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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기행] 스레브레니차 학살 현장에 가다
[시리즈] 전쟁사 기행 · [전쟁사 기행] 카라바흐를 가다 · [전쟁사 기행] 갈리폴리 전적지를 가다 · [전쟁사 기행] 바르샤바 동물원을 가다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 클라우제비츠의 이야기는 매번 인용되는 구절이다. 네이버 국어사전에 '정치'를 검색해보면 '나라를 다스리는 일.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으로,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을 한다.'라고 정리한다. 요약하면 국민의 삶을 위해 정부에서 힘을 행사해 국가를 올바르게 이끄는 것이 정치인 셈이다.실제로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 국가와 국가 단위에서 서로 가치관, 자원, 목표 등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정치적 필요에 따라서는 국가는 언제든지 물리적 수단을 동원해 상대방의 의지를 꺾는 전쟁이란 카드를 만지작거릴 수 있다.문제는 전쟁의 범위에 있다. 근본적으로 전쟁은 살상이 동반되며 그 후폭풍이 강하다. 그럼 우리는 어느 선까지를 일개 주권국의 합법적인 물리력 행사로 인정할 수 있을까? 물리력 행사를 어디까지는 용인할지, 어디부터는 제재할지 딱 잘라서 정리하기가 힘들다. 각 나라마다 추구하는 올바른 국가의 형상이 다르니까.그래서 우리 세계는 국가의 합법적 물리력 행사의 선을 제시하기 위한 다양한 수단을 만들어왔다. UN은 이를 위해 조직된 거대 국제기구다. 5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어나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사회는 또다시 그 광기를 마주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승전국 중심으로 국제 질서를 재편하는 동시에 UN을 통해 위기를 관리하고자 했다. UN헌장은 제1조에서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고, 이를 위하여 평화에 대한 위협의 방지ㆍ제거 그리고 침략행위 또는 기타 평화의 파괴를 진압하기 위한 유효한 집단적 조치를 취하고 평화의 파괴로 이를 우려가 있는 국제적 분쟁이나 사태의 조정·해결을 평화적 수단에 의하여 또한 정의와 국제법의 원칙에 따라 실현한다.'를 명시하며 전쟁에 대한 억제를 목표하고 있다.그러나 문제는 UN의 행동이 '정의와 국제법의 원칙에 따라'갈지는 몰라도 국제평화를 위해 '유효한 집단적 조치'를 취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UN이 아무리 결의안을 발표하고 평화유지군을 보내고 인도적 지원, 적법한 조치를 약속하더라도 그게 지역의 평화와 안정으로 넘어가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UN 결의안이 통과해도, 평화유지군이 보내지더라도 상황이 달라지지는 않고 오히려 상황이 악화되기도 한다. 분쟁 국가에서는 UN의 개입을 꺼리기까지 한다.UN의 억제가 실패하는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결정적 한계는 물리력의 부족에 기인한다. UN 평화유지군은 주권국가의 전쟁 행위를 막아설 물리력과 법적 구속력이 약한 집단이다. 국가가 학살을 원하며 쳐들어오더라도 그에 맞서기엔 너무나도 미약하다. 중화기도 제한적으로 보유하며 유사시 자위권을 행사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없다. 전차가 다가와도 UN 평화유지군은 무전기만 붙잡고 있어야만 하는 꼴이다. 더 나아가면 그 전차를 UN 평화유지군 기지 앞에 갖다놓고 기지로 피난을 온 민간인을 내놓으라 할 때 순순히 민간인을 내놓아야 할 판국인 것이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대략적으로 알면서도.이 말도 안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난 곳이 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동부에 위치한 스레브레니차에서다. 스레브레니차는 한국에서는 생소한 지명이지만 유럽에서는 충격적인 사건의 장소로 유명하다.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진행된 보스니아 내전은 유고슬라비아의 이름 아래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던 크로아티아계, 보스니아계, 세르비아계 사이의 충돌을 야기했고 이 과정에서 잔혹한 인종청소가 자행되었다. 특히나 1995년 7월 11일부터 7월 31일까지 스레브레니차에서 일어난 인종청소는 공식적으로 8,372명, 비공식적으로는 그 이상의 인원이 잔인하게 학살된 사건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유럽에서 일어난 최대 규모의 인종청소였다.스레브레니차 학살의 영향에 대해서는 설명하려고 하면 아주 길어지지만 그 과정은 천천히 여행의 과정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그러나 짧은 소개만으로도 이곳이 얼마나 중대하고도 엄중한 곳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곳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간다면 반드시 방문해야만 하는 곳이다. 스레브레니차를 방문하려면 투어나 렌트카를 이용해야 한다. 스레브레니차를 오가는 버스는 하루에 한두 편에 불과하고 시간대가 맞지 않아 스레브레니차를 제대로 구경할 수 없다. 렌트카는 날이 좋다면 시도해볼 수도 있지만 이 추위 속에서는 불가능하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진입하는 날 엄청난 양의 폭설이 쏟아졌다. 본래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서 출발해 6시간 30분이면 사라예보에 도착해야 했지만 쏟아진 폭설에 버스는 6시간을 보스니아 어딘가에 하염없이 멈춰있다 출발해야 했다. 자동차를 이끌고 가기에는 너무 난이도가 높은 환경이기에 투어를 신청해야 했다. 투어 전날, 호스텔에서 외국인들과 계단에 앉아 신나게 술을 마시다가 새벽 2시에 잠을 들었다. 투어는 7시에 시작하는 투어였고 차로 2시간 30분을 가야 스레브레니차가 나오기 때문에 차에서 잠을 벌충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아침에 가까스로 일어나 집합 장소에 도착한 뒤 투어를 시작했다. 그러나 새벽 2시까지 술을 진탕 마신 덕분에 비몽사몽한 상태로 차에 앉았다. 차에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있었다. 미국인, 아일랜드인, 독일인, 이탈리아인, 그리고 한국인인 나로 이루어진 일행은 큰 차를 타고 눈 덮인 보스니아 땅을 여행하기 시작했다. 가이드 제이크는 자기네 문화 전통이라며 샌드위치를 모두에게 선물해줬고 샌드위치를 아침 삼아 먹으라고 했다. 운전을 시작하자마자 제이크는 스레브레니차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스레브레니차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스니아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그는 자신을 보스니아인이자 보슈나크인이라 불렀다. 사람들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유럽에 위치하기에 기독교 국가라 생각하지만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아 무슬림 인구가 많다고 말하며 운을 뗀 제이크는 보스니아계 무슬림을 보슈나크라 부른다 정리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보스니아 내 기독교인과 보슈나크인의 비율은 정확히 반반이라고 한다. 허나 양측 사이의 대립은 거의 일어나지 않고 다른 이들보다 더 세속적이고 종교적 융화가 잘 되어있는 이들이라 소개하였다. 실제로 보스니아를 들어올 때만 해도, 들어와서 도시를 구경할 때만 해도 이곳이 이슬람계 중심의 국가라는 인상을 전혀 받지 못했다.가이드의 이야기 동안 조금씩 졸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유고슬라비아를 서술하는데 집중되었다. 발칸 반도를 여행하다보면 박물관과 유적, 현지인들에게서 공통된 반응을 들을 수 있다. '유고슬라비아 시절은 천국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유고슬라비아 시절을 그리워한다. 경제적으로 풍족했고, 자급자족이 가능했으며, 여권을 갖고 어디든 갈 수 있었다. 하나의 거대한 공화국으로서 냉전의 제3지대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이득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을 그리워한다. 무엇보다도 모두가 함께 어우러져 살았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생각해보자.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민족자결주의가 주장되며 수많은 제국들이 산산조각나며 민족국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본질적으로는 좋은 일일 수 있다. 당장 한국부터가 3.1운동의 시작에 민족자결주의가 강력한 명분이 되었으니 말이다. 또한 국제사회에서는 국가의 주권 행위가 보장되기에 하나의 단일민족으로 이루어진 국가는 강력한 추진력과 응집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는 그와 반대로 다민족 연방 국가를 내세우는 동시에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를 누렸다. 물론 제1차 세계대전을 유고슬라비아의 세르비아계가 일으킨 걸 생각하면 모순적이지만 어찌되건 그들은 국제사회의 방향성과는 반대로 움직이는 것으로 압도적인 자유와 다채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여행을 하다보면 그들의 향수는 유고슬라비아의 국부이자 중심축이던 티토에 국한되어 있다. 그들은 강력한 지도자였던 티토의 시절을 그리워하지만 다른 민족과 문화와 함께하는 삶에 대해 그리워하지는 않는다. 그의 강한 카리스마가 개별 민족들을 누르고 있던 셈이다. 그 불만을 넘어설 정도로 뛰어난 유고슬라비아의 경제력, 복지, 제3세계로서의 위상이 있었기에 다행일 뿐. 하지만 티토가 사망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티토가 곧 유고슬라비아였고 유고슬라비아가 곧 티토였기에 티토가 없는 유고슬라비아는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티토가 사망하자 유고슬라비아의 민족주의 열풍이 불기 시작한 건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들의 박물관 속 유고슬라비아의 이야기는 티토 외에는 미미한 것처럼. 유고슬라비아의 민족들은 각자도생을 시작했다.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코소보, 몬테네그로. 모두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며 깃발을 흔들었다.유고슬라비아 아래에서는 모두가 뒤섞여 살아갔을지 몰라도 민족주의 열풍 속 그 뒤섞임은 목숨을 건 서바이벌로 전환된다. 이제까지는 윗집 야곱과 아랫집 토마쉬, 옆집 네마냐가 연방의 이웃으로 함께 살고 있었지만 이제는 민족국가를 위해 서로 분리되어야 했고 더 나아가 경쟁에서 제거해야만 하는 대상이 된 것이다.이 문제는 보스니아에서 더 크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보스니아는 유고슬라비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고 유고슬라비아를 구성하는 민족들 중 가장 크던 크로아티아계, 세르비아계, 보스니아계, 보슈나크계가 뒤섞여 있었다. 동시에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유고슬라비아 해체 과정에서 이곳을 장악하는 자가 장차 발칸 반도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고 그만큼 치열한 싸움이 일어났다.스레브레니차로 가는 동안 제이크의 말은 더 이어졌다. 그는 유고슬라비아의 영광스러운 순간이 지난 후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를 말한다. 30대 중반인 그는 사라예보 포위전이나 스레브레니차 학살을 두 눈으로 목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이다. 한순간에 올림픽 스타디움이 공동묘지가 되고 이웃이 다른 이웃을 죽이고, 나라가 두 쪽을 넘어 여러 쪽으로 분해되는 상황을 설명하며 목소리를 높였다.그는 운전 중간 우리가 국경을 넘어왔다고 말했다. 무슨 국경? 우리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국경을 넘지 않았다. 그는 스릅스카 공화국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속에는 하나의 국가가 더 있었다. 스릅스카 공화국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구성하는 국가지만 동시에 세르비아의 지원을 전폭적으로 받는 세르비아계 국가다. 그래서 보스니아 내전 당시 보스니아를 괴롭히던 국가였고 스레브레니차 학살을 주도하는 국가였다.제이크는 언성을 높여야만 했다. 보슈나크계는 스릅스카가 다른 나라라고 인식해본 적이 없었는데 어느새 다른 국가가 되더니 자신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말은 살벌한 전쟁 시기를 정리하는 말과 같았다. 그가 가리키는 곳마다 공동묘지가 있었고 그는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수천 명의 목숨이 사라졌던 공간들을 이야기했다. 스릅스카 공화국 안에서 일어난 학살은 비단 스레브레니차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흥미로운 건 그 학살과 추모의 현장들이다. 차를 타고 움직이며 보면 그곳은 학살 현장이나 추모 기념관이라기보다는 물류 창고에 가깝거나 동네마다 있는 흔한 공동묘지에 가깝다. 제이크의 설명이 없다면 그냥 지나칠만한 곳이다. 이곳은 스릅스카 공화국이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정부의 영향력이 닿는 곳이지만 그 영향력은 미미할 따름이다. 스릅스카 공화국은 자신들의 학살을 숨겨야 하기에 학살 추모 시설들을 크게 만들지 않았다. 그곳의 외관은 겉보기에 평범한 곳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스릅스카 공화국은 세르비아 정부의 지원을 받았기에 세르비아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세르비아 정부와 그 추종자들은 스레브레니차 학살을 비롯해 보스니아계, 보슈나크계를 학살한 사실을 축소하고 있다. 학살 자체는 있었지만 기껏해야 현지 민병대에 의해 이루어진 수백 명 단위의 사소한 일탈이지 정부 차원에서 벌인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세르비아의 공식적인 주장은 세르비아계의 적법한 군사 활동 중 일부 현장에서 일어난 사소한 찐빠다.그러나 스레브레니차에 도착하는 순간 그 주장은 힘을 잃는다. 스레브레니차는 스릅스카 공화국, 즉 세르비아계의 입김이 작용하는 곳이다. 그러나 스레브레니차 학살 추모 시설은 그 입김을 무시하기라도 하는 듯 아주 압도적이다. 스레브레니차 추모 시설 앞에서 제이크는 차를 세우고 우리들에게 평범하게 보이는 건물을 가리켰다. 세탁기 몇 대가 있고 초록색 지붕이 있는 집. 그는 저곳에서 학살이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순간이었다. 정말 평범한 집에서 일상적인 학살이 시작된 것이다.스레브레니차 추모 시설을 들어가며 보이는 주춧돌에는 UN 표시가 적혀 있었다. 이곳은 DUTCHBAT, 보스니아 내전 당시 UN평화유지군으로 스레브레니차에 파병된 네덜란드군의 사령부다. 오늘날 스레브레니차 추모 시설로 쓰이는 이곳은 현대적인 외관을 하고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전투를 위한 요새처럼 보이지 않았다. 스레브레니차 추모 시설을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건 'MAJKAMA, ŽENAMA I DJECI' 추모비이다. '어머니들에게, 여성들에게 그리고 아이들에게'를 의미하는 이 추모비는 학살의 가장 거대한 피해자였던 어머니, 여성, 아이들을 위한 추모비이다. 시설에 들어가기 전, 하나의 문구를 볼 수 있다. 'Srebrenica genocide - the failure of the international communty'. 스레브레니차 학살 - 국제사회의 실패. 이곳에서 우리가 무엇을 볼 수 있는지 알 수 있다.가장 먼저 영상을 시청하며 본격적인 투어가 시작된다. 30분 동안 상영되는 영상은 앞으로 만나게 될 스레브레니차의 참상을 짧게 요약하는 영상이다. 1992년 2월 21일, UN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743호가 채택됨에 따라 UN평화유지군이 유고슬라비아로 진입했다. 처음에는 당시 소란스럽던 크로아티아가 주 활동 범위였으나 보스니아에서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보스니아계, 보슈나크계 사이의 내전이 점차 심화되자 UN평화유지군은 보스니아에서도 활동하기 시작했다.처음에는 캐나다군이 CADBAT(CAnaDa BATtalion)이라는 이름으로 안정화작전을 벌였고 UN 또한 스레브레니차를 포함한 6개의 도시를 UN 안전지역으로 설정해 스레브레니차와 보스니아계, 보슈나크계를 보호하고자 했다. 그리고 CADBAT의 활동 기간 동안에는 그런대로 보호가 되고 있었다.CADBAT의 다음은 네덜란드군의 DUTCHBAT(DUTCH BATtalion)이었다. DUTCHBAT은 150여 명의 CADBAT보다도 더 대규모의 부대가 되어 600여 명 가량이 배치될 예정이었지만 스레브레니차의 사정은 좋지 않았다. 1992년 시작된 전쟁은 1995년까지 3년 동안 이어지고 있었고 그 사이 세르비아계와 스릅스카 공화국, 세르비아에 의한 학살이 계속 보고되고 있었다. 세르비아는 보스니아와 스릅스카에서의 영향력을 장악하기 위해 스릅스카군에 대규모 무기를 지원하고 있었다. 보스니아계와 보슈나크계는 이를 피해 스레브레니차로 몰려들었다. 세르비아계로서는 보스니아계가 밀집되어 있던 스레브레니차를 반드시 장악해야만 했고 네덜란드 평화유지군이 더 진입하는 걸 막아야 했다.군사활동을 늘린 세르비아계는 네덜란드 군인을 붙잡아 인간방패로 쓰거나 네덜란드군의 초소를 위협하는 행위로 긴장을 불어넣었다. 그 결과 1995년 파병된 DUTCHBAT 제3진의 톰 카렘만스 대령이 이끄는 부대는 600명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고 그마저도 중화기와 장갑차량 등이 제한적이었다.스릅스카 공화국은 스레브레니차로 진격을 시작했다. 스릅스카 공화국군 장성 라트코 믈라디치가 이끄는 부대는 전차를 앞세워 스레브레니차로 몰아붙였고 피난민들은 피할 곳이 없어졌다. 일부는 스레브레니차 북부의 포토차리를 향한 피난길에 올랐고 일부는 DUTCHBAT으로 몰려와 UN평화유지군에게 보호를 요청했다.https://youtu.be/8lJAuKgXY9chttps://www.facebook.com/watch/?v=579366676874692스레브레니차에 들어온 세르비아계 군대는 기세등등했다. 그들은 정당한 군사작전 중이라 주장하며 주민 안전을 위해 피난민들을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는 동시에 피난민들에게 지금이라도 돌아오면 안전과 평화를 보장하겠다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로 영상을 보면 세르비아계는 남녀를 버스로 분리하고, 안전을 보장한다는 제스쳐와 목소리를 남기고 있었다. 일부는 그 말을 믿었다. 세르비아계에게 몸을 의탁한 보슈나크계 아버지 라모 오스마노비치는 산속에 있는 아들 네르민을 향해 소리치며 이들은 안전하니 얼른 넘어오라 목소리를 높인다. 아버지는 세르비아계를 믿었던 걸지 모른다. 하지만 그 믿음은 아들과 그를 따라온 사람들의 목숨을 잃는 참상으로 변했다.DUTCHBAT에 몰려든 난민은 1만여 명. 믈라디치가 이끄는 군대는 DUTCHBAT을 포위하고 난민들을 내놓으라 말했다. UN에서 보스니아 상황에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믈라디치의 군대는 수천에서 1만여 명에 이르렀고 DUTCHBAT은 150여 명에 불과했다. DUTCHBAT은 TOW 대전차미사일을 보유하긴 했지만 믈라디치의 군대는 다수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DUTCHBAT의 절대적인 숫자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DUTCHBAT은 NATO에 항공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NATO는 직접 개입하지 않았지만 유고슬라비아를 주목하고 있었고 UN 평화유지군의 요청이 있을시 군사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항공지원은 도착하지 않았다. 믈라디치의 군대는 이미 DUTCHBAT 외곽의 초소들을 점령하고 네덜란드군 병사들을 인간방패로 이용하고 있었다. 만약 NATO가 폭격을 가하면 네덜란드군 장병들이 죽을 수 있었다. 또한 네덜란드와 세르비아 사이의 정치적 거래가 있었으며 전력차는 몇 번의 항공지원으로 뒤집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들은 결국 난민들을 포기하기로 했다.https://x.com/BosnianHistory/status/1282075904206950400?ref_src=twsrc%5Etfw%7Ctwcamp%5Etweetembed%7Ctwterm%5E1282075904206950400%7Ctwgr%5Ee45d9511dec06dfe2062edcee25afa23209f091e%7Ctwcon%5Es1_c10&ref_url=https%3A%2F%2Fwww.redditmedia.com%2Fmediaembed%2Fhprq6b%2F%3Fresponsive%3Dtrueis_nightmode%3DfalseDUTCHBAT은 기지를 포기하고 난민들을 스릅스카 공화국군에게 인계한 뒤 스레브레니차에서 빠져나왔다. 그들은 이후 생환을 자축하며 축제를 벌였다. DUTCHBAT으로서도 힘든 결정이었을 것이다. 생판 처음 들어보는 땅에서 열세한 상황에 처했고 이미 동료들이 인간방패가 되어있었다. 까딱 잘못하면 모두 죽을 위기였고 사선을 넘어 돌아온 건 분명 기뻐할 일이었다. 이를 부정할 수는 없다.하지만 그들이 안도의 축배를 드는 사이 세르비아계에게 인계된 보스니아계는 지옥에 빠졌다. 그들은 거의 모두 죽었다. 스레브레니차 학살 영상을 본 뒤 DUTCHBAT 기지를 둘러보면 놀랍도록 하얗다는 인상을 받는다. 당연할 일이다. UN평화유지군은 중립의 하얀색을 사용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 어느 곳보다도 차갑게 느껴진다. 실내는 공기부터 서늘하며 사람도 적어 적막만이 감돈다. 기지의 영화 상영실 바로 옆으로는 스레브레니차 학살 당시의 영상과 기록들이 보관되어 있으며 당시 네덜란드군이 사용했던 시설들을 일부 복원하여 보여준다. 네덜란드군의 통신시설, 수뇌부 지휘실은 1층에 위치했고 안쪽이 아닌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톰 카렘만스과 부관 로브 프랑켄은 언제든 바깥의 난민들을 볼 수 있었고 철조망 너머의 스릅스카군이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는 것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톰 카렘만스는 레바논에서의 UNIFIL 활동을 해보며 평화유지군 활동 경험을 쌓아온 이였지만 이런 상황은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직접 스레브레니차까지 찾아온 믈라디치가 그를 만나며 미소짓고 DUTCHBAT과 난민들의 안전을 보장한다 했지만 그가 그걸 믿었을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 하지만 공중지원도 없고, 군사적 대응에도 한계가 있는 DUTCHBAT이 여기서 맞설 수는 없었다. 1층에서는 사령부의 고뇌가 보인다면 2층으로 올라가면 장고 끝에 내린 결정이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를 알 수 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길, 그곳에는 이발소가 있었다. 현지인 이발사 메흐메드 우스티치는 DUTCHBAT을 위해 일했다. 그가 머리를 잘라주던 사진에서는 친근감도 느껴진다. 그러나 네덜란드군은 통역사를 제외한 모든 이들을 내보냈고 이발사들도 내보내야 했다. 메흐메드 우스티치는 19살 아들과 함께 스스로 숲을 뚫고 나가 살아남아야 했다. 그렇다면 다른 이들의 운명은 더더욱 뻔하다. 네덜란드군 장병들은 보스니아 평화유지군 활동을 내켜하지 않았고 오랜 포위, 위기에 지쳤다. 그들의 막사에 남아있는 그림들은 원초적이고 문장들도 자극적이다. 그들의 막사에는 그들의 EOD 활동을 상징하는 마크들이 남아있다. 보스니아가 DUTCHBAT을 복원하면서 일부러 이것들만 남겨놓은 것일 수 있지만 사건의 전개를 보면 인지부조화적인 활동이다. 민간인을 위해 위협물을 제거해야 하는 이들이 민간인을 위협물에게 던져놓고 떠나버린 셈이니까. DUTCHBAT 사령부 건물에서의 관람은 데이턴 협정으로 마무리된다. 스레브레니차 학살의 전말이 드러나고 세르비아계와 스릅스카군의 전쟁범죄가 드러나자 결국 NATO가 직접 나섰다. NATO의 지원을 받은 크로아티아군이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서 세르비아계 군벌과 스릅스카군을 몰아붙였고 1995년 12월 14일 미국 데이턴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존속 및 승계를 인정하고 보스니아와 스릅스카를 하나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함께하도록 했다. 이 문제는 UN과 NATO, 미국, 러시아 등이 함께 관리하기로 하였고 더 나아가 보스니아에 고위대표부를 설립하였다. 고위대표부는 데이턴 협정이 잘 준수되고 있는지 파악하기 위한 기관으로서 초헌법적인 존재로 군림하고 있다. EU에서 파견되는 고위대표는 원한다면 보스니아의 대통령과 총리, 보스니아와 스릅스카의 외교와 내정을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다.어찌보면 데이턴 협정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국가에 신탁통치 카드를 꺼내들 수 없는 UN과 NATO가 신탁통치를 대신해 보스니아 상황을 직접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협정이나 다름없다. 억지로 옥상옥처럼 느껴질 구조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중에 일어난 코소보 때는 신생국가를 만들어야 하니 UN이 직접 나서 임시행정부를 구성해야만 했지만 보스니아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그 옥상옥 구조는 지난 30년 동안 이러니 저러니 해도 잘 굴러가고 있었다. 스레브레니차에 한국인이 평범하게 찾아올 수 있을 정도로 평화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곳을 보면 그래도 잘 마무리가 되었구나 생각이 든다.데이턴 협정 후로도 스레브레니차 학살 등 보슈나크계 학살 혐의를 받는 믈라디치, 밀로셰비치 등을 헤이그 전범재판소에 세우며 최소한의 정의를 실현하는데도 성공했다. 이곳에서의 투어에서 볼 건 다 본 것만 같았다.하지만 이 투어는 끝나지 않았다. 데이턴과 헤이그는 모든 것을 마무리하지는 못했다. 사령부 바로 뒤로 보이는 거대한 건물은 그들이 종이로 서명하지 못할 거대한 암흑이 담겨있다. DUTCHBAT 건물에서 나가면 커다란 건물이 나온다. 전쟁 이전까지는 배터리 공장이었던 이곳은 DUTCHBAT의 보급창고로 활용되었다. 스레브레니차 학살 당시 이곳에 난민들이 모여들었고 그대로 믈라디치와 스릅스카군에게 인계되어 모조리 죽고 말았다. 그곳으로 투어가 이어졌다. 건물은 넓고, 어둡고, 차갑다. DUTCHBAT 사령부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른 추위가 느껴진다. 가이드는 이곳이 스레브레니차에서 피난을 떠난 이들의 발자취를 기억하는 공간이라 소개했다. 공장 가운데 있는 신발들은 살아남은 자들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라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신발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러하다. 이발사 메흐메트 우스티치처럼 운이 좋은 이들은 피난에 성공했지만 대부분은 군인과 전차, 군견이 쫓아오는 산에서 사선을 건너다녀야 했고 목숨을 잃어야 했다. 라모 오스마노비치와 네르민처럼 말이다. 바로 옆으로는 희생자들의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들. 우리들 주변의 흔한 사람들이 그렇게 죽어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볼수록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 대체 무슨 이유가 있어서 같은 나라에서 살던 사람들을 악독하게 처리한 것인가. 종교가 다르고 민족이 다르고 이름이 다르다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걸 이유로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여서는 안된다는 걸 이미 배울만큼 배웠고, 삶으로도 느껴왔을 자들이다. 나치 독일의 침략을 받았던 이들이며 유고슬라비아 시절을 그렇게나 좋아하는 이들이다. 모두가 함께 어우러져 살아갔다는 걸 자랑스럽게 말하면서 그게 가능할까? 어쩌면 그것은 함께 살아갔다기보다, 강한 국가 장치 아래 잠시 공존했던 상태였는지도 모른다. 함께 살아간다는 건 공동체로서 서로 유기적이고 상호보완적이며 같은 문화와 사회를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달리보면 자급자족이 가능한 삶이었으니 사회적 활동이 줄어들 수밖에 없고 문화와 사회를 같이 공유하지 않은 것이다. 타 문화에 대한 이해, 타 역사에 대한 이해는 최소한에 그쳤고 서로에 대한 경험을 많이 쌓을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각자의 문화, 민족, 종교가 더 우선시되고 더 뛰어나다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언제든 자신들이 박차고 나설 기회가 있으면 과감하게 박차고 나서서 지배하고자 하는 것이다. 티토가 일시적으로 그걸 묶어놓기만 했을 뿐. 보스니아를 여행하기에 앞서 세르비아를 여행했다. 세르비아는 자신들의 역사를 아주 강하고 융성하게 표현한다. 그들의 수도 베오그라드에 세워진 요새는 수백 년 동안 견고했고 세르비아의 이름 아래 발칸 반도를 호령했다. 오스만 제국의 방패막이기도 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쳤던 이들이기도 하다. 그들의 군사 박물관에 가면 수백 년의 역사를 충분히 볼 수 있다. 보스니아 여행 이후 크로아티아를 여행했다. 신혼여행지로 유명한 두브로브니크는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전쟁터였고 그곳에도 전쟁 박물관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숭고한 민족정체성을 위해 싸웠고 자유를 쟁취했으며 희생자들을 기리고 있다고 말한다. 크로아티아에게 자신의 역사는 독립을 향한 긍지 높은 역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유고슬라비아의 역사가 아니라 자신들만의 역사에 불과하다. 유기적인 역사가 아닌 자신만의 관점 위에 유고슬라비아의 탈을 씌워놓았을 뿐인 역사. 이는 보스니아도 마찬가지라서 유고슬라비아의 화려함이란 천으로 자신들만의 문화나 감정을 덮어놓았다. 그 천이 벗겨지려고 하니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잔혹하게 움직인 것이다.그러니 국제사회에서도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티토의 잔상이 너무나도 강했으니까. 그의 사후 슬로베니아 독립 전쟁,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이 일어났지만 슬로베니아 전쟁은 열흘 만에 끝났고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은 소련의 붕괴와 걸프전, 뒤이어 일어난 보스니아 전쟁에 묻어갔다. 국제사회에서는 평소 잘 지내던 이들이 조금 다투는 것처럼 인식되기 좋았고 무엇보다 냉전이 끝나면서 느슨해진 시대 인식까지 가졌으니 그 결과는 불보듯이 뻔했는데, 뻔하지 않을거라 생각했다.그 뻔한 결과는 다음 박물관에서도 이어진다. 앞선 박물관의 내용을 보충하는 이 박물관은 훨씬 더 거대하다. 공장의 일부를 그대로 남겨놓은 박물관에는 희생자들의 얼굴로 빼곡하다. 그들을 편히 처형장으로 데려갔던 버스들이 있고, 수많은 총들이 겨누는 연단이 설치되어 있다. 아무리 총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버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곳 앞에 서면 섬뜩함을 느끼게 된다. 이들은 편히 죽지도 못했다. 벽을 보면 하나의 대화가 있다. 스릅스카 군인들이 보스니아인들을 총으로 쐈다. 총을 쏘고 난 뒤 군인은 "아직 안 죽은 사람 있어?"라 말했다. 한 명이 말했다. "여기, 나 아직 안 죽었어." 군인이 가서 확인사살을 마쳤다. 죽음조차 편히 갈 수 없었다. 거대한 손, 거대한 흙무더기, 거대한 사진들은 이곳의 참상이 아직도 사람들의 삶 속에 새겨져 있고 땅 속에 묻혀있다는 걸 의미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스레브레니차 학살은 정말 미미한 학살이다. 크로아티아, 코소보에서도 비슷한 학살이 있었고 비슷한 시기 르완다에서도, 소말리아에서도, 동티모르에서도 학살이 있었다. 홀로코스트와 난징, 731부대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90년대 발달된 미디어의 취재와 UN, NATO의 개입이 있었고 유럽 복판에서 일어난 스레브레니차조차 여전히 파내지 못한 것이 있으니 다른 곳들은 얼마나 더 묻혀있을지 상상하기도 힘들다.박물관 바로 옆에는 희생자들의 추모지가 있다. 추모지는 스레브레니차의 꽃의 형태를 하고 있고 무슬림들을 위한 오벨리스크 모양 비석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 추모지에도, 이름을 새긴 청동 동판에도 공란이 있다. 그들은 모두 8,372명...이다. '8,372명...'인 이유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희생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가이드가 소개하길 일부 묘비는 가족 묘비기도 하고 일부 묘비는 비어있는 묘비라고 한다. 희생자 가족들이 이장, 확인을 거부하고 있거나 시신과 흔적을 제대로 찾아낼 수 없어 가족 단위로 만들어놓거나, 비어있다는 것이다. 일부 희생자들의 시신은 여러 곳에서 파편처럼 흩어진 채 나왔다고 말한다. 그야말로 '내부자들'에서 보여주는 그런 장면이 있었던 거다. 그러니 더더욱 묻혀있기를 거부하는 이들도 있고, 확인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으며, 불확실한 이들도 있다. 세르비아로 들어간 이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행방을 알기도 힘들다.추모지 바로 건너편에는 기념품 가게가 있었다. 추모시설이기에 그곳은 크고 화려하지 않았지만 스레브레니차를 기억하기 위한 기념품과 지역 소개 책자가 많았다. 추모지는 스레브레니차의 꽃 모양을 하고 있었고 가게에서도 꽃을 팔고 있었다. 주인은 꽃의 의미를 설명해줬다. 흰 꽃은 순수함, 초록색은 희망과 무슬림의 상징, 11개의 꽃잎은 학살이 일어난 7월 11일을 상징한다 하였다.스레브레니차의 꽃은 그만큼 순수한 하얀색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펼쳐져 있는 UN평화유지군의 본부와 비석의 하얀색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희망은 하얀색 속에서 존재하지만, 그 희망이란 불안전한 보호와 잔인한 역사의 안에 있는 것이지 않은가. 이게 더 지켜질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그런 희망.보스니아에서 만난 보스니아인들은 모두들 그 희망을 불안하게 여겼다. 호스텔의 주인도, 카페의 종업원도, 옆 방의 사람도 현재를 만족하지만 언제든 터질 수 있는 뇌관처럼 여겼다. 수전증과 불면증을 겪고, 수십 년 전 탄피를 보관하며, 세르비아를 가본 적 있는지를 물으며,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인하고 싶어한다. 언제라도 현재의 평화가 깨질지 모르고 바로 옆의 사람이 적대적으로 돌변할지 모른다는 생각과 경험으로 가득한 이들이다. 꽃은 그 불안한 희망처럼 작고 나약하다.가이드는 차를 몰고 스레브레니차 시내로 향했다. 이미 해가 지기 시작해서 어둑해지고 있었고 시내를 내려다보는 언덕 위를 향했다. 향하는 길에서는 스레브레니차의 상처가 조금씩 남아있었다. 가이드는 거리 중간마다 멈춰서서 풋티지 영상과 현재의 거리를 비교해줬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거리는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곳에 더이상 활기도 색깔도 없을 뿐. 언덕 위에서 본 스레브레니차는 스산하고, 버려진 집으로 가득하였다. 전후 이곳에 돌아와서 사는 이들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자기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저녁을 먹고 다시 사라예보로 돌아가는 길, 가이드는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시작했다. 보스니아 전쟁 당시 그의 고모는 겁탈당했고 조카는 포격에 사망했다. 전쟁 이후 세르비아로 간 친구는 엑센트를 이유로 인종차별을 당했다. 그의 아버지는 전쟁 이후 매일을 한 눈을 감고 한 눈은 뜨고 가는 것만 같다고 표현한다 말했다. 전쟁의 상흔은 여전히 깊게 남아있었다. 그는 세르비아를 IS에 비유했다. 이는 가이드 개인의 체험과 상처에서 나온 언어였으며, 현재 보스니아 사회의 불안을 보여주는 증언이었다. 현재의 보스니아는 안전하지만 여전히 위험하다고도 말했다. 그는 세르비아
작성자 : kcvn고정닉
"中에 또 안 당해"… 美, 17조원 투입해 핵심광물 비축한다
미국, 핵심 광물 비축으로 공급망 안정화 추진• 미국은 중국의 희토류 공급 제한 사태 재발을 막기 위해 약 17조 원을 투입하여 핵심 광물을 비축하는 '프로젝트 볼트'를 공개했다.• 이 프로젝트는 자동차, 제트 엔진, 전자 제품 등에 사용되는 희토류, 갈륨, 코발트 등 핵심 광물을 확보하여 미국 기업과 노동자의 공급 충격을 완화하고 미국 내 제조업체 지원을 목표로 한다.• 또한, 미국은 비축 사업과 더불어 호주 등 각국과의 협정 체결, 광산 프로젝트 투자, 연방정부 허가 절차 신속화 등을 병행하며 중국 의존도를 낮추고 핵심 광물 공급망 안정화를 다각적으로 추진할 예정이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469/0000912587
작성자 : ㅇㅇ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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