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
텐은 그 목소리를 듣자 마자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존이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였지만 잊은 적 없던 목소리였다. 텐은 걸음을 멈출 뻔 했으나 애써 멈추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그러자 뒤따라 빠르게 다가오는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텐은 제발 따라오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정말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텐이 내려가는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와중에도 구두 소리는 멈추지 않고 점점 가까워졌다. 그 일정하고 빠른 소리가 커질수록 텐의 심장은 부서질 것 같았다. 구두가 한 발씩 대리석 바닥을 딛을 때마다 복도를 울리는 소리가 두려웠다. 존이 왜 왔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설마 존이 자신을 보고있던 텐을 눈치챘던 걸까. 그런 생각도 잠시 구두 소리가 텐 옆에서 멈추자, 동시에 온 몸의 피가 아래로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과 동시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옆에서 존이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바로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텐이 한걸음 먼저 그리고 존이 한 걸음 늦게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텐이 지하 주차장으로 가는 버튼을 누른 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정적이 찾아왔다. 존이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다 못해 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친구가 같이 좀 와 달라고 해서 왔는데 피곤해서 가려고. 아까는 모르는 사람이 부르는 줄 알고 대답 안했어. 넌 줄 몰랐어. 미안해.”
텐은 자신의 변명이 구차하다고 생각했지만 달리 괜찮은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텐의 변명이 존에게 사실이 아닌 것처럼 들렸더라도 존이라면 자신이 그렇게 말했을 때 굳이 파헤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존의 시선이 자신에게 얼마간 머무는 것이 느껴졌지만 텐은 애써 앞만 보고 그 시선을 무시했다.
“…텐 네가 아닌줄 알았어. 헛것을 보는 줄 알았어.”
“……”
둘 밖에 없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존의 목소리가 더욱 가깝게 들렸다. 그리고 그럴리 없을텐데도 존의 말이 자신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것처럼 그리운 듯이 들렸다.
“넌 프롬에 안 올 줄 알았거든.”
“어. 친구가 부탁한 게 아니면 안 왔겠지.”
“요즘엔 잘 지내? 아줌마 아저씨는 잘 계시겠지.”
“응. 잘 지내. 존 너는.”
“그럭저럭.. 우리 부모님은 잘 계셔.”
엘리베이터가 지하 3층에 도착했고 존이 먼저 그리고 텐이 그 뒤를 따라 내렸다.
“잘됐네… 그럼 난 갈게. 오늘 옷 멋지네. 재밌게 보내.”
텐은 복잡한 마음을 티 내지 않고 말을 건네느라 애를 썼다. 덜덜 떨리려고 하는 목소리를 최대한 쥐어짜내서 할 수 있는 만큼 밝게 말했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에 마지막 인사까지 볼품없어 보이긴 싫었다. 그리고 멋있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었다. 존은 정말로 멋져 보였으니까. 그냥 보내기엔 너무도 아까운 날이었다. 아까 플로어에서 춤을 추던 모습처럼 그렇게 그림처럼 행복한 날이 되기를 바라는 것도 진심이었다. 그렇게 존에게서 돌아서서 주차장으로 향하려는 텐을 존이 붙잡았다.
“잠깐만. 데려다 줄게.”
“뭐? 괜찮아. 나 혼자 갈게.”
“아냐 데려다 줄게.”
말이 끝남과 동시에 존의 손의 텐의 팔에서 떨어져 나갔다. 존 자신도 갑자기 팔을 잡아버린 것에 놀란 눈치였다. 텐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차는 어디에 있어?”
“저쪽에 있는데… 아니 근데 프롬은?”
“나도 먼저 가려고. 키 나한테 줘.”
텐은 단호한 존의 얼굴을 보고 어쩔 수 없이 키를 건넸다. 존이 텐의 차에 다가가서 키로 자동차를 열었다. 삑 소리가 나면서 문이 열렸고 존이 운전석에 앉았다. 텐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존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알 수가 없었다. 텐이 조수석에 앉자 존이 운전을 시작했다. 존은 운전을 하면서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얼마정도 수신음이 가더니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나 먼저 가야할 것 같아. 테이블에 내 가방이랑 키 있으니까 잘 좀 부탁 할게. 내일 차 가지러 너네 집에 갈 테니까. 응. 부탁 할게. 정말 미안해.”
전화를 끊고 존이 텐에게 말했다.
“내 차도 가져왔는데, 친구랑 같이 타고왔거든. 그래서 친구한테 차 좀 부탁한다고 했어.”
존이 차 키와 가방을 모두 내버려두고 그냥 나와 놓고 뒤늦게 친구에게 부탁을 하고 있었다. 자신을 불러 세우고 데려다 주는게 그렇게 큰 일이었을까. 텐은 그렇게 생각하니 존에게 자신이 소중한 존재인 것 느껴졌고 곧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바보 같아 졌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헷갈리게 구는 존이 짜증났다. 그러는 동안 차는 복잡한 주차장을 빠져나와 도로로 진입했다.
아무 말도 꺼내지 않는 텐을 존이 고개를 돌려 보고는 자신이 말을 꺼냈다.
“텐. 우리 서로 만날 일이 거의 없었네. 어릴 때는 자주 놀았었는데.”
“………그렇지 뭐.”
“그때 너 정말 귀여웠는데. 뻔뻔하게 나한테 숙제시키러 오고 말이야.”
존의 장난 섞인 듯이 건넨 말이었지만 텐은 존이 자신들의 사이에 아무 문제도 없었던 듯이 행동하는 것이 넌덜머리가 났다. 존이 그럴 때 마다 덧난 상처를 건드리는 느낌이었다.
“그랬지. 어릴 땐.”
텐은 견디지 못하고 차갑게 말을 뱉었다.
“…….정말 좋았지 그 때.”
그렇게 말하는 존의 목소리가 슬프게 느껴졌다. 텐은 고개를 돌려 존을 바라봤다. 슬픔이 배어있던 목소리와는 다르게 존의 표정은 무덤덤 해보였다. 점점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고 머리가 아팠다. 결국 텐은 자신의 속마음을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하지만 날 싫어한 건 너잖아.”
텐은 그렇게 말하자 마자 결국 저질러 버린 것을 후회했지만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 시원하기도 했다. 다시 찾아온 침묵을 뚫고 존이 뭐라고 말하기만을 기다렸다. 존이 텐을 한번 쳐다보고는 대답했다.
“무슨 말이야?”
존의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가 들렸다. 표정은 또 얼마나 살벌할지 보기가 두려워서 텐은 시선을 앞에 고정했다. 하지만 그 굳은 목소리에 화가 나기도 했다. 자기가 그래 놓고 아니라고 모르는 척 무슨 말이냐고 말하는 것에 화가 치밀었다.
“그러니까…존 네가 나 싫어했잖아.”
“그런게 아냐.”
“그런게 아니라고?”
텐은 존이 부정하는 모습을 보고 정말 억울해졌다. 몇 년간 자신은 그 기억으로 앓아왔는데 상대방은 그 때의 일이 없던 것처럼 잊어버리고 싶어했다.
“내가 너 좋아해서 그랬잖아. 그런 거 역겹고 이상한데 내가 그래서… 그래서 네가 나 싫어 했잖아. 왜 모른척해? 그러면 편해…? 그럼 그게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닌데…”
“텐 진정해. 그런게 아니…”
“네가 인정하기 싫어도 그게 사실인데 왜 자꾸 없던 일 취급해. 왜 날 자꾸 병신같이 만드는데…”
기어코 텐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큰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고는 존이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미안해. 텐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존이 사과하며 계속 텐 쪽으로 고개를 돌리곤 텐의 얼굴을 살폈다. 운전 하면서 텐의 얼굴을 살피느라 고개가 왔다 갔다 바빴다. 결국 도로의 갓길에 차를 세우고 존이 휴지를 찾아 텐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주었다. 텐은 존의 사과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분간 바람을 가르며 도로위를 달리는 차들의 소리만이 차밖에서 들려왔다.
“…텐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어. 네가 싫어서 그런게 아니야. 장난으로 네 볼에 키스했던 날 당황스러웠어. 넌 내 동생인데 자꾸 네 생각이 나서… 그래서 미안했고 난 네가 날 부담스러워 하는 줄 알았어.”
“그 이후로 네가 날 피하는 것 같았어. 그래서 안 다가가려고 했어. 그게 서로에게 좋을거라고 생각했고.”
“그런데 나중에야 알았어. 좋아할 수 있는거구나. 내가 텐을 좋아하는구나 하고.”
“……진심이야?”
“응. 이거 말하려고 데려다 준다고 그런거니까.”
텐이 존을 바라보더니 존에게 다가와 입술을 겹쳤다. 텐의 손이 존의 목과 어깨를 잡고 텐의 허리를 존이 받쳤다. 텐의 눈가의 물기가 존에게 느껴졌다. 그리고 부드러운 입술사이로 뜨거운 혀가 맞닿았고 얽히며 부딪혔다. 서로의 몸에 닿은 손의 촉감 그리고 입술과 혀까지 모든 감각이 선명하고 자극적이었다. 텐이 조금씩 흘리는 신음과 물기 젖은 입술과 입술의 마찰음이 고요한 차안에 울려 퍼졌다.
“….음…으응……하…..”
텐이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입술을 뗐다. 그리고는 왠지 부끄러워져서 존에게서 손을 떼고 자리에 제대로 앉았다. 존은 그런 텐을 보고 소리없이 웃은 뒤 차를 다시 출발시켰다.
-끝-
늦어서 미안긔...쓰다보니까 길어짐 2편으로 끝날줄 알았는데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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