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연관 갤러리
여자 연예인 갤러리 타 갤러리(0)
이 갤러리가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추가한 갤러리가 없습니다.
0/0
타 갤러리 여자 연예인 갤러리(0)
이 갤러리를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0/0
개념글 리스트
1/3
- 싱글벙글 올드카 수집하는 남자 수인갤러리
- 싱글벙글 라오스 대학에 한국인 출입금지가 붙은 이유 ㅇㅇ
- 페이커 신전 리뷰 노무현
- 훌쩍훌쩍 오늘은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일 콘스탄티노폴리
- 싱글벙글 상갤촌 0530 어텀스나이더
- 한국사는 흑인들이 듣는 편견들.jpg ㅇㅇ
- 싱글벙글 요즘 일본 영상 유튜브 ㅇㅇ
- 에스파 실물을 본 일본남자 반응...jpg 설윤아기
- 2종 소형 면허 따는 만화.manhwa 한스짐머가쓰는
- IMF "중국GDP 미국 추월은 커녕 10년전으로 벌어져 후퇴" 맛갤러
- 지방발령 히어로!!! 22 준한준환
- "게임 역사를 조진 레전드 3인방 ㅋㅋㅋ" ㅇㅇ
- 싱글벙글 선물달라는 1년지기 친구...jpg 빠요엔
- 오싹오싹....검경도 공개 꺼린 잔혹한 살인사건 추츄
- 게임 유튜버의 명조 리뷰...jpg 뽀블리♡
정성글) 내가 역사공부하면서 뽑은 명연설들
한국은 그런 문화가 좀처럼 없었지만, 서양권에선 고대 그리스부터 웅변을 가르치는 문화가 있었을 정도로 명연설이 정치인의 덕목으로 여겨졌다.역사를 공부하다보면 가장 중요한 한순간마다 정치인들의 명연설이 튀어나온다. 본인은 그런 ‘스피치의 힘’이 서구 민주주의를 꽃피운 원동력이라 생각한다.오늘은 새붕이들에게 내가 뽑은 최고의 연설 5선을 소개하려 한다.5. 윈스턴 처칠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나는 저번에 우리 각료들에게 말했던 대로, 의회에서도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피’, ‘노고’, ‘눈물’, 그리고 ‘땀’ 뿐이라고.우리의 앞에는 가장 심각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나긴 투쟁과 고통의 시간을 앞두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정책은 무엇입니까’. 저는 이렇게 답합니다. ‘육지와 바다와 공중에서 싸우는 것’이라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힘과 능력을 다해서 역사상 유례가 없는 괴물같은 폭정에 맞서 싸우는 것이라고.여러분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나는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승리’!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승리! 어떠한 공포에도 불구하고 승리! 그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해도 승리! 승리 없이는 생존도 없기 때문입니다."윈스턴 처칠이 1940년 5월, 불신임당한 체임벌린을 대신해 수상이 되면서 한 연설로 그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눈앞의 시련을 헤쳐나가겠다는 의지가 돋보인다.처칠이 음험한 제국주의자에 인종차별자라는 평을 받고, 요새는 그 업적마저 부정당하지만 2차 대전 때 보여줬던 독기 어린 리더십만큼은 모두가 인정해야할 것이다.4. 로널드 레이건 <선택의 시간>"한 가지 분명히 해둡시다. 전쟁과 평화 사이에서 선택하라는 논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실 순식간에 평화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항복’입니다. 항복하지 않고 나아가는 데에 위험이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역사의 교훈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유화정책에 더 큰 위험이 있다는 것이며 그것이 우리의 착한 척하는 자유주의자들이 대면하기를 거부하는 망령입니다.전쟁과 평화 사이에 선택은 없습니다. 싸우느냐 항복하느냐의 선택만 있을 뿐. 만일 우리가 계속 물러나고 후퇴를 반복하면 우리는 마지막 궁극적 요구에 봉착할 것입니다.만약 그 무엇도 삶을 위해 죽을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면 어디서 삶이 시작된 것입니까?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파라오 밑에서 살라고 해야했습니까?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히길 거절해야 했나요? 콩코드에서 우리 애국자들이 총을 내려놓고 항복했어야 합니까?"1964년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의 베리 골드워터 후보 지원 유세에서 배우 출신 신인 정치인 로널드 레이건은 이렇게 당당히 말했다. 이 세상에 전쟁이냐 평화냐의 선택지는 사실 없고, 자유를 위해 투쟁하냐 비굴하게 무릎 꿇고 사느냐의 선택지만 있다고.당시에는 민주당이 핵전쟁의 공포를 앞세우며 TV 광고를 했기에 무너졌지만 훗날 레이건은 자신 말대로 소련을 궁지로 밀어넣어 항복하게 만들었다.3. 조지 워싱턴 <고별사>"지난 날을 되돌이켜보건대, 나는 스스로 내 부족함을 잘 알기에 그간 45년 간의 공직을 맡으며 수많은 실수도 실패도 같이 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합중국 시민들이 나라는 사람의 부족을 관대히 잊어주길 바란다. 나도 언젠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테니."고별사의 경우 말을 빙빙 길게 말하는 당시의 연설 문화 때문에 원문이 매우 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마지막 두 문장이 주는 힘은 매우 위대하다. 워싱턴은 이 연설 하나로 향후 200년 넘게 이어질 미국 민주주의의 토대를 닦았다. 그 오랜 기간 공직에 있었으면서도, 권력을 움켜쥐고 독재자가 될 수 있었음에도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고 후세를 위해 물러난 이 영웅이 있었기에 민주주의와 공화주의가 세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2. FDR, <민주주의의 병기창>"이것은 전쟁에 대한 노변담화가 아닙니다. 국가 안보에 대한 대화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대통령이 가진 목표의 핵심은 지금의 여러분과 훗날 여러분의 자녀, 그리고 더 훗날 여러분의 손주들이 미국의 독립과 그 독립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모든 바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전쟁에 내몰리는 것을 막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사실 민주주의 병기창 연설은 후반부가 좀 더 멋있긴 한데 맨 앞의 이 문장이 주목받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문단인 것 같아 선정했다. FDR은 1940년, 전세계가 파시즘과 싸우느냐, 굴복하고 파시스트가 되느냐를 강요받던 때 미국인들에게 민주주의의 중요성, 자유의 보루로서 미국이 지닌 상징을 설명하며 사람들을 설득했다.가장 앞에서 FDR은 자신이 설명하려는 것이 전쟁이 아니라 안보의 수준에서 접근해야 하며, 그 이유는 자신의 연설을 듣는 사람들과 그들의 자녀, 손주가 살아갈 세상이라며 당위성을 부여했다.이 연설은 또한 미국이 지금까지 유지하는 거대한 외교방침의 시작을 알린 명연설이기도 하다.1. 페리클레스 <전몰자 추도연설>"우리의 정체는 이웃나라들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남을 모방하기보다 남에게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소수자가 아니라 다수자의 이익을 위해 나라가 통치되기에 우리 정체를 민주정치라고 부릅니다. 시민들 사이의 사적인 분쟁을 해결할 때는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합니다. 그러나 주요 공직 취임에는 개인의 탁월성이 우선시되며, 추첨이 아니라 개인적인 능력이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누가 가난이라는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도시를 위해 좋은 일을 할 능력이 있다면 가난 때문에 공직에서 배제되는 일도 없습니다....이제 나는 관행에 따른 연설에서 해야 할 말을 다 했습니다. 또한 여기 묻힌 분들에게 제물을 바침으로써 우리는 행동으로도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국가가 이분들의 자녀를 어른이 될 때까지 국비로 부양할 것입니다. 이것이 고인이 이런 시련을 겪은 데 대한 보답으로 고인과 그 자녀들에게 국가가 바치는 상(賞)이자 영관(榮冠)입니다. 용기에 가장 큰 상을 주는 도시에는 가장 훌륭한 시민들이 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각자 친척을 위해 충분히 애도했으니 이제는 이곳을 떠나도록 하십시오."페리클레스는 고대 아테네의 정치가로서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아테네를 이끌며 아테네 민주주의의 황금기를 열었다.그는 전쟁 중 전사한 이들의 묘역에서 시민들에게 밝혔다. 그가 서두에서 말했듯, 그의 말은 이전의 구태의연한 추도 연설과는 달랐으며 그들이 살고 있는 도시가 얼마나 위대한지, 그 도시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전사한 사람들은 얼마나 위대한지, 그리고 그들을 위해 국가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를 밝혀 앞으로 천 년 넘는 세월동안 있을 수사학의 근본이 되었다.새붕이들도 서양 정치인들의 연설을 한 번 찾아보고 마음에 드는 연설이 있으면 소개해보자- dc official App
작성자 : ㅇㅇ고정닉
스압) 미국 파인애플의 역사...jpg
오래 전 남아메리카 파라나-파라과이 강 유역에서 자라나던 과일이 있었다.. 남미 일대에서 나나스(맛좋은 과일)이라고 불리던 과일은 자연과 인간에 의해 점점 북상하여 멕시코와 카리브 해 일대까지 이르렀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곳곳에서 재배가 이루어져 1493년 신대륙을 탐험하던 콜럼버스도 우연히 이 과일을 접한 뒤 스페인으로 가져왔는데 콜럼버스: 원주민들은 나나스nanas라고 부르던데 우린 이걸 piña de Indes(인디언의 솔방울)이라고 부르죠? 스페인인들: 아나나스(ananas)? 피냐(piña)? 아몰랑 아무거나 씁시다! 이후 북아메리카의 영미계 탐험가들은 이걸 솔방울의 모양에서 따서 Pineapple이라 부르게 된다 당시 신대륙 종자라면 무엇이든지 호기심에 넘쳐 수집하던 스페인인들은 이 기묘한 과일에 관심을 보이고 그것을 재배하기 위한 최적의 생산지를 찾아다녔다 16세기는 스페인 함대가 전세계를 구석구석 싸돌아다니던 시절... 스페인 선원들은 괌, 짐바브웨를 포함해서 파인애플 종자를 가는 곳마다 뿌려댔고 태평양의 한적한 섬 하와이에도 그렇게 파인애플이 도착 일년 내내 따뜻한 하와이의 기후에서 파인애플은 나름 잘 자랐지만 여러 소규모 부족들이 난립하는 하와이에서 대규모 재배가 이루어지진 않고 있었는데.. 1795년 하와이 통일왕국이 성립되었지만 여전히 파인애플은 주요 수출물도 아니었고 어차피 그거 배로 실어날라봐야 푹푹 찌고 습한 환경에서 상하기 일쑤였다 당시 하와이의 주력 작물은 사탕수수였는데 19세기 전세계에서 폭발적으로 수요증가가 이루어지던 설탕의 원료 19세기 중반부터 미국으로부터 많은 이민자들이 하와이로 몰려오기 시작했고 설탕 플랜테이션을 미국 출신의 이민자들이 차지하면서 이들은 플랜테이션을 기반으로 하와이의 주요 산업들을 독점하며 그 재력을 바탕으로 정계에까지 진출해 사회지도층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는데 칼라카우아 왕 대에 이르면 미국,유럽 출신 사업가들이 대놓고 폐위 협박까지 할 만큼.. 하와이 왕도 개길 수 없는 세력이 되어 있었다 백인 유력자들의 기득권을 제한하려는 여왕의 움직임을 눈치챈 백인 유력자들은 공안위원회를 결성하고 미국 해병대를 상륙시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1893년 1월 17일 공안위원회는 민병대까지 동원하여 여왕을 강제로 폐위 미합중국에 편입을 요청했는데 당시 대통령이었던 클리블랜드가 거부하는 바람에 무산되고 하와이 공안위원회는 샌퍼드 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시켜 하와이 공화국을 선포하게 된다 하와이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던 시기.. 미국에서 파인애플의 인기는 계속해서 상한가를 치고 있었고 1893년 천조국에서 파인애플을 원통으로 돌려 깔 수 있는 기계가 발명되었는데 1분에 4개의 파인애플 껍질을 깔 수 있었다 아직 냉장기술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터라 맛좋은 파인애플을 장기보관하는 방법으로 통조림이 선호되었고 이 기계의 발명으로 파인애플 통조림 산업이 활기를 띈다 이 시기 미국 파인애플 통조림의 주요 원료는 카리브 해 인근 국가에서 수입해 오고 있었는데.. 주요 파인애플 산지였던 플로리다 농부들이 거세게 반발 플로리다 농민들: 이 씨발!! 미국 파인애플 놔두고 외국꺼 쓰는 이유가 뭡니까 대체! 사업가: ?? 뭐래 단가가 싸니까 그렇잖아 미친놈들아 억울하면 가격을 낮춰!! 플로리다 농민들: 거대 자본주의가 사람잡는다~ 가격 후려치기 때문에 농민들 다죽겠다 보다 못한 미국 정부가 수입 파인애플에 대해 35%의 관세를 매겨버리고 통조림업자들은 관세 때문에 값이 오른 카리브산 파인애플을 더 이상 이용하기 힘들어져 미국 현지의 통조림 생산공장들은 수지가 악화되어 줄줄이 문 닫고 사업가들은 파인애플을 현지조달해서 제품을 만들어 수출할 수 있는 새로운 곳을 찾아나선다.... 한편 비슷한 시기 1896년 새로운 미국 대통령으로 윌리엄 매킨리가 취임 하와이 공화국은 다시 한번 러브콜을 보내는데 샌퍼드 돌: 미국응디가 그렇게 따뜻하다는데 우리도 좀 넣어주면 안 됩니까 윌리엄 매킨리: 안될거 뭐있노? 클리블랜드와 달리, 매킨리는 팅기지 않았고 1898년 하와이는 속주형태로 미국에 합병된다(아직 정식 주 아님) 이 때 처음이자 마지막 공화국 대통령이었던 샌퍼드 돌이 총독으로 임명되고 동시에 하와이 농산물에 대한 관세가 철폐 하와이에서 파인애플 통조림 산업을 할 경우 1. 관세가 없어서 카리브해 파인애플보다 유리했고 2. 하와이 원주민과 해외 이주민의 값싼 노동력으로 파인애플 경작이 가능 3. 하와이 속주정부로부터 싼 값에 농장&공장부지를 살 수 있었던 등 지원이 많음 여러모로 개이득 미국 사업가들이 하와이로 몰려들어 파인애플 농장과 통조림 공장을 세우기 시작했는데 갓 하버드대 농학부를 졸업한 22세의 젊은이 제임스 돌 그도 파인애플 사업에 대한 꿈을 품고 차곡차곡 모아둔 돈을 갖고 하와이로 왔는데... 전직 공화국 대통령이자 현직 하와이 총독인 샌퍼드 돌이 사촌형이었다 제임스 돌은 모아둔 돈으로 하와이 주정부로부터 64에이커의 파인애플 농장부지를 구입 사촌형의 든든한 지원을 바탕으로 사업준비에 착수한다 우여곡절 끝에 1901년 하와이안 파인애플 회사(Hawaiian Pineapple Company)를 창립하게 되고 당시 하와이에서 파인애플 재배업은 대성황을 이루었는데 하와이에서 재배되던 Smooth cayenne종이 통조림 가공용으로 제격이었고 기후가 파인애플 재배하기에 딱딱 좋았고 경쟁지이던 플로리다에 서리가 자주 끼었던 데다가 파인애플 품질이 하와이산에 비해 좋지 않았다.. 하와이안 파인애플 회사는 신생회사였지만 크게 두 가지 전략에 초점을 맞추고 성장해 나갔다 1) 광고 공격적인 광고전략으로 미국 본토에까지 파인애플 통조림을 대대적으로 선전 라디오&신문을 이용해서 파인애플이 생소한 미국인들에게 인지도를 높여주고 2) 기술개발 1911년 1분에 100개의 파인애플을 돌려깔 수 있는 기계가 발명되자 통조림 생산량이 획기적으로 늘어나게 되는데 미국으로 더 많은 파인애플이 실려나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파인애플을 접하고 달콤새콤한 맛에 이국적인 정취가 곁들여졌고 소화에도 좋아 파인애플만 보면 심장이 바운스바운스 거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922년에 이르면 하와이안 파인애플 회사는 세계 최대의 파인애플 유통기업으로 등극 하와이 주정부로부터 다시 여의도 면적 27배에 달하는 땅을 사들여 사업을 확장했는데 이 때 회사의 주요 경작지였던 라나이 섬에서만 세계 파인애플 생산량의 75%가 쏟아져 나왔다 바야흐로 파인애플 사업계의 정점으로 군림하던 시기 그렇게 돈다발을 쓸어담으며 잘나가나 했는데.. 1929년 대공황이 터져버리고 당장 먹을 양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파인애플 통조림은 먼 나라 이야기가 되어 파인애플 소비량은 바닥을 치게 되어 하와이안 파인애플 회사의 실적은 급격히 악화되고 그동안의 무리한 사업확장&실적악화로 하와이안 파인애플 회사는 1932년에만 500만 달러의 적자를 내면서 파산 직전에 이르렀고 경영자였던 제임스 돌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다 지켜보던 Castle&Cooke사에서 지분을 21% 추가로 매입하면서 지배권을 장악한 뒤 제임스 돌은 쫓겨나게 되고.. 하와이안 파인애플 컴퍼니는 사실상 Castle&Cooke사의 계열사나 다름없게 되어 청운의 꿈을 품고 파인애플 사업을 개척했던 한 젊은이의 외길인생은 여기서 끝이 난다 그래도 Pineapple=Dole이라는 인식이 강했기에 이후 생산되는 주요 파인애플 제품에는 Dole이라는 이름이 계속 들어가게 된다 한편 castle & cook 사의 자금지원으로 여유가 생긴 하와이안 파인애플 회사는 새로운 사업아이템을 구상할 필요가 있었는데 통조림은 아직 냉장기술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19세기 말 ~ 20세기 초에는 유용했지만 이제는 통조림 위주였던 파인애플 제조업에도 변화가 필요했던 것 이미 1920년대에도 가정용 냉장고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사진은 100만개가 팔려나간 모니터탑 냉장고) 1928년 프레온 제조기술이 발명되면서 냉장기술에 획기적 전기가 마련되는데.. 경영진은 냉장보관이 필요하고, 시원하게 먹으면 좋고, 운반 및 가공이 편리하고 누구나 먹기 쉬운것을 알아냈다 파인애플 주스! 하와이안 파인애플 회사는 곧바로 파인애플 주스의 대량양산에 착수했는데 마침 1933년에 금주법이 공식적으로 폐지되면서 칵테일 제조용으로 파인애플 주스가 무지막지하게 팔려나가게 되고 대박을 치게 된다 이 기회를 포착한 경영진은 미국 전역에 라디오와 항공기를 동원한 대대적인 주스 광고를 선보여 1936년에 마침내 적자를 탈출하고 회사경영을 정상적으로 돌려놓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50년대 미국은 경제호황을 누렸고 쑥쑥 늘어나는 파인애플 제품 매출량 속에 하와이안 파인애플 회사는 안정적인 매출을 올려 1961년 마침내 Castle&Cook은 하와이안 파인애플 회사를 완전히 인수했는데 Castle&Cooke사는 이후 필리핀에서 바나나 사업에도 뛰어들면서 1968년에 스탠더드 프루트 회사(바나나 제국에 등장했던 그 회사임)마저 합병해서 델몬트와 쌍벽을 이루는 바나나 업계의 제왕이 되어 1991년에 Dole Food Company로 이름을 바꿔 오늘날 우리가 대형마트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그 Dole 회사가 된다 엄밀히 말하면 하와이안 파인애플 회사가 Dole로 이어졌다기보다는 더 큰 회사(Castle & Cooke)에 흡수당해서 지금에 이른 것이지만 하와이에서 일어난 일련의 정치적 격변으로 인해 총독 사촌형이 탄생했고 그의 후원 아래 사업감각으로 파인애플 사업을 일궈내어 한때 하와이를 세계 파인애플 생산량 3/4를 책임지는 생산기지로 만들어냈던 한 사업가의 이름이 우리가 먹는 파인애플과 바나나에 남겨진 것을 보면 이런걸 알고 먹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오늘날 하와이는 예전의 파인애플 생산기지로서의 명성은 무색해진 지 오래 돌의 현지 통조림 공장은 수익악화로 1991년에 문을 닫았고 델몬트마저도 생산기지를 2008년 이전했다 그렇지만 하와이 곳곳에 남아있는 파인애플농장과 관광지들은 한때 화려했던 파인애플 생산지로서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작성자 : 설윤아기고정닉
차단하기
설정을 통해 게시물을 걸러서 볼 수 있습니다.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