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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 결혼 계약서(31)

ㅇㅇ(222.110) 2020.09.23 00:16:09
조회 684 추천 48 댓글 9


그 날의 대화에도 불구하고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어쩌면 달라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무리 애를 써도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었기에 최대한 덤덤하게 보내려 애쓰는 중이었다. 서로 각자의 일을 하고, 같이 밥을 먹고 서로를 안았다. 

하지만 서로의 몸을 탐하기보다 그저 끌어안고 함께 잠드는 때가 대부분이었다.

어떤 날은 엘사의 방에서, 어떤 날은 안나의 방에서 온기를 느끼며 밤을 보냈다.


“엘사.”


자신을 찾는 목소리에 엘사는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이미 잠옷으로 갈아입은 안나가 비스듬히 문에 몸을 기댄 채 엘사를 보고 있었다. 

그제야 엘사는 벌써 자정이 다 되어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미안해요. 먼저 누워요.”


“내가 왔는데 설마 더 일을 한다는 소리는 아니죠?”


안나의 투정에 엘사는 그저 웃으며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나는 이미 침대로 올라가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엘사도 서둘러 침대에 올라가자 안나는 마침내 있을 자리를 찾았다는 듯 엘사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최근 두 사람이 같이 자기 시작하면서 생긴 이 습관은 일종의 마무리 의식과도 같았다.

마치 시한부를 살아가는 것처럼 하루를 무사히 보낸 서로에게 주는 보상이었다.


“그러고보니 조금 아쉬운 게 있어요.”


갑작스러운 말에 엘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무슨 뜻인지 물었다. 

하지만 안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살짝 올리며 엘사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안나?”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일찍 당신이랑 같이 자는건데 그랬어요.”


“…….”


“바보같이 각방이나 쓰고..”


“그럼 지금이라도 합칠까요? 나는 괜찮은데 당신은 어떨 지 모르겠네요. 저번에 보니까 방에 옷이랑 짐이 많..”


“엘사!”


안나는 필사적으로 엘사의 말을 끊으며 소리쳤다.

그 모습에 엘사가 작게 웃자 안나는 미워 죽겠다는 듯 어깨를 때렸다. 하지만 허리에 감은 손은 풀지 않았다. 

이 순간 마저도 안나에겐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다.


“가만 보면 당신도 장난치는 거 은근히 좋아한다니까요.”


“제 아내가 워낙 매력이 넘쳐서 안 치고는 못 넘어가거든요.”


“그래요? 이상하네 내가 아는 거랑 좀 다른 것 같은데..”


안나의 웃음소리에 엘사는 시선을 맞추며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녹색 눈동자와 파란 눈동자가 서로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눈동자 너머로 얼핏 비치는 슬픔이 서로의 감정을 말해주고 있었다.


“엘사.”


“네.”


“만약에..헤어지더라도..”


“…….”


“바람 피지마요.”


“네?”


“사람들이 당신을 가만히 놔 둘 것 같지 않으니까..바람피면 가만 안 둘거에요.”


“안나, 그럴 리가 없잖아요.”


엘사는 말도 안된다는 듯이 웃으며 안나의 얼굴을 쓸었다.

하지만 안나는 여전히 안심할 수 없다는 듯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결국 엘사는 안나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앞머리를 쓸어주며 말했다.


“이걸로 대답이 될까요?”


“음, 아직 모르겠어요. 좀 더 해주면 알 수도 있고..”


“정작 장난치는 거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네요.”


킥킥대며 웃는 웃음소리와 함께 엘사는 다시 입을 맞췄다. 애정이 가득 담긴 담백한 키스였다. 

많은 대화가 오고 가진 않았지만 두 사람은 그저 같은 곳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사랑을 나누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느끼는 중이었다.


그렇게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날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엘사의 사무실에 퍼졌다. 손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펜이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만 들렸다. 

엘사는 서류에 자신의 서명을 적고 펜의 뚜껑을 닫았다.


“이걸로 된 거죠?”


“그래.”


“고마워요, 파비 아저씨.”


엘사의 말에 파비는 한숨을 쉬며 서류를 봉투에 집어넣었다. 그는 루나드와 아주 오래 알고 지낸 사이였고 회사 법무팀을 이끌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었다는 핑계로 회사를 그만두고 현재는 엘사의 개인 변호사를 하고 있었다.


“엘사, 내가 참견할 할 건 아니다만..”


“..?..”


“지금 네가 벌이는 일의 의미를 알고 있길 바란다.”


“…….”


“언젠가 회장님이 알게..”


“아저씨만 조심해 주시면 문제없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설령 아신다고 해도 괜찮아요. 이미 다 예상하고 있어요.”


“엘사, 넌 내 고객이기도 하지만 언제나 널 손녀처럼 생각했단다. 그렇기에 이게 정말 최선인지 다시 묻고 싶구나.”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은 될 것 같아요.”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더 이상 말하진 않겠다만..”


“…….”


“이 결정이 네가 가진 모든 걸 앗아가게 될 까봐 걱정이구나, 엘사.”


“..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파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봉투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자신이 말한다 해도 엘사는 듣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가 든 봉투에는 엘사 앞으로 되어 있던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이혼시에 즉각 안나에게 넘긴다는 서류가 담겨있었다.

개인재산뿐 아니라 엘사가 가지고 있던 블랙우드의 지분도 상당해서 만약 일이 잘못 되더라도 해밀턴이 가진 지분과 합치면 블랙우드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엘사가 왜 이런 일을 벌이는지 그가 알 길은 없었지만 그저 해밀턴을 위해서 하는 일은 아닌 게 분명했다. 

절대 그럴 아이가 아니었고 자신까지 부를 정도면 꽤 오랜 시간을 고민했다는 이야기였다.


“정말 괜찮겠니?”


“네.”


“그래, 그럼 가보마. 마무리되는 대로 연락하마.”


“감사해요. 나중에 따로 찾아뵐게요.”


파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무실에서 빠져나가자 엘사는 그제야 긴장을 풀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안나는 좋아하지 않겠지만 가능한 모든 상황에 대비를 해야 했다. 파비의 염려대로 루나드가 알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지도 몰랐다. 

그 말은 슬프지만 두 사람의 이혼이 생각보다 빨리 진행되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안나가 말 한 때가 언제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어쩌면 안나도 엘사에게 말을 하지 않았을 뿐, 나름대로의 방법을 찾는 중일지도 몰랐다.


두 사람에게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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