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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갤문학/단편] 빌어먹을! - 1

ㅇㅅㅇㄴ(219.240) 2019.12.28 02:19:27
조회 160 추천 7 댓글 4


크리스토프, 당신은 장차 국서가 될 사람입니다. 몇 번을 말씀드려야 합니까? 제발 이에 걸맞게 행동하십시오!”


카이의 목소리가 아렌델 성 복도를 울렸다. 점잖은 카이가 언성을 높이는 것은 지난 3년간 극히 드물었다. 따라서 그가 크리스토프에게 처음으로 호통쳤을 때, 안나와 크리스토프는 낮선 카이의 모습에 벌벌 떨며 꿀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카이의 꾸짖음은 안나가 여왕이 되고 나서부터 심심찮게 일어나는 일상이 되었다. 크리스토프도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의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하지만 카이 씨, 당신이 늘 말씀하시는 그 고귀한 여왕님께서 평소의 제 모습이 더 좋다고 하셨는데요?”


그 날따라 기분이 안 좋았는지, 평소에는 묵묵히 듣기만 하던 크리스토프의 입에서 빈정거림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이 말은 가뜩이나 숱이 적은 카이의 머리 뚜껑을 활짝 열리게 했다.


당신은 여왕님께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근본이 없다고 예절까지 갖추지 않을 생각이신가요?”


원래도 썩 유쾌한 표정은 아니었지만, 카이의 말을 들은 크리스토프의 표정이 더욱 딱딱하게 굳어졌다.


방금 뭐라고 했죠, 카이 씨? 제가 근본이 없다구요?”


, 그렇게 말했습니다. 뭐 잘못됐나요?”


크리스토프는 코가 닿을 정도로 카이에게 다가섰다. 둘의 눈빛은 질 수 없다는 듯이 날카로워서 둘 사이에 무언가 있었다면 분명 베였을 것이다.


좋아요, 그만두겠습니다! 이 빌어먹을 성에서 나가겠어요!”


카이를 노려보던 크리스토프가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카이는 경악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어떻게 궁정에서 그리 경박한 말을...!”


근본이 없어서 그런가보죠! 빌어먹을 카이 씨, 다시는 얼굴 보지 말고 삽시다!”


크리스토프는 이 말과 함께 카이에게서 몸을 홱 돌려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고는 복도가 흔들릴 정도로 문을 세게 쾅 닫고 성을 나가버렸다.





소식을 들은 안나는 집무실로 카이를 불렀다. 카이가 올 때까지 안나는 어떻게든 둘을 화해시킬 방법을 생각해내려 애쓰고 있었다. 그 둘은 그녀에게 너무나 소중한 사람들이었기에.


카이, 크리스토프에게 근본이 없다고 말한게 사실인가요?”


사실입니다, 여왕님.”


안나는 너무나 태연하게 대답하는 카이의 태도에 조금 당황했다. 그는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어떠한 후회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왜 그렇게 말했죠?”


안나는 불안감을 느끼며 물었다.


여왕님,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크리스토프라는 작자는 여왕님과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주변국의 유수한 왕자들을 놔두고 출신도 모르는 얼음 장수라뇨? 그가 여왕님에게 큰 도움을 준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었어도 여왕님께 기꺼이 도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여왕님은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이시니까요. 제발 신중해지시길 바랍니다.”


카이의 말은 안나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안나를 보살폈으며 일에 바쁜 아그나르 국왕을 대신해 가끔씩 아버지의 역할도 해왔던 카이였다. 그만큼 안나는 카이를 믿고 의지해 왔다. 그녀에게 카이는 단순한 오른팔 이상이었다. 여왕으로 즉위한 초기, 카이의 막대한 도움이 없었다면 그녀는 도저히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카이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을 안나는 믿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카이, 당신은 저희 어머니도 근본 없다 생각하셨나요?”


...크리스토프에게 한 말은 그녀의 어머니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안나는 알아챘다.


“...”


카이는 차마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그가 안나의 말과 같은 생각을 마음 속에 품고 있었다는 것을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카이... 어떻게... 당신이...”


크나큰 배신감을 느낀 안나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안나는 어머니를 욕보인 카이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녀는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을 해임하겠습니다, 카이.”


카이는 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그가 아렌델 성을 떠난다는 것은 방금 안나의 말을 듣기 전까지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순식간에 카이의 온몸에서 모든 힘이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의 잘못이 너무나 명백했고, 너무나 타당했기 때문에 그는 항명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만수무강하시길 바랍니다, 여왕님.”


카이는 뒤돌아 조용히 집무실을 나갔다. 안나는 떠나는 카이의 뒷모습을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흐느꼈다.





카이의 고향, 스눕으로 가는 마차에 몸을 실은 카이는 멍하니 흐르는 풍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평생을 바쳐왔던 아렌델 성을 떠나는 중임에도 그에게는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카이의 마음은 한없이 공허해져 있었다. 그의 삶이 담긴 아렌델 성을 나서는 순간, 그는 껍데기만 남은 인간이 되었다. 남은 그의 인생에서 어떠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따라서 그가 타고 있던 마차가 크게 흔들리고, 말들의 다급한 울음소리가 들리고, 이어 마차가 완전히 뒤집어질 때까지도, 그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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