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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 결혼 계약서(30)

ㅇㅇ(222.110) 2020.09.16 00:31:10
조회 654 추천 54 댓글 10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 엘사는 최대한 덤덤하게 보이고 싶었지만 말을 내뱉은 그 순간조차도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피가 날 때까지 입술을 깨물며 필사적으로 버티는게 고작이었다.

이미 정해 놓은 대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려웠다.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몸은 좀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엘사는 떨리는 마음으로 안나를 바라봤다.


무서웠다.


안나가 정말 이혼에 동의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귀를 막고 싶었다.

자신이 아닌 안나의 입에서 이혼하자는 말이 나오면 영영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론 거절해주길 바랐다.


두 사람 사이에는 긴 침묵이 이어지고 있었다. 두려워하는 엘사에 반해 안나는 그저 무표정으로 엘사를 보고 있었다.

그 어떠한 표현도 없었다. 마치 남의 일을 들은 것처럼 너무 평온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기에 그랬을 뿐, 안나의 녹색 눈동자 너머엔 작은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엘사.”


마침내 침묵을 깨고 낮은 목소리가 허공에서 흩어졌다.

안나는 아주 천천히 엘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엘사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세게 깨물고 있던 엘사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엘사는 안나가 자신의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아준 것을 알았다.


“입술 그만 깨물어요. 피 나잖아.”


이 상황에서도 자신을 걱정하는 안나의 말에 엘사는 혼란스러웠다. 이 상황에서도 자신을 걱정해주는 안나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자신의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안나가 하는 행동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안나, 내가..”


“엘사.”


엘사의 말을 자른 안나는 한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갔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엘사의 불안감은 더 커져갔지만 안나는 더 평온해 보였다.

안나가 얼굴 바로 앞까지 오자 엘사는 그제야 녹색 눈동자 너머로 푸른 불꽃이 이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걸 알아챘을 땐 너무 늦은 것 같았다.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엘사는 마른 침을 삼키며 안나의 행동을 주시했다.

마치 안나가 자신을 잡아먹으러 온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 순간 안나는 한손으로 엘사의 목을 잡았다.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중얼거림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절대 거부할 수 없는 단호한 목소리였다.

안나는 화가 나 있었다.


“...그건 당신이 정하면 안 돼요.”


“…….”


“...내가 정해.”


안나는 엘사의 목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지금 당장이라도 소리치면서 화를 내고 싶었지만 그건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혼을 요구한 것을 보면 엘사도 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이 안나의 분노를 진정시킬 이유는 되지 못했다. 오히려 그 점이 오히려 화를 돋구고 있었다.

어째서 엘사는 항상 말없이 모든 것을 혼자 떠안으려고 할까. 자신이 그렇게 미덥지 못했을까.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상의해줬다면 이 지경까진 오진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안나는 떨려오는 몸을 점점 주체하기 어려웠다.

엘사는 대체 자신을 뭐라고 생각했을까.


“이혼할지, 말지는..내가 정해요.”


“..안나!..”


“당신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당신은 그 말을 입에 올릴 자격이 없어요.”


“...모든 책임은 내가 질게요. 그러니까..”


“이혼하면 전부 괜찮아져요? 이 일을 막을 수 있어요? 확신할 수 있나요?”


“…… .”


“그러니까 더 이상 말 말아요. 나 더 이상 화나게 하지 마요.”


“하지만 안나, 내가 당신한테...”


“엘사, 그만.”


“..?..”


“거기까지만 해.”


짧은 순간이었다. 엘사는 다음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안나의 입술이 엘사의 입을 막고 있었다.

입술에 난 상처 위로 안나의 혀가 지나갔다. 쓰라림과 동시에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엘사는 벗어나려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피 맛과 함께 느껴진 짠 맛에 엘사는 그것이 눈물임을 알았다.


“읍, 하아...안나..”


겨우 떨어진 두 사람 사이를 순식간에 찬 공기가 가득 채웠다. 안나의 손은 여전히 엘사를 붙잡고 있었지만 고개는 더 이상 엘사를 보고 있지 않았다.

마치 지금은 보고싶지 않은 듯, 하지만 차마 손을 놓지 못하겠다는 듯이 안나는 위태롭게 엘사를 잡고 있었다.


“..안나.”


엘사가 조심스럽게 안나를 불렀지만 안나는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대답이 없었다. 그저 소리없이 떨어지는 눈물이 안나의 심정을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그 모습에 엘사는 저린 가슴을 뒤로 하고 안나를 힘껏 껴안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이, 뜨거운 체온이 마침내 서로에게 닿았다.

엘사는 안나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작게 속삭였다.


“...미안해요...그렇지만 이게 최선이에요.”


“…….”


“..이게 내가 당신한테 속죄할 수 있는 최선이에요, 안나. 그러니까..”


“…….”


“우리 이혼해요.”


엘사의 마지막 말을 들은 안나는 결국 눈을 감았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지만 이젠 닦을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엘사의 말은 일리가 있었고 안나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알고 있었다.

엘사가 자신에게 속죄한다는 말을 했을 때 안나는 더 이상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의미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혼이 최선의 방법은 아닐지 몰라도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렇기에 엘사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 분명했고 그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안나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면서 엘사를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애초에 선택지는 없었다. 하지만 딱 하나, 안나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있다.


“..그래요, 이혼해요. 대신..”


“…….”


“그 때가 언제인지는 내가 정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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