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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Thaw (下)

클럼지클레이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4.02.22 05:12:05
조회 2729 추천 70 댓글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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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上 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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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모두들 어디갔어? 파비 할아버지는?”

안나가 눈가를 비비며 물었다.

“다들 쉬러 간 것 같아. 파비 할아버지는 무언가를 가지러 간다고 하셨었는데…….”

엘사가 말하는 도중 때마침 언덕 위에서 파비가 모습을 나타냈다.

“오, 안나 공주님. 깨어나셨군요.”

파비가 언덕에서 뛰어내리며 안나의 얼굴을 살폈다.

“과거의 기억이 썩 즐겁진 않으셨나봅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래요. 하지만 꼭 필요한 일이었죠… 그런데, 손에 들고 계신건 뭐죠?”

파비의 왼손에는 은은하게 비취색으로 빛나는 반투명한 구슬이 들려있었다.
안나의 물음에 파비가 말없이 오른손의 검지로 구슬을 가볍게 두 번 두드렸다. 그러자 구슬 속에서 녹색 기류가 빙빙 돌기 시작하더니, 조그마한 회오리를 형성해내었다.
그와 동시에 은은하던 비취색이 타오를듯이 진해지더니 형광색에 가깝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 신비로우면서도 아름다운 광경에 엘사와 안나는 넋 놓고 구슬을 바라보았다.

“이 구슬은 렘스톤(Remstone)이라고 불리는 돌의 일부입니다. 보통은 기억을 저장하는 용도로 사용합니다만… 다른 용도로도 활용할 수 있죠.”

파비가 왼손에 구슬을 든 채로 가까이 오라는 듯 엘사와 안나를 향해 오른손을 까닥였다. 엘사와 안나는 구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발걸음을 옮겼다.

“이 구슬에 손을 같이 대시면 현재까지의 모든 기억과 느꼈던 감정을 서로 교류, 교감하실 수 있습니다.”

파비의 말에 자매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한명은 장난기 넘치는, 다른 한명은 애틋한 눈빛을 띄고 있었지만 둘이 생각하는 바는 같았다. 서로간에 쌓였던 감정을 해소할겸, 오해도 풀 수 있다는 생각.
둘의 손이 천천히 파비의 손에서 백열하듯이 빛나는 구슬을 포개어 감싸기시작했다. 이윽고, 둘의 손이 구슬을 완전히 감싸쥐자 자매의 머릿속이 동시에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물들기시작했다.



─────



똑똑똑, 경쾌한 노크소리와 함께 앳된 안나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언니, 같이 눈사람 만들자!”

가슴 아플정도로 활기찬 목소리였다. 하지만 안된단다, 안나. 나는 세상과 격리되어야 할 괴물이야. 아무도 제어할 수 없는…….
마음속에서 우울한 생각이 고개를 들고 일어서자 주변 사물들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제발, 언니! 밖에 나가서 같이 놀자아!”

안나, 제발.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둬. 제발…….

통제할 수 없는 힘이 발끝에서부터 뻗어나와 방을 서서히 얼려가기 시작했다.
침착하자, 엘사. 마음을 다 잡아야해.

“저리가, 안나.”

나도 모르게 차가운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말을 내뱉자마자 후회하는 마음으로 가득찼지만, 한번 내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었다. 밖에서 풀죽은 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았어, 안녕…….”

안나의 걸음소리가 멀어지자, 마음속이 텅빈 것 같은 공허함이 밀려들어왔다. 하지만 이 편이 나았다. 서리가 내려앉았던 주변 사물들이 다시 제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말자. 책장에서 손에 잡히는대로 책을 꺼내들며 최면을 걸듯이 중얼거렸다. 우연히 꺼내든 책의 제목은 '기하학 입문서'였다.
책을 펼치자 여러가지 형이상학적인 도형들과 복잡한 공식들이 나를 맞이해주었다. 책의 내용은 무척이나 복잡했지만, 복잡한만큼 집중하기엔 더할나위없이 좋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너무 오랫동안 쪼그려 앉아있어서인지 온 몸이 찌뿌둥했다. 살포시 읽던 책을 덮고 기지개를 폈다. 순간, 창문쪽에서 꺄르르하는 웃음소리가 바람에 실려 들어왔다.
안나의 목소리였다. 마음속에서 호기심이 일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뭔가에 이끌리듯이 창가쪽에 다가갔다.
온통 새하얀 세상이었다. 그리고 그 세상의 가운데엔 안나의 붉은 머리가 세상과 대비되어 더욱 돋보이고 있었다. 안나가 하얀 세상의 중심에서 낑낑대며 열심히 눈덩이를 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안나는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



끙끙, 언니가 도와주면 훨씬 쉬울텐데. 눈덩이를 굴리며 생각했다. 내가 언니에게 무엇인가 큰 잘못을 했었나? 그토록 친했던 언니는 각 방을 쓰게된 후부터 마치 사람이 변한 것 같았다.
언니에 대한 생각을하며 손이 가는 데로 눈덩이를 굴렸더니 내가 만들려고 했던 크기보다 훠얼씬 커져버렸다.

“이크! 반 정도만 됬어도 충분한데.”

잉……. 이걸 어쩌지? 내가 너무 커다래진 눈덩이를 앞에두고 뚱하니 고민하고 있자 갑자기 뒤에서 왠지 모를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시선이 느껴지는 방향을 바라보았더니 창문 안에 있던 무언가가 쏙하고 숨어버렸다. 어, 저긴 엘사 언니의 방인데.
한참을 바라보았지만 아무것도 나타나질 않아서 내 착각이겠거니 생각했다. 지금 나에겐 이 골칫덩이 눈덩이가 가장 큰 문제였다.



─────



“헙!”

안나가 뒤돌아보는것을 느끼곤 급히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처량한 마음도 들었다. 동생이 노는 모습도 숨어서봐야한다니. 하지만 저 정 많은 동생이 자신을 지켜보는 언니를 보면 가만히 놔둘리가 없었다.
서글픈 마음이 들었지만 자신은 동생을 멀리해야만했다. 적어도, 이 저주받을 능력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을때까진.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몰랐지만 왠지 아득하게도 멀리느껴졌다.



아버지가 어느날 갑자기 장갑을 건네주셨다. 눈송이처럼 새하얀 장갑이었다.

“이게 도움이 될거같구나, 엘사.”

자신의 손에 무언가가 덧씌워지는 느낌은 굉장히 불쾌하면서도 답답했다. 손으로부터 느껴지던 감각이 모두 차단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자, 보렴. 감춰졌잖니.”

“느끼지 말고, 보이지말라는 것… 맞죠?”

아버지는 내 말에 안타까운 표정을 숨키려는듯, 고개를 옆으로 돌리셨다.

“힘을 제어할 수 있을 때까지만… 이란다.”

아버지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배어나왔다. 벌써 ‘그 사건’ 이후로 1년이 지났다. 하지만 나는 힘을 제어할 어떠한 단서조차 잡지 못한 상태였다. 아니, 제어는 커녕 힘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손의 감각을 희생한 대신, 내 마법력은 확실히 제어하기 쉬워졌다. 언제나 마음을 무(無) 상태로 유지하는데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걸 제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건 억제였다.
흐르는 강을 강제로 틀어막아버리면, 그 강은 언젠가 범람하기 마련이다. 나는 댐에 난 구멍을 손가락 하나로 막는듯한 심정으로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야만했다.



─────



똑똑, 언니의 방을 노크해봤지만 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벌써 이 상태가 지속된 지 1년이나 되었다. 때론 심술이 나기도 했었지만, 이제는 같이 놀고 싶은 마음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언니, 내가 뭘 잘못했는진 모르겠지만… 이제 그만 화해하자! 내가 다 잘못했어!”

마치 그림을 마주보고 대화하는 느낌이었다. 언니는 나랑 화해하기 싫은걸까? 내가 그렇게 큰 잘못을 했었나?
언니의 방 앞에 주저앉아 문 쪽으로 등을 기댔다. 그러자 기분좋은 서늘한 감촉이 등을 통해 전해져왔다. 왠지 모르게 그리우면서도… 그리운? 문득 떠오른 낯선 느낌에 고개를 한번 갸웃했다.
어쨋건 아늑한 느낌이 전달되었다. 왠지 모르게 언니의 마음도 전달되는 이 느낌과 같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대답을 하지 않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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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려했던 일이 터져버렸다. 첫 달거리가 시작되던 날, 꾹꾹 눌러담아왔던 감정의 둑이 박살이 나버린듯 터져나와 주변을 새하얗게 물들여갔다.
뱃속을 바늘로 쿡쿡 찌르는듯한 아픔과 함께 새빨간 피를 보자 정신이 나가버릴것만 같았다.

“엘사, 무슨 일이니!”

방 밖에서 어머니의 걱정스런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곧 철컥철컥, 하고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들어오셨다.

“가까이 오지마세요!”

내 날카로운 외침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놀란듯 눈을 크게 뜨며 그 자리에서 멈춰섰다.

“제발요… 전 지금 제가 무서워요. 힘을 제어할 수 없단 말이에요.”

“당황하면 상황만 악화시킬 뿐이란다, 진정하렴.”

아버지가 나를 안아주시려는듯, 팔을 벌리며 가까이 다가오셨다. 하지만 나는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만지지 마세요! 제발요… 전 아무도 다치게하고 싶지 않아요.”

내가 겁먹은 듯 뱉어낸 말에 아버지가 움찔하더니 손을 거두셨다. 어머니가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날 더욱더 괴롭게 만들었다.

“나가주세요… 제가 알아서 해볼게요.”

속으론 나를 따뜻하게 감싸안아주며 위로해줄사람이 절실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건 혼자 감당해야하는 일이었다. 나를 위로하려 다가오다간 꽁꽁 얼어붙을지도 모를 일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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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사와 사이가 벌어진지 벌써 5년이나 됐다.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치거나 할 때마다 언제나 엘사의 이목을 끌어보려 노력했지만 엘사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를 냉대하는 엘사의 모습에 점점 지쳐갔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누가 뭐래도 하나뿐인 자매니까!

혹시 나를 엘사와 같은 왕위 후계자로 생각하고 경쟁자로써 대하는것일까?
역사 수업은 지루했기에 그리 귀담아듣지는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다른 왕가들의 형제, 자매에 관한 이야기는 머릿속으로 쏙쏙 들어오곤 했다.
이야기 속의 다른 왕가들은 형제, 자매들끼리 왕위 계승권을 놓고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처절한 암투를 벌였다고 한다.
고작 권력을 얻기위해 같은 피를 나눈 형제, 자매들끼리 피 비린내나는 혈투를 벌인다니… 항상 그 이야기를 들으면 몸서리가 쳐지곤 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었지. 하지만… 엘사는?

만약 엘사가 나에게 공식적으로 왕위 계승권에 대해 포기하라고 시킨다면, 난 그것을 깔끔하게 포기할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설사 내가 왕위 계승을 원한다 하더라도, 나는 결코 엘사의 상대가 되지 못할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엘사 본인이 가장 잘 알테지.
그래… 알고있을거야. 엘사는 머리가 좋으니까. 역시 왕위 계승권 따위로 날 멀리할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해봤지만 이득없는 두통만 얻을 뿐이었다.
머리를 비우고 엘사의 방으로 향했다. 노크를 하다보면 언젠간 엘사도 다시 나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줄거란 희망을 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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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오늘도 어김없이 들리는 노크소리. 나는 읽고 있던 기하학 책을 덮고선 한숨을 내쉬었다. 5년이나 지났지만 안나는 변하지 않았다.
구김살 없는 내 동생… 그게 언젠간 독이 될거란 생각이 언뜻 스쳐지나갔지만, 안나가 저렇게 된 것은 모두 내 탓이었다.
내 능력을 제어할 수 있을 때까지 성문을 닫고 일손을 줄이겠다고 선언한 부모님의 말 이후로 왕궁에 사람들의 인적이 뜸해졌기 때문이었다.
부모님도 이렇게 긴 시간동안 내가 마법을 제어할 수 없으리라곤 생각지 않으셨을것이다. 나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고…….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실마리조차 잡지 못했다. 문 바깥에서 안나가 칭얼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나는 정에 굶주려 있는 것이었다. 가슴이 아려왔지만 내가 안나에게 해줄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 자신이 너무나도 무력하게 느껴졌다. 너무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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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않을거란 생각은 나의 크나큰 착각이었다. 지난 10년간의 단절은 그 어떠한 것으로도 메꿀 수 없었다.
이제는 도저히 엘사의 닫혀있는 방문을 향해 노크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님이 해외를 잠시 다녀오신다고 말씀하신 날, 배웅하러 가는 와중에 닫혀있는 엘사의 방문이 마음에 걸렸지만 끝내 노크를 하진 못했다.
그렇게 엘사의 방을 지나치자 짐을 싸고 계시는 부모님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걸리신다고 했죠? 이주?”

내 말에 어머니가 포근한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렇단다. 선물도 사올테니 기대하고 있으렴.”

부모님과 잠시 떨어져 지낼거란 생각에 조금 우울해졌던 기분이 선물이라는 말에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그럼 이주 후에 봐요!”

나는 부모님을 꼭 끌어안았다. 부모님도 그런 나를 안아주셨다. 오랜만에 안겨본 부모님의 품은 세상에 다시 없을만큼 따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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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층에서 잠시 대기하자, 부모님이 시종들을 이끌고 내려오는것이 보였다.
부모님이 성을 비운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잠시뿐이긴 하지만, 내가 성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된다는 뜻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과연 그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꼭 가셔야만 해요?”

내 불안감이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왔다.

“넌 잘해낼 수 있을 것이란다, 엘사.”

아버지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어머니도 옆에서 조용히 미소지어주셨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 있는 불안감은 가시질 않았다. 그렇지만 이대로 부모님을 붙잡아 둘 수도 없는 법이었다.
약해지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부모님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부모님은 여전히 은은한 미소를 띈 채로 나에게 등을 돌려 배를 향해 걸어가셨다.
멀어지는 부모님의 등 너머로 비추는 붉은 노을이 왠지 나에게 불길한 경고를 내리는 것만 같았다.



─────



부모님이 타고가던 배가 폭풍을 만나 난파당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온 몸의 기운이 쭉 빠져나가 그대로 털썩, 하고 제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떠나실 때 마지막으로 안아주셨던 온기가 아직도 내 품에 남아있는 것 같은데… 모두 거짓말 같아.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럼 꼭 돌아가셨다고만 볼 수 없는거잖아?

“안나 공주님, 일어나시지요.”

옆에서 나를 지켜보고있던 카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부축하러 다가왔다.

“카이, 거짓말이죠? 절 놀래키려고 장난하는거… 흑, 맞죠?”

왜 눈물이 나는거야? 내가 이러면 마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걸 인정하는 것 같잖아. 부모님은 아직 돌아가시지 않았어. 부모님은…….
흐릿해진 시야 사이로 카이의 얼굴이 눈에들어왔다. 제발… 거짓말이라고 해줘요. 제발…….
카이가 비통어린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느낌에 그대로 정신을 놓아버렸다.





어디에선가 들었었던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은 얄궂게도 사실이었나보다. 그토록 먹먹했던 감정이 일주일이 지나자 침전되어 잔잔한 슬픔만을 전해왔다.
모든 감정이 정리된 것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의 장례식을 더 이상 늦출 순 없었다. 그런데 이와중에도 엘사는 방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시고, 엘사의 방문을 향해 노크했다.

“언니… 나야, 안나. 오늘 장례식에 참석… 할거지?”

하지만 방 안에서 돌아오는건 침묵밖에 없었다. 그리고 예전보다 훨씬 싸늘해진 냉기가 방문을 통해 전해져왔다. 기분탓일까? 아니면…….

“안나 공주님! 이제 곧 장례식을 시작할겁니다. 빨리 오시지요.”

계단 아래쪽에서 카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화들짝놀라 발걸음을 계단으로 옮겼다.

“네, 네! 가요!”

아직 엘사의 대답을 듣지 못했는데.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 엘사의 방문을 향해 눈길을 돌려봤지만 여전하게 굳건히 닫혀있는 상태였다.



─────



안나의 발소리가 멀어져가는게 들려왔다. 오늘만큼 내 자신이 증오스러운 날이 없었다. 날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장례식에 참석조차 못한다니…….
일주일 동안 제대로 먹은 것도 없었다. 시녀들이나 시종들을 들일 수도 없었다. 내 방은 부모님의 비보를 들은 이후로 쭉 얼어붙어있는 상태였다.
싸늘한 방 안의 공기가 내 폐부를 깊숙이 찌르고 들어왔다. 심장이 그대로 얼어붙어버릴 것만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길 잃은 꼬마 아이처럼 웅크려앉아 흐느껴 우는 것밖에 없었다.

이제 나에게 더 이상 기댈 곳은 없다는 절망감이 내 마음을 잔인하게 짓눌렀다. 그러자 그 감정은 곧바로 구체화되어 내 주위에 눈보라로 나타났다.
정말 저주받을 능력이었다. 마음속으론 분노가 치솟아 올랐지만 분노를 뒤로하고 어렸을 때부터 주문처럼 외던 말을 마음속으로 읊조렸다.
감추고, 느끼지말고, 보이지말라. 아버지가 나의 가슴속 깊이 새겨주신 말. 곧 눈보라가 잠잠해지더니 눈송이만 남기고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허망해. 부모님의 장례식 날에서조차 목놓아 울지 못하는 내 자신이 너무나도 미웠다.



─────



엘사는 끝내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엘사에 대한 실망감이 가슴속 가득 차올랐지만 무슨 이유가 있었겠지, 라는 생각으로 애써 눌러보았다.
이해하기에 앞서 대화를 이끌어나가야만 했다. 이대로 단절된채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었다. 무엇보다 이제 남은 가족은 엘사와 나 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엘사의 방문 앞에서 심호흡을 한번 하고 떨리는 손을 들어 노크했다.

“언니… 거기 있는거 알아.”

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문득 떠올랐다. 엘사는 무엇때문에 가족까지 외면하면서 숨어사는걸까?

“사람들이 오늘 나에게 묻더라. 언니는 어디있냐고… 그러더니 나더러 용기를 내래. 그래서… 난 지금 그러고있어.”

장례식 때 오늘 쏟아부을 수 있는 눈물은 다 쏟아부은 줄 알았는데. 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언니를 위해 내가 여기에 있어. 제발… 이제 나를 들여보내주지 않을래…?”



───이제는 우리 둘 뿐이야. 너와 나.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걸까…?


──같이 눈사람 만들래……?


─꼭 눈사람이 아니어도 좋으니깐…….





안나의 목소리가 잔잔한 울림이 되어 엘사의 머릿속에 울려퍼졌다. 엘사는 감고 있던 눈을 살며시 떴다.
눈 앞에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천천히 눈을 뜨고 있는 동생이 있었다. 자매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이 전해져오는 것을 느꼈다.
서로 간직하고 있던 서운함은 맞부딪혀 애틋함으로 바뀌었고, 마음속 깊이 가라앉아 있던 앙금은 수면위로 떠올라 산산이 부서졌다.

‘… 이젠 더 이상 문을 닫지 않을거야.’

엘사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마주보고 있던 안나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때, 둘의 손이 닿아있던 렘스톤이 폭발하듯이 녹색 광채를 내뿜었다. 갑작스러운 빛에 놀란 자매는 눈을 가리려했지만 렘스톤에 얹었던 손이 붙어버리기라도 한듯, 떨어지질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렘스톤의 빛이 사그라들며 양 옆으로 잡아당기던 힘을 견디지 못한듯 반으로 쪼개져버렸다.
그 바람에 당기던 힘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당기던 방향으로 넘어진 안나가 헉 소리를 냈다.
안나의 손에는 여전히 은은한 녹색 빛을 발하고 있는 반달 모양의 구슬이 들려져있었다. 엘사도 망연히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반쪽짜리 구체를 바라보았다.

“이… 이게 뭐야! 파, 파비 할아버지 저, 그게, 어…….”

당황한 안나가 자신의 손에 들려져있는 구슬과 파비의 얼굴을 번갈아보며 필사적으로 변명거리를 꺼내려했다. 그 모습을 보던 파비가 껄껄 웃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공주님. 그저 순리대로 됬을 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옆에서 멍하니 구슬을 바라보던 엘사가 되물었다.

“같은 기억을 공유한 렘스톤은 두 갈래로 갈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같이 나눈 기억은 그대로 남아있게되죠. 그리고 구슬과 접촉하시면 언제든지 서로 교감이 가능하답니다.”

파비의 설명을 들은 안나의 입가에 장난스런 미소가 그어졌다.

“음… 그러니까 언니가 이 구슬을 몸에 지니고 있다면 언제든지 제가 언니의 기억을 훔쳐볼 수 있다는거죠?”

“그리고 그 반대도 가능하단 얘기지.”

엘사의 얼굴에도 마찬가지로 장난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두 사람이 동시에 반쪽짜리 렘스톤을 소중하게 감싸쥐었다.
주위가 붉은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길고도 짧은 밤이었다.







일주일 후,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엘사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행정실에서 서류를 부여잡고 씨름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빽빽한 서류의 문자들이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확, 다 얼려버릴까?’

엘사는 문득 떠올린 자신의 황당한 생각에 화들짝 놀랐다.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한거지? 안나나 할법한 생각을…….
안나를 떠올리자 엘사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가슴께로 향했다. 그러자 조그마한 반달모양 구체가 손에 잡혔다. 파비에게서 받은 렘스톤이었다.
잠시 렘스톤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던 엘사가 잠시 뭔가를 고민하더니 옆에서 조용히 업무를 보고 있는 카이를 흘끗 보곤 가슴을 움켜잡았다.

“윽, 가슴이!”

조용히 엘사가 결제한 서류를 검토하고 있던 카이가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여왕님, 괜찮으십니까?”

다가오려는 카이를 보고 엘사가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카이는 여전히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의를 불러올까요?”

어의라는 말에 엘사의 얼굴이 눈에 띄게 당황하는 빛을 띄었다.

“아, 아뇨. 괜찮아요. 제가 직접 어의를 찾아보도록하죠.”

엘사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던 카이는 그 미묘한 표정 변화를 보고 뭔가 떠오르는게 있었다.

“여왕님, 설마 꾀병…….”

“읏! 가슴이 너무 답답한 게 바깥공기를 좀 쐬어야 할 것 같네!”

엘사가 잽싸게 카이의 말을 끊고 행정실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덩그러니 행정실에 남은 카이는 닫힌 문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여왕은 얼마전에 안나 공주와 같이 휴식을 취하신 후부터 왠지 안나 공주의 성격과 비슷해져가고 있었다. 그게 긍정적인 것인지 부정적인 것인지 카이는 판단할 수 없었다.





곤히 자고 있던 안나는 자신의 방문이 갑작스럽게 벌컥하고 열리는 바람에 잠에서 깨버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불청객은 다름아닌 자신의 언니이자 아렌델의 여왕인 엘사였다.

“안나, 같이 눈사람 만들자!”

엘사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안나에게 달려왔다. 그 모습을 본 안나가 잠에 취한 몽롱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나는 적어도 노크는 했었는데.

슬며시 일어나는 안나의 가슴께에도 엘사의 것과 같은 반달 모양의 구체가 반짝이고 있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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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팬픽중에 비극이 너무 많더라고 그래서 좀 행-벅한 자매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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