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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춘천 홍천지구 전투(25~29일)-스크룰 압박.

RunTime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07.12.01 13:4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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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의 남침계획(그들의 용어를 빌면 선제타격계획)은 춘천·홍천지구 전투에 투입된 북한군 제2군단이 가평을 거쳐 수원으로 대우회기동을 함으로써한국군 주력의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춘천 북쪽을 방어하고 있던 임부택 중령이지휘하는 아6사단의 제7연대는 좌일선(적목리-고탄리)에 제3대대(대대장 이남호 소령), 우일선(수리봉-대동리)에 제2대대(대대장 김종수소령)을 배치하고, 제1대대(대대장 김용배소령) (-)는 예비로 춘천에 집결보유하였으며, 제1대대 제3중대와 연대 수색중대는 양구방면에 배치하였다.


 


 6월 2 5일의 상황

6월 2 5일 04:00 중부전선 전역에서 적의 포격이 개시되었다.

적의 공격준비사격은아군이 예상한 주접근로의 전술적 요지인모진교남쪽 일대에 집중되었다.

춘천 정면을공격한 적의 제2사단은 화천-신포리-춘천축선에 주공을 지향시키고, 여타의 산악접근로에는 수 개의 소규모 부대를 조공으로 투입하였다.

이때 적의 대대적인 공격이 개시되었다는 급보를 받은 사단장은 원주에서 사단예비 제1 9연대에 출동명령을 하달한 후 작전참모를 대동하고 춘천으로 직행하였다.


제7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적의 포격이 모진교일대에 집중된 상황으로 보아 적의 주공이 화천-신포리-춘천 축선에 지향되었음을 간파하고 연대 예비 제1대대를 우두동북쪽의 준비된 방어진지 1 6 4고지에 배치하였다.


적의 제2사단은 전차부대가 북한강을 도하하여 춘천으로 진입할 수 있는 유일한 교량인모진교를 확보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제7연대는 모진교를 폭파할 계획을 수립하지않고 있었다.

그 이유는 모진교가 적의 감제하에 있어 폭약장전이 불가능하고, 또한 다리남쪽 600m 지점에 기계화부대의 도섭이 가능한 곳이 있기 때문에 모진교를 폭파한다할지라도 기계화부대가 춘천 방향으로 진출이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이교량을 폭파하지 못하여 4 7㎞에 달하는 제7연대의 방어정면이 일시에 붕괴되는 결과를초래하고 말았다.


적은 모진교남쪽 강변 일대의 감제고지를점령하여 교두보를 확보할 목적으로 고탄리부근에 배치된 제9중대를 맹타하였고, 이로인하여 중대장 이래홍 대위는 적의 포격에의해 전사하였다.


한편 모진교정면에서는 적이 S U-76 자주포를 앞세우고 모진교의 교두보를 확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북한군 제2군단사령부에서는 무전으로“(제2사단) 제6연대 모진교점령”이라는 소식을 접하자“모진교를 점령했다고?, 파괴되지 않았는가”라고 반문하였을 정도로 모진교의 군사적 가치는 큰 것이었다.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북한군 제2군단의 독립전차연대의 운용이다.



제2군단의 주공은 제2사단이었고, 제2군단에게 주어진 결정적인 목표는 춘천이었다.


또한 제2사단은 춘천을 점령한 후 가평을경유하여 수원까지 약 1 5 0㎞에 달하는 장거리를 대우회기동해야 하는 부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전차연대를 조공인 제1 2사단에 배치한 것은 그토록 중요한 이 모진교를 아군이 파괴하지 않을리 없다고 판단하였고, 모진교 남쪽 600m 지점에 기계화부대가 도섭이 가능한 지점이 있다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화천-춘천-가평-서울에 이르는 1 7번 도로는모진교를 통과해야만 춘천에 이를 수 있고,단차선 도로로 인해 기계화부대의 운용이용이하지 않았던 반면에, 인제-홍천에 이르는 2 4번 도로는 2차선 도로로서 홍천까지깊숙이 기동할 수 있는 도로가 종적으로 잘발달되어 있어 독립전차연대를 주공사단이아닌 조공의 제1 2사단 지역에 투입한 것으로추정된다.


아무튼 모진교를 폭파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한 여파는 컸다. 폭 4m, 길이 2 5 0 m의 개미구멍 만큼이나 작은 부분이었으나 이 개미구멍을 막지 못해 4 7㎞에 달하는 제7연대의방어선이 일시에 붕괴되고 말았다.

 더구나 고탄리, 인람리의 3 8도선으로부터춘천분지 외곽까지는 아군 병력이 없는 무인지대였다.



적의 신속한 기동으로 인해 서원-역골간의 도로에는 도로 대화구 마저설치하지 못함으로써 적은 6월 2 5일 0 9 : 0 0경 춘천이 바라다 보이는 역골, 지내리까지 진출한 후 일단 진격을 멈추었다.


모진교에서 적의 주공을 저지하지 못한 제7연대의 전방부대는 계획된 주저항선으로철수하여 준비된 방어진지를 점령하였다.

비록 적주공을 지연시키는데는 실패하였지만, 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소양강 방어선을보강하는 한편, 장기전에 대비하기 위해 지역내의 민간차량을 징발하여 기동력을 증대시키고, 군량미를 확보하며, 삼천리(현수몰지역) 탄약고에 보관중인 탄약을 안전지대로이전하는 등의 조치와 연대 직할대로 신예비대를 편성하는 등 필요한 모든 방안을 강구하였다.

 


이 무렵 연대 5 7㎜ 대전차포중대 제2소대장 심일 중위는 도로변 소나무 숲에서 대전차포와 육탄공격을 병행하여 적의S U-76 자주포 2문을 파괴시켰다.

이것을계기로 제7연대 장병들은 전차를 파괴할 수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전차에 대한공포심을 제거할 수 있었다.

적은 1 6 4고지와 춘천 시내를 집중포격한후 역골-소양교 간 6㎞의 개활지를 밀집대형으로 접근해 왔다.



이때 옥산포 남쪽에 진지를 점령하고 있던 제1 6야전포병대대는 보병의 엄호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영거리사격과 직접조준사격으로 대응하였다.

북한군은 1개 부대가 격멸되면 다시 후속제대를투입하는 등 정면에서 밀어붙이는 전술 일변도로 시종일관하였다.


장애물이라고는 나무 몇 그루와 마을의 집들 뿐, 아군에게 완전히 노출된 개활지를 통하여 진격해 옴으로써 북한군의 손실은 엄청나게 증가하였다.


북한군은 공격 당일에 춘천을 점령한다는명령의 이행에 필수적인 소양강 도하발판을확보하기 위해 이러한 무모한 공격을 계속하였다. 기세가 꺾인 적은 마침내 역골로 퇴각하였다.


적은 1 6 : 0 0경 두번째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역골로 철수하였으며, 이후 전장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이때 아군은 연대 전술지휘소를 봉의산으로, 제1 6야전포병대대를 춘천 시내로 각각이동시켰다.

 이날 밤 제2대대(대대장 김종수소령)는 제5중대를 소양강 대안의 샘밭에투입하여 적을 교란시키는 등 적극적인 공세행동을 실시하여 적에게 물리적·심리적타격을 가하였다.

 

춘천벌에서 혈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포병대대 장병들은 포탄을 운반하느라 노력하였으나 병력이 부족하여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때 대대본부 옆에 있던 제사공장 여공들과 춘천 학도호국단 단원들이 포탄을 운반해 주고, 주먹밥을 지어 주는등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한편 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춘천이 결전장으로 될 것임을 예상하고 사단예비 제1 9연대에 이동을 명령하였다.

이에 제3대대는2 5일 1 8 : 0 0에 증원되어 금산리에배치되었다.

 



 


26일의 상황
사단이 2 6일 아침 제1 9연대 2대대(대대장 최석락 소령)를 우두산에 배치하고 있을 때, 북한군도 역골-옥산포 일대로 집결하기 시작하였다.


164고지에 배치된 제7연대제1대대는 이것을 목격하고, 적이 증강되기전에 기선을 제압할 목적으로 파쇄공격을감행하여 적을 분산 격퇴시켰다.

이 공격으로 적의 공격은 잠시 주춤하였으나 북한군제2사단은 1 4 : 0 0경 사단예비인 제6연대로하여금 전방연대를 초월하여 투입시킴으로써 옥산포-마전리 (가래모기:현재소양교 부근 수몰지역)까지 진출하여 소양강을 도하할 태세였다.



이와는 별도로 적의 자주포 5대가 소양교부근 강변까지 진출하였으나 아군의 5 7㎜대전차포 사격을 받아 선두 2대가 파괴되자나머지 3대는 후퇴하였다.


이무렵 적의 공격제대는 가래모기 부근모래밭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이 지점은 아군이 설정한 살상지대였다.


더욱이 북한군은가래모기 여울이 협소하고 강물이 깊어 도섭이 곤란하다는 것과, 제1 9연대가 증원 배치된 사실을 모르고 있었으므로 이 지점에서아군의 집중포화에 걸려 막대한 인명손실을입었다.


그럼에도 적은 제2, 제3제대를 똑같은방법으로 되풀이하여 투입하였으나 사단의집중포격으로 소양강을 도하하는데 실패하였다.



이때 비로소 전선의 개황을 파악하게 된6사단장은 춘천시민과 행정기관의 피난을지원하기 위하여 제7, 제2연대는 현 방어진지를 고수하도록 하고 제1 9연대는 즉시 홍천으로 이동하여 제2방어선을 구축하고, 전방연대의 철수를 엄호하도록 하였다.


제1 6야전포병대대(-)는 제2연대를 지원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날 오전 소양강 도하에 실패한 적은 이미 제1 9연대가 빠진 전선을 조정하고 있던제7연대 진지로 재공격을 해왔다.

이번에는전차를 소양교로 투입하고, 2개 연대는 가래모기로 도섭을 감행하며, 1개 연대는 춘천동북방 원진나루터에서 소양강을 건너 구봉산방향으로 공격해 왔다. 이에 따라 제7연대의방어선이 무너지고 돌파구가 확장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북한군에게 봉의산이 피탈당하자1 7 : 3 0경 제7연대는 춘천을 포기하고 원창고개 방향으로 철수하였다.

적은 1 8 : 0 0경 춘천시내로 진입하였다.

이날 제1 9연대는 3대대를 금산에, 2대대를우두산에 배치하여 제7연대 1대대를 지원하는한편, 1대대는 소양강과 북한강의 합류지점인근화동에 방어진지를 구축하도록하였다.


2 6일 밤 6사단장은 제7연대의 방어정면을축소하기 위해서 소양강 북쪽에 추진 배치된부대를 소양강 남쪽의 최후저지선에 배치하도록 명령하였다.

 

사단 공병대대장(박정채 소령)은 최후저지선에 병력이 재배치된 시점에서 소양교의폭파를 사단장에게 건의하였으나, 사단장은역습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므로 이를 보류시켰다.

서부전선의 전황을 알 수 없었던 사단장은 전황이 아군에게 유리하게 전환될 것으로 내다보았던 것이며, 이에 따라 소양교에이미 장전된 폭약을 제거하고 교량위와 입구에 장애물을 설치하였다.

 


이 무렵 적측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북한군 제2군단의 목표는 공격초일에 춘천을점령한 후 수원 방면으로 진출하여 국군 주력의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춘천을 공격한 제2사단이 국군 제6사단의 강력한 저항으로 오히려 전투력이 약화되자 다급해진 북한군 제2군단장 김광협 소장은춘천 축선의 공격력을 증강시킬 목적으로홍천 방면으로 공격중인 제1 2사단에서 2개연대(전차 1개 중대 배속)를 빼내어 소양강상류의 원평리와 부창리로 우회하여 진출시켜 춘천 동북쪽의 구봉산과 대룡산경계선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27일의 상황
2 7일 날이 밝자 북한군 제2사단과 제1 2사단은 춘천에 대한 집중적인 공격을 가하였다. 북한군은 1 0 : 0 0경부터 T-34 전차와S U-76 자주포를 앞세워 봉의산을 집중공격하며 1개 연대규모가 가래모기로 도섭을감행하였다.
 

제7연대는 계속해서 도하를 시도하는 적을 저지하기 위해 혈전을 거듭하고있었다.


한편 6사단장은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기전 제2연대를 방문하였다. 거기서 제2연대가전차를 앞세운 적의 압력을 받고 있다는 상황을 보고받고 제2연대 지역의 말고개 상황이 춘천보다 긴박하며, 만일 이곳이 돌파되면 홍천이 북한군 수중으로 넘어가 사단의퇴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사단예비인 제1 9연대(-)를 홍천지역으로 전환시켜제2연대의 전력을 강화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때 6사단장은 적 제1 2사단의 주력이 이미춘천으로 이동한 적정을 파악하지 못하고있었던 것이다.


제7연대가 격전을 벌이고 있을 무렵, 그동안 두절되었던 육군본부와의 유선망이 소통되었다.


육군본부 참모부장(김백일 대령)은“서부전선은 완전히 무너졌다. 육군본부는 시흥으로 철수한다.


제6사단장은 판단에 따라중앙선을 중심으로 한 중부전선에서 지연전을 전개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직후 또다시 통신이 두절되고 말았다.


제7연대는 춘천에서 철수 후 국사봉-안마산-대룡산선에서 지연전을 실시하면서 6월2 8일 정오 까지는 원창고개에 신방어진지를편성하였다.



한편 홍천 축선에서는 제2연대가 말고개에서 적과 대치하고 있었다.


사단명령에 따라홍천에 도착한 제1 9연대는 1 1명으로 대전차특공대를 편성한 제3대대를 말고개에 배치하고, 연대 주공은 춘천과 자은리에서 홍천에이르는 양 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망령산 일대에 배치시켜 홍천 방어선을구축하였다.

 

 28일의 상황


 

  적은 08:00에 보전포협동으로 세 방면으로 침공하였는데 그들의 전개 양상으로 보아 연대를 원창고개 부근에서 포위차단하려는 기도인 것으로 판단되었다.



  즉 그들은 주공을 5번도로(춘천-홍천간)로 지향하고 전차 및 포병을 여기에 집중하여 연대의 정면으로 공격하고,

다른 두 개의 무리들은 동서로 분진하여 그 하나는 897고지를 침탈한 다음 계속 남하하고 있었다.

 또 다른 하나는 북한강을 따라 남하하다가 연대 좌측중복을 찌를 듯이 금병산으로 파고들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303고지로 철수하고 있던  근무대대 김근호 대위는 서쪽 3km의 도로(46번 도로)에 긴 차량행렬을 이루면서 가평으로 향하는 적군을 목격하였는데 뒤에 확인된 바에 의하면 이는 적 제 2사단이 서울 동부를 목표로 서남진하는 것이었다.

 

  제 2대대(대대장 소령 김종수)는 그들의 주공의 침공을 맞아 제 2포대(포대장 중위 이금열)의 직접 지원 밑에 치열한사격전 3시간 동안이나 벌였으나 역부족하여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난전을 하고 있었다.


  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야전지대에서 저항하게 된 불리한 지형조건과 첨예한 화력,
그리고 주보급로를 차단하려는 그들의 흉책을 간파하자 사단장이 강조한 원창고개 선에서의 방어를 결심하고  각 대는 제 2, 1근무대대 순으로 선정한 진지를 점령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런데 적의 압력은 예상외로 가속화하여 보급로의 차단이 목전에 다가옴을 느낀 연대장은 원창선에서 좀 더 물러나서 있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제 2대대의 엄호하에 연대주력과 제 2포대를 사현으로 집결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연대장은 엄호대대였던 제 2대대장 김종수 소령에게 『현 위치(원창고개)를 별명이 있을 때까지 고수하여 적을 저지격파하면서 그들의 침공을 최대한 정착시키라』고 명령하였다.

 


  대대장은 이 고개를 언제까지 고수하여야 할 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적으로부터 완전히 포위될 위험과 극한 상황을 고려하여  전면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6월 29일

 원창고개의 제 2대대장(대대장 소령 김종수)는 주력철수의 엄호를 마치자 적과의 일전을 다짐하면서 전력을 굳히고 때가 도래하기를 고대하였다.

이때 대대의 병사들은 소양강공방전에서 전투다운 전투도 해보지 못하고 철수만 거듭하여 불평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들의 포격이 점점 열도를 가하기 시작하더니 06:00에 사정이 연신되면서 2개 연대규모가 시야를 메우고 올라왔다.

  이들을 목격한 대대장은 『진전 200m로 접근할 때까지 사격하지 말라』고 명령하여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북한기를 앞세우고 수파의 물결을 이루며 밀려들어 드디어 최후저지사격권 내에 들었다.

  대대장의 사격개시 호령이 떨어지자마자  소화기는 교차사격으로 집중 강타하니 전장은 순간에 도륙장이되여  적들의 비명은 하늘을 찔렀다.


  악랄한 독전 밑에 사파가 쓰러지면 오파가 다시 비집고 나오는 연속적인 파상공격으로 돌파를 기도하였으나 끝내 시침공이 둔좌된 채 피아는 사격전으로 대치하게 되었다.

  이윽고 11:00에 1개 대대 규모가 재침하기 시작하여 대대는 다시 전투태세를 갖추고 근접하기를 기다렸다.

  바로 이때, 대대장은 제 5중대장 김상흥 대위로부터 『적이 백기를 들고 올라옵니다』라는 보고를 접하고 앞으로 나가 보았더니 큰 백기를 흔들면서 올라오는 것이었다.

  그는 적이 투항하려는 것으로 속단하고 사격을 중지시켰는데  그들은 웃음을 띠며 20m 앞까지 다가오더니 갑작스럽게 어깨에 숨겼던 다발총을 꺼내 난사를 가함으로써 일순간에 백병전이 벌어졌다.

  피아가 얽힌 혼전으로 양측 모두 사격은 제쳐놓고 총검과 주먹의 대결장이 되었으며 대대장도 적병과 맞붙어 뒹굴다가 연락병이 날쌔게 이를 사살하고 위기일발에서 구출되었다.

  난전격투 끝에 적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는데

비록 병력면에서는 호각을 이루었다고 하지만, 그들은 병력이 전의가 상실된 가운데 독전으로 몰아친 까닭으로 허수아비나 다를 바 없음에 반하여,

대대는 대부분의 호를 즉각 방패로 삼아 노출된 그들을 사살할 수 있었고 더욱이 대대장이 위기를 면한 즉시 진두에서 대대를 수습한 데 더욱 용전할 수 있었다.


  대대장 김종수 소령은 『이때만 하여도 전투에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백기만 들면 투항하는 것이라고 간단히 생각하고 그들의 어깨에 걸머진 총에는 관심조차 갖지 않아 완전히 그들의 속임수에 넘어갔던 것이다.




이 사실을 육군본부에 보고하여 이러한 적의 기만에 속지 말도록 전군에 하달한 바 있다』고 술회하였다.


  원창고개 전투 이후 제 2대대(대대장 소령 김종수)는 질서 있는 철수를 하여 13:00에 사현에서 연대 주력에 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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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일화




26일 새벽 4시쯤. 6사단 예비대인 19연대(연대장 민병권 중령·군영 출신)가 급히 춘천 방어 증원차 홍천에서 기차로 춘천역에 도착, 곧바로 소양강 남단에 배치됐다.


그러나 적은 파상공격을 펴며 전차를 앞세우고 소양강에 접근, 도하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압박 수위가 너무나 팽팽해 숨쉴 수조차 없었다.


이처럼 위기에 빠지자 7연대 대전차포(57mm) 소대장 심일(육사8기·전사·태극무공훈장 추서)소위가 중대장 앞에 나섰다.


그는 중대장 송광보 대위에게 적의 공격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나서야겠다고 건의했다.


“중대장님, 용감한 부하 1개 분대를 선발해 주십시오. 어떻게든 저놈들을 쳐부수겠습니다.”


“저놈들과는 중과부적이오. 신중을 기해야 하오.”


“사태가 급박합니다. 우리는 일당백입니다.
 

저놈들의 침략을 조금이라도 지체시키려면 우선 탱크 진입을 차단해야 합니다.


특공작전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전력이 약하면 비상수단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성공할 수 있겠소?”


“과감히 부딪쳐 보겠습니다.”


송중대장은 망설였으나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으므로 심소위에게 1개 분대를 선발, 결사 특공대를 편성해 주었다.

심소대장은 편성된 특공대원들에게 수류탄과 휘발유병(화염병)을 휴대토록 하고 적 전차 접근로상에 매복시켰다.

선두 전차 두 대가 다가오고, 일정 거리를 두고 수십 대의 전차가 그 뒤를 따르는 모습이 보였다. 적 보병도 일정 거리를 두고 전차 대오 후미를 따르고 있었다.


심소대장은 선두전차가 커브를 틀자 일부 분대원을 인솔하고 곧바로 탱크에 뛰어올랐다.


뚜껑을 열고 수류탄과 휘발유병을 투척했다. 다른 탱크는 분대장이 맡았다.


순식간에 탱크 두 대가 화염에 휩싸였고 적 전차병이 탱크 밖으로 뛰쳐나온 것을 육박전으로 한순간에 쓸어버렸다.


이를 본 후미 전차가 당황해 어정쩡하게 서 있거나 방향을 틀고 뒤따르던 보병이 황급히 산속으로 흩어졌다. 일부는 북쪽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이들은 아군의 엄청난 화력과 병력이 산속에 매복해 있는 줄 알고 일단 뺑소니를 친 것이다.



이를 관측하고 있던 16포병의 포격이 개시됐다.


일순간에 적 전차 한 대가 파괴됐다. 적은 더욱 혼비백산한 모습이었다. 이때를 노려 1대대장 김용백(육사5기·전사·준장 추서)소령이 적들을 추격, 집중사격을 가했다.


보·포병 협동작전의 승전보가 일시에 전선에 퍼져 나가자 진중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듯 치솟았다. 겁먹고 불안에 떨던 장병들도 자신감을 갖고 움직였다.



“천하무적이라는 인민군도, 소련제 탱크도 별것 아냐!”


장병들의 얼굴에는 어느새 두려움이 사라지고 적을 무찌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이 같은 전과와 자신감은 심소대장의 특공작전 성공이 계기가 됐음은 물론이다.

춘천 전투의 세 영웅은 뭐니 뭐니 해도 6·25전쟁 직전 어수선한 전선에 흐트러짐 없이 병력을 비상 대기시킨 임부택 연대장, 적시에 지원사격을 가한 김성 16포병대대장, 특공작전의 개가를 올린 심일 소대장을 친다. 

당시 연대장이었던 임부택 중령은 “심 소위가 육탄공격으로 전차 2대를 파괴한 사실은 6.25전쟁이 발발한지 몇 시간이 안되지만 이것이 처음일 것이며, 우리 장병들은 그때부터 전차를 파괴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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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포병대대

6월27일 북한군 2군단이 총공세를 폈을 때 북한군 2사단의 손실은 40%에 달했고, 이 피해의 대부분은 국군의 105㎜ 곡사포에 의한 것이었다.

 

국군 6사단의 포병은 김성(金聖·사진)소령이 지휘하는 16포병대대였다.


대대의 화력은 적보다 열세에 있었으나 개전 전 갖춘 준비태세는 확고했다.


심지어 대대 군의관까지도 포사격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6월25일 적은 SU-76 자주포를 앞세워 5번 도로를 따라 침공해 왔다.


오전 10시쯤 적의 선두가 옥산포까지 도달했으며 12시가 되자 주력이 옥산포를 통과하게 되었다.


아군 7연대와 16포병대대의 화력이 집중됐다.


남하하던 적은 우왕좌왕하다가 시체를 남겨 놓은 채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때 아군 보병은 반격을 개시, 지내리선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후 1시 적은 SU-76 자주포 10대를 몰고 다시 옥산포로 밀려들어왔다.


이때 심일 소위는 특공대를 조직해 자주포를 파괴하는 전공을 세웠다.


적은 이제 5번 도로 양측에서 남북으로 흐르는 소천을 따라 공격을 계속해 왔다.

이곳은 은폐나 차폐물이 하나도 없는 곳이었다.

보병의 전 중화기 ·개인화기가 일제히 불을 뿜는 가운데 16대대도 화력을 퍼부었다.


  16대대는 관측할 사이도 없이 목측으로 맹격을 가했다.


정확히 조준하고 사격할 틈이 없었던 것이다.

적은 부대가 격멸되면 다시 후속 제대를 투입 정면에서 밀어붙이는 전술로 시종일관하였다.
 

포병은 사정거리가 짧은 관계로 대대와 전진 후퇴를 같이 하면서 보병과 동열에서 보 ·포 협동으로 포격을 계속, 적을 궤멸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기세가 꺾인 적은 마침내 역골로 퇴각했다.




  26일 12시 이후 북한군은 옥산포~마전리까지 진출, 소양강을 도하할 태세였다.

 김성 소령은 금강봉 남쪽과 가래모기 사이를 살상지역으로 설정해 놓고 있었다.

적은 16대대의 집중포화에 걸려 막대한 인명손실을 입었다.


그럼에도 제2, 제3 제대를 똑같은 방법으로 재투입했으나 결국 소양강 도하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김성 소령이 이때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금강봉 남방은 우리 포병이 항상 훈련하던 곳인데 이곳의 누런 보리밭이 어느덧 청흑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것은 목격한 사람 외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이다.


우리 포병 2개 포대 8문이 포격을 개시했다.

연속적으로 10분 하면 황색이 되고 중지하면 청색이 되고 해 숨박꼭질하는 느낌이었다.\'

 

  27일에는 홍천 말고개에서 2연대의 상황이 불리해짐에 따라 김성 소령은 대대 일부를 전환해 연대를 지원하는 등 극히 제한된 화력을 집중·분배함으로써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저지, 사단의 혁혁한 전공을 뒷받침했다.



 사단이 이 지역을 철수할 때까지 포병이 입은 피해는 거의 없었다.

 춘천을 점령하고 난 적들은 제6사단 16포병대대장 김성 소령의 하숙집 주인을 \'국군 포병대대장을 하숙시켰다는 죄목으로 반동으로 몰아 체포하였는데 다행히도 탈출하여 피신하고 있다가 수복후 김성 소령을 만났을 때, 그가 말하기를 "그 놈(김성 소령) 때문에 1개 연대가 전멸당하였다"는 말을 여러 북한군들 한테서 들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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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일부 발췌



남침2일 후인 27일 상오8시 민병권 연대장은 홍천국민학교 운동장에서 1개대대 병력을 집합시켜놓고 적의 전차를 격파할 특공대의 긴요성을 강조하면서 조국의 존림과 민족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적의 전차를 격하할 특공대원이 필요하다고 비장한 연설을 하였다.

나는 이때 1착으로 손을 들고 나섰다


그리고 나서 옆 전우들을 둘러보니 너도나도 손을 들고 나오는데 그 숫자는 삽시간에 30여명에 달하였다.


그중 3대 독자와 당대 독자들을 모두 제외하고 비교적 우수한 11명의 용사만 선발하였다.

이때 전차에 대하여 경험이 많다는 이택규 일병이 나와서 전차에 대한 장단점을 설명하여 주었다. ....중략

우리 특공대 일행 11명은 비장한 각오를 지닌채 홍천 말고개(일명 삼마치고개)를 향하여 떠나는 죽음의 행진에 나섰다


떠남에 앞서 연대장은 우리들과 다시는 못만날것이라 하시면서 이별의 술한잔씩 돌렸다.


그리고 는 화랑담배1개비를 나누어 주시며 11명의 특공대원 모두에게 직접 불을 붙여 주었다...중략



한잔의 술, 한개비의 담배 이것이 부대장과 그리고 전우들과 헤어지는 최후의 술, 담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왠일인지 나도 모르게 눈가에는 눈물이 괴어있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동료전우들도 눈물이 괴어 있었다...중략..



밤 12시경 나는 일행을 인솔하고 가만가만 소리나지 않게 포복으로 소나무숲속을 전진해 갔다. 그렇게 약2백50야드가량을 기어서 전진하자 유선 하나를 발견할수 잇었다.



나는 그것이 적의 유선인줄알고 입으로 끊으려 하였으나 좀체로 끊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자그마한 돌멩이를 갖고 돌위에 선을 놓고 딱딱 때리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그 딱딱 소리를 들은 아군에서는 이 순간을 목표로 하여 집중사격을 가해왔다.


그 순간 그 선이 바로 아군이 설치한 유선임을 알수 있었다.


여기서 억울하게도 역효과를 내 우리일행은 후퇴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로인해 특공대원은 제각기 흩어지고 나머지 대원은 6명 뿐이었다.

우리들은 약백미터쯤 후퇴하고 다음 작전을 논의하였으나 모두가 전투경험이 부족한 일등병들이라 누가 어떻게 지휘할것이냐의 난처한 일에 봉착했다.



그순간 나의 머리를 스쳐간것은 "조국과민족을 위하여 지원한 우리들의 숭고한 정신이 이래서야 되겠느야 지금부터 내가 앞장서야겟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모두 나의 명령에 따르라면 소리를 지르며 일어섰다. 시간은 2시가 지났다. ..중략..




우리는 무작정 말고개 고지로올라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해어졌던 전우들을 만날수 있었다.


정말 생각지 못했던 반가운 만남이었다.


28일 아침 8시쯤 돌연 고지에서 포성이 진동하며 적군의 공격이 가해왔다.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10여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유유히 밀어닥치는 적을 막을 길이 없어 아군진지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할수 없다는 생각끝에 주먹에 힘을 가하며 "전우여 때는 왔다"라고 소리치면서 작전을 세우기 시작했다.


제일먼저 선두전차를 내가 맡고 나머지 대원들에게 1인 1대씩 임무를 분담시킨후 고개너머 길가에 패여있는 배수로속으로 숨어 잠복하였다. ..중략




잠시후 거대한 진동소리를 내며 적의 전차가 나타나기시작했다.


숨을 죽이고 뛰는가슴을 억누르며 적의 전차를 주시하였다.


이때 아군진지에서는 57밀리 대전차포를 쏘았다.


그것은 백발백중 명중을 하였으나 전차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채 마구 밀어닥쳐 올뿐이었다

더욱이 적의 전차는 양기관포를 요란하게 쏘아대면서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순간 나는 재빨리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았다


전자는 벌써 눈앞에 다가왔다


81미리 포탄을 안고 전차후부에 기어올라 갔다.


마침 s자형 지형관계로 그뒤의 적전차는 보이지 않았다.


마침 전차의 뚜껑이 열려 있어 포탄과 수류탄을 던져집어넣고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요란한 폭음 소리와 환호성에 정신을 차려보니 절벽의 큰소나무에 나의 몸이 실려있었다.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러 전우들의 구원을 요청하고  정신을 차리고 눈을 크게 뜨고 보니 그자리에는 적의 전차가 산산조각이 나있었으며 이미 연대장이하 각지휘관들과 종군기자까지 모여있었다


이작전에서 우리는 선두의 전차를 위히하여 9대의 전차를 대파 또는 노획하는 대전과를 세웠으며 우리대원중에는 부상자 1명뿐 모두 무사했다

 






이에 대한 다른 서술임
 


조일병은 말고개에 특공대를 배치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371고지 하단부의 S자 급경사 커브에 각 2명으로 구성된 6개 특공조를 30m간격으로 배치했다.


10:00경, 한계리 벌판 쪽에서 접근해오고 있는 10대의 적 전차를 발견하고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대기했다.


얼마 후 적 전차가 나타나는 순간, 먼저 제2연대 57 밀리 대전차포(사전에 협조)가 1번 전차를 사격하여 명중시키자, 모든 적 전차는 발악적인 사격을 가하면서 속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1번 전차가 마지막 매복조 앞을 통과하는 순간 조일병이 81밀리 박격포탄을 궤도 밑에 밀어 넣었으나 불발이었다.


바로 이때 제2연대 대전차포의 2, 3탄이 1번 전차에 다시 명중했다.


전차가 허둥지둥하자 당황한 승무원이 헤치를 열고 고개를 내미는 순간 조일병이 신속히 전차에 뛰어올라 수류탄과 화염병을 헤치 안으로 집어넣었다. 요란한 폭음과 함께 전차는 파괴되었다.


 한편 중간 특공조는 연막 수류탄을 터트려 전차의 시계를 차장했다.


시계의 차장으로 더 이상의 기동을 포기한 승문원이 모두 하차하여 371고지 쪽으로 도주를 시도했으나 이들은 모두 아 제2연대의 방어진지에서 사살되었다.

이 전투에서 적 전차 파괴 4대, 노획  6대와 24명의 사살의 전과를 거뒀다


 

 


또다른 진술임

다른 대원들도 20m 간격으로 배수로 근처에 눕거나 도로변 숲 속에 은폐해 있었다.


얼마 후 적의 선두 전차가 다가왔다.

이때 아군이 쏜 57㎜ 대전차 포탄이 적 전차를 명중시켰지만 잠시 멈칫했을 뿐 포와 기관총을 난사하며 질주해 왔다.

 드디어 눈앞에 커브길을 돌면서 서행하는 전차가 나타났다.


순간 조일등병은 81㎜ 박격포탄을 적 전차의 궤도 밑으로 집어넣었다. 그러나 불발이었다.


이에 조일등병은 적 전차의 후미로 올라가 수류탄 2발을 전차 속으로 집어넣은 다음 벼랑으로 굴렀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선두 전차는 화염에 휩싸였고 동료들이 파괴한 마지막 전차 사이에 낀 7대의 전차는 진퇴양난에 빠져 전차병들은 전차에서 내려 도망가기 시작했다.

이때 특공대원들은 일제히 도망가는 적을 모두 사살하고 남은 전차 7대를 포획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역시 또다른 서술임

 다음날 08시 30분경 고지에서 포성이 진동하며 피아간에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0900경, 마침내 제2연대가 설정해놓은 살상지대에 적의 주력이 완전히 진입하고 선두전차를 위시한 전차대열이 작은 말고개를 오르기 시작하자, 방어부대의 모든 화력이 살상지대로 집중됐다.

적은 예상외의 강력한 포화로 인해 순식간에 대혼란이 일어나고 전차와 보병이 분리되어 SU-76 자주포와 T-34 전차 등 10여 대가 전차포와 기관총 사격을 가하면서 느린 속도로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고개의 첫 번째 S자 굴곡지점에 배치됐던 57㎜ 대전차포가 포문을 열고 첫 탄을 명중시켰으나 전차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후속전차가 사격한 포탄에 맞아 포수 이하 전원이 전사하고 대전차포가 파괴되는 것을 도로변에서 목격한 병사들은 전차에 대한 공포심으로 육탄공격을 주저했다.

  잠시 후 적의 전차대열은 고개 중턱에 있는 가장 굴곡이 심한 두 번째의 S자형 지점에 이르렀다.

 선두에서 달리던 자주포가 굴곡지점을 미처 빠져나가기 전 30m쯤 떨어진 곳에서 제2연대 57㎜ 대전차포 중대 제2소대 1분대장 김학두(金學斗) 일등중사는 철갑탄을 사격해 자주포의 측면을 명중시킨 뒤 2탄, 3탄을 계속 발사했다.

첫 탄에 명중된 선두 자주포가 2∼3m 전진하다 정지하자 뒤따르던 전차가 자주포와 추돌하고 정지했다.

  2번 전차에도 철갑탄 공격이 이어졌다.

 이때 도로변에 매복해 있던 제19연대 대전차특공대원 조달진 일등병이 1번 전차에 뛰어올라 해치 안에 수류탄을 넣고 뛰어내렸다.

 잠시 후 굉음과 함께 화염이 치솟았다.

선두전차 2대가 파괴되자 뒤따르던 전차들은 모두 정지할 수밖에 없었고, 호기를 포착한 대전차특공대는 제각기 수류탄과 화염병을 들고 적 전차를 공격했다.

당황한 적 4번 전차는 북으로 회전하려다 화양강으로 굴러 떨어졌고, 나머지 전차병들은 탈출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사살되었다.

 후미전차는 전차대열이 정지하자 해치를 열고 전차장(戰車長)이 뒷면을 살피고 있었다.

바로 이때 약 10m쯤 떨어진 좌측 능선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던 대전차 특공대가 발사한 2.36인치 로켓탄이 해치 안으로 들어가 폭발하면서 불길을 내뿜었다. 이리하여 10여 대의 적 전차는 좁고 굴곡이 심한 작은 말고개의 오르막길에서 섬멸되었다.

구체적으로 적 전차 2대를 완파하였고, 7대의 전차를 노획하였다.

홍천 말고개 전투와 유곡전투에서의 공로로 조달진 이등중사는 1950년 10월 5일 을지무공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아울러 개전 이후 한국군 최초로 미 동성훈장 수여자의 영예를 안았다.

 


말고개 전차 파괴에 대한 진술이 약간씩 상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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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 동북지구 전투의 청문회 (전차파괴를 중심으로)

이 기록은 전쟁초 홍천동북지구 전투에서 적 전차 10대를 파괴한 것을 놓고, 참전하였던 양 연대(제2 및 제19연대)간의 주장이 엇갈려 끝내는 진정 및 고소사건으로 까지 번지게 됨으로써 전사에 올바른 기록을 남기기 위하여 청문회를 열고 그 시비를 가리기 위한 것임


문제의 발단 : \'50년 6월 28일 홍천북쪽 말고개에서 적의 전차 10대를 파괴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홍천군민들은 제6사단 예하 제19연대의 육탄11용사에 의한 전공으로 길이 빛내기 위하여 군비 일부와 군민의 성금으로 공적비를 세웠는데 동사단 제2연대는 57mm 대전차포로 단독 파괴하였다고 주장함으로써 제막(1975. 12월 제정)이 연기되었을 뿐 아니라 진정 및 법정으로 까지 끌고가 군의 위신을 추락시키었음.

 

청문회 개최

 일시 : 1977년 7월 22일 14:00∼16:00

 위원구성 :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실장), 합참작전과장 , 공군군사실 전사과장, 해군전사담당관, 공군전사담당관, 육군사관학교 전사교수, 육군작전참모부 기갑과장, 육군병기감실 야전정비장교, 담당편수위원

증언자 참석 : 제2연대 참전장병 7명, 제19연대 참전장병 6명

장소 :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회의실


결 론

   본 청문회에서 다음과 같은 의견의 결론을 얻었음.
[2개 연대의 부대약사기록을 근거로 하여 제2연대의 57mm 대전차포와 제19연대의 육박특공대의 공격에 의하여 전차 9대가 폭파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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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용사 일화

   6월 29일 16:00 제2연대는 말고개(홍천 동북쪽 11㎞)에서 적으로부터 이탈하여 홍천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때, 동연대 제2대대(장, 문정식 소령)는 동 고개에서 연대주력의 철수엄호의 임무를 맡고 마지막까지 혈전을 거듭하면서 적을 저지격파하였는데 동대대 LMG사수 및 부사수(모두 성명 미상)는 한계리남서쪽 400지점까지 나가 하수구토관위에 화기를 거치하고 잠복하고 있었다.


  적은  잠복조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치 않았음인지 1개 대대 규모가 한계리로 부터 행군대형으로 나와 바로 잠복조 앞에서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 기회를 포착한 잠복조는 LMG의 경쾌한 소사로 그들은 무리를 지어 스러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계벌판은 적의 시체가 즐비하였고 유혈은 낭자하여 벌판을 물들였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불의의 기습을 받은 적들은 잠복조를 제거하기 위하여 2차, 3차에 걸쳐 습격을 기도하였으나 그때 마다 양호한 은폐물에 위치한 이들에게 발견되어 사상자만 추가하였다.
(다른 진술에 의하면 3차례 진지변환을 하였다고 함)



  당황하여 우왕자왕하던 그들은 그제서야 생각이 났는지 전차를 드리대고 포를 난사하기에 이르니 1명은 현장에서 전사하고 다른 한명은 소양강을 따라 본대로 돌아갔다.
(2명 다 전사한것으로 기술되 있는곳이 많은 아마 2달 죽었을듯)


  현지를 답사하여 무명용사가 LMG를 거치하였던 곳에서 그들이 전개한 곳을 바라보니 총구앞 300m 까지는 삼면이 툭 터 있었고 은폐물이라곤 초가집 몇채가 드문드문 있었으니 두 용사가 선정한 사격위치는 감히 적이 덤벼들 수 없는 요지였다.


  한계리주민들은 최후까지 적과 맞싸워 1개중대 이상의 적을 사살한 두 용사의 전투에 대하여 오늘날까지 구전하고 있다고 증언하였다.


 이들에게 실탄과 주먹밥을 날라준 이곳 주민 신민진, 원승준 양인의 증언에 의하면 두용사 모두 현장에서 산화하여 마을청년들이 바로 길옆에 합장하였는데 1959년 미제2사단 공병대대가 도로확장공사를 하면서 비석도 없었던 탓으로 무덤을 덮어 버렸다고 한다.


   이로부터 한계리 주민들은 오늘날까지도 매해 6월 27일이 되면 두 무명용사의 무덤위치(현 철정리 철정검문소에서 내촌방향의 다리 밑쪽)를 어름하여 간소한 제를 올려 호국의 넋을 위로 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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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파괴(자주포 포함)
25일 심일 2대
26일 57미리 2대
28일 11용사 10대 (어떤곳은 9대로 기술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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