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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장편] 아렌델행 횡단열차 (6)

서리나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5.27 21:38:12
조회 721 추천 44 댓글 52
														


※라푼젤 tva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통합링크] 아렌델행 횡단열차



아렌델행 횡단열차(6) ebook으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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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델행 횡단열차


(6)




12. 카산드라 / 코로나(Corona)


“오, 얘야. 카산드라."



커다란 회안이 삽시간에 경악으로 젖는다. 심장이 목젖을 뚫고 나올 기세로 벌렁거린다. 두 팔을 활짝 벌린 중년 여자가 그녀를 꽉 끌어안을 기세로 다가온다. 거미의 아가리처럼 벌어진 그 품에 카산드라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건만 도리어 머리에서부터 핏기가 가신다. 카산드라의 반응에 고델은 도리어 아리송한 모양이다.



“아니, 얘야. 밥을 잘 못 먹고 다니니? 혈색이 너무 좋지 않구나.”

“당신....... 어떻게.......”



거미 다리처럼 마디가 불거진 손이 뺨에 이어 머리카락에 닿는다. 카산드라는 거칠게 그 손을 쳐냈다.



“어떻게....... 아니야, 이건.......”



환상이야, 이건. 환상이라고. 고델은 7년 전에 죽었어. 라푼젤이 평생을 갇혀 살았던 그 탑에서. 하지만 푸른 보석이 보이질 않잖아. 여태껏 환영에서 푸른 보석이 나타나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오랜만에 보는 이 어미에게 너무한 것 아니니?”



고델은 조롱하듯 고혹적인 눈빛을 그녀에게 던진다. 해골 같은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지며 울퉁불퉁한 윤곽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어미라고? 어머니라고?”

“그래, 어머니. 오, 카산드라. 매일같이 술이나 푸며 살더니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게니? 그래서 내가 네 어미인지 애비인지도 구분하지 못하는 지경이 되고 만 거니?”



힘이 바짝 들어가며 새하얘진 손마디 사이로 식은땀이 고인다.



“난 당신 같은 어머니 둔 적 없어.”

“카산드라, 이 가엾은 것. 너와 내가 이렇게 쏙 빼닮았는데, 내가 네 어머니가 아니면 누가 네 어미겠니?”

“자식을 버려 놓고 이제 와서 자신을 부모라고 칭하는 거야? 갑자기 마음에 헛바람이라도 드셨나?”



담담한 기조로 매몰차게 쏘아붙이려 해보지만 가팔라지는 숨에 자꾸만 목이 멘다. 금방이라도 눈물 한 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릴 것만 같다. 바보 같이. 마치 그녀를 옭아매려 만든 올가미처럼, 흐느적거리는 몸놀림으로 고델이 천천히 그녀에게로 옮아온다.



“카산드라, 너는 네가 만든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구나.”



메마른 손가락이 그녀의 턱끝을 치켜올린다. 여차하면 찌를 기세로 카산드라는 허리춤을 뒤적이지만 단검은 램프와 함께 저만치 떨어져 있다.



“널 어쩌면 좋을까? 네 그 피해의식을, 어쩌면 좋을까?”

“피해의식?”

“아, 카산드라. 널 낳기 아주 오래 전부터 나는 젊음을 위해 끝없는 세월 동안 노력해 왔다. 어쩌면 넌 내 삶의 불청객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지. 하지만 그러면서도 어린 널 5년간이나 길러 왔어.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니?”

“사랑?”



사랑, 혀끝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달콤하고 아름다워야 할 그 단어가, 바짝 말라버려 손에 쥐는 것만으로도 바스러지는 꽃처럼 입술에서 맥없이 부서진다.



“내가 당신에게 일말의 사랑이라도 느꼈을 것 같아?”



고델은 비웃음 어린 얼굴로 가소롭다는 듯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물며 골목에 사는 새끼고양이도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담긴 뜻을 읽을 줄 알아. 그게 자신을 보살펴 줄 어미의 품일 것인지 해하려는 포식자의 이빨인지 구분할 줄 안다고. 내가 당신의 눈에 담긴 감정을 모를 줄 알았어?”



숨조차 쉬지 않고 으르렁거리는 음성이 갈수록 불안하게 흔들린다.



“거울을 봐. 거울을 보라고. 탐욕스런 눈을 봐, 보라고!”

“거울을 봐야 할 사람이 나뿐인 것은 아닐 텐데?”



뒷짐을 지고 있던 손에서 손거울이 불쑥 나타난다. 깨진 거울 위로 수십 갈래 초상이 쪼개진다. 움푹 들어간 눈구멍 속 잿빛 눈동자가 유리 파편 사이로 부서진다. 손에 거울을 쥐고 제 얼굴을 연신 들여다보는 카산드라의 주위를 고델은 연신 맴돌며 속삭인다.



“네 눈동자는 더 이상 감정을 담을 수 없지. 항상 다른 사람 탓을 하고, 너 자신을 돌아볼 생각은 않는 거야. 내게 사랑을 모른다고 했었니? 너는 사랑을 잃어버렸어. 이젠 가슴에 사랑을 품는 법조차 모르게 된 거야.”



불쾌한 숨결이 얼굴을 간질인다.



“장장 5년간, 다른 사람의 탓만 해대느라.”

“닥쳐.”

“그 5년간 다른 사람들은 어떤 발전을 이뤘을 것 같니? 라푼젤은 코로나의 여왕이 되었지. 바리안은 수석 기술자로 이름을 떨치고 있고. 네가 좀도둑이라며 무시했던 유진은 경비대 대장으로 막시무스와 함께 코로나를 수호하지.”



표독스러운 미소가 독사의 혀처럼 날름거린다.



“우리 솔직해지자고, 카산드라. 네가 라푼젤을 찾아가지 못하는 이유, 네 자신이 무척 부끄러워서 그런 거지? 네 운명을 찾겠다고 코로나를 호기롭게 떠나 놓곤 5년간 아무런 발전도 없었던 네가, 여전히 과거에 얽매여 연연하는 네가 어엿한 어른으로 자라난 그들과 비교해서 비참해질까봐 두려운 거야.”

“닥치라고.”

“왜냐하면 너는 그저 현상금 사냥꾼 나부랭이로 돈과 술만 좇으며 허송세월을 보냈으니까.”



날카롭게 찢어진 눈에 핏발이 가득 오른다.



“당신이 내게 그런 말을 해? 내가 이 지경이 되기까지 당신이 뭘 했는데, 내게 뭘 해 줬는데! 애초에 당신이, 적어도 자식을 버리지만 않았어도, 내가 문스톤으로 코로나를 파괴하는 일 따윈 없었겠지!”

“또 남탓이구나, 카산드라. 나는 내 삶에 끼어든 너를 탓하진 않아, 적어도. 너는 왜 날 탓하지? 응?”



입 안 가득 조소를 머금고 고델이 그녀에게로 고개를 바짝 들이민다.



“한 마디 해 줄까. 카산드라, 라푼젤은 네 운명을 채어간 게 아니야. 너는 원래부터 폰이었다고, 퀸이 아니라. 네가 그렇게 특별한 사람 같아? 왜, 내가 널 버리지 않았더라면 네가 퀸이 될 줄 알았어?”



커다란 못이 카산드라의 폐부에 박힌다.



“지난 5년간, 네게 남은 건 결국 원망과 증오뿐이야, 카산드라.”

“네가 뭘 알아, 당신이 뭘 알아!”

“오, 가엾은 카산드라.......”



손마디로 카산드라의 눈물을 쓸어내리며 고델이 중얼거린다.



“이 엄마는 다 알아, 카산드라.”

“카산드라?”


투명한 목소리가 그녀를 흔들어 깨운다. 카산드라는 엘사를 한 번 돌아보고, 고델이 서 있던 자리로 다시 눈길을 옮겼다. 끈적하게 그녀를 조롱하던 중년 여자는 마치 깨진 조각상처럼, 시퍼런 광채를 내뿜으며 수억 개의 파편으로 부서지고 있었다. 먼지와 함께 별빛처럼 흩날리는 결정 조각을 관망하다 카산드라는 울음의 근원으로 조심스레 다가섰다. 움푹 팬 바닥의 음영이 등불을 따라 비스듬히 드러난다. 무저갱처럼 아가리를 벌리는 구멍. 그 구멍에서 금방이라도 검은 돌이 솟아올라 심장을 관통해 버릴 것만 같아, 짙은 안개 속에서 카산드라는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13. 엘사 / 코로나(Corona)


먼지가 층을 이뤄 겹겹이 쌓인 책방은 무척이나 탁하고 지저분하다. 오만상을 쓰며 엘사는 손바닥으로 표지를 툭툭 털어냈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책장 사이에서 엘사는 이 짓만 수십 번째 반복하고 있었다. 매캐한 공기가 코끝을 간질이고, 기도에 낀 먼지 때문에 호흡이 거칠어진다. 재채기를 한대도 간지러움이 가시기는커녕, 먼지가 허공에 풀썩 날리며 도리어 더욱 심해진다.



『 .......‘선드랍’과 ‘문스톤’의 이름을 들어보지 않은 자는 결코 마법사의 자격을 지녔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마법사들조차 이젠 신화 속에 숨어버린 두 고대 정령의 이야기에는 생소하다는 듯 반응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까마득한 수천 년 전 마법이라는 게 사람들에게 아직 익숙하지 않던 시절, 이 대륙의 자연을 수호하는 두 정령이 있었다.


그들은 각각 태양과 달이 흘린 눈물에서 비롯된 존재로, 태양의 힘을 품은 ‘불새(Sunbird)’와 달의 힘을 품은 ‘서리사슴(Moondeer)’으로 일컬어지며 뭇사람들의 숭배를 받았다. 그들을 각각 토템으로 삼은 부족은 정령의 힘을 빌려 대륙에서 힘을 확장시켜 나갔는데, 그것이 오늘날의 코로나와 어둠왕국의 원형이 되었다....... 』




여기까지 읽고 엘사는 다시 한 번 표지를 확인했다. 『생태학』, 생태학이라는 제목과 정령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명확히 떠오르는 바가 없었지만 엘사는 정령이라는 단어가 싫지 않았다.




『 ‘불새’와 ‘서리사슴’에 대한 숭배는 지중해 연안 고대 유적에서나 그 흔적을 가끔씩 엿볼 수 있다. 그들의 기록에 의하면 그 누구도 ‘불새’와 ‘서리사슴’이 자취를 감출 줄 감히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런 세상은 상상하기도 싫었을 뿐더러, 정령의 위상, 그것도 태양과 달의 힘을 받은 정령의 위상은 엄청난 것이었으므로 그들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 불경한 행위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령이 사라진다고 해서 그 힘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별이 죽는다고 해서 그들이 우주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정령이 사라진 이후에도 대륙에는 익숙한 기운이 여운처럼 남았다. 고대의 마법사들은 그 힘을 찾아 온 대륙을 하염없이 떠돌았다. 두 명의 위대한 마법사, 데마니투스와 잔 티리가 ‘불새’와 ‘서리사슴’이 남긴 유산을 마침내 찾아냈는데, 그것이 바로 ‘선드랍’과 ‘문스톤’이다....... 』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튀어나올 기세로 잰걸음을 놀린다. 오래되어 얇아진 양피지를 손끝으로 쓸며 엘사는 단어와 단어의 상관관계를 수없이 곱씹었다. ‘불새’나 ‘서리사슴’의 말로가 ‘선드랍’과 ‘문스톤’과 나란히 쓰여 있다는 것은 곧 정령이 마법을 포기한다고 해서 그 힘이 자연으로 흩어지는 게 아님을 의미했다.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듯 숨이 가쁘다. 문득 어지럼증이 일어 비틀거리다 엘사는 책장에 몸을 기댔다. 오래된 책장이 위태롭게 흔들거린다.



“내 결정이 틀린 거야.”



아무리 부정한대도 현실을 바꿀 순 없다. 이마에서부터 머리털이 따갑게 삐죽삐죽 솟는 기분이다. 화가 치민다. 핏기가 가신 얼굴에 시퍼런 회한이 물든다.



“브루니, 우리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걸까?”



배가 부른지 브루니는 골골 소리를 내며 어깨 위에서 똬리를 틀고 낮잠에 빠져 있다. 망토 자락을 끌어 올려 엘사는 그의 배를 덮어주었다. 잠꼬대를 하며 브루니가 품에 고개를 더욱 푹 파묻는다. 서글픈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네 정령과 아토할란은 정령의 권위를 포기하자는 자신의 의견을 모두 존중해 주었다. 가장 먼저 자연으로 흩어진 것은 계곡의 바위 거인이었다. 녹크는 그녀를 로윰에 데려다 주는 것을 마지막으로 바다로 녹아내리듯 사라져 버려 생사조차 알지 못했다. 게일은 명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안나를 보필하겠다며 아렌델에 남았다.



“정말 우리의 최후도 ‘불새’나 ‘서리사슴’과 같을까? 신화 속 이야기가 정말 사실일까?”



아토할란은 세월을 기록하는 도서관이지, 점성술사가 미래를 예언하기 위해 올려다보는 천구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고대의 정령에 관한 정보는 도서관에조차 기록되지 않은 것이었다. 제 삶과 같았던 마법을 포기하기 전 엘사는 수없는 시간 동안 아토할란에 틀어박혀 운명을 계산해 보았다. 하지만 시간이 그녀를 허락하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기억을 읽도록, 세상이 그녀를 가만두질 않았다.



“내 생각이 짧았어.”



마법에 트라우마를 갖고 있던 어린 시절의 엘사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완전히 사라졌다고 여겼던 묵은 악몽이 앞을 막아선다. 이젠 괜찮다며 스스로를 아무리 다독인대도 뾰족하게 일어선 기억이 그녀를 자꾸만 재촉했다. 모순적이게도 감정은 소유자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었다. 분명 그녀의 것인 감정이 그녀의 뜻에 따르지 않았다. 너무나 성급한 결정이었다. 파도에 뒤집히는 빙붕처럼 뒤늦은 후회가 그 판단을 반박하고 번복한다.



페이지를 쥔 엄지가 파르르 떨린다. 계속해서 책을 넘기다 엘사는 문득 한 대목에 멈춰 섰다. 캄캄한 동굴 속 드리운 횃불처럼 머릿속이 환히 밝아온다.




『 .......아렌델의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한없이 거슬러 올라가면 우윳빛 안개에 뒤덮인 땅이 있다. ‘마법의 숲’ 노덜드라라 일컬어졌던 그 땅은 사시사철 서늘한 기후와 신통력을 품은 토양 덕에 독특한 생태가 조성되어 있기로 유명하다. 비록 지금은 마법의 장막이 드리워 있어 안에 들어가볼 순 없지만, 선대 루나드 왕 시절만 하더라도 마법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지 않았었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노덜드라 자생종인 ‘얼음꽃’에 관한 이야기이다. 노덜드라 북부에는 다크 씨라고 불리우는 새카만 빛깔의 바다가 있는데, 마치 에메랄드빛 연꽃을 닮은 이 식물은 부레옥잠처럼 다크 씨의 수면을 둥둥 떠다니며 살아간다.


‘얼음꽃’은 매년 하지 단 하루에만 꽃을 피우기로 잘 알려져 있다. 마법의 숲이 안개로 덮인 이후, 학자들은 햇빛을 받지 못해 꽃을 피우지 못한 ‘얼음꽃’이 곧 멸종하리라 예상했다. 솔스타드의 연금술사들이 노덜드라인들 몰래 ‘얼음꽃’을 마법의 숲에서 빼돌렸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이다. 』




“마법의 숲에서 들었던 ‘얼음꽃’의 이야기가 사실이었어.”



브루니를 비스듬히 내려다보다 엘사는 힘주어 중얼거렸다.



“솔스타드. 브루니, 우리는 솔스타드로 가야 해.”



졸린 눈을 껌벅이며 브루니가 망토 속에서 일어나더니 엘사의 손에 풀쩍 뛰어내려 기지개를 편다. 망둥어처럼 둥근 눈망울이 무언가 기대하는 눈치이다. 그녀가 정령의 위상을 내려놓지 않았을 적만 하더라도 브루니는 그녀에게 눈꽃을 뿌려 달라며 종종 애교를 부리곤 했고, 그럴 때마다 엘사는 엄지와 검지를 비벼 싸락눈을 내려 주곤 했다. 살갗에 닿는 눈의 감촉과, 뜨거운 살에 눈꽃이 앉으며 지르는 즐거운 비명을 브루니는 무척 좋아했었다. 하지만 늘상 불을 머금고 다닐 정도로 강한 마법이 이젠 브루니에게 없고, 마법과 함께 기억이 흩어지는 지금, 엘사 역시 마법을 마음껏 쓸 순 없었다.



입꼬리를 늘어뜨리며 브루니가 손바닥 위에서 또아리를 튼다. 심통난 듯 보이는 그 눈빛이 이렇게 묻고 있는 것 같다. 그곳에 가면 우리 마법을 되찾을 수 있어?



“아니, 브루니. 기억이 우리에게서 빠져나가는 것 정도는 막을 수 있을지 몰라.”



그 말에 브루니는 부루퉁하게 돌아앉아 버렸다. 보랏빛 반점이 숨소리에 맞춰 오르내린다.



“브루니, 마법은 우리가 스스로 버린 거잖아. 마법을 다시 되찾을 순 없어. 그래서는 안 되고.”



혀를 쑥 내밀고 브루니가 투덜거린다. 엘사는 속눈썹을 내리깔고 입술을 짓이겼다. 혀에서부터 솟은 쓴물이 목젖을 두드리고 식도를 적신다. 정령의 권위를 내려놓으면 마법이 서서히 자신에게서 빠져나가는 건 예상한 바였지만 기억도 함께 사라지는 줄 그녀는 차마 알지 못했다.



가장 먼저 사라진 것은 어머니의 이름이었다. 이름에 이어 얼굴이, 어릴 적 매일 밤 들려주던 자장가가, 옛 이야기가, 그래서 최후에 남은 것은 어머니가 아버지와 함께 배를 타고 다크 씨를 건너다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뿐이었다. 다음으로 사라진 것은 노덜드라 부족민들이었다. 순록을 좋아하던 순박한 청년의 얼굴, 허니마렌과 나눴던 대화, 근엄하지만 따스했던 부족장이 그녀의 세계에서 차례차례 모습을 감췄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로윰의 어느 해안가에 이르러, 녹크와 이별한 이후 엘사는 다시는 아렌델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한 참이었다. 그녀의 존재는 아렌델과 노덜드라 모두에게 위협으로 작용했고 그런 상황을 엘사는 결코 원치 않았다. 어차피 돌아가지 않을 공간, 돌이킬 수 없는 시간. 그쪽 세상을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는 편이 나았다.



“또 질질 짜고 있는 거냐?”



하지만 스스로 그런 판단을 내렸음에도 사무치는 그리움과 시퍼런 회한을 주체할 수 없어 엘사는 종종 눈물로 새벽을 지새우곤 했다.



“어린애처럼 질질 짤 바에 아렌델로 가서 네 동생의 얼굴이나 한 번 더 보는 게 어떠냐. 여기, 로윰에서 그림이나 그리며 허송세월 보낼 게 아니라.”



눈두덩에 고이는 눈물을 훔치며 엘사는 미술선생을 꼬나보았다. 선생은 능글맞게 입술을 뒤틀며, 제가 틀린 말 했느냐는 얼굴로 눈빛을 마주 받았다.



“선생님은 아무것도 몰라요.”

“오, 그럼. 아무것도 모르지. 네가 내게 아무것도 얘기해 주지 않았잖냐.”



벅차오르는 숨을 주체할 수 없어 엘사는 무릎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선생은 혀를 끌끌 찼지만 안타까운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참, 답답하구나 답답해.”



이젤을 치우고 의자를 끌어다 주저앉은 뒤 선생은 삐딱하게 주절대기 시작했다.



“너네 자매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들었지. 두 놈들이 하는 꼬라지가 하도 답답해서 오지랖을 부리지 않을 수 없구나.”



고개를 들어 엘사는 벌게진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엘사, 왜 네가 먼저 손을 내밀 생각은 않는 거냐?”



조금 주저하다 눈을 꼭 다물고 그녀는 내뱉었다.



“손을 내밀 겨를이 없어요.”

“왜지?”

“제 존재가 아렌델에는 오히려 위협인걸요. 저는 안나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존재일 뿐이에요.”

“안나도 그렇게 생각할까?”

“선생님도 아시잖아요. 위즐튼과 로윰이, 부국강병을 위해 아프리카와 인도에서 어떤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뒤늦게 식민지 사업에 뛰어든 서던 제도가 얼마나 잔혹한 일도 서슴지 않는지. 그리고 그 세 나라가, 제 존재를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아렌델에 어떤 압박을 넣고 있는지를요.”


“난 그런 복잡한 건 잘 모르겠는걸?”



놀리듯 빙글빙글 웃다가도 선생은 문득 정색을 하고 엘사를 바라본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던가, 이 빈민가에서 자타공인 최고의 괴짜로 통하는 이 미술 선생의 의중을 이해할 방도가 없어, 엘사는 가끔 그의 뇌를 뜯어다 돋보기로 들여다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알겠다. 정말 안나를 위한다면, 지금 네가 있어야 할 곳은 네 동생의 곁이라는 걸. 안나를 떠나 있을 게 아니라, 이 미련한 것아.”



선생과 나눴던 대화는, 그를 떠난 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았건만 날카로운 무언가로 난도질당한 듯 벌써부터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고 흐릿하게 지워져 있다. 이러한 현상이 평범한 사람에게서도 나타나는 망각인지 자신에게서만 나타나는 기억의 증발인지 알 수 없어 엘사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의 조언 중 중요하다고 생각될 법한 것들은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 있었고, 엘사는 그 사실을 퍽 다행이라고 여겼다.



“코로나 역사 출입구에서 두 블럭쯤 떨어진 곳에 오래된 헌책방이 있다.”



담뱃대에 불을 붙이고 그 끝을 입으로 질겅질겅 씹으며 선생은 일러 주었다.



“예전에 그곳에서 ‘얼음꽃’에 대한 책을 읽었던 것 같아. 네 몸에서 마법이 빠져나가는 걸 막진 못하겠지만, 네 기억이 빠져나가는 것 정도는 어떻게 해 볼 수 있을 거다.”

“브루니, 적어도 이 꽃을 찾기만 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정도는 막을 수 있을 거야.”



못마땅하게 눈꺼풀을 들어올리며 브루니가 이렇게 묻는 것 같다. 과연 그럴까? 우리의 정체성은 마법이었는데?



“우리를 마법으로만 정의할 수 있다면 우리는 저 ‘선드랍’이나 ‘문스톤’과 같은 가치밖에 지니지 않는다는 말과 같을 거야.”



그럼 무엇이 우릴 정의 내린단 말이야? 퉁명스러운 울음을 흘리곤 브루니는 망토 속으로 모습을 쑥 감춘다.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내쉬며 엘사는 문득, 이처럼 기억이 계속 사라진다면 과연 언제까지 자신을 ‘엘사’라고 불릴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올라프를 잊어버리고, 크리스토프를 잊어버리고, 마침내, 그런 날은 상상조차 하기 싫지만, 안나조차 잊게 된다면. 그 때도 나는 나를 ‘엘사’라고 칭할 수 있는 걸까? 혹은 엘사의 껍질만 가진 다른 무언가라고 불려야 하는 걸까.



망토 속에서 화들짝 놀란 브루니가 고개를 쳐든다. 느닷없이 책방 저 깊은 곳에서부터 진한 절규가 귀청을 찢었다. 잠시 가게를 구경하고 있겠다며 사라진 카산드라가 뒤늦게 떠오른다. 책을 다시 원래 있던 자리에 황급히 꽂아 두곤 엘사는 비명을 좇아 어둠 속으로 파고들었다. 종이의 숲 가운데 홀로 떨어진 등잔불이 유령처럼 그녀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흐릿한 불빛을 타고 오르골 선율이 시냇물의 흐느낌처럼 흩어진다.



“애초에 당신이, 적어도 자식을 버리지만 않았어도, 내가 문스톤으로 코로나를 파괴하는 일 따윈 없었겠지!”



뾰족한 석순에 관통당한 것처럼 마룻바닥에 커다란 구멍이 뻐끔하게 뚫려 있고, 그 너머 책방의 가장 깊숙한 곳, 진열장을 따라 세 줄로 가지런히 나열된 오르골들이 보인다. 카산드라는 그 진열장 앞에 서서,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혼자 있는 힘껏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카산드라?”



비틀거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책꽂이에 간신히 기대 선 카산드라를 엘사는 걱정스럽게 불러 보았다. 그제야 카산드라는 그녀를 한 번 돌아본다. 부유스름한 어스름과 섞인 카산드라의 눈은 얼핏 평소와 다름없이 혼탁하고 딱딱하다. 하지만 제아무리 어두운 암흑 속이라도 부옇게 터진 노른자처럼 경계가 불투명하고 불안하게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엘사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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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델 부분 쓰면서 들은 노래 mother knows best

뭐 고델 메인곡이니 당연하겠지만......

진짜 기분나쁘게 잘 부른 노래라 생각함



다음화는 토요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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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89197 근데 가끔 아저씨들이 쳐다보고 약간 웃으시는 거 [4] 묘기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1:05 43 0
5489196 엘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시 프로즌3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0:22 11 0
5489195 대 엘 시 프로즌3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0:22 11 0
5489194 1억내고 30%확률로 10억받기 (도전기회 단 한번) vs 그냥 살기 [3] 천연효모식빵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13 39 1
5489193 전 힙플 있는디ㅎ [2] ㅇㅇ(221.152) 05.13 31 0
5489192 진짜 ㅇㅇ(222.107) 05.13 20 0
5489191 스탠리 텀블러 사구싶다 [1] 아렌델시민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13 34 0
5489190 돼지갈비가 먹고싶은 밤 이네요 ㅇㅇ(223.39) 05.13 19 0
5489189 대관시 ㅇㅇ(118.235) 05.13 15 0
5489188 저녁 혼밥은 육개장 ㅇㅇ(118.235) 05.13 16 0
5489187 안-시 ㅇㅇ(118.235) 05.13 16 0
5489186 앙시이이이 아렌델시민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13 15 1
5489185 엘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시 [1] 프로즌3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13 29 3
5489184 엘-시 [1] ㅇㅇ(118.235) 05.13 27 1
5489183 인스타에 김하루 이 분은 존함부터 이쁘신 [3] ㅇㅇ(221.152) 05.13 85 0
5489182 지각 엘-시 [1] ㅇㅇ(183.107) 05.13 34 0
5489181 인생이 영화네요 [1] 프로프갤러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13 31 0
5489180 내 인생을 어떡하면 좋겠냐?.txt [2] ㅇㅇ(106.101) 05.13 76 2
5489179 방금 사바하 봤다 큰일이다 [1] ㅇㅇ(118.235) 05.12 44 0
5489178 전손블루 맨들맨들 광빨 뒤진다에~~~ [1] Frozen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12 33 0
5489177 오늘 2연패하고 걍 끔 [1] ㅇㅇ(221.152) 05.12 41 0
5489176 코성탈출 ㅅㅂ 좆도 내용도 없는 프롤로그 ㅈㄴ 오래보여줌 ㅋㅋ Frozen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12 39 0
5489175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 ㅇㅇ(118.235) 05.12 34 0
5489174 제가 저런걸 쓰겠나요 천연효모식빵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12 44 0
5489173 안진짜 ㅇㅇ(222.107) 05.12 31 0
5489172 늦 안-시 ㅇㅇ(183.107) 05.12 28 0
5489171 안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시 프로즌3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12 25 0
5489170 대 안 시 프로즌3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12 22 0
5489169 이새끼 천효식아님 ㅅㅂ? [7] 쥬디홉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12 97 0
5489168 이겼삼 ㅅㅅㅅㅅㅅㅅㅅㅅㅅㅅㅅㅅㅅㅅㅅ [5] *JungNu*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12 49 0
5489167 코구 입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 *JungNu*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12 35 0
5489166 엘-시 엘-시 ㅇㅇ(118.235) 05.12 29 0
5489165 엘-시 엘-시 엘-시 ㅇㅇ(118.235) 05.12 27 0
5489164 와씹 AI 접으려고 하니까 시비타이 개선되네 [2] ㅇㅇ(222.107) 05.12 8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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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89160 목말라 [1] 아렌델시민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12 48 0
5489159 잠이 안온다 푸갤라미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12 3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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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89153 피어노 [3] lduna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11 56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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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89148 이겼삼 ㅅㅅㅅㅅㅅㅅㅅㅅㅅㅅㅅㅅㅅㅅㅅ *JungNu*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5.11 28 0
5489147 블루아카이브는 좀 패야하는게 맞음 [3] ㅇㅇ(175.199) 05.11 67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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