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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갤문학/야구] 친선경기

ABC친구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7.05 22:21:03
조회 425 추천 27 댓글 31

 몇 번의 험한 경기를 겪은 이후로 안나는 외국의 대표팀이나 실업야구팀과 친선전을 치르는 것을 극도로 기피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그런 경기라도 하지 않으면 경기를 해주겠다는 야구팀이 없으니 꾸역꾸역 전지훈련 온 다른 나라 야구팀들을 적당히 상대해주었지만, 그러다가 두어 번을 거의 패싸움 직전까지 가버린 이후로는 이제 좀 질렸다. 사실 야구팀들 사이에서 크로커스 야구단의 위치는 굉장히 애매했다. 수비진 내에서 서로 번갈아가며 투수를 맡아야 할정도로 선수도 부족했고, 그 부족한 선수들 중에서도 두세명은 아예 수비 불가 판정을 받을 정도로 질적으로도 낮았지만, 개중 가장 뛰어난 선수들, 예를 들어 안나나 크리스토프는 공수 양면에서 동네야구수준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우수한 퍼포먼스를 펼쳤다. 그래서 다른 동네의 아주 난장판인 동네야구팀들과 경기를 하기에는 수준이 조금 높았고, 그렇다고 정식 고등학교 야구팀이나 실업야구 팀을 상대하기에는 수준이 다소 낮았다. 그런 상화에서 간간히 들어오던 해외 실업야구팀들의 경기 제안까지 뻥뻥 차버리자 아렌델 크로커스 입장에서는 도저히 할 수 있는 게임이 남지를 않았다. 공을 만지질 못하니 좀이 좀 쑤시긴 했지만, 이 참에 각자 본업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던 안나에게 외국 사는 오랜 친구의 편지는 사뭇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녀는 그새 라푼젤이 자기나라에서 동네야구팀을 꾸리고 있었는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라푼젤하고 경기를 한다면야 별 문제가 없겠지, 하는 심정으로 안나는 흔쾌히 코로나 야구단을 아렌델로 초대했다. 당연히 크로커스 쪽이 홈팀이었고, 1회초는 코로나의 공격으로 시작된다.


  "오늘은 내가 처음부터 던져? 허니마린 말고?"


  크리스토프가 투수용 글러브를 손에 끼며 안나에게 묻는다. 안나가 크리스토프의 어께를 툭툭 두드리며 2,3루 사이로 이동할 준비를 한다.


  "상대도 시작부터 플린 라이더가 나올건가봐. 대충 합을 맞춰줘야지. 쟤네가 우리처럼 투수운용하는 걸 제대로 받아들여줄지도 모르겠고, 그냥 오늘은 시작부터 자기가 던져. 괜찮지?"


  "안괜찮을건 또 뭐야."


  크리스토프가 마운드를 벅벅 발로 차며 홈플레이트를 노려본다. 엘사는 벌써 자기 의자를 준비해두고 그 위에 털석 주저앉았다. 감독겸 주장인 라푼젤이 포수가 의자 위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 심판에게 뭐라고 어필해보지만 엘사의 얼음장같이 차가운 눈초리를 받은 심판이 잔뜩 겁을 먹고 라푼젤을 다시 덕아웃으로 돌려보낸다. 라푼젤은 포수가 의자 위에 앉아도 된다는 이 나라만의 예외규정이 상당히 의아하지만, 일단 게임을 하긴 해야 할테니 얌전히 다시 덕아웃으로 들어간다. 크리스토프는 전날 안나가 준 코로나 타자들에 대한 정보를 대충 읽어보았다. 1번 타자는 팀의 에이스 투수이자 강타자인 유진 피츠허버트, 즉 플린 라이더다. 힘, 컨택, 주루, 기초체력,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운동신경의 소유자인 유진은 선출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실력을 지닌 신생팀 코로나의 주축이다.

  포수를 맡고 있는 엘사는 크리스토프에게 그리 많은 선택지가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크리스토프가 변화구를 아예 던질줄 모른다, 그렇게 말하면 좀 억울한 얘기긴 하겠지만, 엘사가 유진에 대해 들은 바가 확실하다면 안나가 던지는 변화구의 절반 수준으로도 위협적이지 않은 크리스토프의 어설픈 커브는 이 남자에게 걸리면 그냥 치기좋은 똥볼일 뿐일 것이다. 결국 이 남자를 상대로는 직구 원피치다. 문제는 로케이션. 팔이 길고 운동신경이 좋다 했으니 그리 빠르지 않은 크리스토프의 직구라면 어지간한 코스는 다 쳐낼 것이다. 선두타자 볼넷은 피해야한다고들 하지만, 그건 어느정도 공에 자신이 있는 야구선수들끼리나 하는 얘기고, 크리스토프 같은 적당한 속도의 똥볼러라면 잘못 맞아나가서 장타를 주느니 차라리 볼넷을 각오하고 존 바깥쪽에서 이리저리 빼보는 것이 더 합리적일 수도 있다.


  '바깥쪽, 쭉 빼서.'


 시작부터  피해가는 것 같아서 크리스토프는 기분이 좋지 않다. 크리스토프는 평소에 시작부터 피해가는 승부를 하는 데에 익숙하지 않다. 그야 뭐 평소엔 허니마린이 오프너 비슷한 느낌으로 상위타선을 대신 상대해주었기 때문에 크리스토프가 주로 처음에는 하위타순을 만나는 경우가 흔했기 때문에 마음편하게 승부를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오늘은 조금 경우가 다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일지도 모른다.

  크리스토프는 엘사가 요구한 코스로 평범한 속도의 직구를 하나 꽂아넣는다. 살짝 날아오는 공을 흘끔 살펴보던 유진이 주저하지 않고 배트를 낸다. 유진이 빠따를 힘껏 잡아당기는 순간에야 크리스토프는 자기가 던진 초구가 약간 가운데로 몰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어?"


  크리스토프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으며 뒤로 돌아선다. 유진이 제대로 당겨친 타구는 그대로 좌측담장을 넘어간다. 유진은 화려하게 배트를 집어던진다음 당당하게 다이아몬드를 돈다. 초구를 던지자마자 그대로 홈런을 얻어맞은 크리스토프는 완전히 정신이 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유진을 따라 시선을 옮긴다. 엘사가 자리에서 일어서 짧은 한숨을 푹 내쉰다. 안나를 제외한 다른 야수들도 기운이 쭉 빠진 표정이지만, 유격수 위치의 안나는 별달리 내색하는 기색이 아니다.


  "계속 그렇게 던져."


  안나가 크리스토프에게 말을 툭 건낸다. 크리스토프가 얼굴을 찌푸리며 23유간을 쳐다본다.


  "지금 비꼬는 거야?"


  "아냐, 공 괜찮았어. 로케이션이 좀 몰렸지? 근데 졔네 팀에서 쟤가 제일 잘 쳐. 쟤 아니면 저렇게도 못치니까, 계속 그런 공만 던지면 될 거야."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자기보다 공을 훨씬 잘던지는 아내 안나가 저렇게 말하니 뭔가 조금 기분이 묘하다. 격려하는 것 같기도 한데, 놀림받거나 무시당하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도 든다. 크리스토프는 일단 그런 일에는 신경쓰지 않기로 한 다음 타석에 선 2번타자에 집중한다.

  2번 타자는 카산드라. 안나가 준 자료에는 여성선수임에도 불구하고 어지간한 수준의 남성에는 맞먹는 수준의 펀치력을 지녔다고 적혀있었다. 그렇다고 막 장타자의 기질을 지닌 것은 아니고 테이블세터진에 어울리는 타격센스와 뛰어난 주루센스 쪽에 좀 더 방점이 찍혀있긴 했다. 말하자면 아렌델 쪽의 2번타자인 안나와 무척이나 유사한 스타일의 선수인 모양이었다.


  '한가운데, 직구.'


  엘사가 주문한다. 그것이 효과적일 것이라는 계산 하에 지시한 리드라기 보다는, 아무래도 크리스토프의 멘탈을 되잡아주기 위해 일단은 공을 제대로 던지라는 가벼운 목표만 주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크리스토프도 불만은 없다. 마침 한가운데 시원하게 공을 한 번 쳐박아보고 싶던 참이다.


  '딱'


  정확하게 한가운데로 향한 직구가 카산드라의 배트에 정타로 적중한다. 하지만 제대로 맞은 타구는 크리스토프의 정면으로 날아와 투수 글러브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원아웃. 엘사가 고개를 갸웃한다. 아무리 치기 좋은 공이 들어왔다지만 방금 전 카산드라의 타격 자세는 지나치게 적극적이었다. 생각해보면 유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초구공략이 코로나 덕아웃쪽에서 지시로 나오기라도 한 것 같다. 크리스토프가 볼넷을 줄 때에 비해 난타를 얻어맞기 시작했을 때 더 심하게 흔들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 같다. 엘사가 미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코로나의 3번 타자이자 팀의 감독 겸 선수인 라푼젤이 헬멧을 눌러쓰고 프라이팬을 든 채 타석에 들어선다. 엘사가 화들짝 놀라 라푼젤을 올려다보자, 라푼젤도 자신이 무엇을 실수했는지 금방 깨닫고 프라이팬을 뒤로 집어던진 다음 나무 방망이를 집어든다. 아무래도 스윙으로 몸을 풀 때 야구방망이 대신 저런 물건으로 스윙감각을 잡아보는 모양이다. 뭐, 사람마다 취향 차이가 있는 법이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기로 한다.


  엘사는 이번에도 상대가 초구를 공략하는지 확인한 다음 그 결과를 토대로 상황에 따라 크리스토프의 똥볼커브도 적절히 섞어보는 볼배합을 지시해볼 생각이다. 크리스토프의 초구 직구가 몸쪽으로 꽉 차게 들어온다.


  '딱'


  라푼젤이 힘차게 배트를 휘둘러 크리스토프의 초구를 파울로 만들어낸다. 아무래도 타이밍이 살짝 빨랐던 모양인지 그대로 파울라인을 넘어간다. 이쯤되면 크리스토프도 바보는 아니다. 상대의 배팅은 오늘따라 무척이나 적극적이다. 이런날엔 쉽게쉽게 승부하려다간 무조건 얻어터질 것 같다. 엘사는 우선 라푼젤이 크리스토프의 똥볼커브에는 어떻게 승부할지 확인해봐야겠다는 생각을 갖는다. 크리스토프가 엘사의 지시에 따라 바깥쪽 높은 코스에 커브를 집어넣는다.


  '딱'


  별 다른 타이밍 수정없이 라푼젤이 크리스토프의 커브를 컨택해낸다. 아무래도 놀라운 반사신경으로 공의 궤적을 직접 눈으로 보고 친 것 같은 느낌이다. 타구는 그대로 2,3루간을 뚫고 좌익수 라이더 앞으로 데굴데굴 굴러간다. 3루수인 매티어스는 공을 잡으러 움직일 의지가 없고, 안나는 조금 쫒아가보다가 그만 뒀다. 라푼젤은 안정적으로 걸어가듯이 1루에 들어간다. 크리스토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1루에서 보호구를 풀고 있는 라푼젤을 쳐다본다. 라푼젤. 달리기 자체가 빠르다고는 할 수 없지만 주루센스는 팀 내에서 유진 다음으로 탁월한 편이라고 들었다. 직구 최대구속이 120km밖에 안나오고, 커브 구속은 완전 똥볼인 크리스토프를 상대로라면 2루, 혹은 이어서 3루까지도 훔쳐볼 수 있는 능력의 주자다. 엘사는 4번 타자인 거구 블라디미르를 상대할 때는 잠시 얼음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있기로 마음먹는다. 유격수 위치의 안나가 흘끔 엘사의 눈치를 본 다음 3루쪽으로 한 걸음 살짝 이동한다. 엘사가 이번 타석에서 도루 저지를 시도할 것을 예측하고 라푼젤의 움직임을 일부로 이끌어내볼 생각이다. 크리스토프는 1루 쪽을 흘끔 쳐다본다. 라푼젤의 리드폭은 넓지도, 좁지도 않지만 무게 중심축이 진루 쪽에 몰려있는 것만은 확실하게 느껴진다. 


  견제를 할 생각은 없다. 어차피 올라프가 견제구를 잡아서 라푼젤에게 재빠르게 태그할 거란 기대 자체가 없다.지금  라푼젤은 초구에 뛴다. 오늘 코로나의 공격적인 배팅과 지금 라푼젤의 모습을 종합해보면 그런 느낌이 팍 온다. 엘사의 주문은 한가운데 가장 빠른 직구. 의자에서 엉덩이를 살짝 띄고 있는 것을 보면 지금 엘사도 라푼젤이 초구에 뛴다는 것을 직감했다. 물론 오늘의 공격적인 코로나의 배팅을 보면 힛앤런이 나올 수도 있고, 그런 경우 상대의 4번타자를 상대로 초구 한가운데 직구를 쑤셔넣는 건 조금 위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엘사가 읽은 파일에서 블라디미르는 덩치가 크고 힘은 좋지만 주루툴과 컨택 센스는 최악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도루자를 잡는다면 확실히 분위기가 바뀐다. 상대가 헛스윙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쯤 한가운데에 꽂아넣는다고 손해볼 것은 크지 않다. 


  준비자세, 세트포지션. 크리스토프가 엘사의 미트를 향해 한가운데 직구를 쑤셔넣는다. 블라디미르가 붕소리와 함께 빠른공을 크게 헛친다. 크리스토프가 투구하는 것과 동시에 라푼젤이 스타트를 끊는다. 2루수 허니마린이 약간 1루쪽으로 치우쳐져 있어서 2루는 비어있다. 그 사이, 라푼젤을 도발해볼 생각으로 2루에서 살짝 멀어져있던 안나가 라푼젤과 거의 동시 타이밍에 2루쪽으로 스타트를 끊는다. 도루에 대비해 베이스커버를 들어가는 쪽은 2루에 더 가까운 허니마린이 아니라 순발력이 좋아 포구와 태그 실력이 더 우수한 유격수 안나 쪽이다.


  엘사가 공을 받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서 텅 비어있는 2루에 송구를 뿌린다. 안나가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손을 뻗어 2루쪽으로 날아온 공을 붙잡은 다음 슬라이딩하듯이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준비하고 있는 라푼젤에게 달려든다. 그런데 슬라이딩 타이밍이 조금 빨랐다. 안나가 쓰러지듯이 달려오는 것을 알아차린 라푼젤이 슬라이딩하려던 자세를 멈추고 그대로 서서 달린다. 그리고 안나가 기어코 넘어지듯 태그를 시도한 그 순간,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 안나의 글러브를 뛰어넘고 2루 베이스를 밟는다.


  "세잎!"


  태그가 되질 않았으니 당연히 세잎이다. 안나가 허탈한 표정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홈을 향해 공을 쓱 던진다. 엘사도 안나못지 않게 허탈한 표정이고, 크리스토프는 짜증난 표정을 숨기기 위해 땅을 바라보며 발로 땅을 벅벅 긁고 있다.


  결국 1회초는 크리스토프가 3실점을 한 이후에 간신히 세번째 아웃카운트를 잡으며 마무리된다. 1회말은 아렌델의 공격. 투수인 유진 피츠허버트가 마운드에 올라와 포수인 블라디미르와 합을 맞춘다. 


  "이얏호!"


  유진이 1번타자로 나온 올라프의 코를 정확히 맞추며 소리지른다. 유진도 어차피 올라프가 고통같은걸 느끼지 못하는 걸 잘 알고 있고, 작은 몸집을 이용해 사사구로 출루하라고 내보낸 타자인 걸 잘 알고 있다. 이런 타자를 상대로는 그냥 몸에 맞춰 내보내주는 게 편하다. 문제는 2번타자인 안나부터다. 안나는 일단 유진의 공을 슬쩍 살펴보기부터 하려고 한다. 


  '퍽'


  초구 날카로운 직구가 블라디미르의 미트에 꽂힌다. 존에서 살짝 벗어난 볼이긴 했지만, 구속은 안나의 직구만큼이나 빠르다. 이정도면 동네야구계에서는 파이어볼러 취급 받을 수 있는 구속이다. 안나는 타석에서 물러서 몇 번 배트를 휘둘러본 다음 다시 타석에 들어선다. 안나의 배트스피드로 저 공을 제대로 맞추려면 타이밍을 조금 빨리잡아야할 것 같다. 


  '퍽'


  2구는 훅 떨어지는 포크볼이다. 포크와 직구의 구속 차이가 심각하다. 이런 경우에는 변화구와 직구를 같이 머릿속에 넣고 있다가는 그 어떤 것도 칠수가 없다. 방금 스윙연습을 하면서 직구쪽에 타이밍을 맞츨 준비를 했다. 1-1 볼카운트. 한 번은 헛스윙을 해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배트를 몸 가까이 잡아당기고 마운드를 노려본다.


  직구다.


  '딱'


  안나가 몸쪽으로 들어온 직구를 정확한 타이밍에 당겨친다. 그대로 좌익수 카산드라의 키를 넘긴 공은 펜스까지 굴러간다. 정확한 2루타 코스지만, 안나가 2루까지 가기엔 앞을 가로막고 있는 똥차 올라프의 주력이 너무 형편없다.

  무사 주자 1,2루. 코로나의 맹공이 끝난 이후에 곧바로 아렌델에 반격의 기회가 돌아왔다. 타석에는 3번타자 엘사가 들어선다. 안나에게 이끌리다시피 이 팀에 들어왔고, 타격재능이 별로 뛰어난 편이 아님에도 엘사가 클린업트리오에 들어온 이유는 크리스토프와 안나를 제외하면 팀 내에 엘사만한 선구안과 주루 센스를 보여주는 선수도 없기 때문이다. 50살 다되어 가는 매티어스 장군이 국왕 명령으로 억지로 팀 경기에 끌려와 5번타자이자 3루수를 보는 팀에서는 엘사만한 선수라도 감지덕지로 여기고 상위타순에 배치할 수밖에 없다.


  '볼.'


  엘사가 몸쪽으로 강하게 들어오는 직구에 흠칫 뒤로 물러선다. 오늘 유진은 단 한 번도 초구를 스트라이크로 잡지 못했지만, 얼굴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한 여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다.


  '볼넷으로 진루하자. 정 안되면 엉덩이라도 들이밀어서 맞고 나가야지.'


  엘사가 적당히 중얼거리듯 생각한다. 유진의 2구는 엘사의 바람과는 거리가 멀게 꽉찬 스트라이크로 들어온다. 아마도 유진은 엘사가 자신의 직구에 대한 대응력이 전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해주면 엘사 입장에서는 조금 고마울 수도 있다. 엘사의 직감은 유진이 엘사와 상대하는 내내 강속구로만 상대할 거라고 이야기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히팅 타이밍을 맞춘 것을 티내서는 안 된다. 이번 공에서는 적당히 늦는 타이밍에 헛스윙해 타이밍을 맞추지 못한다는 확신을 준 다음, 4구에 결정구로 들어오는 직구를 정확히 노려서 친다. 머릿속에 계산이 섰다. 엘사는 여차하면 엉덩이에라도 맞고 나가려던 종전의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제대로 타격자세를 잡는다.

  3구는 역시 직구. 엘사는 공의 궤적을 대충 확인한 다음 늦는 타이밍에 배트를 휘두르며 빙그르르 돈다. 예술적인 스핀에 1루주자 안나가 폴짝 뛰며 박수를 짝 친다.


  "언니 방금 어제 스케이트 탈 때보다 더 화려하게 돌았어!"


  안나가 외친다. 오늘따라 안나가 하는 말은 격려인지 핀잔인지 도발인지 좀체 구분이 가질 않는다. 엘사는 몸의 중심을 잡고 배트를 힘껏들어올려 타격자세를 취한다. 이제 직구타이밍은 눈에 보인다. 유진이 와인드업을 한 이후 타이밍은...


  '붕'


  결정구는 엘사가 예상한 대로 직구다. 하지만, 유진은 공을 한참 뺄 생각이었는지 공은 엘사의 방망이가 닿지 않는 곳으로 날아가버렸고, 결국 엘사는 타이밍만 맞추고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난다. 최악이 결과다. 엘사가 타이밍을 맞춘 것을 알아차렸을 때니 플린 라이더는 다음 타석부터는 순순히 엘사에게 직구만 던져주지 않을 것이고, 이번 타석도 실패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엘사는 헬멧을 벗고 고개를 부르르 흔든 다음 실망한 표정으로 땅바닥을 바라보며 덕아웃으로 돌아간다. 4번타자 크리스토프가 맹렬한 기세로 배트를 휘두르며 타석에 들어설 준비를 한다. 1회초에 얻어맞은 초구 홈런을 반드시 복수해주겠다는 맹렬한 의지가 느껴진다. 


  초구. 초구를 노린다. 크리스토프는 유진에게 자신이 느꼈던 당혹감을 그대로 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크리스토프가 유진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와인드업, 피치.


  '틱'


  틱? 공이 배트에 맞는 소리가 좋지 않다. 유진의 휘어들어오는 커브가 크리스토프의 배트 상단을 정확히 떼렸다.


  '제발 파울이어야 해!'


  크리스토프가 공을 때리는 순간에 생각하지만, 빗겨맞은 공은 야속하게도 페어존에 떨어져 3루수 라푼젤 앞으로 데구르르 굴러간다. 라푼젤은 안정적으로 3루 베이스를 밟은 다음 이미 안나가 전력질주로 달려가고 있는 2루 베이스를 포기하고 곧장 1루로 공을 던진다. 1루수 울프가 공을 잡아 포스아웃시키며 더블플레이, 이닝종료. 2루에 슬라이딩하며 들어갔던 안나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안나야 뭐 별 생각 없이 상황이 웃기니 웃은 것이겠지만, 크리스토프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한 채 그대로 덕아웃으로 돌아가 투수글러브를 낀다. 다른 야수들도 수비할 준비를 마치고 2회초를 맞는다. 


  2회초 크리스토프는 추가실점을 허용하지 않지만, 2회말의 아렌델 타선도 점수를 내지 못한다. 3회초 노아웃, 크리스토프는 다시 한 번 타순이 돌아온 유진을 상대한다. 1회에 맞았던 홈런의 잔상이 그에게는 아프게 남아있다. 유진 또한 그 홈런의 감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커브 써볼래?'


  엘사가 제안하는 사인을 보낸다. 크리스토프가 고개를 끄덕인다. 유진이라면 크리스토프의 커브는 눈으로 보고도 치겠지만, 일단 맞아도 장타코스가 제대로 안나가도록 몸쪽 낮은 곳에 커브를 욱여넣어볼 생각이다. 초구를 파울로 유도해내 스트라이크 하나라도 잡고 가는 것이 이번 공의 목적이다.

  와인드업, 피치.


  '퍽!'


  경쾌한 소리와 함께 크리스토프의 공이 유진의 엉덩이에 들어가박힌다. 크리스토프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짓지만, 혀를 쭉 내민 채 미안하다는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 유진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마운드를 향해 손가락질 한다.


  "야, 너, 임마 내가 아무리 거르고 싶어도..."


  "아냐, 거르려다가 그런게 아니라 진짜 실순데."


  "에게에게? 솔직히만 말해봐, 그럼 나도 뭐라 안해."


  유진이 무의식적으로 마운드쪽으로 발걸음을 한 걸음 옮긴다. 그 순간, 코로나 벤치쪽에서 갑자기 야단이 난다. 


  "유진이 마운드로 간다!"


  "벤치 클리어링이야? 우리 해본 적 없잖아!"


  "몰라! 일단 나가고 봐!"


  무식하게 힘만 쎈 경범죄자 출신들로 구성된 코로나의 야구팀은 상황을 맥락적으로 파악하기보다는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보는 걸 좋아한다. 아무래도 유진이 공에 맞고 마운드쪽으로 몸을 돌린 것만 보고 벤치클리어링이라 결론을 내리고 날뛰려는 것처럼 보인다.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라푼젤과 카산드라는 벤치의 극단적인 반응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지만, 그 두 사람이 뭔가를 해보기도 전에 이미 경기장으로 뛰쳐나가고 있다.


  "뭐야? 뭔데?"


  안나를 비롯한 아렌델의 야수들도 깜짝 놀라 마운드쪽으로 웅성웅성 몰린다. 유진이 화들짝 놀라 뛰쳐나온 동료들을 막으려 하지만, 이미 코로나 야구단의 팀원들은 경기장으로 뛰쳐나와... 멀뚱멀뚱 서로를 쳐다보고만 있다.


  "다 나왔어! 이제 뭐하면 돼?"


  "출석점호?"


  "벤치클리어링이 그런 거 하는 거야?"


  라푼젤이 뒤늦게 경기장으로 뛰어나와 상황을 수습해보려 하지만, 아렌델과 코로나의 선수단 양측 모두 서로에게 설명을 요구하는 표정으로 멀뚱거리고 서 있을 뿐 누가 먼저 상황을 정리해보려 하질 않는다. 카산드라는 느릿느릿 경기장으로 걸어나와 3루수인 매티어스와 왕실 경비대로서의 삶에 대한 잡담을 나누고 있고, 유진은 크리스토프와 가벼운 말다툼을 나누고 있다.


  "아니 그러게 왜 일부로 나를 맞춰서 애들을 자극해? 느린 볼로 엉덩이 맞춰준 건 배려라고 쳐도..."


  "아, 일부로 맞힌 거 아니라니까? 몸쪽 꽉찬 커브가 주문이었어."


  "우리끼리는 자동고의사구 룰이 없나?"


  "룰이야 없으면 우리 맘대로 하면 돼지. 내가 내 와이프도 아니고 수틀린다고 사람을 일부로 맞히겠어?"


  "잠깐, 뭐라고?"


  안나가 잔뜩 찌푸린 표정을 지은 채 크리스토프의 말에 끼어든다. 크리스토프가 자기 입을 손으로 막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아니 그게..."


  "자기 지금 날 무슨 깡패처럼 표현한거야?"


  "어? 아니 그런게 아니라 그런 적이 있긴 하니까..."


  "그래서 그게 이번 일에 굳이 예시로 들어야 할 만큼 막 나쁜 짓을 한 거냐고. 내가 괜히 그랬어? 내가 일부로 맞힌 놈들은 다..."


  "아니 그런 얘기를 하는게 아니라 자기가 일부로 맞힌 사람들이 있는 건 사실이잖아."


  "그래서 그게..."


  벤치클리어링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돌아간다. 멀뚱멀뚱 자리에 서 있던 선수들은 곧 자신들이 이제 이 두 사람의 부부싸움을 말려야 마저 경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오늘 솔직히 자기 좀 불만이 많았지? 오늘 날 보는 표정이 고깝지가 않더라고."


  "아니 그건 자기가 좀 말을 툭툭 내뱉는게 오늘따라 이상하게..."


  "뭐, 격려해줘도 난리야? 그냥 나 입다물고 조용히 있을까? 그래?"


  라푼젤은 이제 자기 힘으로 상황을 수습하는 것을 포기했다. 양팀 선수들이 모두 안나와 크리스토프 주위를 빙빙 둘러싸고 있지만, 누구도 끼어들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저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다. 카산드라는 계속 매티어스에게 툭툭 말을 건내보지만, 매티어스가 왕가 부부의 말싸움에 정신이 팔려 제대로 답해주지 않자 포기하고 투수와 유격수의 말다툼을 지켜본다.


  "그러니까 쟤넨 뭔 부부간에 같이 팀을 짜서 야구를 하겠다고 난리를..."

 

  엘사가 포수마스크를 벗으며 중얼거린다. 엘사 옆에 서 있던 라푼젤이 그 말을 듣고 어깨를 으쓱한다.


  "그런 말을 왜 저 들리게 해요?"


  "고의는 아니었어. 그런데 솔직히 네 남편이 안나 남편보다 잘해. 쟤네야 뭐 싸워도 오래가진 않거든? 근데 한 번 싸울때마다 팀내 분위기가 아주 복잡해진다니까. 지난번에는..."


  "됐어, 투수글러브 내놔. 깡패식 투구가 어떤 건지 보여줄테니까."


  안나가 주위의 시선을 부담스럽게 느끼기 시작하며 말했다. 크리스토프는 순순히 안나에게 투수 글러브를 내준 다음 내야수 글러브를 건내받는다.


  겨우겨우 경기는 재개된다.


  그날 안나는 분노의 피칭으로 8회까지를 무실점으로 틀어막은 다음 직접 4안타 2타점 경기를 펼치며 마치 깡패처럼 경기를 지배했다. 안나의 호투와 맹타 하에 경기를 6대 3까지 역전시켰던 아렌델은 9회초에 안나와 교체되어 올라온 허니마린이 한이닝 8실점을 하며 기적같은 역전패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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