 대로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저 엘사의 행동을 눈감아 준 것일수도 있었고.

대체 위즐튼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그렇다면 안나는? 안나는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엘사는 눈을 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이었다. 

위즐튼에게 답을 듣기 위해 온 것이었지만 질문만 늘었을 뿐이다.


“엘사.”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엘사는 눈을 떠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쫓았다.

시선의 끝에는 엘사가 그토록 그리던 사람이 있었다. 차가운 녹색 눈동자가 엘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나..”


중얼거림에 가까운 엘사의 말이었지만 안나는 상관없다는 듯 엘사의 앞에 앉았다.

항상 얼굴에 기분이 드러나던 평소와 달리 오늘은 그 어떠한 것도 읽을 수 없었다.

안나는 그저 무표정으로 엘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긴..무슨 일로..”


“..엘사.”


안나는 엘사의 말을 자르며 숨을 골랐다.

이제는 더 이상 엘사를 믿을 수 없었다. 위즐튼과 웃고 있는 엘사를 보니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사업적으로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이곳까지 오면서 자신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혹시 엘사와 위즐튼 사이에 다른 이야기가 오간 것은 아닐까.

자신에게 숨기면서까지 엘사가 해야만 하는 일이 무엇일까.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은 안나의 마음을 점점 검게 물들이는 것 같았다. 마치 늪지대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거리며 나올 수 없었다. 

한번 금이 가기 시작한 마음은 겉잡을 수 없이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그만큼 엘사를 좋아하기에, 믿었기에.


안나는 쉽게 입을 뗄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엘사의 모습마저 이젠 거짓으로 느껴졌다.


“당신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안나?..”


“나 좋아하긴 했어요?”


엘사는 안나의 질문을 이해하기 위해 인상을 쓸 수밖에 없었다. 

자길 좋아하냐고? 갑자기?

아무리 엘사가 둔하더라도 지금 이 상황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엘사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재차 물었지만 안나는 그저 엘사의 대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있는 안나의 눈에선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당신을 좋아해요. 아니, 사랑해요.”


“증명할 수 있어요?”


“..당신이 원한다면.”


“…….”


엘사의 대답에 안나는 결국 참았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불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엘사의 모습에 마음이 저렸지만 지금 안나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우리 시간을 가져요.”


“안나?..”


“..이젠 못 믿겠어. 날 더 이상 바보로 만들지 말아요, 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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