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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장편] 아렌델행 횡단열차 (2)

서리나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5.15 21:4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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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푼젤 tva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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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델행 횡단열차


(2)





3. 카산드라 / 로윰(Royaume)



카산드라는 있는 힘껏 철로를 따라 질주했다. 허벅지가 터질 듯 달아오르고, 오래된 가죽신은 불이라도 붙은 듯 뜨거워진다. 손을 뻗어 철제 난간을 잡고 당겨 몸을 열차 위로 올린다. 난간을 쥐었던 손바닥에서 비릿한 쇠 냄새가 묻어난다.



고개를 좌우로 틀어 그녀는 자신이 있는 위치를 파악해보려 애썼다. 문틀 위쪽에 5라는 숫자가, 반대편에는 6이라는 수가 쓰여 있다. 열차를 쫓으며 대충 세었을 때 열차는 총 8량까지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전까지 카산드라가 보아 왔던 열차에 비하면 무지막지하게 큰 열차인 셈이다. 큰 광산 마을에서 쓰이는 세 량짜리 작은 증기차나 코로나에서 역사 착공식이 있을 때 견본으로 보았던 네 량짜리 기관차에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발바닥에서부터 허벅지를 타고 울리는 거대한 진동에 카산드라는 벽에 달린 손잡이를 부여잡고 숨을 헐떡였다. 바퀴가 레일을 구르며 내는 울림에 내장이 들썩이고 목구멍까지 역한 맛이 오른다. 고개를 드니 차문에 달린 유리창에 얼굴이 희미하게 비친다. 퀭한 눈동자는 벌건 실핏줄이 터져 있고 두 뺨은 피로로 움푹 깎여 있다. 흑요석처럼 반들거려야 할 머리칼은 생기를 잃어 잿빛으로 푸석푸석하기 그지없다.



눈만 감으면 빌어먹을 그 푸른 보석이 어른거리는 바람에 어젯밤에도 그녀는 어김없이 잠에 들지 못했다. 시퍼렇게 번쩍이는 보석이 잠으로 흩어지려는 그녀의 의식을 또렷하게 붙들고, 그 보석을 노리려 온 신경이 옻이 오른 듯 따끔따끔해진다. 달의 힘을 품은 보석, 문스톤은 떼어내려 하면 할수록 바위틈에 단단히 박힌 고목처럼 정신의 핵 깊숙이 뿌리 내리고 달라붙었다.



코로나를 떠난 지난 5년간 그녀는 문스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무슨 짓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구닥다리 연금술사나 대학의 교수에게 상담을 청하기도 했고, 문스톤을 처음 만났던 어둠의 왕국을 찾아가기도 했다. 심지어 그녀가 혐오하는 점성술사나 예언가에게 조언을 구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허사였다. 연금술사나 의학교수는 그녀의 병을 이해하지 못했고, 점성술사나 예언가의 말을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으며, 문스톤이 사라진 어둠의 왕국은 초라하고 앙상한 폐허 그 이상도 아니게 되었으니까.



"안녕하세요."



열차 소음을 뚫고 귓가에 또랑또랑한 음성이 뚜렷하게 와 박힌다. 상념에 잠긴 사이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새 6호차에 들어서 있음을 깨달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주위를 휘 둘러보다 카산드라는 입구 가까운 쪽 구석에 앉은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소녀가 입꼬리를 올려 희미하게 웃는다.



아, 그 소녀다. 얼음처럼 불투명하고 단단한 눈을 가진 소녀.



엘사.



가볍게 목례하곤 카산드라는 맞은편 구석에 짐을 풀었다. 대각선으로 비껴 맨 크로스백에서 술병이 서로 부딪히며 달그락거린다. 유리와 유리가 부딪히는 그 소리가 가슴 속에 품은 불안함의 소리인 것 같아 괜히 부끄러워진다. 행여나 소리가 닿았을까 카산드라는 소녀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엘사는 그녀의 행동에는 영 관심 없는 모양새였다.



엘사는 작은 캔버스를 끌어안고 차창 밖을 조용히 내다보고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았다가, 캔버스 위로 슥슥 연필을 놀리고, 다시 풍경을 뜯어보길 반복하고 있다. 검지를 입술에 가만히 가져다대며 구도를 고민하다, 한참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풍경에 그려진 나무를 지우곤 심통 난 듯 입술을 삐죽 내민다. 나무가 시야를 지나치게 가리는 탓에 풍경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인상을 찡그리며 그림에 골몰하는 그녀가 무척 귀여워 카산드라는 저도 모르게 작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림 그리는 걸 무척 좋아하시나 봐요.”



소녀와 눈이 마주치고, 카산드라는 자연스럽게 첫 삽을 뜬다.






4. 엘사 / 로윰(Royaume)



“그림 그리는 걸 무척 좋아하시나 봐요.”



캔버스에서 눈을 떼고 엘사는 다시 한 번 소녀를 바라보았다. 어깨까지 떨어지는 흑단발은 끝이 곱슬곱슬하게 말려 있고, 커다란 회갈색 눈동자와 도톰한 단풍색 입술이 매력적인 여자다. 기다란 장검과 묵직한 가방이 소녀의 옆에 놓여 있었는데, 유리병이라도 여러 개 든 것인지 열차의 진동에 맞춰 가방에서 경쾌한 소리가 울린다.



“예전에 제가 알던 친구도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거든요. 또 곧잘 그렸고.”

“재능이 있는 친구인가 봐요.”

“표현력이 풍부한 친구였죠. 매사 낙천적이었고.”



아. 알겠다는 뜻에서 눈썹을 한 번 치켜 올리곤 다시 캔버스로 시선을 돌리려는데 소녀가 한 마디 더 던진다.



“무슨 그림 그리는지, 제가 한 번 봐도 될까요?”



엘사가 수긍하기도 전에 소녀는 엉덩이에 묻은 지푸라기를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잿빛 망토 안쪽에서 쉭쉭거리는 소리가 나지막이 새어나온다. 어깻죽지를 토닥이며 엘사는 고개를 기울여 속삭였다.



“괜찮아, 브루니.”

“멋진데요?”



소녀가 바로 옆까지 바짝 다가오자 독한 술 냄새가 코를 찌른다. 코끝을 들썩이며 엘사는 엉덩이를 움직여 옆으로 물러섰다. 하지만 소녀는 앉을 자리를 비켜 주는 줄 착각한 모양인지 덥석 옆에 앉아 그림을 요모조모 뜯어본다.



“로윰 역을 그린 그림인가요?”

“로윰에 간 걸 기념해 두고 싶어서요.”


“아, 로윰은 처음이신가?”


“예전 해외순방 때 한 번 가 본 이후론요.”


“해외순방이라. 어디 지방 귀족이라도 되시나 봐요? 혹은 부농?”



엘사는 제 풀에 화들짝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 반응이 도리어 그녀의 의구심을 증폭시킨 모양이었다.



“뭘 그렇게 놀래요? 그냥 물어본 것뿐인데.”

“아, 아하하.......”



뒷목을 긁으며 엘사는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망토 속에서 골골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여전히 맴돈다. 어깨를 토닥여 브루니를 안심시키곤 엘사는 다시 그림에 집중한다.



표를 확인하는 검표원과 열차에 타려 줄을 서 있는 사람들, 신문을 읽으며 바삐 발걸음을 옮기는 중절모 신사, 빵모자를 푹 눌러 쓰고 신문을 파는 소년, 기둥에 기대앉은 노숙자.



지나온 삶도, 이곳에 온 목적도 모두 달라 공통점이라곤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 모여 한 폭의 그림을 이룬다. 고개를 들어 엘사는 같은 량에 탄 사람들과, 동물들과, 망토 속에 있는 브루니와, 제 그림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검은 머리 소녀에게로 차례로 눈길을 옮겼다. 그저 각자의 끝에 다다르기 위해 스쳐가는 사람들. 목적지에 다다르기 위해 존재하는 그뿐인 인연과 공간. 그래서 먼 미래에는 기억에 조금도 남지 않을 그런 시간.



작렬하는 태양 아래 사라지는 겨울처럼 빠져나가는 기억을 좇으며 엘사는 열차에 올랐다. 한여름 허공으로 승화되는 얼음처럼 정신을 차리고 보면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그런 기억 말이다. 열차 속 작은 세계는 아렌델을 떠난 이후 그녀의 삶과 똑 닮아 있었다. 열차에서 마주친 사람은 누군가 하나가 목적지에 다다를 때까지 유효기간이 정해진 인연이었고, 철도로 방방곳곳을 다니면서 엘사는 잠깐잠깐 존재하는 세계를 즐겼다. 힘들여 머릿속에 새겨 넣을 필요도 없고, 가슴에 담아 둘 가치도 없는 가벼운 세계. 그런 세계에서는 자신의 짧은 기억력을 구태여 숨길 필요도 없었고, 제 속에 갇힌 작은 세계의 종말에서 깊은 인연에 아쉬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책임 없는 자유가 엘사는 좋았고, 자신이 서서히 자기에게서 빠져나가는 지금, 오로지 이 순간만을 누리며 즐길 참이었다.



“이렇게 된 거, 우리 인사나 하죠.”



한때 흑요석처럼 새카맣게 빛났을 머리칼을 찰랑이며 소녀가 손을 쑥 내민다. 스트레스와 술에 찌든 머리칼은 회색으로 가늘어져 있고 피로로 움푹 깎인 두 뺨은 거칠기 그지없지만 자신감 넘치는 말투나 당당한 모습에서 엘사는 과거의 소년스러웠던 그녀를 엿본 것 같았다. 소녀의 몸에 밴 악취에 코를 연신 찡그리면서도 엘사는 그녀에게서 묘한 매력을 느꼈다.



“카산드라예요.”



엘사는 제 이름을 말하려 입술을 떼다 그만두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이름이 뭐예요?”

“어, 그, 그게......”



날이 갈수록 증세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곤 생각했지만, 이름까지 까먹어 버릴 정도인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머리가 뜨겁게 달아오른다. 어떻게든 생각해내야 해. 속으로 급히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천천히 되뇌어본다. 내 동생의 이름은 안나. 안나와 함께 만든 눈사람은 올라프. 안나의 남편은 크리스토프, 크리스토프와 함께 다니던.......



다니던.......



그 순록의 이름, 뭐였지?



소녀는 미심쩍게 눈을 뜨고 그녀를 빤히 바라보더니 끝내 성마르게 재촉해대고 만다.



“이름 몰라요, 이름?”



그제야 기억났다, 내 이름.



“엘사예요, 엘사!”



아주 오래 전 잃어버린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마냥 엘사는 탄성을 내지르며 대답했다. 하지만 탄성에서 배어나오는,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냈다는 기쁨과는 달리 그녀에게 성큼 찾아오는 것은 시퍼렇게 차가운 공포다. 망각에서 비롯된 두려움의 부피가 숨결을 가파르게 두드린다.



미심쩍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혀끝에 다음 물음을 올리려는 카산드라의 시선을 피해 엘사는 왼쪽 손목을 몰래 흘끗거렸다. 가느다란 팔찌가 손목 위에서 빛나고 있다.


Anna. my sister, the only one in the world.



안나, 안나, 안나. 수없이 되뇌며, 팔찌에 굵다랗게 찍힌 글씨를, 엘사는 머릿속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도록 꾹꾹 눌러 담았다.





5. 엘사 / 로윰(Royaume)



로윰 역에 적힌 시간표에는 코로나까지 꼬박 하루가 조금 넘게 걸린다고 되어 있었다. 아무 탈 없이 기차가 정해진 궤도를 열심히 달린다면 그들은 내일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코로나에 도착하는 셈이었다. 엘사는 가방을 뒤적여 자신이 가져 온 물품들을 하나씩 살펴봤다. 갇힌 공기에 젖어 눅눅해진 빵 두 덩이, 물이 가득 담긴 물통 하나, 물감이며 붓이 담긴 통과 작은 팔레트, 여태 그린 그림이 담긴 책자 하나, 빈민가의 책방에서 동화 일곱 닢을 주고 산 빛바랜 책 한 권과 안나에게서 25살 생일 기념으로 선물받은 일기장.



음식이야 부족하면 식당칸에서 사 먹으면 그만이었고 그림이야 물감이 다 떨어지면 흑백으로 마무리하는 것도 나름의 멋이 있으니 괜찮았지만, 엘사는 자꾸만 조바심이 일었다. 두려움에서 비롯된 불안이었고 조바심이었다. 종종 그녀는 시퍼런 바다 위에서 끝없이 표류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매일같이 반복되는 삶이든 이따금씩 꾸는 꿈이든 말이다. 작은 얼음덩이에 불과한 빙붕은 수면 위를 떠다니지, 결코 심해에 가라앉거나 바닥에 고정되는 법 없다. 광막한 바다에서 그녀가 의지할 곳이라곤 오로지 그 빙붕 하나뿐이었고, 집채만 한 파도는 물론이요 잔잔한 물결에도 맥없이 흔들리는 그 빙붕이 그녀는 몹시 원망스러웠다.



이 빙붕이 조금만 더 넓었더라면 중심 잡기가 수월했을 텐데,



조금만 더 깊었더라면 중심이 저절로 잡혔을 텐데.



아니,



애초에 바다에 홀로 뛰어들 용기 일랑 접어두고, 처음부터 거대한 빙하에 꼭 붙어 있었더라면 물에 젖지 않으려 이리 용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평정심을 가져.”



아렌델을 떠나 유럽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엘사가 마침내 로윰에 정착하게 된 건 순전히 그림 때문이었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러했다는 것이다. 일명 낭만주의자라 불리는 자들이 도시의 허름한 골목에서 예술촌을 이루고 있었고, 그녀의 미술 선생은 한때 위즐튼의 명문 예술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할 정도로 장래를 촉망받았던 사람이었다.



“선생님은 왜 이런 곳에서 사세요? 더 유명해질 수도 있었잖아요.”



마치 병풍처럼 화실에 주욱 진열된, 미술 선생의 작품을 하나씩 찬찬히 바라보다 엘사는 문득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녀가 보기에 선생의 그림은 헨리 푸젤리나 윌리엄 터너의 작품과 비견되어도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였고, 그림을 팔거나 교수가 되어 충분히 명예롭고 부유한 삶을 살 수 있음에도 곰팡이가 슬고 몸 하나 제대로 뉘일 곳 없는 이런 쪽방에 사는 그의 생각을 도무지 뚫어볼 수 없었다.



하지만 선생은 그저 킬킬 웃으며 재미난 농담이라도 되듯 가볍게 대꾸할 뿐이었다.



“재미있잖아.”



엘사에게 그 물음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선생의 답을 웃음으로 되받아야 할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 가벼운 답을 처음 들었던 그때도 그랬고, 수많은 오래된 이름을 잃어 버렸음에도 찰나에 들은 그 문장만이 뚜렷이 남은 지금 또한 그러했다.



“평정심을 가져라.”



이젠 얼굴조차 희미해진 그 선생은 엘사에게 그렇게 반복해서 강조하곤 했다. 눈을 편안하게 감고, 심호흡으로 긴장을 뱉으며 엘사는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려 애썼다. 선생의 선은 가늘었지만 뚜렷했고 날렵했지만 부드러웠다. 분명 인간의 손으로 그린 것임에도 캔버스에 담긴 것은 그림이 아닌 작은 세계였다. 엘사의 선은 들쑥날쑥했고 뾰족뾰족했으며 어딘가 불안하게 날이 서 있었다. 선생의 것과 제 것을 수차례 비교하며 부족한 점을 찾았지만 그녀가 찾아낸 것은 선생에 비하면 제 그림은 그저 밋밋한 낙서에 불과하다는 점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눈을 감고 바다를 고요히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깊은 호흡이 하늘에서 바다를 짓눌렀고 검은 물결을 넘실거리던 바다는 잠시나마 진정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정말 이따금씩, 칼날처럼 뾰족한 과거에 빙해가 깨지고, 날카로운 빙하가 송곳니를 세우며 서로를 잡아먹으려 드는 그런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역류하는 감정의 고동을 감당하지 못해 엘사는 붓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곤 했다.



“또 뭐가 그리 복잡한 거냐?”



아무렇게나 튀어나가는 붓을 일별하며 선생은 그녀를 빙글빙글 놀려댔었다. 그는 심심하면 시장에서 시들시들한 체리나 청포도를 사 와 먹곤 했는데, 때문에 화실에 들어서노라면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자꾸 불길한 예감이 들어요. 아니, 불길한 기억일지도요.”

“아렌델을 떠난 게 후회되기라도 하는 거냐?”

“아뇨.”



반사적으로 내뱉다 엘사는 윗니로 아랫입술을 꾹 짓이겼다.



“솔직해져라.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말고.”

“후회되지 않아요. 멀리서 볼 때 이해되는 게 더 많은 법이니까요. 마치 선생님이 그리는 이 대자연처럼.”

“그러냐?”



소파에 반쯤 누워 청포도를 우물거리던 그는 문득 자세를 바로 일으키며 말했다.



“내가 볼 땐 너는 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조차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 같은데.”

“노력한다면 할 수 있어요.”

“노력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넌 뭘 이해했지? 아렌델에서 널 내친 네 동생 안나를? 아니면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것을 합리화하고, 야만을 우아함으로 겹겹이 포장하면서 심상찮게 돌아가는 이 세상을?”



알맹이가 모두 떼어진 포도 가지를 아래위로 털어대며 그가 입술을 뒤튼다. 그 모습이 마치 빈정거리는 조소를 흘리는 것 같기도, 씁쓸한 미소를 감추는 것 같기도 하다.



손끝에서 피어오른 한기가 가슴을 새하얗게 덮는다.



“더 무시무시한 것, 아니, 무섭다고 생각했던 것도 이해하고 받아들였어요. 제가 이해하지 못할 건 세상에 없어요.”

“기억도 조금씩 잃어간다면서. 머리 아프게 살아가는군, 엘사. 연장자로서 조언 하나 하마.”



탁자 위에 널브러진 파이프를 집어 들고 그는 담뱃잎을 꾹꾹 눌러 담았다.



“네가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그래, 엘사. 어쩌다 이런 열차에 오르게 됐어요?"



사포처럼 거칠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그녀를 억지로 현실로 잡아끈다. 이름을 겨우 기억해내기가 무섭게 그녀에게 겨눠진 두 번째 질문이다. 눈을 수차례 끔벅이며 흐릿했던 초점을 바로잡자 짜증을 삼키며 자신을 바라보는 카산드라의 인상이 동공 가득 잡힌다. 팽팽한 활시위 끝에 걸린 물음이, 기억의 구멍 하나하나를 노리고 텅 빈 공간을 키울까 무서워 엘사는 차마 대답을 짜낼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리고 입을 떼어 답을 내뱉자마자 곧장 또다른 질문이 시린 허무를 이끌고 그녀를 덮칠까 두려워진다. 그녀가 답변하지 못하는 질문의 수만큼이나 사라진 기억의 부피가 더욱 또렷이 느껴진다.



“나는.......”



이미 가진 것보다도 잃어버린 것의 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지는 건 비단 그녀만의 감정은 아닐 것이다. 차이점이라면 기억이란 게 형상이 있는 게 아니므로, 그녀는 그녀가 무엇을 까먹어 버렸는지 모른다는 데 있었다. 엘사는 차라리 다행이라 여겼다. 아니, 여겼었다. 그녀가 질문이란 걸 받지 않고 일부러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다닐 적만 하더라도 말이다.



“왜, 그것도 기억이 잘 안 나요?”



은연한 비꼼이 담긴 말이다. 다른 모든 것은 까먹었을지라도 이 모험의 방향만큼은 그녀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엘사는 아직까지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가슴 속에서 아무렇게나 날아다니던 글자를 얼기설기 엮어, 뺨 안쪽에서 한 번 굴려 보곤 그 비유가 직설과 같은 뜻을 지님을 확인한 후에야 엘사는 힘겹게 입을 떼었다.



“나는 이 겨울을 끝내러, 내 동생을 만나러 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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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화는 일욜이나 월욜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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